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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야, 군사작전 중인데 어떻게 알고... 공비와 내통했나"[1974, 그 후 50년] 언론사로 돌아가지 못한 기자들 이야기(3) 윤석봉 동아투위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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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4.04.08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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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10월24일 발표한 ‘자유언론실천선언’이 올해로 50주년을 맞았습니다. "우리는 자유언론에 역행하는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다"는 선언문에 따라 기자들은 자유언론 실천운동을 펼쳤고 그 과정에서 이듬해 3월 동아일보에서 130여명, 조선일보에서 33명의 언론인이 펜을 빼앗기고 거리로 쫓겨났습니다. 해직 후 50년 세월이 흘렀지만, 기자들은 아직도 언론사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자협회보는 10·24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을 맞아 자유언론을 위해 분투하다 해직된 기자들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지난 2월3일자 조간신문 부음란에서 이균범 전 전라남도 도지사의 별세 기사를 보고 아침 일찍 서울대 병원 장례식장을 찾았다. 문상을 마치고 나오자 유족들이 “고인과 어떠한 인연으로 이른 아침 조문을 오셨냐”고 묻기에 “흑산도에 침입한 북한무장간첩 15명 소탕작전 인연”이라고 간단히 대답했다. 그러나 고인은 내 기자 생활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고마운 사람이었기에 그분과 관련한 끈질긴 인연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1969년 6월 흑산도 무장간첩 사건 당시 무장간첩과 교전 중 실탄이 떨어져 동굴 속에 피신한 한 전투경찰관을 공수특전단이 구출하는 장면. /윤석봉 제공

지금부터 꼭 55년 전인 1969년 6월14일, 공수 특전사 부대원들이 엿장수와 고물장수로 변장하고 흑산도로 향했다는 연락을 동아일보 목포주재 최건 기자로부터 받았다. 나는 회사의 출장 명령을 받고 황급히 밤 열차로 15일 아침 목포에 도착하여 다시 9시간이나 걸리는 여객선을 타고 흑산도에 들어갔다. 16일 아침 흑산도 중심지를 돌아봐도 군사작전 같은 긴박한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나 하고 흑산도 지서로 가보았다. 목포경찰서 소속인 흑산도 지서는 분위기가 확 달랐다.

출입이 통제된 지서 안에는 작전 지휘부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밖에서는 사복 차림 병사 2명이 무전기를 등에 메고 송수신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나는 군사작전을 직감하고 상황 파악을 위해 지서 안으로 들어갔다.

나를 본 작전지휘관, 중앙정보부 3국장, 현역 육군 소장은 “너 누구야? 군사작전 중인데 어떻게 알고 왔냐? 공비와 내통한 것 같다”라며 “목포서장, 저놈을 잡아넣어!”하고 소리쳤다. 내게 다가온 목포서장에게 기자 신분증을 제시하자 목포서장은 ‘조금 떨어진 곳으로 얼른 나가라’고 눈짓을 했다.

삼엄한 작전 지휘부 주위에서는 사실상 취재가 어려웠다, 특히 사진 취재는 더 불가능하다는 것을 직감하고 얼른 밖으로 나와 신발 가게에서 운동화를 사 신고 비상식량과 음료수를 준비해 흑산도에서 제일 높은 해발 272m 칠락산 정상으로 뛰었다. 여름철 칠락산은 나보다 더 크게 웃자란 억새가 바닷바람에 춤을 추고 있었다. 무장 공비가 어디에서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홀로 산 정상으로 향하는 것은 사실 두렵기도 했다.

산 정상에 오르자 매복 작전 중이던 경찰관 2명이 경계의 눈초리로 다가오기에 나는 신분을 밝히고 갖고 온 먹거리를 나누었다. 이들과 환담하고 있을 때 해안가에서 여러 발의 총소리가 들렸다. 동굴에 숨어 있던 무장공비들이 해안가를 수색하는 군경 수색대원들에게 선제공격을 시작했다. 나는 해안가로 단숨에 뛰어 내려갔다. 몇 시간의 군경합동작전으로 북한 무장공비 15명은 일망타진되었다.

이한열군이 1987년 6월9일 연세대 정문 앞에서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7월5일 사망했다. 입관 전 이한열군 시신 앞에서 어머니와 누이 등 유가족이 오열하고 있다. /윤석봉 제공

성공적인 군사작전과 취재는 끝났는데 아날로그 시대라, 외딴섬에서 서울 본사로 필름을 신속하게 송고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선박과 열차를 이용하면 약 2일이 소요되는 상황이었다. 흑산도 지서를 돌아보니 내일 아침 작전지휘부를 태우고 목포로 갈 13인승 공군 헬리콥터가 마침 대기하고 있었다. 조종사를 만나 상황을 설명하며 간곡한 협조를 부탁했고 겨우 탑승 승낙을 받았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아침 일찍 헬리콥터 제일 뒷좌석에 몸을 낮추고 앉아 이륙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작전 지휘부 13명이 탑승을 시작했는데 이균범 전남도경 경비과장이 서 있자 중앙정보부 3국장은 이균범 경비과장에게 탑승을 재촉했다. 나는 할 수 없이 밖으로 나와 “국장님 작전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제가 빨리 서울로 가서 승전보를 국민에게 알려야 합니다. 도와주세요”라고 동행을 애원했다.

작전 지휘관인 3국장은 “허허, 당신은 어지간히 속썩이는군, 지독한 사람이야”라며 “경비과장, 양보하겠나?”하고 물어보자 이균범 경비과장은 나를 향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균범 과장은 30분이면 갈 수 있는 헬기탑승을 나에게 양보함으로써 9시간이나 걸리는 연락선을 택했고 나는 신속하게 귀사할 수 있는 결정적인 협조를 받았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목포까지 단숨에 날아와 데스크에 특종을 보고하자 동아일보사는 보물처럼 아끼는 회사 전용 비행기인 세스나기를 목포로 띄웠다. 간혹 선배들이 회사 비행기로 항공 촬영할 때 뒷좌석에라도 한번 탑승해보기를 원했던 나는 그 선망의 세스나기를 혼자 타고 개선장군처럼 서울로 돌아왔고, 동아일보 지면에 대서특필 특종 사진들이 게재되었다.

1991년 4월24일 노태우 정부 규탄 집회 중 한 학생이 서울대 정문에 설치한 바리케이드에 불을 지르고 뛰쳐나오고 있다. /윤석봉 제공

1975년 3월 동아일보 자유언론실천 운동으로 강제 해직된 나는 1988년 12월10일 집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 국회 청문회 생중계를 시청하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TV 화면에 내가 특종한 흑산도 북한무장간첩 소탕작전 사진들이 등장했다. 평민당 이해찬 의원이 내가 촬영한 그 사진들을 제시하며 광주 시민 민주화 투쟁을 공수부대원들이 ‘양민들을 학살하고 환호하는 장면’이라며 당국을 맹공격하고 있었다.

이해찬 의원은 “중앙일보가 발행하는 월간중앙 1988년 3월호에 이 사진들이 실렸다”며 전두환 정권의 만행이 이렇게 지독했노라고 매섭게 몰아부쳤다. 동아일보의 특종사진이 어떻게 경쟁사인 중앙일보사 월간지에 게재되어 양민학살 사진으로 둔갑했는지 희한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많은 억측이 나돌았고 나도 검찰청에 불려가 진상을 밝혀야 했다.

뒤에 알고 보니 창설되자마자 큰 공을 세운 공수특전사는 이 작전을 특종 보도한 동아일보사를 찾아 김상만 사장에게 감사패를 증정했고 나에게도 명예 공수단원증을 수여했다. 그 자리에서 특전사는 흑산도 북한무장간첩 소탕작전 사진을 특전사 본부에 전시할 수 있도록 요청했고 김상만 사장도 그 청을 받아들여 내가 찍은 사진들이 특전사에 제공되었다.

1987년 7월2일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 일행이 유성환 의원을 서울구치소에서 면회하고 있다. 유 의원은 1986년 10월 국회에서 “우리나라의 국시는 반공보다 통일이어야 한다”는 등의 발언을 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윤석봉 제공

당국의 조사결과 1988년 2월 중앙일보사가 광주민주화 운동사진을 수집하자 공수특전사 공보실에 문관으로 근무하던 장○○가 특전사 본부에 전시되고 있던 그 사진들을 복사하여 넘긴 것으로 밝혀졌다. 이 소동은 결국 사진의 진실성 여부도 확인하지 않고 엉터리 제보에 놀아난 언론사의 웃지 못할 실수로 끝났지만 사진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고 동아일보사와 취재한 나는 물론이고 국회청문회 명예를 훼손한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나는 1975년 동아일보 자유언론실천 운동으로 강제해직돼 직장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심지어 외출까지도 감시를 받고 있었다. 그러다 1988년 하계 서울 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강제해직 10여년 만에 국제 통신사인 로이터 한국 특파원 기자로 채용되어 언론사에 복귀했고 매년 망월동 국립묘지 취재를 위해 광주를 방문했다.

윤석봉 동아투위 위원.

1993년 여름 전남지사로 부임한 이균범 도지사를 도지사실로 예방했다. 20여년 만에 만나 반갑게 맞아준 이 지사는 본인이 종로경찰서장으로 재직할 때 1975년 동아일보 자유언론실천 운동으로 해직된 130여명 기자들이 매일 아침 신문사 앞에서 도열집회 하는 일일 보고를 받았다며 당시 훌륭한 언론인들이 강제 해직된 상황이 매우 안타까웠다고 회상했다. 고 이균범 도지사님,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명복을 빕니다.

* [1974, 그 후 50년] 언론사로 돌아가지 못한 기자들 이야기 시리즈는 2024년 3월 22일부터 한국기자협회뉴스타파에 매주 금요일자로 동시 게재되고 있습니다. 이글은 2024년 4월 5일(금) 한국기자협회에 게재된 글 전문입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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