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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미국 공군기지가 핵무기 저장소라서 카터 유혈진압 결정?[고승우의 한미관계 탐구 (29)] 전두환이 미국의 핵정책 파악하고 광주를 공포정치 유발할 학살 장소로 선정했을 가능성 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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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6.26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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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한국에서 박정희, 전두환 등의 정치군인들이 두 차례에 걸쳐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찬탈하는 것을 승인해 한국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하는 짓을 저질렀다. 한국에서 두 차례 발생한 군 쿠데타는 미국이 한국군에 대한 평시와 전시 작전지휘권을 행사해 한국의 군사주권을 장악한 상태에서 발생했다.

박정희와 전두환이라는 대표적인 정치군인이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었던 것도 한국군이 실질적인 한반도 전쟁 억지력이 아니라 미국이 그것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미국은 자국의 이익이 보장될 경우 한국군의 정치 참여를 사후 승인해 기정사실화 했다.

5·18민주화운동, 즉 광주항쟁은 박정희가 김재규에 의해 살해된 뒤 박정희의 유신독재를 계승하겠다고 나선 전두환이 자행한 양민학살의 성격을 지녔다. 전두환은 1980년 ‘서울의 봄’으로 상징되는 전국적인 민주화 추진 운동에 찬물을 끼얹기 위해 광주를 선택해 시민, 학생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지금껏 광주항쟁의 핵심적 진상이 아직도 규명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역할이 더 규명되어야 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광주항쟁 당시 미국 카터대통령이 광주의 유혈 진압을 백악관 안보회의에서 왜 직접 결정했으며  그런 결정의 배후에는 광주 미군 핵 기지가 원인이었는지 등이 규명되어야 한다.

합리적인 의문을 다각도로 해볼 수 있는데 정치군인 전두환이 미국의 한반도 핵 배치를 이용해 정권찬탈의 음모를 공작차원에서 진행시켰을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전두환이 미군 핵 기지가 있는 광주를 선정해 시민의 항거를 유발할 대량 학살을 자행할 계획을 세우고 무차별적인 대학생과 시민 학살을 집행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이다. 당시 전두환은 전국적으로 타오른 민주화 열기를 잠재우기 위해, 미국의 유혈 진압 허락 가능성이 거의 확실한 광주를 희생양으로 삼아  공포정치를 펴 정권찬탈의 목표를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전두환이 광주에서 시민 저항을 유발할 폭거를 자행한 이유로 광주 미군기지의 핵무기가 공식 거론된 것은 없다. 더 늦기 전에 정치군인으로 공작정치에 능했던 전두환이 미국의 핵정책을 이용해 권력 찬탈의 음모를 추진하고 그 목적을 달성했다는 식의 가설에 대한 검증작업이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가설에 제기될 수 있는 것은 광주항쟁 당시 미국은 해외에 배치한 핵무기의 안보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한다는 정책을 세워놓고 있었고, 광주 미군기지에 전술핵이 다량 배치되어 있었다. 이런 점을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미리 파악한 상태에서 광주에서 시민군이 결성되도록 유도하는 무차별 학살을 자행해.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장악하고 있던 미국이 신군부의 광주진압을 허락할 조건을 조작하지 않았을까하는 점이다.

이런 가정에 대한 점검을 통해 최초발포명령은 미국에서 나와 한국군에 통보되었다고 볼 수 있다. 카터 대통령이 광주 유혈 진압을 결정해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인 위컴에게 지시했고 위컴은 자신이 작전지휘권을 행사하는 한국군에게 진압작전을 허락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광주’유혈진압 원인의 하나인 미군 핵기지 시설에 변화 생기나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광주미공군기지가 폐쇄되어 다른 지역으로 이전되는 등의 조치가 취해지는 광주 군공항 특별법이 지난 4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는 점이다. 광주미공군기지가 이전될 경우 광주항쟁 유혈진압과 직결된 원인의 하나인 미군 핵기지 시설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전 대상이 된 광주 군공항은 제1전투비행단으로 한미공군공동운영기지(COB) 역할을 하고 있는데 미공군 기지는 1991년 이후 한국 공군이 관리하고 있지만 유사시 극동 미 공군의 전개기지 역할을 하는 공항으로 한미공군공동운영기지인 만큼 폐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견해도 제시되고 있다(더팩트 2023년 4월14일).


박정희 암살과 김재규, 그리고 미국

광주항쟁 발생의 원인 가운데 하나는 박정희 암살이다. 미국은 박정희가 암살당한 뒤 한국에서 민주화 요구가 폭발적으로 제기되었고 광주항쟁 발생 초기에 전두환 신군부가 광주에서 간첩을 체포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당시 미군 정보요원들의 광주현지에 대한 정보보고가 집중 실시된 점도 주목할 사실이다.

▲ 사진은 1979년 당시 김재규 중정부장이 박 전 대통령 시해사건 현장 검증하는 모습. ⓒ 연합뉴스

이와 관련해 이재봉 (원광대 정치외교학.평화학 명예교수)가 2020년 11월10일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린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 40주년 학술회의>에서 발표한 ‘5·18민주화운동 전후 한국정치와 미국의 개입: 박정희 암살, 전두환 쿠데타, 광주 학살, 김대중 구명과 미국의 역할’ 가운데 박정희 암살 뒤 작성된 미국 비밀 자료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암살된 뒤 27-28일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는 국무부에 하루 몇 번씩 전문을 보냈다.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충격적인 사건이 잘 계획된 군사쿠데타인지, 일부 기득권 세력이 두려워하던 지도자를 제거해버린 사건인지, 또는 단순히 기상천외한 사건인지 아직 알 수 없다… 한국 체제가 큰 혼란까지 가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미국은 새로운 정권이 현저한 실수를 저지르기 전까지는 징벌적 조치에 대한 공개적 언급을 피해야 한다… 1960년대부터 한국에 대해 미국이 행사해온 압력 때문에 우리가 너무 강경하거나 너무 어리석게 한국의 체제개편을 압박해 나가면 극도로 부정적인 반미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군사쿠데타로 박 대통령이 죽었다고 생각한다… 대통령 주변의 일부 인물들, 아마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이끄는 세력이 정부구조를 유지한 채 괜찮은 후계자를 내세울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대통령을 제거했을 수 있다는 것이 더욱 설득력 있다… 김재규가 박 대통령의 강경책이 한국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 한명이었을 수 있다.”

이와 동시에 글라이스틴은 박정희의 후임이 누가 될지 촉각을 곤두세우며, 정치인, 군인, 재야인사, 목사, 교수, 언론인, 학생 등 “거의 모든 분야 모든 계층의 사람들”과 접촉하며 다양한 정보를 얻고 있었다. 김종필, 정일권, 김영삼, 김대중 등에 대한 인물평을 국무부에 보고하기도 하면서 11월1일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우리는 영향력을 조용히 활용하여 지금이 보다 민주적인 헌법으로 나아갈 때라는 판단을 엘리트 지도층 내부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시켜야 한다. 국무부 인권국은 우리가 영향력을 ‘조용히’가 아니라 ‘완전히’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분노를 살 수 있는 ‘지도’나 ‘가르침’을 준다는 인상을 피해야 한다. 특정세력에게 반대하거나 편들면 안 되고, 상당수 한국인들이 생각하듯, 배후에서 킹 메이커 역할을 한다는 인상을 주어서도 안 된다.”

11월 초 미국하원에서 박정희 암살에 관한 청문회를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자, 글라이스틴은 이를 막아야 한다며 11월8일 국무부에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나는 청문회가 미국이 박정희 죽음을 공모했다는 의혹을 건드릴 게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를 공모한 적이 없으며 박 대통령을 비판했을 때도 그의 정부와 안보, 경제 등의 문제에 대한 협력을 지속하겠다는 신호를 함께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청문회에서 얘기하게 되면 우리가 박 대통령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더 증폭시키지 않을까 우려된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공개적 이슈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대통령을 죽인 중앙정보부장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소문이 국내외에서 확산되자, 주한미국대사는 11월19일 다음과 같은 내용 전문을 보냈다.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에 미국이 관련되어 있다는 의혹이 한국에서 퍼지고 있다. 반체제인사들과 기독교단체들은 미국이 김재규 음모의 일부였으며 최소한 신호를 보냈으리라 믿고 있다. 학생들도 이러한 시각을 공유한다는 보고가 있었고, 박 대통령의 일부 측근도 미국이 어떤 형태로든 암살에 관여했지 않았을까 우려하고 있다. 공산주의 날조자들이 제기하고 있는 의혹 외에도 일본은 물론 미국언론마저 미국이 박정희 정권을 비판한 것은 쿠데타 기도자들에게 신호를 보내기 위해서였다는 취지로 얘기하면서 음모론을 부채질하고 있다. 김재규가 나의 격려를 받고 박정희를 공격했다고 말하리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나는 박정희 정권이 1년 이상 가기 힘들 것이라는 말을 개인 또는 단체에 하고 다녔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나는 그러한 국가전복 행위에 관련된 적이 없지만, 박 대통령의 몇몇 조치에 대한 공개적 비판으로 일부 한국인들이 우리의 언행을 오해해 박정희 통치가 종반으로 치닫고 있으며 미국은 그가 사라지더라도 아무런 불만이 없으리라 생각했을 수 있다… 나는 박 대통령의 임기 전망과 같이 민감한 주제를 제기할 만큼 무모하지 않았다. 내가 그런 언급과 가장 비슷한 얘기를 한 것이 9월 26일 우리의 마지막 대화 도중 김재규가 한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다. 김재규가 나에게 한국경제에 대한 분석과 향후 국내정치 전망에 대한 의견을 물었는데, 나는 경제 분석과 관련하여 향후 6-12개월 간 한국경제의 발전 속도가 느려질 것이라고 말했다.”


전두환과 미국

미국은 1979년 전두환 일당이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키자 주한 미 대사 윌리엄 글라이스틴이 국무부에 전통을 보내 군의 소장파 젊은 난폭자들이 기존 지휘부로부터 권력을 쟁탈해 군 내부에서 추후 싸움이 더 벌어질 심각한 위기 상황이라고 타전했다. 당시 전두환은 계엄사령관 정승화 장군을 박정희 암살범으로 체포하고 군 최고 지휘관으로 행세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전두환을 비밀리에 만난 뒤 본국에 비밀 전문을 보냈다(UPI 2020년 5월15일 https://www.upi.com/Top_News/World-News/2020/05/15/US-faced-tricky-choices-following-South-Korea-coup-documents-show/1021589548521/).

“전두환은 쿠데타를 미리 음모했다는 증거를 감추려 하고 있다. 전두환의 반대 세력이 반격을 가해 양측의 충돌이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쿠데타가 발생한 현 상황은 북한의 도발 위험이 높아지고 있어 우려된다. 전두환과 그 일당은 미국의 지원을 보장받고 싶어 한다. 미국은 한국군 내부의 중요성을 강조해야 하는데 향후 수주 또는 수 개 월 안에 극도로 예민한 선택을 해야 할 처지가 될 수도 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1980년 5월17일 전두환이 비상계엄을 확대하기 전에 전두환의 보좌관을 만났으며 그 때 그 보좌관은 자신 있게 말했다.

“우리 군은 정부 기관을 완전 장악했다.”

1980년 5월 18일부터 전두환 신군부는 광주에서 민주화를 외치는 대학생들과 시민들을 사살 또는 무차별 구타, 연행했다. 광주항쟁이 발생하자 미국 카터 대통령은 1979년 발생한 이란 사태가 재연될 가능성을 우려했다. 카터 행정부는 광주항쟁이 발생한 뒤 전두환 일당에게 군이 대학생과 노동자들의 시위를 진압하는 것에 동의했다. 당시 미국 중앙정보부의 비밀 문건의 내용은 대부분 한국에서 군부 독재에 대한 반대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https://popularresistance.org/qwang-ju-democracy-protest-and-massacre-us-was-complicit-in/).

글라이스틴 대사는 1980년 5월8일 전두환을 만나 미국은 군이 법과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것을 양해하고 있으나 평화적 시위에 대해서는 과도한 진압을 삼가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비밀이 해제된 미 정부 자료에 따르면 미 국방부와 국무부는 5월18일 이전 전두환이 특전사 부대를 광주와 다른 지역에 배치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미국은 5월22일 백악관에서 국가안보회의를 열고 광주 항쟁은 군에 의해 제압되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 회의 5일 뒤 계엄군은 광주로 진입해 전남 도청을 사수하던 시위대를 사살했다.

▲ 2015년 4월10일 한국에서 실시된 맥스선더 훈련에 참가한 미 공군 F-16 파이팅 팰컨 전투기가 광주 미공군기지를 이륙하고 있다. 이 훈련은 한미 공군의 전투기 100여 대가 참가하는 연례 훈련으로 2주간 진행됐다.


광주 미 공군기지는 5·18 당시 동북아 최대 핵무기 저장소

미국이 신군부의 광주항쟁에 대한 야만적 진압을 허가한 이유가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한 미국 정부의 공식 또는 비밀 자료가 아직 공개된 적은 없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주한미군이 광주 미공군기지에 보관하고 있던 핵무기가 광주항쟁으로 위협받을 가능성을 상정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이런 추정은 광주항쟁 당시 광주 등 한국 내 여러 개의 미군기지가 미국의 핵무기 저장소였으며 다량의 핵무기가 저장되어 있었고, 미국은 자국의 핵무기가 제 3국인 등에 의해 탈취될 가능성 등에 최우선적으로 대응할 대책을 세워놓고 있다는 점 등에 의해 유추될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관련 자료를 취합해 보면 아래와 같다.

① 일본 반핵운동 전문가인 곤도 가스코는 1982년 출판한 저서를 통해 미국이 광주항쟁을 핵위기와 연결시켜 대처했다고 아래와 같이 추정했다(고승우, 윤범모. 반해과 미술, 춘추언론, 1989. 111).

-- 광주는 미국의 베트남 패전이후 동북아 최대의 미군 핵탄두 저장기지가 되었다. 미군 사령관의 작전지휘권 아래에 있는 한국의 군부가 광주 진압에 병력을 출동시킨 배경에는 광주 미군기지의 미국 핵무기에 대한 민간인의 공격을 방지하기 위해서도 광주항쟁을 진압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

② 광주가 미국 핵무기 기지라는 사실은 1980년대 핵 전문가 등에 의해 언급된 바 있고 그 사례는 다음과 같다(고승우, 윤범모. 반해과 미술, 춘추언론, 1989. 116-118).

-- 1988년 7월 방한한 그레고리 핸더슨은 한국에 핵지뢰로 알려진 원자파괴탄(ADM)이 배치되어 있으며 광주는 핵저장 및 핵폭탄 정비기지로 핵무기가 비축되어 있다고 말했다.

-- 피터 헤이즈는 1988년 10월 자신의 저서에서 주한미군 핵기지는 군산, 광주 등 19개 지역이라고 주장했다.

③ 광주 미 공군 기지는 1991년 미군이 한국군에게 그 소유권을 반환하기 전까지 향후 한국전쟁이 발생할 경우를 대비해 군장비와 병력을 배치할 수 있는 예비기지의 하나로 관리되었다. 주한 미 공군은 오산 기지를 사령부로 해서 광주, 대구 등 5개 기지를 후속부대의 체류 기지로 운영했다 (https://www.globalsecurity.org/military/facility/kwangju.htm).

1992년 미국 정부는 광주 기지의 경우 종래의 작전을 중단하고 축소된 규모만으로 운영하는 것으로 변경했다. 1999년 6월에는 광주 미군기지에 일본 카데나 미군기지에서 옮겨온 F-15C기 8대가 배치되었다.  한미 두 나라는 2002년 한국 내 미군기지에 대한 조정을 실시해 부지 반납 등을 실시했지만 광주의 경우는 예외로 해서 계속 미공군 기지로 활용키로 했다. 미군은 2004년 광주기지에 패트리어트 미사일 등의 배치를 시작했으나 현지 주민 등의 반대에 부딪혀 2006년 미군 방공포 부대는 다른 지역으로 이전했다.

④ 광주 미 공군기지는 주한미군이 핵무기를 한국에 배치하면서 미군의 주요 핵 저장소의 하나로 관리되어 온 사실을 미 의회가 확인했다. 지난 1975년 9월 미 상하원 원자력합동위원회의 한 분과위원회에서는 “한국에 저장된 미국의 핵탄두나 핵폭탄은 콘트리트 원형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고 보고되었다(고승우, 윤범모. 반핵과 미술, 춘추언론, 1989. 118-120).

군산 미군기지는 미 하원에서 지난 1988년 공개된 미공군 자료에 따르면 동북아 전략용 미공군기지로 핵폭탄을 실은 전투기가 배치되어 있고 36개의 신형 핵폭탄 탄약고를 건설할 예정이었다. 광주 미 공군기지의 핵 저장 시설이 일본 핵전문가의 말처럼 동북아 최대 규모라면 미국 정부가 가장 중시했던 군사시설의 하나로 볼 수 있다.

⑤ 미국정부가 상위기관인 유엔사령부는 1958년 1월 한국에 핵무기가 도입됐다고 공식 발표하고 그 해 2월3일 280미리 원자포와 지대지 미사일 어네스트존을 공개했다.

그 이후 한국에서 주한미군이 최소 1백 여 개에서 최고 1천 여 개에 달하는 핵무기를 도입했으며 핵무기 종류는 전술 핵무기와 중성자탄, 전략 핵무기와 전역 핵무기 등으로 보도되었다. 주한미군의 핵 기지도 군산, 광주 등 19개 지역으로 알려지기도 했다(고승우, 윤범모. 반핵과 미술, 춘추언론, 1989. 111). 미국이 남한에 수 백기의 핵무기를 반입했을 경우 그것은 남한 내 여러 미군기지에 분산 배치해서 관리했을 가능성이 크고 광주 기지도 그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이 엄청난 양의 핵무기를 남한에 들여다 놓을 수 있었던 것은 한미상호방위조약 4조로 가능했다. 미국은 당시 소련과의 냉전 중이었고 남한 핵무기는 비핵국인 북한보다 핵 강국인 소련 타격을 목표로 배치되었다. 미소 대결 차원에서 광주에도 핵무기가 다량 배치된 것이다.

▲ 2023년 4월14일 한국에서 실시된 한미연합 훈련에 참가한 미 공군 F-16 파이팅 팰컨 전투기들이 군산 미 공군군기지에서 이륙해 광주 미공군기지에 착륙한 뒤 퍼레이드를 하고 있다(https://www.dvidshub.net/video/880363/8th-fighter-wing-arrives-gwangju-air-base-korea-flying-training-2023-b-roll 동영상 갈무리).


광주항쟁 유혈진압 카터 대통령이 결정

⑥ 핵무기가 배치된 주한 미 공군 기지 가운데 광주가 차지하는 비중이 컸기 때문에 광주항쟁 발생 당시 미국 대통령이 미소 핵전략 차원에서 핵무기 보호 목적으로 한국군의 광주 유혈 진압을 허용한 정황이 아래의 자료에서 확인되고 있다.

-- 미국은 1980년 5월22일 지미 카터 대통령 주재로 리차드 홀부르크 국무부 차관보, 브래진스키 안보 보좌관 등이 긴급회동하고 광주 항쟁을 한국군 특전사가 무력으로 진압해야 된다고 결정했다. 이 결정 후 5일 만에 한국군 9사단이 광주시내로 진입해 다수의 시민군을 살해하고 광주항쟁을 진압했다(https://www.thenation.com/article/world/kwangju-uprising-and-american-hypocrisy-one-reporters-quest-truth-and-justice-korea/). --

미국 대통령이 직접 광주 항쟁을 무력진압토록 결정한 것은 광주 현지의 사태가 미국이 가장 우려하는 군사적 이해관계, 즉 미국 핵무기의 안전과 관련이 있다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미국 대통령이 직접 해외 미군 주둔지에서의 정부군과 시민 대립 상황에 대해 무력진압을 결정하는 사례는 흔치 않은데, 유사한 사례의 경우 장관급이나 군사령관 수준에서 처리 방향을 결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⑦ 1980년 5월22일 주한미군사령관 위컴은 한미연합사 소속의 한국군 20사단의 네 개 연대를 ‘폭동진압(Riot Control)’용으로 허용해 달라는 신군부의 요청을 승인해주었으며, 데프콘3 수준의 경계태세를 발동해 신군부의 광주 진압을 전후방에서 지원해주었다. 또한 미국은 보수정권인 레이건 행정부의 출범 후 첫 방미인사로 전두환을 초청함으로써, 신군부 정권이 국제적인 정당성을 얻게 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⑧ 미국은 동북아 핵 전략 추진과정에서 미국의 이해관계와 공약을 위협할지 모를 각종 사태의 돌발가능성에 대비해왔다는 사실이 미 정치학자 윌리엄 오버홀트(미 허드슨대 연구소 연구원)에 의해 언급되었다. 오버홀트는 1979년 1월 서울에서 열린 한 국제학술대회에서 아시아에서 발생할지 모를 군사적 위기 중에는 테러리스트들에 의한 핵위협과 한국에서의 혁명 등이 포함된다고 밝혔다(고승우, 윤범모. 반핵과 미술, 춘추언론, 1989. 111).

그는 이어 미국은 적국과 우방국들에 의해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사태에 대비해 군사개입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개입의 대가 등을 분석하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미국은 한반도에 배치하고 있는 미국 핵무기의 안전한 보존을 위해 신경을 쓰고 있으며 ‘주한미군이 핵무기의 통제력을 상실할 경우 초강대국간의 전면전으로 비화할 수 있다’는 점에 경계태세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위와 같은 미국 정부의 핵무기 안전 보존 대책이 공개된 뒤 1년 후 카터 대통령의 광주 진압 결정이 내려졌다.

⑨ 1980년 당시 주한 미 대사 글라이스틴이 작성한 외교전문에 따르면 미국과 신군부는 1980년 5월 무렵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시위가 격화될 경우 이들 특수부대를 동원해 진압하는 문제에 대해서 긴밀하게 조율했으며, 신군부는 시위 진압을 목적으로 이동하는 부대의 동향을 한미연합사에 상세히 보고하고 있었고 상호간에 긴밀한 조율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특전사가 광주로 진입하기 하루 전인 1980년 5월 26일 청와대로 들어가 최광수 비서관을 만나 “어떤 군사행동이든 인명 피해를 최소한으로 하는 방식이어야 한다.”면서 “미국 정부는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법행위가 장기화되고 있는 위험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 한국이 군사행동을 하는 것을 자제하라고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http://timshorrock.com/2020/05/19/gwangjuarchives-box1-file1/).

미국 정부는 광주항쟁과 관련해 3500 건의 비밀 자료를 공개했지만 핵무기 관련 자료 등은 공개되지 않았다.

⑩ 지난 2020년 5월 열린 '5·18 증언회'에서 김용장 전 미군 501정보단 요원이 "5·18민주화운동 10일간의 항쟁기간 동안 40여건의 보고서를 썼으며 전두환 전 대통령이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사살명령을 내렸다고 증언해 충격을 준 바 있다(광주드림 2020년 5월20일).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미군이 광주항쟁 기간 동안 활발한 정보활동을 통해 수집한 정보를 어디에 어떤 목적으로 사용했느냐 하는 것이다. 5·18 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조속히 정상 가동되어 새롭게 제기된 여러 문제들을 포함한 진상규명에 나서야 할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이상과 같이 10가지 자료를 연결시키면 광주항쟁 당시 미국이 어떤 이유로 전두환 신군부의 광주 유혈진압을 허가했는지의 윤곽이 드러난다. 퍼즐 맞추기 형식인데 앞으로 좀더 많은 관련 자료가 드러나면 당시의 사실관계가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 1980년 5월 광주항쟁기간 동안 태극기를 손에 든 시민들이 탄 버스가 광주 시가를 달리고 있다. 사진=위키피디아


광주 진상 규명, 미국 개입에 대한 진실 밝혀져야 가능

현재까지 공개된 광주항쟁과 미국의 관련 자료에서 광주 미군기지와 미국 핵무기 저장소라는 것에 대한 직접적인 자료나 카터 미 대통령이 왜 직접 백악관에서 광주 유혈진압을 한국 군부가 하도록 결정하는 회의를 주재했는지 등에 대해서도 여전히 안개속이다. 미국 외교사에서 제3국의 반정부 또는 소요사태에 미 대통령이 주요한 결정을 하거나 그것을 공개한 사례는 매우 드물다.

지금까지 시도된 5·18민주화운동의 진상 규명 성과는 여전히 미흡하다. 미국의 개입 여부에 대한 모든 사실 확인이 되어야 그 전모가 드러날 것이란 점이 분명해지고 있다. 지금껏 공식적으로 5·18 민주화운동에서 미국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정부기구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규명한 적은 없다.

최근 일부 국회의원이 미국에 관련 정보 제공을 요청하는 조치를 취했을 뿐이다. 미국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주장은 오래전부터 제기되어왔었고,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가 2018년 9월 전남대학교를 방문했을 때 전남대 총학생회 집행부 등 학생 10여명이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 학살의 책임이 미국 정부에 있다며 해리스 대사 방문을 반대했었다.

지금까지 확인된 관련 자료는 미국이 광주학살을 묵인한 방조자가 아니라, 명백히 책임이 있는 공모자로 5.17쿠데타를 용인했고 공수특전단의 광주 및 주요도시 출동을 승인했으며, 한국군의 학살을 전혀 제지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나 있다.

미국은 2차 대전 종전 후 점령군으로 남한에 진주한 뒤 친일세력을 해방정국의 지배세력으로 만들면서 제주 4·3 항쟁과 6·25 한국 전쟁 당시 민간인 대량 학살, 5·16군사쿠데타 등에 직간접적인 책임을 지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 있지만 그에 대한 진상 규명 등은 한미동맹의 유지라는 구실로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한미동맹은 미국에 지나치게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군사적 주권이 실질적으로 미군에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어 이의 정상화가 시급하고 그래야 광주항쟁 등의 진상 규명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2022년 5월18일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거행된 제42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 5·18 항쟁은 “42년 전 자유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피로써 지켜낸 항거로 5·18은 현재도 진행 중인 살아있는 역사이다. 5월 정신은 지금도 자유와 인권을 위협하는 일체의 불법 행위에 대해 강력하게 저항할 것을 우리에게 명령하고 있다”고 언급했다(중앙일보 2022년 5월19일). 이런 점을 되살릴 때 윤 정부는 광주의 진실에 대해 규명하는 작업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미국 1987년 전두환 계엄령 선포 저지시켜

한편 1987년 6월 항쟁이 발생해 전국적으로 시위가 벌어지자 전두환은 그 해 6월 19일 자정에 계엄령을 선포해 계속 집권할 시도를 하자 미국은 그럴 경우 한국에서 내전이 발행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 이를 저지하기 위해 레이건 대통령이 나서 저지시킨 것으로 밝혀졌다(https://adst.org/2013/06/avoiding-martial-law-in-south-korea-1987/).

미국은 전두환이 계엄령 선포 계획을 실행하기 레이건 전 대통령의 친서를 주한미대사관을 통해 전달하는 방식을 취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전두환에게 대통령 단임 약속을 지키고 권좌에서 물러나야 하며 계엄령을 선포하고 대통령 선거를 취소할 경우 한미간에 심각한 사태가 날 것이라고 경고하는 서한을 작성해 주한 미 대사관을 통해 전두환에게 전달했다. 릴리 주한 미 대사는 1987년 6월19일 오후 전두환을 직접 만나 전달하면서 워싱턴의 의중을 설명했다. 전두환은 결국 계엄령 선포 계획을 포기했다.


5·18민주화운동, 87년 6월 항쟁의 실질적인 동력으로 폭발

5·18민주화운동은 그 발생 43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5·18 당시 계엄군에 발포 명령을 내린 자가 누구인지, 계엄군이 시민군을 향해 헬기 사격을 가했는지 등 이 아직 명쾌하게 규명되지 않고 있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80년대 민족민주운동 발전의 출발점이 되었고 그 추동력은 지금도 여전히 뜨겁고 강력하다.

유신체제를 승계 하려는 신군부 독재체제의 재편 기에 나타난 5·18민주화운동은 공수부대의 진입과 양민학살에 대한 국민의 무장저항, 군부의 무차별 진압으로 전개되었고, 광주항쟁을 통해 80년대 민주화운동은 변혁적 사회운동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조희연, 80년대 한국사회운동의 전개와 90년대의 발전전망, 한국사회운동사, 한울, 1990, 15-25).

5·18민주화운동을 통해 확인된 80년대 사회운동의 특성을 보면, 지배 권력의 폭력성을 극복의 대상으로 부각시킨 의식이 확산되면서 미국의 군부세력에 대한 지원의 확인을 통해 반외세자주화역량 확보의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된 것 등을 들 수 있다.

군사정권은 군부독재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민주화 추진세력에 대한 탄압, 와해 노력을 벌이고 학생 운동권을 중심으로 80년대 사회운동이념 및 실천방안이 다양하게 제시됐다. 83년 들어 군사정권이 체제의 재정비와 권력의 공고화를 마친 뒤 민중적 불만을 체제 내로 수렴키 위한 유화정책을 실시하게 되면서 사회운동 세력들은 확대된 합법적 활동공간을 활용, 사회운동의 대중적 활성화를 촉진키 위한 활동을 강력히 전개한다. 5·18민주화운동은 87년 6월 항쟁의 실질적인 동력으로 폭발하고 이어 쟁취된 민주화가 지속적으로 추진되면서 97년 투표에 의한 평화적 정권 교체로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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