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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남한의 서울과 개성 등 3곳 점령 지역으로 검토[고승우의 한미관계 탐구 (06)] 미국 1945년 6월 점령 필요 지역에 한반도 포함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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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3.20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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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합동참모본부는 태평양 전쟁 종전 1년 전인 1944년 8월 합동전쟁준비위원회에 일본군 철수나 일본 정부의 붕괴나 항복에 대비해 일본이 점거하고 있는 전략 요충지에 대한 공격 계획을 세우라고 지시했다(Joint War Plans Committee Directive JWPC 264/D, 22 August 1944, "Occupation of Strategic Positions Upon Japanese Withdrawal, Collapse, or Surrender," in folder CCS 386.2 Japan (4-9-45)* Section 1, RG 218, Box 135). 그러나 그로부터 1년이 지나 일본 규슈와 혼슈에 대략적인 침공계획이 완성된  시점에서도 아무 것도 추진된 것이 없었다.

합동전쟁계획위원회가 일본의 항복에 대비한 비상계획의 문제점에 관심을 가진 시점은 1945년 5월이었다. 합동전쟁준비위원회는 미국이 점령할 필요가 있는 지역이 일본 열도 외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 1945년 6월 미국이 점령할 필요가 있는 지역으로 한반도를 포함해 만주와 대만, 인도차이나, 중국 해안 등을 포함시켰다(Minutes of the 204th meeting of the Joint Planning Staff, 30 May 1945; JWPC 264/1, "Strategic Positions Selected for Occupation Upon Japanese Withdrawal, Collapse, or Surrender," 8 June 1945, in Folder CCS 386.2 Japan (4-9-45) Sec. 2, RG 218, Box 135, NA. See also Ray S. Cline, United States Army in World War II: The War Department: Washington Command Post: The Operations Division (Washington: Office of the Chief of Military History, 1951), p. 344).

미 합동참모본부는 1945년 6월14일 극동군 최고사령관 맥아더 장군과 태평양 함대 사령관 니미츠 제독에게 일본의 붕괴 또는 항복과 같은 급변사태에서 미국이 즉각적 이익을 취하기 위해 일본 본토를 점령할 계획을 만들라고 지시했다(JCS Message WARX 17064 to Commander in Chief, US Army Forces, Pacific and Commander in Chief US Pacific Fleet, Information to Commanding General Twentieth Air Force, 14 June 1945, in JCS 1331/4, folder CCS 386.2 Japan (4-9-45) Sec. 2, RG 218, Box 135, NA).

1945년 7월10일 미 합동전쟁준비위원회는 전반적인 작전계획을 다각도로 검토하면서 미국은 일본 본토와 한반도, 중국의 상하이와 난징, 일본이 점거하고 있는 태평양 도서, 대만 등을 우선 점령할 필요가 있다고 잠정 결정했다(“Outline Plan for the U.S. Occupation of Strategic Positions in the Far East in the Event of a Japanese Collapse or Surrender Prior to ‘Olympic’ or ‘Coronet’” Appendix A to JWPC 264/6, 10 July 1945, in folder CCS 386.2 Japan (4-9-45) Sec. 3, RG 218, Box 135, NA). 위원회가 제시한 작전계획 가운데 하나는 일본이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할 것이라고 내용이 들어 있었는데 이 추정이 적중한 꼴이 되었다.

▲ 1945년 1월 영국군이 버마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뒤 파괴된 사원 부근을 순찰하는 장면. 사진=위키미디어


미, 미소 두 군대의 한반도 경계선으로 북위 38도선 부근 검토

미 합동참모본부는 포츠담회담에 앞서 맥아더 등 두 지휘관에게 한반도를 포함한 작전 계획을 지시했다. 맥아더는 도쿄와 서울을 일차적인 점령 목표로, 그리고 부산과 군산을 2, 3차 점령 목표로 제안했다. 이후 포츠담회담이 열리자 미 합동전쟁준비위원회와 맥아더, 니미츠 사령관의 참모들은 점령계획 수립에 착수했다(James F. Schnabel, United States Army in the Korean War: Policy and Direction: The First Year (Washington: Office of the Chief of Military History, 1961), pp. 2-3. Reports of General MacArthur Prepared by His General Staff, vol. 1 supplement, MacArthur in Japan: The Occupation: Military Phase (Washington: 1966), p. 2).

1945년 7월 25일 마셜 제독은 포츠담회담이 열리고 있는 기간 동안 트루먼 대통령에게 일본의 급작스런 항복 가능성이 있다고 통보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이를 보고 맥아더와 니미츠 사령관에게 일본의 갑작스런 붕괴나 항복 가능성에 대비해 일본을 점령할 계획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맥아더와 니미츠 사령관은 소련이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기 이전에 일본이 붕괴 또는 항복할 가능성을 미리 알게 되었다(Chief of Staff "Memorandum for the President," 25 July 1945, in folder ABC 014 Japan (13 Apr 44) Sec. 1A, RG 165, Entry 421, Box 19, NA).

같은 날 마셜 제독은 미 전쟁부 작전책임자에게 한반도에 미군을 진주시킬 준비를 하라고 지시하면서 한반도에서 미군과 소련군 사이의 지상 경계선에 대한 기본계획이 수립됐다. 이에 따라 미군의 한반도 진입 시 병참지원을 위해 두 개의 주요 항구가 필요하다는 점과 미소 두 군대의 경계선으로 서울 북쪽 북위 38도선 부근이라는 점 등이 검토대상으로 제시되었다(Schnabel, Policy and Direction, p. 7; Roy E. Appleman, United States Army in the Korean War: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June-November 1950 (Washington: Office of the Chief of Military History, 1961), pp. 2-3).

마셜 제독은 맥아더에게 전문을 보내 가까운 장래에 일본 항복에 따른 일본 통제와 점령 등에 대한 결정이 내려질 가능성이 있다면서 일본과 한반도 점령에 대한 맥아더의 견해를 물었다.

미 전쟁부 작전책임자도 장차 일본이 붕괴 또는 항복할 경우 일본과 일본이 점거한 지역을 점령할 계획을 맥아더 장군이 수립하는데 필요한 정보의 요점을 즉각 보고하라고 부하직원들에게 지시했다(JCS Message VICTORY 295, Personal to MacArthur, Info Handy, from Marshall, 25 July 1945; JCS Message, VICTORY 294, From Hull Personal to Craig, 25 July 1945 in OPD 1945 series, folder OPD 014.1 Top Secret (Sec. III), RG 165, Entry 419, Box 108, NA).

미 합동참모본부가 6월14일 내린 지시에 따라 니미츠, 맥아더 장군이 일본의 갑작스런 붕괴와 항복에 대비한 계획을 작성해 상부에 보고했다. 니미츠 장군이 작성한 해군의 작전계획(암호명 Campus)은 일본 전역의 주요 지역에 대한 미 육군의 상륙작전이후 해군이 도쿄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한편 맥아더가 작성한 작전계획(암호명 Blacklist)은 도쿄에 대한 육해공군의 공격과 상륙작전을 실시하고 이어 두 번째 지역을 점령하는 내용이었다. 미 합동참모본부는 두 작전계획을 짜 맞추는 식으로 추진했지만 그것은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완성되지 못했고 실제 맥아더의 작전계획을 필요할 때마다 수정하는 방식으로 활용했다(The Blacklist plans and OPD briefs based on those plans are in OPD folders "Australian Ports to BLACKLIST Ed. 1" and "BLACKLIST Ed. 3 to BOLERO," RG 218, Boxes 1776 and 1777, NA. A copy of the CAMPUS plan and OPD brief is in folder OPD 014.1 Top Secret (Sec. IV), Case 58, RG 165, Entry 419, Box 108, NA).


미국  북위 38도 미소 점령 경계선 설정 최우선 추진

맥아더의 작전계획 Blacklist에 대한 수정보완 작업이 이뤄질 때인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에 첫 번째 원폭이 투하되었다. ‘리틀 보이’라고 불리는 이들 원자폭탄은 요즘 소형차 정도의 크기였지만 위력은 엄청나서 1945년 말까지 21만 명이 숨지고 2022년 말 현재 26만 명의 피폭자가 후유증을 앓고 있다. 이틀 뒤 소련 외무상은 모스크바 주재 일본 대사를 불러 8월 9일자로 양국은 전쟁상태로 돌입한다고 통보했다. 미국은 8월 9일 두 번째 원자폭탄을 나가사키에 떨어뜨렸고 소련은 그날 만주 국경을 넘어 일본 관동군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Entry of the Soviet Union, pp. 106-07).

8월10일 일본정부는 항복할 의사와 함께 정전협정을 타진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자 워싱턴과 서태평양 주둔 미군 지휘부 등은 혼란에 빠져 전투 작전을 일본 점령과 일본과 그 점거 지역에 대한 미국의 통치에 대한 계획으로 전환했다. 미 국무부와 전쟁부, 해군부와 합동참모본부는 일본의 항복에 따른 필요한 절차 등을 강구하기 위해 회의를 계속했다<Documents concerning SWNCC and JCS staff deliberations on issues involving the other allies are in folder CCS 387 Japan (2-7-45) Sec. 2, "Unconditional Surrender of Japan," RG 218, Box 137, NA).

미국이 전후 질서를 새롭게 구상하기 위해 1944년 11월 2차 대전 기간 중에 군부와 국무부의 정책조정을 담당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국무부의 조직을 개편, 확대하면서 만든 국무·육군·해군 3부조정위원회(SWNCC ; State-War-Navy Coordinating Committee; 이하 SWNCC)는 일본군의 항복 조건들이 담긴 항복문서 '일반명령 제1호' 작성 작업을 하고 있었다. SWNCC는 2차대전 기간 중에 국무부의 조직이 개편, 확대되면서 전후 질서를 새롭게 구상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책기구였다.

SWNCC가 검토한 최우선 과제는 미국이 일본 점령을 주도하고 궁극적으로 미 점령군을 가능한 신속히 일본에 주둔시키는 것이었고 일본군이 극동 여러 지역에서 어떤 연합군에 항복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일본군 지휘관이 연합군내부의 분열을 촉발하기 위해 항복 약속을 악용할 기회주의적 시도를 차단하고 연합군 지휘관 사이의 관할 다툼을 방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미국은 이 문제에 대해 1944년 12월부터 관심을 가지고 작업했으나 일본군 항복을 어느 지역에서 누가 접수하느냐 하는 것에 대해 명백한 지침을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동남아에 주둔해 있던 미군을 지휘하던 앨버트 코디 웨더마이어 사령관이 워싱턴에 긴급전문을 보내 중화민국 군과 모택동 군의 내전이 가열되고 있어 주목해야 한다고 촉구했다(Letter, General (ret.) C. H. Bonesteel III to Major Donald W. Boose, Jr., 14 April 1973, hereafter, Bonesteel letter. Memorandum by Assistant Secretary of State for Far Eastern Affairs, Dean Rusk, 12 July 1950, in FRUS, 1945, VI, 1039. Documents relating to the development of General Order No. 1 are included in the SWNCC 21 series of documents ("Unconditional Surrender of Japan") in folder CCS 387 Japan (2-7-45) Sec. 2, RG 218, Box 137, NA).

웨더마이어 사령관은 중국 본토의 주요 지역을 미군이 점령할 것을 건의했다. 그 당시 호주,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등은 중국 사태를 주시하면서 일본이 점거하고 있던 식민지에서 자신들의 이익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일본 항복 뒤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하는 중요성은 후순위로 밀렸다. 미국무부는 한반도에 미군을 신속히 진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미군과 소련군의 경계선을 가능한 한 북쪽으로 더 멀게 삼으려 시도했다.

소련군은 한반도로 신속하게 진군하는 것으로 알려진 반면 한반도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은 미군은 오키나와에 주둔 중이었고 미군 이동 우선권은 일본 본토를 점령할 부대에게 주어진 상태였다. 미군이 진주할 한반도의 3개 지역은 서울과 개성, 그리고 서울 근처 전쟁포로 수용소였다.

마셜 제독 등 미군 수뇌부는 한반도에서의 미소 점령군 경계선과 미군의 한반도 진입 시간과 장소 등에 대한 협의를 했지만 미소 점령군 경계선을 설정하는 것을 최우선시 했다. 1944년부터 시작된 이 작업의 최종단계는 전략정책단 정책과 과장 데이비드 딘 러스크 대령과 육군 소령 찰스 하트웰 보네스틸 3세가 담당했다(러스크 대령은 후에 F. 케네디와 린든 B. 존슨 행정부에서 제54대 국무장관 (1961~1969년)을 지내면서 미국의 주요 베트남 전쟁 정책을 입안했다. 보네스틸 3세 소령은 1966년부터 1969년까지 유엔사령부 및 주한 미군 사령관을 지냈다. 재임 기간 동안 1·21 사태와 푸에블로호 피랍 사건, 울진·삼척 무장 공비 침투 사건 등이 발생했다).

당시 미국이 북위 38도 선을 미소 점령군 경계선으로 삼을 때 주로 고려한 점은 그 경계선이 한반도 행정단위의 경계선이어야 하고 정치적 함의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연합국 수뇌들이 한반도를 일본 점령에서 해방시켜 적절한 단계를 거쳐 독립국으로 만들기로 합의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합의가 어떻게 이행될지에 대해서는 모호한 상태로 남겨져 있어서 일본군 항복을 접수할 미소 점령군의 경계선은 한반도 독립과 관련해 어떤 정치적 의미가 감춰져 있다는 연관성을 배제해야 했다. 이런 점을 고려해 경계선은 누구나 쉽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한반도 지방행정 구분선위에 만들어져야 했다(Bonesteel letter).

러스크 대령과 찰스 하트웰 보네스틸 3세 소령은 이런 점을 고려해 한반도를 절반으로 나누는 군사분계선을 북위 38도 선으로 획정하고 미군의 남한 점령 지역을 서울, 개성, 서울 근방의 전쟁 포로수용소 3곳으로 건의했다.

▲ 1945년 9월 8일 서태평양 Solomon 제도 최대의 섬인 부겐빌에서 일본군이 호주군에게 항복하는 장면. 사진=위키미디어


미군 서울과 개성, 서울 근방의 전쟁 포로수용소 3곳 점령 지역으로 검토

일본군의 항복 조건과 한반도 처리 방침 등이 담긴 항복문서 ‘일반명령 제1호’의 초안은 1945년 8월 11일 합동참모본부 기획담당부서인 SWNCC에 전달됐다. 제임스 던 국무부 차관보는 한반도가 다롄(大連) 뤼순 항보다 미국에게 정치적으로 더 중요한 지역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이에 따라 38도 선 제안이 '일반명령 제1호'의 초안으로 합동참모본부 기획자들에 의해 채택되었다.

미국 정부가 한반도에서의 미소 점령군 경계선 획장에 대해 검토를 하고 있을 당시 소련이 한반도 문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정보가 전해졌다(Sandusky, America's Parallel, pp. 242-48. Schnabel, Policy and Direction, p. 10; Bonesteel letter).

연합국 의회 미국 대표단 에드윈 W. 폴리가 모스크바에서 트루먼 대통령에게 긴급 전문을 보내 전후 배상문제가 합의되기 전에 한반도의 공업지대를 가능한 한 많이 점령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건의했다.

윌리엄 애버렐 해리먼 주소 대사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스탈린이 중화민국 외교부에 전후 배상 문제의 요구를 확대하고 있으며 미국이 한반도와 관둥 반도에 군대를 증파하도록 요구했다고 경고했다(Telegram, "The Chairman of the Council of Peoples Commissars of the Soviet Union (Stalin) to President Truman," 12 August 1945, translation in FRUS, 1945, VI, 643. Truman, Year of Decisions, pp. 433-34). 그러나 그 시기에 소련군은 만주와 한반도를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소련 육군 25사단은 육로로 두만강을 건너 공세를 취하고 있었고 소련 해군은 북동부 한반도 해안에 상륙작전을 전개했다(Sandusky, America's Parallel, pp. 204-18; Raymond L. Gartoff, "Soviet Operations in the War With Japan, 1945," US Naval Institute Proceedings, 112 (No. 5, 1966), 53-54; Naval Operations Against Soviet Russia, Japanese Monograph No. 106, Military History Section, Headquarters, Army Forces Far East, 24 January 1952, p. 17). 8월15일 SWNCC는 일본의 항복 조건을 담은 '일반명령 제1호' 최종안을 트루먼 대통령에게 제출했고 트루먼은 이를 승인해 소련과 영국에 보냈다. SWNCC는 이때 미 대통령에게 소련이 한반도에서의 미소 점령군 경계선을 받아드리지 않고 맥아더 부대에 앞서 서울을 점령할 경우 미 점령군은 부산에 상륙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북위 38도선 획정에 반대하지 않았다(SWNCC Memorandum for Information No. 20, "Surrender of Japan," 17 August 1945, contains the texts of the messages sent to Atlee, Stalin, and Chiang Kai-shek (CCS 387 Japan (2-7-45) Sec 2, RG 218, Box 137, NA). See also Schnabel, Policy and Direction, pp.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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