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경순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맹모닝 상담소. 오른쪽은 홍성남 신부.

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이라니!

한 생명이 태어나 50년이 지났다면 이른바 중년도 한참 지난 시간인데 이렇게 빨리 지나갔나 하는 생각이…. 아니, 한탄이!

역사적 소명, 언론의 책임 등등은 앞서 여러 선배들이 많이 쓰셨으니 나까지 보탤 필요가 없겠다. 그렇게 쫓겨나와서 동아일보사 건너편 국제극장(현 동화면세점) 골목 깊숙한 곳, 여관에 동아투위 사무실이 생겼다.

칠판에 서로 연락할 것, 지침 등이 적혀 있는데 하루는, “배 차장님, 0시에 여관에서 만나재요”라는 글이 쓰여 있어 폭소를 자아냈다. 배 차장은 동아방송 라디오 파트의 배동순 차장님이었다.

몇 달은 생활지원비 명목으로 돈이 지급됐으나 오래 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선배들의 독려는 곧 다시 귀사해 일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때였다. 몇 달이 지나자 이제 생활이라는 삶의 현실이 다급하고 절실하게 다가왔다.

그 전에 내가 소속된 아나운서부의 전영우 실장과 김인권 차장께서 밤에 우리집에 방문해서 딸이 하는 일이 뭔지 잘 모르는 모친을 설득하고 갔다. 집에서는 난리도 아니었다. 아나운서라는 좋은 직업을 가진 애가 차분히 일하고 좋은 급여를 받으며 살 일을 왜 이리 시끄럽게 만드냐는 이야기였다. 집안 식구들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실 입사도 좀 시끄럽긴 했었다. 첫 직장이던 기독교방송(CBS)에 졸업 전에 합격해서 신입 아나운서로 지냈는데 몇몇 선배를 중심으로 경영진의 부당한 업무지시와 개인 취향의 단체 육성 등에 항의하며 투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전력 약화와 전투력 부족으로 흐지부지 주저앉고 사내 분위기는 다음달에 봉급이 제대로 나올지가 관건이라 아주 좋지 않았다. 방송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내가 기독교방송에 입사한 해에 신입사원을 뽑지 않았던 동아방송이 신입사원 채용공고를 냈다. 운 좋게도 실기시험과 필기시험, 면접 등 모든 과정이 공휴일에 있었고 서류심사는 이미 끝났었다. 최종면접 때 심사위원들은 ‘기독교방송 퇴사에 아무 문제가 없겠는가?’ ‘1년 경력이 있어도 신입사원으로 모든 교육을 받는 것에 이의가 없겠는가’를 물었다.

맹경순 아나운서는 2016년 9월부터 2018년 8월까지 EBS 라디오 심야책방을 진행했다.

최종면접을 보고 기독교방송에 출근하니 난리가 났다. 동아방송에서 전화로 기독교방송에 ‘이 사람이 응시했고 우리는 이 사람을 선택한다’고 통보했다고 한다.

그곳에서의 합당하지 않은 대우와 근무 환경은 내 근무시간에 저촉되지 않는 한 타사로의 응시 지원은 비윤리적인 것이 아니라고 나 스스로 생각했다.

아무튼, 입사 후의 교육은 재미있고도 우울했다. 당시 뛰어난 MC였던 고려진, 임국희씨 등 다양한 외부 강사들의 체험과 조언을 듣는 것은 재미있었지만 사내 강사들이 들어오면 여지없이 “전 직장에서 1년 경력이 있는데 왜 신입사원으로 다시 시작하려 하는가”라고 했다.

구질구질한 시간을 까발리는 것도 싫었다. 아나운서실 여자 선배는 강영희, 이경자, 이선미, 임수진, 홍명진, 한현수, 최남경씨 등이었다. 남자 선배들은 거의 동아투위에 없었기 때문에 생략한다.

여자 선배들은 종로5가 시절을 끝내고 들어온 내 눈에 마치 프랑스 파리의 예술인 같았다. 늘 책을 읽고 음악을 들었으며 연애를 했다. 그리고 집안 어르신 같은 간부 사원들이 있었지만 비교적 다양함과 특별함을 존중하는 분위기여서 재미있었다.

물리적 환경은 그리 좋지 못했다. 부장, 차장을 비롯해 몇 사람만 나무 책상이 있고 나머지는 책상 몇 개에 긴 의자에 둘러앉아 책을 보거나 방송 원고를 준비하곤 했다.

깔깔거리고 웃고 얘기하다가 담당 피디가 문을 열고 녹음하자는 사인을 보내면 스튜디오로 따라가는 웃기는 풍경이지만 우리는 매일매일 새로운 이야기로 꽉 차 있고 일하는 것이 재미있고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러다가 하루아침에 우리는 아나운서부 긴 의자에 같이 앉아 ‘하하호호’ 할 수 없는 날을 만나게 됐다.

우리가 만든 호소문을 갖고 요소요소를 방문하는 2인 1조의 팀을 만들었는데 지금 한길사 대표인 김언호 선배와 같이 다녔다. 소신이 별로 없는 나와는 달리 철두철미 자유언론 정신으로 무장된 분이었다.

그러는 사이 배신자도 생기고 이탈자도 생기고 직장을 새로 구해 출근하는 사람도 생겼다. 간간이 투위 사무실을 통해 들어오는 외부 녹음도 있었지만 그걸로 생활하기는 불가능했다.

국민TV 라디오 프로그램 '맹경순의 아름다운 세상'을 진행하던 시절. 사진 왼쪽이 맹경순.

그 무렵 중앙일보사의 동양방송(TBC)에서 신입사원 모집이 있어 응시해봤다. 가능성은 별로 없었지만…. 최종 면접에서 떨어졌다. 집안의 누가 비선으로 알아보니 최종심사에서 ‘굳이 높은 데 비위를 거스를 필요가 없다’고 결론을 냈다고 한다. 그때 분위기를 보면 무리가 아니었다. 게다가 동아방송과 청취율 싸움이 치열했던 곳이었다.

그때 동기 아나운서였던 황윤미가 무역업 회사에 들어가 근무하고 있다가 관련 업체인 바잉 오피스(Buying office)에 리셉셔니스트(Receptionist)로 알선해 근무하게 되었다. 과거에 동아일보 기자 입사시험에 응시했다 실패한 사장의 프라이드였다. ‘동아방송 아나운서가 우리 직원이야.’

하느님은 한쪽 문을 닫으실 때 반대편 문을 열어두신다는 서양 속담이 있는데 실감하는 일이 생겼다. 숫자 맞추기에 진저리를 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저는 문화방송(MBC) 라디오의 장명호 피디입니다. 맹경순씨와 라디오 프로그램을 하고 싶은데 의사가 있으신지요?”

가까운 커피숍에서 만났는데 나는 TBC 일을 겪은지라 아무 희망없이 말했다. “저희랑 일을 같이 하고 싶어도 아마 안 될 거예요.” 지금도 내가 ‘저희’라는 단어를 쓴 게 신기하다. 우리는 공동운명체임을 깊이 깨닫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마 안 될 거’라는 것은 우리가 체험한 크고도 무겁고도 무서운 공권력의 맛을 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해사한 모습의 장 피디는 밝게 말했다. “그게 아니더라구요. 저희도 알아볼 만큼 알아봤는데 일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더라구요. 저희도 사전에 다 점검해 봤습니다.”

그래서 나는 TBC 일을 꺼냈다. 장명호 피디의 말은 “아마도 알아서 미리 포기한 걸 겁니다.”

세상에…. 거의 일생에 무거운 체험을 하고 많은 것을 걸고 응시한 것에 알아서 기었다니…. 그럴 수밖에 없었겠다고 이해는 한다.

어쨌든 나를 무직의 어두운 시간에서 구해준 바잉 오피스(Buying Office) 대표님께 심심한 사과를 드리고 MBC 라디오의 프리랜서로 방송을 다시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동아방송에 있을 때 그렇게 신명이 나게 일했는데 영 몸이 안 풀리고 벤치의 운동선수처럼 잘되지 않았다. 동아방송 때의 진행멘트가 (당시 이규만 PD 선배는 늘 나에게 적극적 참여를 요구했다) 실제 생방송 전 나는 광화문 거리에 나가 오프닝 멘트를 생각하고 만들었다.

내가 진행하는 교통 프로그램은 화제가 되었고 주간지 요청으로 행운의 엽서를 뽑는 사진도 찍혔다. 그런데 MBC에 와서는 이상하게 방송이 잘되지 않았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 아나운서부라는 소속이 있어 편안했는데 갑자기 닌자같은 ‘일인무사’가 되어 방송과 사교에 능란하게 된다는 게 영 서툴렀다. 더구나 피디들은 프리랜서가 인사성 밝고 싹싹하고 많은 일들을 능숙하게 해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

공권력에 뺨따귀를 맞고 한없이 작아진 나는 낯 가리고 인사 잘못하고 사교적이지 않고 아나운서가 진행했던 프로그램을 꿰찼다는(아나운서실에서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곱지 않은 시선 속에서 일이 잘 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1년 반 정도를 견뎌준 피디들에게 감사하다.

그 무렵 큰아이를 임신해 서로 편안한 굿바이를 한 셈이었다. 1976년 결혼을 했는데 남편은 아나운서부에서 남자 아나운서 중 유일한 동아투위 소속이다.

신혼집을 이사갈 때마다 이른바 ‘담당’이 인사를 왔다. 인사라는 것은 ‘우리가 너희들이 이곳에 산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나쁘지 않은, 오히려 매우 정중한 사람들이었지만 돌아가면 소름이 끼치긴 했다. 우리는 저 사람들의 감시 감독을 받고 산다는 실감.

출산으로 6개월 쉰 다음 아나운서 선배 한현수씨 부군이 MBC 라디오 부장이셨는데 어린이 프로그램을 맡겨주셔서 재미있게 일했다. 또 그 당시 동아방송에서 TBC로 이직한 김정일 선배가 새벽 생방송을 하자는 제의를 하셨다. 그 전에 MBC 프로그램을 할 때 TBC 프로그램으로 옮기면 출연료를 더 주겠다는 제의도 있었는데 그 지겨운 바잉 오피스(Buying office)의 숫자 놀음을 끝내게 해 준 MBC를 배신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TBC 라디오의 새벽 6시5분 생방송은 재미있게 진행했다. 대부분 녹음 방송이 나가는 시간에 시도한 새벽 생방송은 반응이 좋았다. 생방을 마치고 드물게 새벽에 문 여는 서소문의 찻집이 있었다.

30분으로 시작한 프로그램이 1시간으로 연장 편성됐다. 낯 가리고 사교에 능하지 못한 젊은 여성을 따뜻이 감싸주신 TBC 이기재 차장, 유성화 차장님께 감사드린다.

1980년 신군부 주도로 언론 통폐합이 일어났다. 신문사 11개, 방송사 27개, 통신사 6개 등 44개 언론매체가 통폐합됐다. 1000여명의 언론인들이 해직되는 사태였다. 날이면 날마다 비분강개의 회식을 하며 슬퍼하고 분개하는 사람들을 보며 한편으론 ‘우리는 몇 년 전 더 참담하고 참담하게 당했답니다’하고 중얼거렸다.

5년 전 자유언론실천운동 당시 당신은 어떤 생각이었는가 묻고 싶었다. 그래도 대부분은 KBS로 보직 급여가 보장되며 수평이동을 했다. 물론 직장이 거대한 상대에게 접수되어 인질 내지는 포로로 잡혀가는 심정이 참담했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낯설고 불안한 환경에서 일했지만, 동료들과 함께 생활할 급여에 큰 지장없이 생업을 이어갈 수 있지 않았는가.

동아투위의 많은 희생을 생각한다. 스트레스로 신병을 얻어 삶을 마감한 선배들, 생계를 위해 해보지 않던 일을 하면서 힘들게 살았던 선배들, 자부심과 자존심으로 버티기엔 삶은 너무 가혹했다.

내 프로그램도 KBS로 옮겨갔다. ‘아침의 로타리’란 이름으로 TBC 피디, 동아방송 피디와 같이 재미나게 일했다. 이 무렵부터는 동아에 대한 공권력의 적개심이나 보호 관찰도 좀 느슨해진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더 큰불이 떨어졌으니. 그 대신 KBS도 좌불안석이었을 것이다. 포로로 잡아온 듯한 타 방송사 직원들을 정중히 대하고 거대한 프로젝트에 누가 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 역력했다.

대한민국의 이른바 방송인들은 하루아침에 다 여의도로 운집하게 된 셈이었다. TBC가 그렇게 자랑스러워했던 여의도 별관도 KBS가 접수했다.

동아방송 선배 아나운서였던 남편은 매형의 소개로 접착 윤활제 수입을 하는 회사에 근무하다가 그 아이템을 인수해서 사업을 시작했다. 다른 남자 아나운서들은 한 명도 동아투위에 합류하지 않았다.

동아투위 정신이 어딜 가겠나. 남편은 업계의 관행인 구매 담당에게 리베이트를 주지 않았다. 자신이 취급하는 물건은 품질이 훨씬 뛰어나고 가격도 월등히 싸기 때문에 문제없다는 생각이었다. 다른 회사 물건 가격이 비싼 데는 관행의 비용이 반영됐겠지.

구매 담당 직원들은 이런 장점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자기와 윗 상사들에게 떨어질 리베이트 액수가 관건이었을 것이다. 동아투위, 자유언론실천운동의 정신으로 우리나라에서 사업을 하겠다는 사람. 참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기가 힘들었다.

물론 좋은 날도 있었다. 살림이 피어서 풍족하게 산 날도 있었다. 그는 그렇게 사는 게 참으로 힘들었을 것이다. 남편은 60세 생일을 맞기 몇 달 전 폐암 통보를 받고 두 달 후 세상을 떠났다. 우리가 동아방송에서 해직될 때도 다시 내 직장으로 돌아간다는 희망이 있었다. 물론 불안도 있었지만.

회사의 회유에도 안락한 자리로 돌아가지 못한 것은 남은 선배들과 동료 때문이다. 자유언론이고 나발이고 그것은 뒷날의 영광이고 현재의 판단은 과연 그들을 남겨두고 내가 안락을 택할 수 있는가? 그것은 차마 못할 일이었다.

나는 MBC에서 TBC, KBS, 다시 MBC 라디오에서 프리랜서로 일하다가 1990년 개국한 평화방송 개국 멤버로 입사했다. 프리랜서가 아닌 소속원으로 방송을 한다는 벅참이 있었다.

평화방송도 개국 다음 해 사측과 노조의 충돌이 시작됐다. 가톨릭 신자로 간부 사원인 나로서는 무척 난감한 상황이었다. 지금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교회는 언론을 몰랐고 언론은 교회를 몰랐다.’

교회는 언론의 노동조합 운동에 너무 겁을 먹고 있었고 언론은 교회를 무시했다. 불행한 시간이었다.

얼마 전 구청에서 국가유공자로 월 10만원을 지급하고 명예회복을 해주겠다고 알려왔다. 담당 공무원에게 말했다. “나는 한 번도 내가 불명예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한 일이 없습니다.”

성유보 선배의 사모님께서는 “나는 다시 태어나도 이거(자유언론운동) 할란다”고 하셨지만 솔직히 나는 그럴 자신이 없다.

내 양심으로, 내 판단으로 그렇게 했지만 너무도 크고 무거운 고통이었다. 이런 선택이 다시는 없기를 소망했다. 그러나 그 고통으로 지금 누리는 평범한 일상이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50년이 흘렀는데도 우리의 언론 환경이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에 한탄한다. 우리가 바쳤던 희생과 고통이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했던가. 앞서 세상을 떠나신 선배들께 장하게 성장한 언론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 [1974, 그 후 50년] 언론사로 돌아가지 못한 기자들 이야기 시리즈는 2024년 3월 22일부터 한국기자협회와 뉴스타파에 매주 금요일자로 동시 게재되고 있습니다. 이글은 2024년 9월 20일(금) 한국기자협회에 게재된 글 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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