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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국무부 3·1 운동을 왜곡 폄하하는 성명 발표[고승우의 한미관계 탐구 (03)] 1910년 조선 강제병합부터 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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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3.08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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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정부는 3·1운동이 발생한 10여일 후인 1919년 3월14일 미국무부가 발표한 성명을 통해 3·1운동을 왜곡 폄하하는 내용을 발표했다. 미국은 조선인들이 언론 자유와 기타 불만 사항을 시정해 달라며 소요를 일으켰다고, 진실을 외면하고 조선인을 깎아내리는 공식 성명서를 발표한 것이다. 다음은 성명서 전문이다(뉴시스 2014년 2월27일).

-- 3월12일 서울을 비롯한 지방에서 사실상 시위가 중단됐으며 공식적으로 시위 참여자의 15%만이 기독교 신자로 파악됐다. 시위 지도자들은 새로운 정치적 종교계의 사람들이며 외국 선교사들은 독립 운동에 관계되지 않았다는 전문을 국무부는 받았다. 시위의 목적은 언론의 자유와 청원권, 학교에서 한국어 학습, 기타 불만 사항을 시정해 달라는 것이다. --

▲ 일본군이 파고다 공원 출입문을 막은 뒤 공원앞 인도에서 무력시위를 벌이는 모습. 이 사진은 1918년 12월31일 프랑스인이 촬영한 것으로 3·1 독립운동에 대한 소개 책자에 일본군이 조선인의 독립요구를 탄압하는 실상을 소개하는 글 속에 실려 있다. 사진=위키미디어


미 국무부 “3·1 운동은 언론 자유 등 불만 사항을 시정해 달라는 소요”

미 국무부는 3·1 운동이 발생 다음 달인 4월 일본주재 미 대사에게 전문을 보내 ‘서울에 있는 미영사관은 조선 독립 운동가들이 도움을 요청할 경우 거절하라. 동시에 일본 정부당국이 조선의 독립운동에 미국이 동조한다고 의심하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했다(Frank Baldwin, "Participatory Anti-Imperialism: The 1919 Independence Movement," Journal of Korean Studies, 1(1979): 123-61; Dae-Yoel (Tae-yol) Ku, Korea Under Colonialism: The March First Movement and Anglo-Japanese Relations (Seoul, 1985), 37-303. https://rmc.library.cornell.edu/Straight/timeline_text.html#top).

미 국무부가 3·1운동에 대해 조선민중이 독립을 원한다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넣지 않고 부수적이거나  부정적인 내용을  공식 발표하고 미국 공관에 비밀 지령을 내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이유는 미국 정부의 비밀 자료로 분류되었다가 공개된 미 정부 극비서류에서 확인된다. 그것은 미국과 일본이 1905년 맺은 ‘미국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한다'는 내용의 ‘가쓰라·태프트 비밀협약’이다.

일제는 약 3개월가량 전국적으로 전개된 3.1독립운동을 제압하기 위해 화성 제암리 사건과 같은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고 유관순 열사 등 숱한 이가 이 과정에서 순국했다.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집회인수가 106만여 명, 사망자가 7509명, 구속된 사람이 4만7000여 명이었다. 조선총독부는 3·1 운동을 계기로 군사, 경찰을 앞세운 강경탄압정책에서 민족분열책인 일명 문화통치로 정책 기조를 바꿔, 조선어로 된 일간신문 발생을 허가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또 다른 자료에 의하면 3.1운동은 집회회수 1542회, 참가인원수 202만3089명, 사망자수 7509명, 부상자 1만5961명, 검거자 5만2770명, 불탄 교회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 715채나 되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투쟁했던 거대한 독립운동이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울려 퍼진 피맺힌 외침은 중국의 5·4 운동, 간디의 독립운동에도 자극을 주었다(https://blog.naver.com/sencecool71/221477491277).


3·1 독립운동의 구조적 원인이 된 일제의 강제 병합

일제는 1910년 국권을 강탈한 후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근대적 기본권을 박탈하고 폭압적인 무단통치를 실시했다. 또한 조선민족 고유의 문화를 파괴하고 조선인들을 일본인들에게 복종하는 충실한 피지배자로 만들려 했다.

일제는 한반도 토지 조사 사업 등을 강행하면서 농민들의 토지를 강탈하는 등 경제적 폭압을 일삼아, 한국 사회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불만과 저항이 거세졌다. 일제는 을사늑약 다음해인 1906년부터 일본인들이 한반도에서 농지 등을 구입할 수 있게 만들었고 그 결과 1910년 일본인이 소유한 한반도 내 경작지는 전체의 7-8%에 달했다. 그 비율은 계속 증가해 1916년 38.8%에서 1932년 52.7%로 증가했다.

한반도로 이주한 일본인 숫자는 1934년 전체 인구 2천 1백 만 명의 3%인 65만 명에 달했다. 일본인의 농지 소유가 증대되면서 조선인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했고 가난을 견디지 못해 북간도, 일본 등으로 이주하게 되었다(https://en.wikipedia.org/wiki/Japan%E2%80%93Korea_Treaty_of_1910).

미 의회는 1916년 윌슨 대통령에게 일본의 한반도 병합에 관해 미국과 조선 독립운동가간의 외교적 접촉을 시작하라고 건의했다는 점을 로버트 란싱 미 국무장관이 언론 보도에 포함시켜 공개했다. 윌슨 정부는 그러나 이 건의를 실행치 않았다(https://rmc.library.cornell.edu/Straight/timeline_text.html#top).

1918년 윌슨 대통령이 밝힌 민족자결주의와 러시아 10월 혁명 성공 후인 1919년 3월 1일 한일병합조약의 무효와 독립을 선언하는 비폭력 운동인 3·1 만세 운동 또는 3·1 혁명이 일어났다.

윌슨 대통령은 조선의 독립만세 운동에 대해 침묵했다(Frank Baldwin, "Participatory Anti-Imperialism: The 1919 Independence Movement," Journal of Korean Studies, 1(1979): 123-61; Dae-Yoel (Tae-yol) Ku, Korea Under Colonialism: The March First Movement and Anglo-Japanese Relations (Seoul, 1985), 37-303.).

이는 미국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의해 일본의 조선 점령에 동의했던 것을 의식한 행위로 보인다. 당시 미국 국무부의 성명과 공관에 대한 조치에서 일본의 조선인 만세운동에 대한 탄압에 눈을 감고 간접적으로 동조했던 점이 확인된다.

미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다가 세계의 약소민족들이 민감한 반응을 보이자 그 적용 범위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및 터키에 속했던 주민과 영토, 그리고 독일제국의 지배 아래 있던 식민지로 국한한다고 수정했다. 그것은 당시 국제적인 지배구조에 눈을 감은 것이었는데 특히 일본이 전승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여서 조선 독립 문제를 외면했다.

윌슨은 최종적으로 강화회의에 제출할 국제연맹 규약에서 민족자결주의라는 용어를 아예 삭제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주장을 본 조선인들은 그 속셈을 모르고 큰 기대를 했고 오늘날에도 그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한심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얼빠진 역사왜곡은 당시 상황을 정확히 살펴 시급해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 일본 제국 내각총리대신 가쓰라 다로(왼쪽)와 미합중국 전쟁부 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3·1 운동은 비록 제국주의 세력이 외면하고 침묵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승전국 식민지에서 일어난 최초의 반제국주의 운동이면서 민족적인 항일 운동으로 조선 민족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린 역사적 사건이었다. 3·1 운동을 계기로 다음 달인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미국 정부는 1920년 이후 1941년 12월7일 일본이 진주만을 습격해 시작된  태평양전쟁 초까지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표한 적이 없다. 이승만이 임시정부 수반을 하면서 미국 정부에 임시정부를 조선의 합법적 정부로 인정해 달라는 청원을 했지만 미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Frank Baldwin, "Participatory Anti-Imperialism: The 1919 Independence Movement," Journal of Korean Studies, 1(1979): 123-61; Dae-Yoel (Tae-yol) Ku, Korea Under Colonialism: The March First Movement and Anglo-Japanese Relations (Seoul, 1985), 37-303.).

그러다가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미국, 영국, 중국 지도자들이 만나 조선을 적절한 조치를 통해 독립하도록 할 것을 선언했고 소련의 스탈린 수상도 이에 동의했다(FRUS, The Conferences at Cairo and Tehran, 1943, 448-49.).

당시 열강 지도자들의 마음속에서는 조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것은 조선인들이 희망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제국주의적 국가이기주의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전쟁이 끝나면 승전국들이 조선에 대해 조선인이 독립할 자질을 갖췄다고 판단될 때까지 수년 또는 더 긴 기간 동안 신탁통치를 한다.’로 요약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 독립 운동가들은 일본이 패퇴하면 즉시 독립정부가 수립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 정부의 태평양전쟁 종전 이전 한반도 점령 대책 비밀자료

미국 정부는 일본의 한반도 지배에 대해 냉담했지만 1944년 태평양 전쟁 종전이전에 종전 이후의 한반도 문제를 다각도로 검토했다. 미국은 일제의 지배를 받고 있던 한반도 상황에 대한 상세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반도 인접국인 소련, 중국이나 영국 등 연합국이 전후 한반도 정책에 미칠 영향에 대해 치밀하게 검토한 것으로 이들 비밀 자료에서 드러났다.

미국이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 지배를 침략, 반인도주의적 행위 등으로 평가하지 않고 한국인을 비하하는 식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은 가쓰라-데프트 밀약에 의해 미국이 일본의 한반도 강점에 동의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미국은 3·1 독립운동이나 조선민중의 독립운동 등에 대해 철저히 외면했던 것도 그런 이유로 보이고 전후 한반도를 연합국 공동지배로 구상하는 것도 미국의 이익만을 챙기려는 발상의 결과라 하겠다. 미국 극동부처간지역위원회(IDAFZ)는 1944년 3월29일 ‘한반도 점령과 군사정부 ; 군사력 구성’이라는 제목의 자료를 통해 일본 점령 시의 대책을 검토했다(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44v05/d1201).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① 문제점 : 문제는 어느 나라가 한반도 점령에 참여할 것인가를 정하는 것이다. 즉 민간업무에 대한 책임은 영국, 중국, 소련(극동 전쟁 참여 시) 등이 분담할 것인지, 그리고 미국의 육군과 해군이 행정적 민간업무 책임을 어느 정도까지 질 것인가?

② 기본 요인 : 한반도는 일본에게 35년 동안 지배를 받고 있다. 일본은 1905년 한반도를 보호국으로 삼아 외교업무를 통제했다. 이런 통제 상태는 1910년 공식적인 합병이 이뤄질 때까지 점차 증대되었다. 그 이후 일본의 지배는 한반도를 일본의 일부로 통합시키는 쪽으로 진행되었다. 전체 조선인은 일본에 예속된 상태에서 살고 있다. 해외로 망명한 다양한 조선인 단체들이 국내에 미치는 영향력이 의심스럽고 그들의 지도자들은 국내에서 통치한 경험이 없다.

일본인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조선인은 분명한 민족, 예술, 지리적 공동체의 특성을 유지하고 있다. 한반도 조선인은 1940년 기준 2천4백 만 명이고 일본 거주인은 1백 만 명이다. 조선인의 의복과 다른 문화적 전통은 여전히 지배적이고 조선인은 과거에 그랬듯이 두만강과 압록강을 국경으로 여기고 있다.

한반도는 중국과 소련에 인접해 있고 이들 두 나라와 일본이 한반도의 통제를 놓고 경쟁을 한 것은 1894~5년의 청일 전쟁, 1904~5년의 러일 전쟁의 주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한반도가 연합군에 의해 일본의 지배로부터 해방이 될 경우 어떤 상황일 것인지는 현재 예측하기 어렵다. 한반도가 해방되는 것은 한반도에서 전쟁의 결과이거나 실제 한반도에서 전투가 벌어지지 않고 일본의 무조건적 항복의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만약 한반도가 전쟁을 겪으면서 점령될 경우 군 당국은 각자의 역할에 걸맞는 정치적 요인이 충분히 고려되는 것이 바람직스럽다. 거기에는 향후 한반도 정치 상황에 실질적 이해관계가 있는 연합국 군대의 전투부대가 지니고 있는 군사적 필요성과 부합해야 할 것이다.

그런 국가 중의 하나가 중국이다. 중국은 한반도와 인접해 있고 오랜 역사를 통해 밀접한 정치적 관계를 맺어왔다. 장개석 총통은 중국을 대신해서 한반도의 독립을 다짐했다. 이는 중국이 한반도의 전투 부대에 동참할 것으로 예상되는 부분이다.

미국도 역시 한반도의 미래 상황에 관심이 있다. 미국은 일본의 무조건적 항복과 자유롭고 독립된 한반도 건설을 다짐해 왔다. 미국이 한반도 임시정부에 대한 국제적 감시와 주요 민간업무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한반도와 그 주변에서 발생할지 모를 군사작전에 미국이 참전할 경우 가능해질 것이다.

영국도 유사한 다짐을 해왔다. 영국은 한반도에서 전투에 직접 참여할 것을 고집하지 않겠지만 캐나다와 같은 자치령을 통해 간접적인 대표권을 행사하려할 가능성은 있다. 소련은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할 경우 한반도 북부를 통해 일본을 공격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될 경우 소련은 한반도의 상당부분을 점령할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 밖에서 활동 중인 훈련받은 조선인 무장 세력인 독립군은 한반도에서 벌어질 전투와 점령에 참여하려 할 것이다. 상해임시정부의 지지를 받는 이들 독립군 규모는 1천 여 명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고 중국 쓰촨(四川)성 동남부의 도시 충칭(重慶)에 주둔하고 있다.

독립군은 현재 중국의 직접적인 통제 하에 있다. 또한 중국공산군 부대에 조선인 무장 세력이 중국의 산시성과 그 주변에 주둔하고 있는데 그 실제 숫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만주에는 다수의 조선인 정착민이 있으며 이중 일부는 군인이 될 가능성이 있다. 1939년 조선인 정착민은 약 1백 만 명에 달랬고 조선 국경의 북쪽 지역에 몰려 있었다. 조선인 군대의 다수는 소련 극동군에 의해 훈련받았을 것이 틀림없다.

이들 조선인들은 소련 정치이념으로 완전 세뇌되어 있으며 잘 훈련되고 장비를 잘 갖추고 있는데 그 숫자는 3만 5천 명에 달하고 그 가운데 2만 여 명은 실제 군복무중인 것으로 믿어진다. 이들 조선 군인들은 군사적 상황이 보장되면 즉시 조선에서의 군사작전에 참여하고 소련 지휘와 별도로 독립적으로 작전을 할 가능성이 있다.

조선의 독립은 군사작전이나 일본의 항복의 결과가 될 것이냐에 따라 조선의 장래 정치적 위상에 대한 영향을 미칠 연합국들의 이해관계가 조선의 군사정부가 그 특성상 연합국과 부합하고 참가국이 중국, 미국, 영국과 영국 연방국 중의 하나, 그리고 태평양전쟁에 소련이 참전할 경우 소련이 될 것이다.

한반도의 점령과 군사정부 수립을 위해 한 나라보다는 연합국 다수가 참가할 가능성과 한반도에서의 군사작전이 다수의 국가 지휘관의 지휘에 의해 여러 지역에서 동시적으로 수행될 개연성 등은 한반도 점령이 몇 개 지역으로 나눠이뤄질 것인지, 연합군의 대표들로 구성된 군사위원회에 의한 것인지 또는 다른 원칙에 의해 이뤄질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한반도의 군사정부에 대한 기본 원칙은 일관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군사정부가 미래의 한반도 독립을 위한 준비를 원활하게 할 경우 군사정부는 지역으로 구분된 체계를 갖추는 것은 회피해야 하고 민간업무를 관장하는 행정기구가 모든 참가국들이 동등한 책임을 지는 조건으로 가능한 신속하게 만들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반도의 점령과 군사정부 구성을 위한 군사력 구성 문제는 연합군의 상당한 군대가 한반도를 점령하기 전에 소련군이 한반도 일부를 점령할 경우 새롭게 논의되어야 한다.

③ 건의 : 한반도에서 전투 목적으로 활용될 군사력은 군사작전의 효용성이 공평할 경우 중국과 미국, 영국, 영국 연방국 등이 모두 하나의 군대로 포함되어야 한다. 그리고 소련이 태평양 전쟁에 참전할 경우 미국이 상당한 정도의 대표권을 가진 조건에서 소련도 포함되어야 하며 아래와 같은 사항이 준수되어야 한다.

- 다수의 참전국들이 파견한 군사력이 각기 분리된 지역에서 군사작전을 수행할 경우 민간업무를 담당할 행정기구는 각 전투 지역의 군사령관이 책임을 맡아야 한다. 그리고 그 군사령관이 미국인일 겨우 미국 군 당국은 그런 책임을 수행할 태세를 강구해야 한다. 군사작전이 연합명령 체계일 경우 전투기간 동안의 민간업무는 연합형식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 한반도에서 군사작전이 완료되면 가능하다면 점령군과 군사정부 내부에 연합군의 대표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 같은 대표성 보장은 한반도의 미래 정치상황에 진정한 이해관계가 있는 국가들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 군사작전이 별개의 전투 지역에서 수행될 경우 군사정부가 조기에 만들어져 대처할 필요가 있다.

- 한반도 점령은 중앙집권적 행정의 원칙하에 이뤄져야 한다. 지역별 군사작전이 지역 군사정부로 귀결된다면 이 같은 민간업무 행정 형식은 중앙집권적 행정기구로 가능한 한 신속히 변경되어야 한다. 동시에 그 대표성은 한반도와 그 주변에서 군사작전에 참가한 국가들에게서 나와야 한다.

이 같은 대표성은 개개 국가 군대의 장교로 구성된 위원회를 통해서 정규적인 간부들에 의해 수행되어야 한다. 이 위원회는 한반도 전역의 군사정부 작전의 협조에 대한 책임을 지면서 감독권을 행사해야 한다. 이 경우 다른 국가의 대표성은 미국의 참여를 약화시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

- 한반도에 독립정부를 수립하기 이전에 설치될 군사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감독권한과 식탁통치에 대한 최종적 형태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감독권한은 미국이 참여하는 것을 전제로 한 연합국간 협의 형식이 될 것이다. 한반도에서의 군사정부는 단기간만 존속해야 하는데 만족할만한 중간단계의 감독기구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겪게 될 어려움 때문에 군사정부가 상당기간 존속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조선인이 가능한 최대한 활용되어야 하고 자신들의 독립정부에서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잇도록 훈련시켜야 할 것이다.

- 조선인 군대의 경우 소련 극동군에 소속되어 있지 않을 경우 별개의 명령체계나 비정규직 형태로 한반도에 진입해야 하고 미 국무부는 군 당국에 그들의 정치적 위상과 미군 당국에 의해 취해져야 할 태도에 대해 통보해야 한다.

▲ 1995년 미국 육군참모대학교 정기 포럼에서 “Portentous Sideshow: The Korean Occupation Decision” 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2 차 대전 종전 전후 취해진 미국 정부의 한반도 점령 정책에 대한 자료(https://press.armywarcollege.edu/parameters/).


미국의 ‘한반도 점령과 군사정부 : 군사력 구성’ 자료의 특성

미국이 종전 1년 전에 만들었던 미국 극동부처간지역위원회(IDAFZ)의 비밀 자료는 종전 이후 한반도 점령과 군사정부 수립, 연합군 군사력 구성 등에 대해 세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자료는 특히 한반도 밖에서 활동 중인 훈련받은 조선인 무장 세력인 독립군이 소련과 중국의 직접적인 통제 하에 있다는 점을 중시하면서 조선인 군대의 다수는 소련 극동군에 의해 훈련받았을 것이 틀림없다고 추정했다.

이어 “이들 조선인들은 소련 정치이념으로 완전 세뇌되어 있으며 잘 훈련되고 장비를 잘 갖추고 있는데 그 숫자는 3만 5천 명에 달하고 그 가운데 2만 여 명은 실제 군복무중인 것으로 믿어진다. 이들 조선 군인들은 군사적 상황이 보장되면 즉시 조선에서의 군사작전에 참여하고 소련 지휘와 별도로 독립적으로 작전을 할 가능성이 있다.”고 적었다. 미국은 당시 소련을 견제한다는 목적으로 조서닌 독립군에 대해서도 예의 주시하고 소련 영향력이 종전 이후 한반도에 미칠 것을 우려하고 있다. 미국의 이런 태도는 남한에 미군을 점령군으로 진주시킬 때부터 유지되면서 남한 단도정부 추진, 제주 4·3 항쟁 초 강경 진압, 6·25 한국 전쟁 참전으로 이어졌다.

미국 극동부처간지역위원회(IDAFZ)가 소속되어 있던 미국 전쟁부(The United States Department of War, the War Department ; 이 부서는  미 육군을 지휘하고 관리하던 미국 내각 중 하나였고 1949년에 미국 국방부로 이름을 바꿨다)는 일본이 예상보다 일찍 항복하면서 최종적으로 일본에 대한 간접통치 정책을 채택하고 ‘태평양군 사령관이 천황을 포함한 일본 정부의 기구를 통해 미국의 권한을 행사했다. 동시에 연합군간의 이견이 있을 경우 미국이 결정권을 행사했다. 미국이 일본에 대한 원폭 투하 위세를 몰아 다른 연합군의 위에 군림한 것이다.

당시 미국은 ‘천황제를 포함한 일본 정부 형태의 지속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정했지만 일본을 소련 견제를 위한 교두보로 삼기 위해 일제 전범 처리 등을 최소화 하는 식으로 처리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천왕을 포함한 일본 정부의 지배력을 중단시키고 맥아더 미군 최고사령관이 천왕과 일본 정부 기구를 총괄하는 권한을 행사하게 했다.

미 전쟁부의 일본에 대한 통치계획은 일본의 식민지로 미국이 인식하고 있던 북위 38도 이남 한반도에서도 적용되었다. 미국은 한반도를 연합군이 주도하는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계획만을 세웠을 뿐 한반도에 대한 별도의 점령 정책은 전혀 검토하지도 않았다. 이에 따라 맥아더의 지휘를 받은 하지 중장이 한반도 미군 점령군 사령관으로 부임해 군정 초기에는 일본에 대한 통치계획을 액면 그대로 실시했다(https://press.armywarcollege.edu/parameters/).


3·1 독립운동 104주년에 일어난 역사적 비극

청산되지 않은 역사는 비극을 낳는다고 했던가? 친일청산이 깔끔하게 이뤄지지 못한 상황에서 맞은 3·1 독립운동 기념일을 둘러싸고 그런 아픔이 확인됐다.

윤석열 대통령의 3·1 독립운동 기념축사가 일본 총리의 발언과 흡사하다는 야권의 비판을 받으면서 분위기가 흐려졌다. 문제가 된 윤 대통령의 발언은 일본에 일제 강제 징용문제 관련 저자세 외교를 하고 있다는 비판 속에 일본을 '협력 파트너'로 언급하면서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했던 과거를 되돌아봐야 한다'고 말한 부분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 민주당은 “매국노 이완용과 윤석열 대통령의 말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나”라고 원색 비난했고 여당은 “야당이 다시 죽창을 들고 나섰다”고 반박했다. 어느 해석이 맞는지는 국민의 몫이다. 윤 대통령은 미국이 주도하는 한미일 군사동맹 체제를 수용하면서 전쟁범죄를 인정치 않는 일본과 한미일 해군합동훈련을 독도부근에서 벌인 것도 구설수에 오르고 있는 상황이다.

윤 대통령이 문제의 발언을 한 뒤 닷새 뒤인 6일 한국 정부가 강제징용 배상금을 한국기업이 떠맡겠다는 ‘제3자 변제’ 발표를 하자 미국이 쌍수 들어 환호하고 나섰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성명을 통해 “오늘 한국과 일본의 발표는 미국의 가장 가까운 동맹 간의 협력과 파트너십에 신기원적인 새 장을 장식할 것”이라고 환영했다.

▲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월1일 104돌 3·1절 기념식에 참석해 참석자들과 행사를 보며 박수를 치고 있다. 사진=대통령실


윤 대통령의 저자세 대일 외교 비판 속 눈길 끄는 미국 정부, 국내 언론

한국에서 제 2의 을사늑약이라는 혹평이 쏟아지는 가운데 나온 미국의 대대적 환영은 박근혜 정권 시절인 2015년 '종군위안부 합의'때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대통령 등 미국정부가 보였던 "정의, 용감한 결정" 등 격렬한 환영을 꼭 닮았다. 미국이 자국 이익을 위해 적극 추진하는 한미일 군사동맹 결성을 위한 걸림돌 치우기에만 혈안이 된 모습이다.

미국은 3·1절 다음 날 한국 정부를 통해 ‘죽음의 천사’라고 불리는 전략폭격기로 한국 영토에서 작전을 하는 모습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국내 언론은 이를 대서특필했다. 하늘의 전함'이라고 불리는 미국의 특수전 항공기 AC-130J는 분당 수천 발씩 ‘포탄의 비’를 퍼붓는 것은 물론 최신 미사일과 정밀유도폭탄도 발사·투하할 수 있어 ‘천사의 날개를 두른 하늘의 전함’ ‘죽음의 천사’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구형 AC-130은 한반도에 몇차례 출동한 적이 있지만 최신형인 AC-130J가 한반도에 출동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미국은 북한 핵과 미사일에 대한 대응이라는 점을 앞세워 “북한 핵사용하면 김정은 정권 종말”이라는 전략을 내놓았는데 북 정권이 종말이 되는 상황이면 한반도 전면전을 의미하고 이는 한민족이 결단 나는 사태를 피할 수 없다. 그런 비극을 막아야 하는 안전판으로 제시된 것이 박정희,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의 남북합의나 정상회담일 터인에 이에 대해서는 현재의 한미 정부는 완전 외면하고 있다.

3·1 독립운동은 미국과 일본의 야합인 가스라-테프트 밀약에 의해 가속화 된 일제의 한반도 강점에 대한 한민족의 항거였다. 미국은 오늘날까지 이 밀약에 대해 공식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다. 일제의 한반도 강점이 국가범죄라면 거기에 동조했던 미국도 자유스럽기 힘들다. 그러나 미국은 물론 국내에서도 일제의 한반도 침략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지 않은 채 미국은 혈맹이라는 이름으로 한반도에서 군사행동을 하고 있다. 물론 한국 정부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상황이라는 점도 분명하다.

국내 일부 언론은 3·1 독립운동을 해외에 보도한 미국 언론인에 대한 미담을 기사화했다. 해마다 되풀이 되는 일인데 이번에는 앨버트 와일더가 그 주인공이었다.  그는 대한제국 및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활동한 미국의 기업인이자 언론인으로, AP통신 임시 특파원으로서 3·1 운동 소식을 해외에 처음 알리는 등 한국의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시는 2021년 그가 서울에 짓고 살았던 가옥 ‘딜쿠샤’의 원형을 복원해 3·1절을 기해 개방했다(서울신문 2023년 2월28일). 한국 정부와 언론의 이런 태도는 박수 받아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3·1 독립운동 당시 수많은 조선인이 일제에 의해 학살당하는 비극이었지만 미국 정부는 일본의 입장에서 이 운동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는 점도 같이 알려야 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한 미국인의 의로운 행동이 미국 정부의 부정적인 역사적 사실을 가리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1919년 당시 미국 정부는 한반도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선교사들이 3·1 독립투쟁에 관계하지 않았다는 점을 확인하면서 미국 언론의 이 투쟁 취재에 대해 제재를 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결과 미국 언론에서 이 투쟁에 대한 보도는 발생 열흘 정도 지나 선교사들의 전언 등의 형식으로 주로 보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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