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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욱 회고록' 출간하자 "날 찾는 현상수배 전단이…"[1974, 그 후 50년] 언론사로 돌아가지 못한 기자들 이야기(13) 정동익 동아투위 위원
  • 관리자
  • 승인 2024.06.24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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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10월24일 발표한 ‘자유언론실천선언’이 올해로 50주년을 맞았습니다. "우리는 자유언론에 역행하는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다"는 선언문에 따라 기자들은 자유언론 실천운동을 펼쳤고 그 과정에서 이듬해 3월 동아일보에서 130여명, 조선일보에서 33명의 언론인이 펜을 빼앗기고 거리로 쫓겨났습니다. 해직 후 50년 세월이 흘렀지만, 기자들은 아직도 언론사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자협회보는 10·24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을 맞아 자유언론을 위해 분투하다 해직된 기자들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정동익 동아투위 위원이 1997년 4월22일 열린 제4회 언론학교 입학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1988년 민주언론운동협의회(언협) 2대 회장을 맡은 그는 1991년 언론학교를 처음으로 열었다. /정동익 제공


우리 동아투위는 1975년 동아일보사에서 강제 축출된 이래 줄곧 재야 민주인사들과 호흡을 함께 해왔다. 동아투위 위원들은 언론인으로서 평소에 각계 인사와 폭넓은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재야 민주세력들을 이어주는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70년대와 80년대 중반까지 독재정권의 탄압이 심해 재야인사들의 공개적인 집회는 거의 없을 때였다. 그런 암흑의 시절 동아투위 모임이 유일한 민주인사들의 공개적인 집회였다. 긴급조치가 발동된 유신체제 아래서도 동아투위 행사는 거르지 않고 지속됐다. 재야 민주인사들은 동아투위 모임에서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묻고 동지적인 결속을 다짐하곤 했다. 동아투위는 매년 10·24자유언론실천선언 기념식과 송년회, 3월17일 투위 결성식을 함께 모여 기념하였다.

그때마다 문익환·계훈제·박형규·이해동·백기완 등 재야인사, 이돈명·한승헌·황인철·홍성우·조준희 등 민주 변호사들, 성래운·리영희·김병걸·이우정·변형윤 등 해직교수들, 고은·남정현·이호철·신경림 등 문인들, 조선투위 동지들, 김한림 여사 등 구속학생 학부모들, 나병식·김병곤 등 제적된 학생들이 장내를 가득 메웠다. 이른바 반체제 인사들 300명이 넘게 한자리에 모이니 공안 기관원들이 신경을 곤두세웠다.


1979년 6월10일 서울 천호동 베다니집에서 열린 동아투위 가족 동반 야유회에서 정동익 동아투위 위원이 사회를 보고 있다. 정동익은 서울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사회를 잘 본다고 ‘정동익은 사회주의자’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자유언론실천재단 제공


동아투위는 모임 때마다 성명서를 발표하고 자유언론 실천과 민주회복을 주창하였다. 모임의 전반부는 권력에 무릎 꿇은 제도언론을 비판하는 성토장이 됐고 후반부는 모두의 억눌린 마음을 달래주는 여흥과 화합의 자리로 이어졌다. 모임 때마다 사회는 내가 도맡아 보았다. 그래서 서울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사회를 잘 본다고 ‘정동익은 사회주의자’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85년 민주화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결성될 때에도 재야 민주인사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던 동아투위 모임이 한몫을 하였다. 그 덕에 나는 민통련 초대 감사, 서울민통련 부의장 감투를 쓰고 재야인사의 길을 걷게 됐다.


정동익 동아투위 위원이 메가폰을 들고 시위를 이끌고 있다. /정동익 제공


동아투위 모임 사회 도맡아 보다 재야의 길로

1982년 서울 명동성당 문화관에서 가진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기념식이 끝나고 뒤풀이 장소에서 전주고 후배라면서 권형택·윤석인 등 제적학생들 몇이 인사를 청해왔다. 우리는 시국에 대해 얘기 나누며 고향 전북의 민주인사들에 대한 지원과 관심이 조직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 지역을 기반으로 한 모임은 당국에서도 함부로 다루지 못할 것이라는 기대 아래 우리는 회원 규합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다음 해 5월12일, 서울 혜화동에 있는 중국집 진아춘에서 한승헌 변호사와 고은 시인 등 80여명의 회원들이 모여 전북민주동우회(전민동) 창립대회를 열고 초대회장에 정동익, 총무에 소병훈을 선임하였다. 창립 이후 매달 첫째 수요일에 월례모임을 갖기로 하였는데 40년이 넘도록 이어 오고 있다. 전민동 회원들은 6월 민주항쟁에서 최근의 촛불투쟁에 이르기까지 창립 때 초심을 잃지 않고 꾸준히 민주화운동에 참여해 오고 있다.

나는 동아일보 해직 후 2년 가까이 놀다가 대한간호협회에서 창간한 ‘간협신보’에 서권석 선배와 함께 입사하게 됐다. 그런데 중앙정보부에서 가만히 있질 않았다. 협회장에게 바로 해고하라고 압력이 들어왔다. 이에 분노한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떠들어 댔다.

“내가 단지 먹고 살기 위해서 들어간 직장인데 그것도 못하게 한다면 광화문서 분신이라도 해야겠다.” 얼마 후 중정 직원이 회사로 찾아 왔다. 중간에 오해가 생겨서 그런 모양인데 없던 일로 하자고….


사월혁명회 상임의장을 맡고 있는 정동익 동아투위 위원이 2016년 4월 4·19혁명 56주년 기념식에서 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다. /정동익 제공


추석 전전날 '김형욱 회고록' 전국 서점에 뿌리고 잠적

간협신보에서 5년간 편하게 직장 생활을 했지만 진로에 답답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언론을 대신할 수 있는 출판 쪽에서 활로를 찾기로 하였다. 김승균씨의 ‘일월서각’ 출판사 사무실에 책상 하나를 빌려 ‘도서출판 아침’을 차렸다.

첫 번째 낸 책이 송건호·임채정·김태홍 등 해직언론인 10명이 쓴 ‘민중과 자유언론’이었다. 언론통제 실상과 언론운동이 나아갈 방향 등을 제시한 최초의 언론운동 지침서였다. 이 책에서 전국의 해직 언론인 명단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출판사를 차린 지 1년도 안 됐는데 깜짝 놀랄만한 원고가 입수됐다.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목숨과 맞바꾼 문제의 회고록이 내 손에 들어온 것이다. 며칠 후 중앙정보부의 후신인 국가안전기획부 6국에 근무하던 고교 동창이 난데없이 사무실로 찾아 왔다. 정동익이 김형욱 회고록을 입수했는데 동창생인 자기 손에서 조용히 소리 안 나게 처리하라고 해서 왔다는 것이다.

나는 문제가 되면 법정투쟁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친구는 “우리 회사와 부딪쳐 좋을 거 없다. 제발 부딪치지 마라”고 경고하고 갔다. 국가안전기획부에서 출판사 전화를 도청할 게 뻔한데 과연 출판이 가능할 것인지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동익 동아투위 위원은 1988년 6월 민주언론운동협의회(언협) 2대 회장을 맡았다. 그는 "폐허에 깃발 하나 들고 선 기분이었다"고 했다. /정동익 제공

인쇄소, 제본소, 지업사 등 출판 관련 업소들이 많은데 한군데만 회고록 관련 전화가 와도 들통나는 거 아닌가. 나는 고민 끝에 친구에게 500만원을 빌려 관련 업소들에 선금을 주며 회고록에 관한 이야기는 전화하지 말고 직접 만나 처리하기로 약속했다.

가슴을 졸이는 가운데 드디어 책이 완성됐다. 추석 전전 날 전국 서점에 수천 부를 쫙 뿌리고 나는 줄행랑을 쳤다. 안기부에서 경고까지 하였는데도 책이 나왔으니 괘씸죄까지 붙어 즉시 체포 전담반이 편성되고 현상수배령이 떨어졌다. 현상금이 20만원이라 했다.

한번은 김장수란 친구 사무실에 숨어 있는데 경찰들이 덮쳐왔다. 마침 밖에 나갔다가 그날따라 기분이 묘해 바로 들어가지 않고 멀리서 지켜보니 검은 경찰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 친구는 그날 잡혀가 엄청 두들겨 맞고 풀려났다.

1986년 봄이 되자 헌법 개정운동으로 정국이 요동쳤다. 공안당국은 시국에 대처하느라 김형욱 회고록 같은 건 안중에 없는 것 같았다. 나는 관할 마포서장에게 자수하겠노라고 직접 통고하고 내 발로 서장실로 찾아갔다.

그 시국에 김형욱 회고록이 사회문제화 되는 것을 꺼린 듯 즉결심판에 넘겨져 구류 열흘을 선고받고 유치장에 수감돼 있는데 나병식 등 운동권 출판사 사장 대여섯 명이 면회를 왔다. 모두 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2010년 5월19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 이해학 이사장 외 602인이 '6월항쟁 정신으로 국민주권 되찾기'를 제안하고자 마련한 기자회견에서 정동익 사월혁명회 상임의장이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출판탄압 맞서 한국출판문화운동협의회 결성

그 당시 정부는 출판탄압을 한층 강화하고 있었다. 서울 시내 대학가 부근 서점 14곳을 압수수색, 도서 51종 1200여부를 압수하고 서점 주인 6명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류형을 선고하였다.

‘풀빛’, ‘일월서각’, ‘거름’ 등 많은 출판사가 압수수색을 당하고 출판인들 연행이 줄을 이었다. 이러한 출판탄압에 대처할 투쟁조직 결성을 논의하면서 나를 면회 온 것이었다. 나는 출감하자마자 출판운동 조직 건설에 참여했다.

마침내 1986년 6월21일 서울 광화문 한글학회 회관에서 한국출판문화운동협의회(한출협)가 출범했다. 나와 ‘석탑출판사’ 최영희 대표가 공동회장으로 선출되고 사무국장에 유대기씨가 선임됐다. 한출협은 출판사에 압수수색이 들어오고 출판인이 연행될 때마다 항의 집회를 갖고 공동대응에 나섰다.

80년대 권력에 통제된 언론이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할 때 출판은 언론을 대신해 권력을 비판하고 비리를 들춰내며 학생·노동·농민운동에 필요한 이론적 자양분을 제공하였다. 그리고 해직교수, 제적된 학생들에게 일시적 일자리와 활동자금을 제공하는 역할도 하고 있었다. 출판운동 과정에서 구속 기소된 출판인 수는 약 100여명, 판금서적 300만권에 달한다. 단일부문 운동 중 그 피해 정도가 가장 심했다. 나도 출판과 관련 두 번 구속돼 옥인동 대공분실과 홍제동 대공분실을 거쳐 서대문구치소와 의왕구치소 신세를 진 일이 있다. 1987년 6월 항쟁 때는 내가 출판 분야를 대표해서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로 참여하였다.


‘언협’ 주력부대는 모두 한겨레로 떠나고

1988년 5월 한겨레신문이 창간될 때 민주언론운동협의회(언협) 주력부대는 모두 한겨레신문 창간 멤버로 떠나고 ‘말’지 실무자들만 일부 남아 언협을 지키고 있었다. 그 당시 언협은 ‘말’지 발간이 본업이었고 지금의 시민언론운동이라는 개념은 아직 없을 때였다.

그해 6월께 한겨레에 가 있던 신홍범씨로부터 언협 결정사항이라며 언협을 맡아달라는 통고를 받았다. 나는 졸지에 송건호 선생님 뒤를 이어 언협 2대 의장을 맡게 됐다. 물론 취임식도 없었다. 폐허에 깃발 하나 들고 선 기분이었다.

우선 최장학·황헌식·노향기·정상모·심재택·조양진씨와 실행위원회를 다시 꾸리고 공개채용 시험을 통해 ‘말’지 기자들을 보강하였다. ‘말’지를 내 이름으로 출판 등록하여 서점에서 공개적으로 판매토록 했다. 말지는 5만부를 인쇄하는 매체로 성장, 재정적으로도 여유가 생겼다.

대학신문 기자 출신들을 간사로 영입하면서 언협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1991년 시민들에게 언론의 중요성을 교육시킬 언론학교를 개강한 것이다. 송건호·리영희·이상희·김중배·손석희 선생 등 막강한 강사진들이 흔쾌히 강의를 맡아주었다.

제도언론의 왜곡 편파 보도에 분노한 시민 학생들이 언론학교를 매번 가득 메웠다. 나는 언론학교 교장으로서 수강생들에게 “언론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 언론의 주인인 국민이 나서서 언론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저녁 강의가 끝나면 꼭 뒤풀이를 했는데 우리 간사들이 각 분반에 들어가 소주잔을 나누며 언협 회원 가입을 독려하였다.

나는 전국의 대학과 도시들에서 시국강연을 하며 국민언론운동의 중요성과 언론운동 조직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다녔다. 대학생들 앞에서 강연할 때는 왜 불쌍한 전경들에게 돌멩이를 던지느냐, 독재정권을 떠받치고 있는 조선일보에 돌을 던지라고 힘주어 말하기도 하였다.

1993년 3월5일 언협 제7차 총회에서 나는 언협이 해직언론인 단체에서 일반 시민들과 함께 하는 국민언론운동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선포하였다. 언협 최고 의결기구인 중앙위원회를 해직언론인과 ‘말’지 전·현직 상근자, 시민 등으로 구성키로 결정한 것이다.

이 결정이 있었기에 오늘날 민주언론시민연합이 회비 내는 회원만 5000명이 넘는 명실상부한 시민언론운동의 본산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내가 팔십 평생을 살면서 이때처럼 열심히 뛰었던 적이 없는 것 같다.


정동익 동아투위 위원.


민주화·통일 위해 묵묵히 한 길을

나는 민통련에 참여한 이래 전민련, 전국연합, 지금의 한국진보연대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재야단체를 떠난 적이 없다. 크게 운동에 기여한 건 없지만 우리 민족의 숙원인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머릿수 하라도 보태자는 심정으로 묵묵히 한길을 걷고 있다.

내가 수십 년간 변절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처 천양선씨 덕이 크다. 어려운 고비를 많이 넘겼지만 한 번도 나의 기를 꺾은 적이 없다. 정말 고맙다. 그리고 매번 장학금을 받아 대학 등록금 걱정을 하지 않게 해준 유현·유미에게도 고마운 마음 전하고 싶다.

말이 나온 김에 선친이신 정희남씨 얘기를 하고 싶다. 나는 부자가 해직기자라는 진기록을 갖고 있다. 부친은 박정희 정권이 1972년 언론을 장악하기 위해 언론통폐합 조치를 강행할 때 전북일보에서 강제 해직을 당하셨다. 부친께서는 강직한 분으로 소문난 전북 언론계의 최고 원로이셨다. 언론인은 항상 약자의 편이 돼야 한다며 나에게 억강부약(抑强扶弱) 정신을 심어 주신 분이다. 자식이 언론인으로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구질구질하게 살지 않고 떳떳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하늘에서 미소를 짓고 계시리라 믿는다.

* [1974, 그 후 50년] 언론사로 돌아가지 못한 기자들 이야기 시리즈는 2024년 3월 22일부터 한국기자협회뉴스타파에 매주 금요일자로 동시 게재되고 있습니다. 이글은 2024년 6월 21일(금) 한국기자협회에 게재된 글 전문입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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