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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튀는 기자'가 안 보인다, 딱 한명 기억에 남는 사람은..."[1974, 그 후 50년] 언론사로 돌아가지 못한 기자들 이야기(14) 이종욱(李宗郁) 동아투위 위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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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4.07.08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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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10월24일 발표한 ‘자유언론실천선언’이 올해로 50주년을 맞았습니다. "우리는 자유언론에 역행하는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다"는 선언문에 따라 기자들은 자유언론 실천운동을 펼쳤고 그 과정에서 이듬해 3월 동아일보에서 130여명, 조선일보에서 33명의 언론인이 펜을 빼앗기고 거리로 쫓겨났습니다. 해직 후 50년 세월이 흘렀지만, 기자들은 아직도 언론사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자협회보는 10·24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을 맞아 자유언론을 위해 분투하다 해직된 기자들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1988년 5월15일자 한겨레신문 창간호 1면.

1987년 9월1일 종로구 안국빌딩에 한겨레신문 창간사무국이 차려지고, 창간기금 모금도 시작되었다. 얼마 후, 창간사무국으로 일터를 옮긴 나는 모금 일로 임재경 부사장과 함께 장덕진 회장을 만나기도 했다. 액수는 기억나지 않은데, 기금 납입자로는 임 부사장 명의를 빌리기로 했다. 이 모금 때 ‘창간 주주’인 김대중 평민당 총재는 5000만원을 직접 전달했다.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기부금도 아마 비슷한 액수였을 것이다.

창간을 앞둔 어느 날 심채진 편집부장(조선투위)이 부르더니 창간호 1면에 실을 백두산 사진을 보여주며 캡션을 써달라고 했다. 1988년 5월15일자 한겨레신문 창간호 1면에 실린 ‘6천만의 그리움 끝이자 희망이 시작 백두산’이라는 표제의 사진이다. 물론 곧바로, 끙끙대며 썼다. 다시금 돌이켜보아도 가슴 벅차진다. 사진 설명은 “백두산 천지, 그 넘쳐흐르는 맑은 가슴은 43년 넘어 삭이고 또 삭이는 우리들 그리움의 끝이자 희망의 시작이다. 한라산 백록담이 4천만의 것이 아니듯, 백두산 천지도 2천만의 것이어서는 안 된다. 6천만의 것이어야 한다. 한라와 함께 삼천리를 끌어안고 있는 백두는 우리더러 백두와 한라가 뜨거운 심장으로 용트림한 ‘그날’을 앞당기라고 몸부림치고 있다”로 말문을 열고, 신동엽 시인의 시구(詩句)를 슬쩍 비틀어 “이제 백두산 천지를 보되, 모오든 껍데기와 쇠붙이가 없는 한반도를 한눈에 보아야 한다”로 마무리지었다.

임재경 부사장 겸 논설주간이 논설위원실로 불러 문화부장은 오래 하지 못했다. 난생 처음 쓰는 사설인데다가 노후한 인쇄기 탓에 마감시간마저 빨라 꽤나 애를 먹었다. 한쪽 구석에 칸막이가 쳐진 책상 앞에서 줄담배를 피우며 썼다. 논설간사 김종철 위원이 논설회의를 주재하고 나서도 자판을 두드리며 댓바람에 써내는 것을 보고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논설위원실에는 이인철, 권근술 선배도 있었다. 소설가 최일남 선생, 한국노동사회연구소장 김금수, 한국일보 출신의 한신대학교 교수 정운영, 박호성 서강대 교수, 그리고 창간사무국 고문 변호사 박원순 변호사가 비상임논설위원으로 일했다. 논설회의에 부지런히 참석한 ‘박변’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다. 법률적인 접근이 필요한 꼭지가 걸리면 대놓고 전화를 걸어 자문을 구했다. 그는 언제나 ‘자동 구술’로 술술 풀이해 주었다. 열심히 메모한 뒤 약간의 살을 붙이면 ‘만사 해결’이었다. 다소 까다로운 주제를 쓸 때면 자주 도움을 받았다.


1988년 5월5일 서울 양평동 한겨레신문 사옥에서 열린 윤리강령 선포식 직후 윤리강령에 서명하고 있다. 오른쪽 맨 앞이 이종욱.

어느 단체, 어느 회사에나 파벌은 어김없이 존재한다. 한겨레도 예외는 아니었다. A파, B파로 나뉘었는데, A파는 DJ(김대중) 지지, B파는 YS(김영삼) 지지로 분류되었다. 영·호남 지역감정에서 헤어나지 못한 셈이다. 이인철, 김종철 선배는 A파, 권근술, 성유보 선배는 B파로 간주됐다. 나는 경상도(경북) 출신인데도 A파에 속해, 애꿎은 오해를 사기도 했다. 우리는 공식적인 회식 외에는 식사나 술을 함께 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태를 견디지 못한 나는 결국 사직하기로 마음먹었다. 속앓이가 심해 홍대입구역 인근의 정내과에서 검사를 받았더니 위염이라고 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지내던 중 문화일보에 근무할 때 정기 건강검진에서 위암 초기임이 밝혀져 절반 이상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다.

내가 그만두자 이인철 선배와 김근 위원이 동반 사직했다. 우리는 사직서를 제출하기에 앞서 1991년 1월5일 ‘다시 태어나야 할 겨레의 신문’이라는, 성명서 비슷한 글을 발표했다.


안국빌딩 창간사무국에서 1988년 1월 열린 새신문 편집회의. 왼쪽 셋째부터 시계 방향으로 임재경, 성유보, 박우정, 작은 이종욱, 권근술, 신홍범. (앞줄 왼쪽은 창간되면서 여론매체부를 맡았던 이기중 선배인 듯.) /이종욱 제공

“힘으로 몰아붙여 모든 것을 기정사실화하면 그만이라는, 본질적으로 군사문화적 사고행태가 어느 사이에 한겨레신문의 조직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 조직분열을 계속할 경우 한겨레신문은 민주화와 통일의 바다를 향한 항해를 멈추고 머지않은 장래에 파선할지도 모른다. (…) 불합리한 인사안을 기획하고, 그 인사안을 고집하며 편집국의 분위기를 편집권 독립이라는 외피를 입혀 반지성적이고 반이성적으로 몰아간 그들이 창간 당시부터 존재했던 오래된 파벌이었다”라고 주장한 원고의 초안은 김근 위원이 작성했다. 셋이 머리를 맞대고 수정해나갔다. 상근이사였던 조영호 위원도 가끔 합석했다.

우리가 느닷없이 사직하자, 편집국 기자들은 모임을 갖고 우리들의 복직을 요구했다. 그들의 뜻에 따라 복직하고 나서, 나는 홀로 ‘초지일관’ 재차 사직했다.


‘튀는 기자’가 그립다

이듬해, 집에서 쉬고 있던 나에게 국흥주 위원이 전화를 걸어왔다. ‘자리가 났으니 빨리 오라’는 것이었다. 당시 문화일보 이규행 사장은 촌지 받는 기자와 기사 표절하는 기자는 발각 즉시 자른다고 공표했었는데, 연예문화부장이 발각되어 자리가 생긴 것이다. 나는 이력서도 쓰지 않고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나중에 미디어부장으로 옮겼다).

지난 5월15일 부처님 오신 날, 입사 동기생 홍종민, 김진홍 위원의 뒤를 따라 떠난 국흥주 위원의 장기 입원도 발단은 업무 과다였다. 이규행 사장은 서울상대 직계 후배인 데다, ‘다재다능’하기까지 한 그에게 정경부장(편집부국장)의 업무 외에 국흥주 칼럼에 더해 사설까지 쓰게 했다. 그는 ‘차붐’(차범근)의 딸에게는 하나, 아들에게는 두리, 세찌라는 한글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으며, 이것이 널리 회자되기도 했다


1988년 4월13일 민족문학작가회의(한국작가회의 전신) 주최로 열린 제1회 민족문학교실 행사장에서 수강생들과 기념촬영을 한 문인들. 앉아 있는 왼쪽부터 강은교, 조태일, 이종욱, 김명수, 이기형 시인. 뒷줄 오른쪽부터 강형철, 민병일 시인, 한 사람 건너 이흔복, 이재무 시인. /이종욱 제공

나는 1993년 11월 종합문화부로, 이듬해 11월에는 한국일보 출신의 민병택 선배와 함께 논설위원실로 옮겼다. 1998년 문화일보를 그만둔 뒤, 2000년부터 2006년까지 언론중재위원회 중재위원으로 일했다. 언론중재 2004년 가을호에 실린 <위원칼럼> ‘튀는 기자가 없다’에 국흥주 위원을 언급한 대목을 다소 길게 인용한다.

“튀는 기자로 가장 기억에 남은 사람은 신문사 입사 동기인 국흥주 기자이다. 그는 동아일보 체육부 기자로 일할 때, 당시 인기 절정이던 고등학교 야구와 월드컵 축구에 관한 장기 기획기사를 박학함과 독특한 문제, 그리고 열의로 버무려 동아일보가 그야말로 ‘낙양의 지가’를 올리게 했다. 혹시나 해서 인터넷을 검색했더니, ‘동아사태’ 이후에 동아일보사에 입사한 김기만 기자가 대통령 공보비서관 시절 월간 ‘시민체육 ’ 2002년 6월호에 쓴 글이 있다. ‘고교 시절 동아일보에 국흥주 기자가 월드컵 열전을 연재할 때는 너무나 재미있어서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제일 먼저 도서관에 뛰어올라가 신문을 읽고 또 읽고 나중에는 노트에 기사를 베껴 집에 가 외우다시피 하곤 했다.’

일간지 지면이 8면 체제이던 시절인 74년 1월부터 6월까지 무려 80회에 걸쳐 상당히 튀는 연재물 ‘월드컵 축구 발자취’를 게재했던 동아일보는 발행 부수를 대폭 늘려준 기자를 1975년 3월에 130여명의 동료 언론인과 함께 내쫓았으니….”

뒤이어 튀는 발행인으로 문화일보 이규행 사장을 언급한 뒤, “튀는 기사를 읽고 싶다. 튀는 기자를 만나고 싶다”는 말로 마무리 지었다. 그런데 요즈음, 튀는 기자는커녕 그야말로 ‘기레기’ 천지다. 이를 입증하는 해프닝이 최근에 벌어졌다. 윤석열 대통령이 5월24일 대통령실 출입 기자들을 용산 대통령실 잔디마당에 초청해 만찬을 했는데, 약 200여명의 기자에게 직접 끓인 김치찌개를 국자로 퍼서 직접 나눠줬다. 이때 기자들의 표정이란?! 마침 똑같은 심정을 피력할 글이 있다.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에 김성재 에디터가 쓴 “‘김치찌개 더 주세요’라는 기자에 국민이 느낀 모욕감”(2024.05.26.)이다.

“그러나 이 행사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 힘들다. 불편하다. 우선, 음식을 나눠준 쪽이 이 나라 최고 권력자요 국정운영 책임자인 대통령이고, 그 음식을 ‘더 주세요’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라며 받아먹은 쪽이 그를 감시해야 할 기자들이어서 그렇다. 최고 권력자가 자신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기자들을 불러 야외 잔디밭에서 바비큐 파티를 열었고, 수많은 기자들이 이 파티에 우르르 참석해 최고 권력자가 배식한 음식을 받아먹으며 박수를 치고 만찬을 즐겼다. 권력자와 권력 감시자의 관계가 정상적인가? 이게 권력을 감시하는 기자의 모습인가?”


2005년 7월20일 인민문화궁전 대회의실에서 열린 ‘남북작가대회’ 만찬식장에서 조선작가동맹 소속 문인들과 함께. /이종욱 제공

2000년에는 김정환 사무국장의 권유로 민족문학작가회의(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후신, 현 한국작가회의의 전신)의 이사로 등재되어, 2002년까지 이따금 회의에 참석했다. 김정환 시인은 내가 동부이촌동 입구의 강변에 있는 복지아파트에서 거주할 때, 김사인 시인과 함께 소주병을 들고 가끔 들렀다. 김정환 시인은 당시 서부이촌동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서울대학교 학생운동사에서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는 ‘5둘둘 사건’으로 쟁쟁한 명성을 떨친 후배들 앞에서 어설픈 ‘김수영론’을 펼쳤던 것을 돌이켜보면 다소 쑥스럽다.

2005년 3월31일 언론중재위원회는 정기총회를 열어 조준희 전 사법개혁위원장을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나는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조 위원장은 ‘민변’ 출신으로 ‘보도되지 않은 민주인권사건일지’ 사건의 변호인단 가운데 일원이었으며, 이부영 선배를 비롯한 동아투위 위원 여러 명과도 친분이 있었다. 그래선지 우리 두 사람은 합이 잘 맞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사무총장을 내부에서 발탁하자고 건의하자 조 위원장은 ‘그거 참 좋은 생각’이라고 즉각 받아들인 것이다. 그때까지 사무총장은 청와대에서 점지해 낙하산으로 내려왔는데, 실제로 문화일보에서 함께 근무했던 후배가 이때의 ‘낙하산’이었다. 딱히 그 후배가 아니라 누구더라도 거부했을 것이다. 나중에 우연한 기회에 적지 않은 중재위원들 중에서 나를 부위원장으로 밀어올린 사람이 문화체육부 정동채 장관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한겨레신문 창간 멤버로 정치부 차장, 여론매체부장, 논설위원을 지낸 한겨레 후배였다. 그러니까 나 역시 ‘낙하산’이었던 것이다.


만경대 혁명 유적지의 김일성 생가 앞에서 안내원들과 함께. 왼쪽부터 이종욱, 정용국. 신경림, 김창규 시인, 백낙청, 고은, 한 사람 건너 아동문학가 이가을. /이종욱 제공


장군봉 아래에 모여 ‘통일문학의 새벽’ 열어

2005년 7월20일부터 25일까지 평양, 백두산, 묘향산에서 ‘6·15 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민족작가대회’가 열렸다. 대회 참석자들은 7월20일 오전 인천공항에서 북측의 고려항공 전세기 직항편을 이용해 평양 순안비행장으로 출발했고, 25일 오후 고려항공 전세기 직항편으로 귀국했다.

‘남북작가대회’에는 남측 문인 98명과 북측 문인 100여 명이 참가했다. 남측 대표들은 숙소인 고려호텔에서 “6·15공동선언실천을 위한 민족작가대회 환영연회에 초대합니다. 장소 인민문화궁전, 날짜 2005년 7월 20일 19시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라는 내용의 초대장을 받았다. 인민문화궁전 대회의실의 만찬식장에서 백낙청 6·15 공동행사 준비위 남측 상임대표는 “분단의 엄중한 경계를 지우고 하나의 겨레말 작가가 한자리에 모였다. 이 대회는 분단에 길들여졌던 문학적 상상력을 복원하고 민족의 상처를 치유하며 통일의 시대 우리 문학의 새로운 성취를 향한 중요한 자리”라고 역설해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았다.

남쪽 대표들은 21일 만경대와 쑥섬혁명사적지, 만경대학생소년궁전, 주체사상탑, 개선문, 평양 지하철 등 평양시내 주요 시설들을 둘러보았다. 22일에는 삼지연 및 백두산지구를 둘러보았다.

7월23일 새벽 5시 남과 북, 해외문인 150여명이 백두산 장군봉 아래 개활지에 모여 ‘통일문학의 새벽’을 열었다. 우리는 삼지연 베개봉여관에서 새벽 2시30분에 버스를 타고 올라갔다. 흰 구름 아래로 흰 구름이 보였다. 천지에 도착하니 맵찬 바람이 몰아쳤다. 20일 인민문화궁전에서 채택한 공동선언문을 낭독하는 것으로 문을 열었다. 은희경 소설가(김상익 기자의 부인)가 진행을 맡았다. 고은 시인이 베개봉여관에서 쓴 시 ‘다시 백두산에서’를 낭독했다. 온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추워서 타고 왔던 버스로 돌아가고 싶었는데 마침 울산의 정일근 시인이 따뜻한 음료를 주어 고맙게 마시며 몸을 풀었다. 7월24일 묘향산 보현사를 둘러보고 ‘폐막 연회’에 참석했다.


헤이리에서 ‘헌책방 카페’ 운영

언론중재위원회 회의에는 2006년까지 참여했다. 파주의 예술마을 헤이리에 입주한지 3년 지난 때였다. 강복영 서예가 다음인, 두 번째로 입주했다. 막상 헤이리를 조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김언호 선배보다 먼저였다.

지금은 헤이리에 카페, 레스토랑을 비롯한 다양한 업소들이 번거로울 정도로 많아졌지만, 당시 북카페 반디 주변은 허허벌판이었다. 앞마당의 테이블들은 오래 전에 치워졌고, 플라타너스는 여전히 서 있다. 이 나무를 소재로 ‘마당의 플라타너스가 이순을 맞은 이종욱에게’(『창작과비평』 2005년 봄호)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


‘파주 명사의 서재’에서 ‘다섯 번째, 파주의 명사’로 선정되었을 때의 포스터 사진. (교하도서관 소개 글. https://gyohalib.tistory.com/370)

북카페 반디는 ‘헌책방 카페’라는 슬로건을 내건 덕분인지 책을 살펴보고, 가끔은 구입하는 손님들이 차를 마시는 손님보다 많다. 여러 해 전부터는 알라딘의 온라인중고 사이트을 통해 주문이 들어오면 책을 찾아 보내는 ‘헌책방지기’로 소일하고 있다. 내가 읽고 싶은 책들은 교하도서관에서 빌려 본다. 2014년 7월에는 교하도서관에서 마련한 ‘다섯 번째 파주 명사의 서재’에 선정되어, 포스터, 추천도서 등과 함께 전시되는 영광을 누렸다.

고은 시인의 ‘만인보(萬人譜)’에는 안종필, 안성열 위원에서 정연주 위원에 이르기까지 동아투위 위원이 다수 등장한다. 15권에는 윤수경 여사(동아투위 초대 총무 박종만 위원 부인)도 있다. 14권에 실린 ‘이종욱’의 전문은 아래와 같다.

산양인가 하면 아니다
옛 연금술사의 도제인가 하면 아니다
막 시를 쓰기 시작했다
기자 노릇 그만둔 뒤

팔레스타인 시인들의 시 번역하고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시 번역했다

제3세계 문학으로 향한 그의 고즈넉한 눈

술자리에서
차츰
술꾼들의 소리 높아지는데
그는 가만히 처음 그대로였다

어쩌다가 웃을 일도 아닌데 싱긋 웃어 보이고
배꼽을 잡고 웃을 일이나
비분강개로 술상머리 내리칠 일에도
그는 가만히 처음 그대로였다

그렇다고 신선인가 하면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는 구름 쓸어낸 하늘의 한쪽이었다
안개 걷힌 바다 복판의 파도 골짜기였다

* [1974, 그 후 50년] 언론사로 돌아가지 못한 기자들 이야기 시리즈는 2024년 3월 22일부터 한국기자협회뉴스타파에 매주 금요일자로 동시 게재되고 있습니다. 이글은 2024년 7월 5일(금) 한국기자협회에 게재된 글 전문입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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