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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학살에 대한 미국정부의 사과, 배상 등에 한미 정부 침묵 부적절[고승우의 한미관계 탐구 (15)] 미국의 제주4‧3 개입과 친일 경찰 등의 양민학살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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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4.19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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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의 진상은 미군 비밀자료 등에서 확인된 미국의 군사적 개입, 친일경찰과 군인들의 양민학살 등에 대해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공개한 관련 자료 등을 통해 그 전모의 일부가 드러났는데 이를 2회에 걸쳐 소개한다.

미군의 4·3 관련 개입에 대한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의 자료에 보면 ‘미군은 미군정시절에 진압작전을 직접 지휘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수립 직후인 1948년 8월24일 이승만 대통령과 하지 주한미군사령관 사이에 체결된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에 따라 임시군사고문단이 설치돼 여전히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갖게 되었다라고 되어 있다.

또 미군 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이 1948년 9월 이범석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에게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은 여전히 미군에게 있다. 군 작전에 관한 모든 명령은 발표되기 전에 해당 미군 고문관을 거쳐야 한다며 한미협정의 내용을 상기시켰다’고 썼다.


국가기록원이 확인한 미군사고문단의 제주 4·3 개입

로버츠 미군 고문단장이 제주도에서 참혹한 초토화 작전이 벌어지고 있던 1948년 12월 이승만 대통령, 이범석 국무총리, 채병덕 참모총장에게 서신을 보내 ‘송요찬이 대단한 지휘력을 발휘했다. 이 사실을 대통령 성명을 통해 알리라’고 요구했고 이에 대해 채병덕참모총장은 ‘송요찬에게 훈장을 수여할 것’이라고 답했다.

학살극은 제9연대장 송요찬이 1948년 10월17일 정부의 최고 지령에 따라 해안선에서 5㎞ 이외에 있는 사람은 이유여하를 불구하고 총살하겠다는 포고령을 발포하면서 예고됐고, 11월 17일 계엄령이 선포됨에 따라 본격화됐다. 경비대는 중산간마을 주민들이 무장대에게 협조하고 있다며 중산간마을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학살극을 벌였다.

이 작전에 대해 미군 비밀보고서는 제9연대가 대량학살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을 채택했다고 기록했다. 제9연대는 모든 중산간마을 주민들이 공공연하게 게릴라에게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을 채택했다. 1948년 12월까지 제9연대가 점령했던 기간 동안 섬 주민에 대한 대부분의 살상이 발생했다.

미군이 당시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행사하면서 송요찬이 진두지휘한 학살계획에 대해 이승만 정부가 훈장을 수여하라고 요구한 것은 미군이 제주4.3 학살을 진두지휘했다는 의미이다. 미군사고문단의 임무에 대해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이 작정한 자료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 그 당시 미 군사고문단은 주로 1949년 후반기 주한미군의 완전철수에 따른 보완 업무를 수행하였는데, 대한군사원조의 집행, 미군장비 및 무기의 이양, 한국군의 편성 및 훈련지도 등의 업무를 주관하였다. 이외에도 주한 미 군사고문단은 한국 육군·해안경비대·경찰로 구성된 한국치안대를 조직, 관리, 그리고 무장, 훈련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추가하여 한국국내 치안과 질서 유지, 38도선의 방어, 불순세력 제거, 게릴라 침투방지와 방어전쟁 수행, 그리고 해안질서 및 치안유지 등에 관하여 자문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

이상의 내용으로 볼 때 한국군경이 제주에서 이른바 토벌작전을 할 때 그 기본 골격을 미군이 자문했다고 볼 수 있고 미국이 제주 4·3 학살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제주도민에 대한 미국과 대한민국 정부, 경찰과 우익세력의 탄압과 공세는 7년 동안 계속됐다. 그것은 1954년 9월21일 마지막 무장대원이 체포되고 한라산에 대한 입산금지령이 해제되어 일반인들에게 공개되면서 끝났다.

제주 도민들은 불법으로 자행된 인권침해의 피해자가 되었지만 외부 세계의 어느 누구도 미국이 주도한 테러의 무고한 희생자들을 변호하려 시도한 적이 없었다. 외부에 이 비극의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고 대량 학살 책임자를 가려내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불법해위의 피해자에 대한 보상은 물론 시민권 회복 노력, 거짓 주장으로 피해자를 욕되게 만든 허물을 벗겨주려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제주 도민은 50년간 침묵을 강요당했고 그들의 고통을 짓누르면서 견뎌야 했다.


이승만 정권 6·25전쟁 발발 직후 예비검속자 집단 학살

제주도내 4개 경찰서에 구금된 예비검속자들은 1950년 8월 중순경 군인들에게 학살됐다. 제주경찰서 예비검속자는 바다에 수장되거나, 제주비행장에서 총살돼 암매장됨으로써 시신조차 수습되지 못했다. 서귀포‧성산포경찰서의 예비검속자는 어디에서 희생됐는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모슬포경찰서 예비검속자는 1950년 8월20일 섯알오름 부근에서 집단으로 학살됐다.

6·25전쟁이 벌어졌을 때, 1948년 12월과 1949년 6~7월 등 두 차례에 걸쳐 열린 불법적인 군법회의의 결과로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는 제주도민 2500여 명이 수감돼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이승만 정부에 의해 1950년 7월 경 집단 학살됐다.

1950년 8월20일 검속된 모슬포 지역 주민 194명이 군인들에 의해 섯알오름 학살터에서 집단 학살되었으며, 희생자 중 한림지역 62명의 시신은 유족들에 의해 1956년 3월 몰래 수습되어 한림면 ‘만벵디 공동장지’에 묻혔다. 나머지 희생자 132명의 시신은 1956년 5월 유족들의 청원을 당국에서 받아들임으로써 사계리 공동묘지에 안장하면서 ‘백 할아버지의 한 자손’이라는 의미로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란 위령비를 세웠다.

그 후 5·16 이후 위령비가 파괴되는 수난도 있었다. 학살 현장에서는 총기류, 실탄, 뼛조각 등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섯알오름 학살터는 일본군이 1945년 초부터 ‘알뜨르’ 지역을 군사요새화 하는 과정에서 만든 일본군 탄약고 터로서, 6·26전쟁 발발 직후 모슬포경찰서 관내 예비검속된 사람들이 집단 학살된 장소이다.


300여 명 희생된 북촌 학살사건 진상 폭로한 「순이삼촌」

1949년 1월17일, 함덕 주둔 2연대 3대대 군인들에 의해 북촌국민학교를 중심으로 동‧서쪽 들과 밭에서, 4·3 당시 단일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300여 명이 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시신들은 이곳에 임시매장 되었다가 사태가 안정된 후 안장되기도 했으나 어린 아이와 무연고자 등은 임시 매장된 상태로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현재 이곳에는 20여 기의 애기무덤이 있으며 그 중 적어도 3기 이상은 북촌 대학살 당시 희생된 어린 아이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북촌 학살사건은 4·3사건에 대한 논의가 금기시되던 1978년 소설가 현기영 소설 「순이삼촌」을 통하여 이 사건의 진상을 밝히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49년 3월 말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 유재흥 대령은 소위 선무공작을 폈다. “산에서 내려와 귀순하면 과거 행적을 묻지 않고 살려주겠다”는 사면(赦免) 계획이었다. ‘산에서 내려와도 과거처럼 무조건 죽이지는 않는다’는 소문이 퍼지자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피난민들이 나뭇가지에 흰옷을 매어 만든 백기를 앞에 들고 산에서 내려왔다.

1만 명에 이르는 하산민들은 대부분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이었다. 사전적 의미로 ‘귀순’이란 적이 반항심을 버리고 스스로 복종하는 것이며, ‘사면’은 죄를 용서하여 형벌을 면제한다는 뜻이다. ‘적’과 ‘죄’를 전제로 한 단어이다. 학살을 피해 산에 간 것이 ‘죄’가 될 수 없고, 피난민이 ‘적’은 아니기에 부적절한 표현들이다.

산에서 내려온 주민들 가운데 일부 노약자들은 곧 풀려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주정공장 등 수용소에 수개월 동안 감금된 채 철저히 심문을 받았다. 그 사이 오랜 피난생활의 후유증으로 병들어 죽기도 했고 이 비참한 집단수용소에서 아기가 태어나기도 했다.

당초 “하산하면 과거의 죄를 묻지 않고 생명을 보장해 주겠다”고 했지만 선무공작을 주도했던 유재흥 대령이 제주도를 떠난 후 제2연대장 함병선은 하산한 주민들을 1949년 6~7월 군법회의에 넘겼다. 이 군법회의는 법이 정한 최소한의 절차도 거치지 않은 불법적인 것이었다.

군법회의에서 젊은 남자들은 대부분 사형‧무기형‧15년형 등 중형을 선고받았다. 여성들도 남편이나 아들이 사라졌다면 ‘도피자 가족’이 되어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 결과 1660 명의 주민이 제주비행장에서 총살되거나 전국 각지의 형무소로 보내져 감금되었다.

6·25전쟁 발발 직후 북한군에게 밀려 속수무책으로 남하하던 이승만 정부는 전국적으로 예비검속자와 형무소 수감자에 대해 대대적인 학살극을 벌였다. 학살극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해 전세가 역전된 후에야 멈췄다. ‘예비검속(豫備檢束)’이란 범죄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전에 구금하는 것을 말한다.

일제가 식민지 조선을 탄압하기 위해 ‘예비검속법’을 만들었지만, 이 법은 해방 후인 1945년 10월 9일 미군정법령 제11호에 의해 폐지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6.25전쟁 발발직후 불법적인 예비검속을 대대적으로 실시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예비검속을 공표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 제주 4·3 발생 뒤 산간 지방으로 피신한 어린이들. 사진=제주 4·3 평화재단 홈페이지


미국, 4·3 당시  소련 잠수함이 출몰한다는 가짜뉴스 등을 근거로 토벌 정당화

미국이 제주 4·3에 대한 직접적인 가해자 역할을 한 것에 대한 조명이 최근 들어 다양한 방식으로 제기되고 있다. 종래의 방식은 목격자들의 진술이나 국내에서 작성된 관련 자료 중심이었던 것에 비해 진실을 규명하는 접근 방식이 시도되고 있는 것이다.

제주 4·3 관련 미군정의 대책은 당시 미국정부의 지시에 의해 추진되었다는 점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 정부는 소련의 동북아 영향력 확대를 저지하기 위한 냉전 전략의 하나로 남한에 대한 미군정을 실시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남한을 점령한 미군에 의해 주도된 미군정은 본국 정부의 지휘감독을 받은 미군 부대에 ;불과해서 하지 사령관 등이 독자적으로 행한 것은 지엽말단적인 부분에 국한했기 때문이다. 한반도 근현대사는 이런 점에 한반도 현지에서의 주요 인물을 중심으로 기술되는 방식에서 미국 본국 정부의 동북아, 한반도 정책이 미 점령군에 의해 추진되었다는 관점의 도입이 시급하다.

이런 점에서 <헤드라인제주> 신문이 2018년 10월4일 <미국, 소련 잠수함 ‘가짜뉴스’에 제주 4‧3 학살 당위성 부여>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미국이 제주에 소련 잠수함이 출몰한다는 가짜뉴스 등을 근거로 제주 4‧3 학살의 당위성을 부여했고, 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알고도 우려를 표하기 보다는 공산주의자 제거를 명분으로 진압을 격려했’다는 사실을 보도한 것이 주목된다.

<헤드라인제주> 신문이 제주 4·3 제7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에서 참석한 한겨레신문 허호준 부국장이 발표한 ‘제주 4‧3의 전개와 미국의 역할’의 내용을 아래와 같이 소개했다.

--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일으킨 1948년 4월3일 무장봉기 발발의 직접 원인은 경찰과 극우 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항거와 5월10일 치러진 제헌국회선거, 이른바 ‘5‧10선거’의 반대였다. 미군정은 5‧10선거의 성공적인 실시를 한반도 점령기간에 수행하게 될 핵심사안으로 인식하고, 제주도 사태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했다.

1947년 3‧1사건 이후 제주도 출신 박경훈 지사가 사임하자 유해진이 제주도지사로 부임했고, 이후 경찰과 극우단체의 제주도민에 대한 체포와 테러가 공공연하게 이뤄졌다. 특별감찰관 넬슨 중령은 제주도의 상황의 엄중함을 알리는 보고서들을 제출하고, 유해진의 교체를 건의했지만 미군정의 군정장관 딘은 거부했다. 넬슨의 건의가 이뤄졌다면 당시 제주도의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4‧3 당시 남한 미군정에 근무했던 2연대 미군 고문관은 1949년1월 제주읍 오라리에서 97명에 이르는 남녀 및 어린이 시체를 목격했고, 한 달 뒤에는 도두리에서 76명이 민보단에 의해 죽창으로 학살되는 현장을 목격 했다고 말했다. 이 미군 고문관은 학살에 대한 정보보고서를 제출했을 뿐 후속 보고 또는 처형 중단 요구나 군경의 행위를 문제 삼았다는 기록은 아직까지 찾을 수 없다. 이는 미국이 당시 관련 자료를 숨기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제주 4‧3의 전개과정에서 소련 연계설로 등장하는 것이 소련 잠수함 ‘출현설’로, “잠수함이 제주도 연안에 나타났다는 보고가 나올 때 마다 외신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이러한 정보보고나 언론보도는 모두 가짜로 판명됐고, 이런 ‘가짜뉴스’들은 제주도를 소련의 전초기지이자 미국의 대소봉쇄를 위한 전진기지로 간주하도록 하는데 기여했다. ‘가짜뉴스’가 당시 미 당국 관계자들에게 제주도 토벌의 당위성을 부여했다고 분석된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일어난 제주도에서의 초토화 작전 시기에도 미국의 개입은 지속됐고, 제주도에서 이뤄진 작전에 대해 일관된 것은 제주도민에 대한 학살에 대한 우려보다는 공산주의자 제거를 명분으로 한 군‧경의 진압을 격려하고 고무한 것이다. 주한미군사령부는 (한국군)9연대가 민간인 대량학살계획을 채택했다고 평가했지만, 주한미군사고문단은 이를 저지하기는 커녕 초토화 작전을 감행한 지휘관을 높게 평가했다.

제주4·3시기 국내에 있던 미 당국의 제주도 관련 보고서에 등장하는 ‘대량 처형’(mass execution), ‘대량 학살’(mass slaughter), ‘대량 집단학살’(mass massacre) 등의 표현은 그만큼 제주도에서 이뤄지는 대량 학살을 미국이 인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

▲ 제주 4·3 평화공원에 설치된 제주 4·3 희생자 변병생(호적명:변병옥) 모녀의 기념조각 상 비설(飛雪). 이 조각상은 1949년 1월6일 봉개동 지역에 2연대의 토벌작전이 펼쳐지면서 군인들에게 쫓겨 두 살 난 젖먹이 딸을 등에 업은 채 피신 도중 총에 맞아 희생된 당시 봉개동 주민 변병생 모녀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사진=제주 4·3 평화재단


제주 4·3에 대한 미국 개입과 그 진상 규명 촉구 성명

이승만 정권이후부터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제주 4·3이 종료되는 시기까지의 과정과 특히 미국의 개입과 그에 대한 진상 규명이 시급하다는 점은 말할 필요가 없다. 국내에서 제주 4·3 특별법이 시행되고 있지만 제주 4·3에 대해 미국정부의 책임과 사과, 배상 등에 대해 미국은 물론 한국 정부가 침묵하고 있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등 시민단체들이 2018년 발표한 성명은 미군정의 제주 4·3 직접 개입은 미국정부의 한반도 점령정책에서 추진되었다는 점에서 미국의 개입 진상이 규명되지 않고는 제주 4·3의 실체가 밝혀지기는 어렵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그 전문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제주 4·3에 대한 미국과 유엔의 책임있는 조치를 촉구하는 10만인 서명을 전달하며 미국 정부에게 보내는 성명

우리는 오늘 제주 4·3항쟁 당시 발생했던 대규모 인권유린과 주민 학살에 대한 미국과 국제연합의 책임 있는 조치를 촉구하는 10만인 서명을 미국 정부에 전달하고자 주한 미국대사관을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1년 전인 2017년 10월17일과 올해 4월7일에도 이미 서명의 이유를 담은 성명을 대사관에 전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1년 동안 미국 정부로부터 어떤 책임 있는 답변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여 오늘 우리는 서명지를 전달하면서 다시 한번 제주 4·3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환기하고 합당한 조치를 촉구하고자 합니다.

1945년 8월15일 한반도를 지배하던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하고 나서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의 남과 북을 점령하였습니다. 조선(한국)은 패전국이 아니었고, 1천 년 이상 한반도에서 통일된 국가를 유지해온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점령은 일본군을 무장해제하고 식민통치체제를 해체하여 한국인의 독립 정부를 수립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에 한정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미군은 처음부터 군정을 실시한다는 포고와 함께 한반도 남쪽에 진주하였습니다.

미군정은 경찰을 비롯한 통치기구에 일제에 부역한 친일파들을 재등용하였고, 미국에 우호적인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한국 내 정치세력 관계를 폭력적으로 재편했습니다. 그리고는 일부 우익세력과 손잡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강행하였습니다.

이는 당시 한국인의 열망과 배치된 것일 뿐만 아니라 국제법상 점령의 원칙도 명백히 위배한 것입니다. 제주 4·3과 관련한 미국의 가장 포괄적인 책임은 제주도를 비롯한 전국에서 한국 민중들이 저항에 나설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미국의 점령체제와 점령정책 자체에 있습니다.

제주도민들은 친일파 청산과 통일 독립 국가에 대한 열망을 표출하기 위해 1947년 3월1일 대규모 집회와 시위를 벌였습니다. 그런데 미군정이 파견한 경찰이 평화적으로 시위를 하던 군중을 향해 발포하여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당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미군정 경찰의 발포와 인명살상은 제주도에서 미국이 구체적으로 책임져야 할 첫 번째 사안입니다.

이 사태에 대해 미군정이 경찰의 잘못을 인정하고 합당한 조치를 취했다면 무장충돌과 대규모 희생이라는 비극적인 사태가 뒤따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미군정 경찰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제주도민들이 총파업으로 항의하자 이를 공산주의자들의 음모로 단정하고 대대적인 검거 작전을 벌였습니다.

1년 사이에 2500여 명이 체포·감금되었고 그 중 몇몇은 경찰서에서 고문당해 사망했습니다. 결국, 제주도의 일부 젊은이들이 무장봉기에 나서게 만든 이 대 탄압이 미국이 책임져야 할 두 번째 사안입니다.

1948년 4월3일 무장봉기가 발발한 후에도 참극은 피할 길은 있었습니다. 당시 제주 주둔 국방경비대 9연대장이었던 김익렬 중령은 4월28일 무장대 사령관 김달삼을 만나 무장해제를 포함하는 평화협상에 합의했습니다.

그런데 5월1일 미군정 경찰의 통제 하에 있던 우익 청년단체 회원들이 오라리 마을에 불을 질렀고, 미군정은 이를 무장대 소행으로 몰아 평화협상을 파기했습니다. 더구나 당시 미군이 이 장면을 항공에서 영상으로 촬영하여 선전에 이용했습니다.

미군에 의해 기획된 위장작전(false flag)으로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사건 직후인 5월 5일 딘 군정장관을 비롯한 미군정의 수뇌부는 제주에서 모여, 강경진압 방침을 결정하고 평화적인 해결을 주장하던 김익렬 중령을 해임했습니다. 무장봉기 발발 이후 평화적 해결의 길을 거부하고 무력충돌의 격화와 대규모 희생을 낳을 수밖에 없는 강경진압정책을 선택한 것이 미국이 책임져야 할 세 번째 사안입니다.


미국, 제주 4·3 발생 직후 제주도에 구축함 급파

미군정의 강경진압정책은 실패했습니다. 5월10일 남한에서만 치뤄진 총선거 당시 전국에서 유일하게 제주지역 두 개의 선거구에서 선거가 무산되었습니다. 그 직후인 5월 12일 미 극동사령부는 제주도에 구축함을 급파하였습니다.

또 미군정은 5월 20일 경 미군 제6사단 제20연대장 브라운 대령을 제주도 최고 지휘관으로 파견하여 진압을 지휘하게 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외국의 '전투 현장'에 미군 지휘관을 진압작전 책임자로 파견한 것은 이례적인 일입니다. "원인에는 관심이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라고 말한 브라운 대령은 2주 안에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제주도의 서쪽으로부터 동쪽 땅까지 모조리 휩쓸어 버리는 작전’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브라운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한 달 동안 수천 명을 연행하고 상당수를 사살한 이 작전은 오히려 주민들을 산으로 내몰아 대규모 희생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이것이 미국이 책임져야 할 네 번째 사안입니다.

1948년 8월15일 한반도 남쪽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10월 중순부터 다음해 봄까지 이른바 초토화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중산간에 있는 수백 개의 마을이 불태워지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대학살이 자행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다음의 일이지만, 미국은 이 대학살에 대해서도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1948년 8월24일에 체결된 한미군사협정에 따라 미군사고문단이 한국군에 대한 작전권을 보유하였고, 진압작전을 위해 미군의 무기와 정찰기 등을 지원했습니다.

로버츠 고문단장은 제주도에 파견한 고문관 버제스 대위를 통해 제주도 작전에 관한 모든 상황을 보고 받아 매주 정기적으로 주한미군사령관에게 보고했으며, 이범석 총리나 신성모 국방부장관의 군 작전에 관해 일일이 관여하였습니다.

로버츠 고문단장은 1948년 11월17일 이승만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후 12월1일 국방부 참모총장에게 계엄령에 관한 문서를 보내 계엄령이 실시될 수 있도록 조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초토화 작전으로 대량학살이 절정에 이르렀던 1948년 12월18일 이승만 대통령, 이범석 국방장관, 채병덕 참모총장 등에게 서신을 보내 그 작전을 집행하고 있던 송요찬 중령이 ‘대단한 지휘력을 발휘했다’고 높이 평가하고 대통령의 성명을 통해 일반에 알리라고 권고했습니다.

이에 채병덕 참모총장은 훈장을 수여할 것이라고 답신했습니다. 이처럼 한국군에 대한 작전권을 갖고 있던 미 군사고문단이 무차별 대량학살을 제어하기는커녕 초토화 작전에 직·간접으로 개입하여 학살을 부추겼다는 사실이 미국이 책임져야 할 다섯 번째 사안입니다.

진실은 일단 드러나기 시작하면 자신의 길을 갑니다.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는 데에는 시한도 없습니다. 미국은 도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일본계 미국인 12만 명을 수용소로 강제 이주시킨 사건에 대해 44년 만에 사과하고 보상한 경험이 있습니다. 또 2009년 오바마 대통령은 100년도 더 지난 선주민 학살에 대해 사과하는 결의안이 포함된 법안에 서명했습니다.

2007년 국제연합 제61차 총회에서 ‘선주민 인권선언’을 채택할 때에도 미국,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4개국이 반대했지만, 2009년 호주와 뉴질랜드, 2010년 캐나다에 이어 미국도 2011년에 여기에 서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미국 제주 4·3학살 책임 인정하고 유족과 제주도민에게 사과해야

마찬가지로 올해 70주년을 거치며 제주 4·3에 대한 미국의 책임은 더 이상 덮을 수 없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세계의 수많은 지식인들이 제주4·3과 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제주 4·3은 냉전체제가 구축되는 과정에서 한반도 남쪽에 대소전진기지 역할을 할 친미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반대세력을 억압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반인륜적 인권유린 사태입니다. 당시 제주 인구 27만 중에서 3만여 명이 희생된 대 비극입니다. 이제 냉전은 끝났습니다. 탈냉전 시대는 인권과 평화에 기초한 정의로운 세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냉전 시대의 어두운 유산부터 정리해야 합니다. 이에 우리는 오늘 제주4·3에 대한 미국과 국제연합의 책임 있는 조치를 촉구하는 서명을 미국 정부에 전달하면서 다시 한 번 다음과 같이 요구합니다.

- 미국은 제주4·3학살에 대하여 책임을 인정하고 유족과 제주도민에게 사과하라.
- 미국은 한국 정부 및 시민사회와 함께 제주4·3에 대한 미군정과 미군사고문단의 법적, 정치적, 도덕적 책임을 규명하기 위한 조사에 착수하라.
- 미국은 진상조사를 바탕으로 제주 4·3에 대한 법적, 정치적, 도덕적 책임에 상응하는 피해회복 조치를 시행하라.

2018년 10월 31일
제주4·3희생자유족회 /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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