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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부, 1901년부터 일본의 한반도 강점 책동 묵인[고승우의 한미관계 탐구 (02)] 신미양요에서 가스라-테프트 밀약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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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3.06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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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19세기 중반까지 조선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가 조선과의 통상에 관심을 둔 것은 1854년 페리호 등 미군 함대를 일본에 보내 평화리에 미일조약을 체결하면서부터였다. 당시 조선 조정은 외부 세계와의 교역을 엄격히 금지하는 쇄국정책을 유지하고 있었다. 청나라가 조선의 개항을 반대했는데 그 이유는 조선이 개항하면 조선에 재한 지배권을 잃어버릴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청나라는 조선이 계속 쇄국정책을 고수하면서 청나라와의 전통적인 조공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했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의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1866년 7월 평안도 용강현 주영포 앞바다에 도착한 뒤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올라왔다가 평양 군민과 충돌이 벌어졌다. 셔먼호가 대포를 발사해 조선 군민 중에 사상자가 발생하자 평양감사 박규수가 화공으로 셔먼호를 불태우고, 선원은 몰살했다.

미국은 1871년 기함 콜로라도호, 군함 5척에 병력 1230명, 함재대포 85문의 군대를 인천 앞바다로 보내 무력시위를 벌이다 수륙 양면공격을 개시해 역사상 최초의 조미전쟁이 벌어졌다. ‘신미양요’로 불리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이었다. 미군 측 기록에 의하면 미군은 전사자 3명, 부상자 10명이었고, 조선군은 전사자 350명, 부상자 20명이었으나 조선 측 기록에 의하면 조선군 전사자는 57명으로 되어 있어서 다소 차이가 있다.

▲ USS콜로라도호에서 신미양요 참전 기념 사진을 찍는 장교들. 사진=위키피디아

미국은, 일본과 조선의 강화조약이 체결된 뒤인 1882년 조미 수호통상조약을 맺고 조선과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당시 청나라는 일본의 영향력 확대를 막고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미국이 조선과 수교하도록 주선했다. 조선은 미국과의 통상 조약을 체결한 뒤 영국, 독일, 러시아 등과 통상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조약의 내용은 불평등 조약으로 이들 외국에게 치외 법권, 최혜국 대우를 제공했다. 이를 통해 조선에 대한 열강의 침입이 가속화되기 시작했다(Drake, op. ciL, 96-108. Documents pertaining to Shufeldt's enterprise may be found in Despatches from United States Ministers to China, File Microcopies, no.92, rolls 59-61, National Archives. For the Treaty of Chemulp'o, see U.S. Department of State, Theaties and Other International Agreements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1776-1949, Charles I. Bevans, comp., IX, 470-76.).

일본이 1894년 7월부터 1895년 4월까지 벌어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조선에 대한 장악력을 강화하면서 미국은 엄격한 중립을 유지했다. 일본을 견제하거나 한반도 침략을 제어할 어떤 의지나 행동도 보여주지 않았다(For documents pertaining to the Washington government's response to the Sino-Japanese confrontation of 1894-95, see FRUS, 1894, Appendix, I, 5-106.).

1895년 10월8일 새벽 일본의 자객들이 명성황후의 침소인 경복궁 옥호루로 쳐들어가 황후를 시해하고 시신을 불태운 사건이 발생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공관이 미국 공사에게 일본에게 고종황제를 보호하고 그 지위를 유지하도록 촉구하자고 제의했을 때 미국무부는 그에 반대하면서 중립을 지키라고 지시했다. 당시 리처드 올네이 국무장관은 서울 공관에 전문을 보내 엄하게 질책했다(https://rmc.library.cornell.edu/Straight/timeline_text.html#top).


미국무부 일본의 명성황후 살해 후 영국 등의 일본 항의 제의를 거부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는 것은 공사의 업무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고 미 국법에 따르면 불법이다. 공사는 자신의 업무가 미국 시민과 그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타국의 내정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민비가 시해된 수개월 뒤인 1896년 2월11일 새벽, 고종은 극비리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아관파천을 계기로 친러파가 정권을 장악했고 러시아는 조선에 대한 접근 책을 강하게 펴면서 고종과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고종은 러시아를 움직여 일본을 견제하고 싶어 했다. 고종이 1897년 황제에 즉위하자 미 국무장관 존 셔먼은 서울의 미국 공사에게 중립을 지키라는 전문을 다시 발송했다(https://rmc.library.cornell.edu/Straight/timeline_text.html#top).

“공사는 러시아와 일본 간의 긴장이 고조되는 것에 유의해 처신에 신중을 기하라. 공사는 어떤 경우에도 충고나 제안 또는 영향력을 행사하지 말고 최대한 신중에 신중을 기하라.”


미 정부, 고종황제의 조선 자주권 보장 주선 요청 거부

고종황제는 1899년 미국에게 서구 세력이 조선의 자주권을 보장하도록 주선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윌리엄 매킨리 미 대통령과 존 헤이 국무장관은 서울의 미국 공사 호레이스 알랜에게 고종의 요청을 거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https://rmc.library.cornell.edu/Straight/timeline_text.html#top).

1900년 일본주재 조선 공사가 동경의 미국 공사 알프레드 버크에게 미국이 서구 열강들이 조선의 독립과 중립을 보장하는데 앞장서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버크 공사의 답변은 냉담했고 종래의 내용을 반복했을 뿐이다(https://rmc.library.cornell.edu/Straight/timeline_text.html#top).

“그런 요구는 워싱턴에 주재하는 조선 공사가 미국 정부에 직접 보내는 것이 타당하다. 이는 존 헤이 국무장관의 승인을 받은 답변이다.”

영국이 1902년 1월 영일동맹을 통해 일본에게 조선에 대한 특권을 인정하는 조치를 취했다(https://rmc.library.cornell.edu/Straight/timeline_text.html#top). 이에 따라 일본은 만주에서 러시아의 단독지배를 인정하지 않고, 제국주의 열강과의 협조 하에 조선 지배뿐 아니라 중국 분할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일본과 영국은 교섭을 거쳐 1902년 1월 30일 영일동맹을 체결했다. 이에 대항해 러시아는 3월에 러시아-프랑스 공동선언을 발표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조선이 일본의 침략으로 독립을 상실할 위기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챙기는 조치를 취하는 약삭빠른 태도를 드러냈다. 국무부가 1902년 11월 서울 주재 미 공사에게 보낸 공문에 그런 내용이 담겨 있었다.

“조선과 1882년 맺은 통상조약의 개정을 위한 회담을 개시해 미국에 대한 통상권을 확대하라.”

그러나 조선은 이를 거부했다.

미국은 1903년 조선에게 중국 동북부에 있는 단둥 항의 부근에 있는 압록강의 의주항을 미국에게 개항할 것을 제안했다. 영국과 일본, 러시아는 각각 다른 항구의 개항을 요구했다. 미국은 조선이 거부했지만 계속 요구를 굽히지 않다가 러일전쟁이 발생하면서 교섭은 더 진행되지 못했다(https://rmc.library.cornell.edu/Straight/timeline_text.html#top).

1904년부터 1905년 동안 만주와 한반도에서 이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기 전 1905년 7월 일본의 총리 가쓰라 다로와 미국의 육군장관 태프트는 ‘미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한다’는 내용의 ‘가쓰라-태프트 비밀협약’을 맺었다. 이어 그해 8월12일 일본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외교적으로 보장하는 제2차 영일동맹을 체결했다. 일본은 여러 제국주의 열강의 동의를 얻어 한국의 식민지화를 노골적으로 추진했다(https://rmc.library.cornell.edu/Straight/timeline_text.html#top).

▲ 일본 제국 내각총리대신 가쓰라 다로(왼쪽)와 미합중국 전쟁부 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미국 26대 대통령 “나는 일본이 조선을 정복하는 것을 보고 싶다”

1905년 9월5일 러일전쟁이 끝나면서 러시아는 조선에서 일본이 최상의 이익을 보장받는데 동의했다. 1905년 11월17일 조선은 을사늑약을 강요받아 일본의 보호국이 되고 말았다. 미국무부는 그로부터 일주일 뒤 서울 주재 공사에게 서울의 미영사관을 폐쇄하고 한국에서 철수하라고 지시했다. 서울의 미영사관은 11월28일 폐쇄하고 모든 영사업무는 동경에서 대행하라고 지시했다. 워싱턴 주재 조선 공사관은 1905년 12월16일 폐쇄됐다(https://rmc.library.cornell.edu/Straight/timeline_text.html#top).

일본은 을사늑약을 체결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 실질적으로 주권을 빼앗고 내정 장악을 위해 통감부를 설치해 식민지에 준하는 통치와 수탈을 자행했다.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26대 대통령은 이에 대해 전혀 반대하지 않았다.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는 노일전쟁이 나기 4년 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바 있었다(Roosevelt to Hermann Speck von Sternberg, 8 August 1900, The Letters of Theodore Roosevelt, Elting E. Morison, ed., II, The Years of Preparation, 1898-1900 (Cambridge, Massachusetts, 1951), 1394.).

“나는 일본이 조선을 정복하는 것을 보고 싶다. 그래야 일본이 러시아를 견제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이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보면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

미국은 당시 다른 열강에 비해 후발 제국주의 국가로 강대국과의 연대를 통해 이익을 챙기려는 외교 전략에 의존했으며, 일본이 동아시아 최강자로 떠오르자 일본을 주목했다. 미국은 일본과 손을 잡는 것이 동아시아에서 자국의 이익을 챙길 수 있는 방법으로 판단한 것이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자신의 견해에 따라 을사늑약이 만들어지기 4개 월 전인 1905년 7월 일본과 필리핀, 조선을 각각 식민지로 삼는 조건에 합의하 비밀 각서를 만들도록 각료에게 지시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그것이다.

이 밀약에 이뤄진 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을 구체적 조치인 을사늑약을 조선에 강요한 것이다. 일본의 조선 침략 과정에서 미국은 일본과 한통속이 된 제국주의적 야욕을 채우는 짓을 한 셈이다.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 이후 3·1운동에 한민족이 일본의 엄청난 탄압을 받는 것을 철저히 외면하면서 일본 편을 들었다. 미국은 1945년 해방 이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맺을 때 이 밀약을 감안해 한반도, 특히 독도 문제 등을 일본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방향으로 만들어준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 1905년 러·일 전쟁 처리 위한 포츠머스 회담에서 조선 배제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맺어진 뒤 일본은 같은 해 8월 제2차 영일동맹과 9월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한반도 지배권을 미국 등 세계열강들로부터 인정받게 되었다(Roosevelt to Taft, M July 1905, Morison, op. cit., IV, The Square Deal, 1903-1905, 1293. The full text of the Taft-Katsura memorandum, with an introductory note, may be found in John Gilbert Reid, "Taft's Telegram to Root, July, 1905," Pacific Historical Review, IX, 1 (March 1940): 66-70.). 이 조약으로 미국·영국뿐만 아니라 패전국 러시아도 일본의 조선 지배를 승인함으로써 일제의 한국 지배가 국제적으로 확인되었다.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중재로 미국 뉴햄프셔 주의 군항도시 포츠머스에서 1905년 8월부터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강화회의가 열릴 즈음 고종황제가 워싱턴에 특사를 보내 루스벨트에게 아래와 같이 간청했다(Willard D. Straight to "Whitey," 30 November 1905, Willard D. Straight Papers, microfilm edition, reel 11, John M. Olin Library, Cornell University, Ithaca, New York.).

“조선과 미국이 1882년 5월 제물포에서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 제 1조가 ‘두 나라가 제 3국으로부터 불공경모(공정하지 못한 대우를 받거나 모욕을 받았을 때)한 일이 있을 때 필수상조(필히 서로를 돕는다)를 원칙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오늘날 일본이 조선을 자국의 보호국으로 만들려 하니 조미수호통상조약 제 1조에 근거해 일본을 제어해 달라.”

▲ 미국은 1905년 9월 러·일 전쟁 처리를 위한 포츠머스 회담에서 조선과 중국을 배제하는 전략을 썼다. 사진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의 대통령의 중재로 미국 뉴햄프셔주에 있는 군항 도시 포츠머스에서 일본 제국과 러시아 제국 대표들이 회담하는 장면. 일본 제국의 전권외상 고무라 주타로와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세르게이 비테 간에 러일 전쟁의 강화 조약이 맺어졌다. 사진=위키미디어

루스벨트는 조선 황제의 요구를 접수하기를 거절했을 뿐 아니라 일본이 을사늑약을 체결한 이후 미국에게 서울에 주재하던 영사관을 철수를 요구하자 그에 응했다. 미국이 앞장서 공관을 철수하자 다른 열강들도 뒤따라 동일한 조치를 취했다.

당시 서울 주재 미국 영사관 부영사 윌리엄 스트레이트는 서울의 외국 공관 철수 모습을 신랄하게 묘사했다(Willard D. Straight to "Whitey," 30 November 1905, Willard D. Straight Papers, microfilm edition, reel 11, John M. Olin Library, Cornell University, Ithaca, New York.).

“일본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 뒤 외국 공관의 외교관들이 서울을 빠져나가는 모습은 마치 침몰하는 배에서 쥐들이 도망가는 모습과 흡사했다.”

또한 미국의 유명한 논객이며 정치적 영향력이 막강하던 조지 케난은 당시 조선에 대해 쓴  기행문에서 고종황제를 혹평했다.

“그는 어린애처럼 철이 없고 가부장적인 유목민 보어인처럼 완강하며, 무식하고 우쭐대기만 하는 인물이다.”

케난의 기행문을 읽고 난 루스벨트는 “당신의 그런 통찰력은 훌륭하다”라는 편지를 보냈다(Roosevelt to Kennan, 15 October 1905, Morison, op. cit., V, The Big Stick, 1905-1907, 56.).


미국, 일본이 1910년 8월 조선을 강제 병합하자 한 달 뒤 승인

루스벨트와 미국 정부가 1901년부터 일본의 한반도 강점을 묵인했다는 것은 1900년대 초 한·중·일에서 근무했던 미국 공사가 루스벨트 대통령 및 국무장관과 한국 정책을 협의한 편지와 문서, 보도 문건 등에서 드러났다(경향신문 2007년 4월26일).

거기에는 루스벨트 대통령이 1904년 러·일 전쟁을 앞두고 일본이 미·영의 대기업들로부터 전비 차관을 받도록  주선했고 미국은 1905년 러·일 전쟁 처리를 위한 포츠머스 회담에서 조선과 중국을 배제하는 전략을 썼다는 등의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미국과 일본은 1908년 조선에서의 상표와 저작권 보호 협정을 맺고 조선 거주 미국 시민은 일본 법원의 관할에 속한다는 것에 동의했다(https://rmc.library.cornell.edu/Straight/timeline_text.html#top). 미국과 일본은 1908년 조선에서의 상표와 저작권 보호 협정을 맺고 조선 거주 미국 시민은 일본 법원의 관할에 속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일본은 1910년 8월 조선을 강제 병합해 식민지로 만들었고 그 해 9월 미국은 이를 승인했다(Theodore Roosevelt, Fear God and Take Your Own Part (New York, 1916), 294-97.  https://rmc.library.cornell.edu/Straight/timeline_text.html#top.).


20세기 초 미국의 이기적인 한반도 정책 기조, 오늘날은?

미국이 20세기 초 한반도를 포함한 극동에 대한 정책은 자국 이익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한 방향으로 이뤄졌다. 외교 관계라는 것이 자국 이익 확보를 최우선한다는 시각에서 미국의 태도를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면 그 후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어떤가?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동북아 정책의 핵심 부분의 하나로 미 국익을 최우선 하는 기조 속에 2차 대전 종전이후 일관되게 추진되고 있다.

1945년 미군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북위 38도를 경계로 분할 점령키로 하고 미군이 점령군으로 남한에 진주해 역시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유엔을 통해 강행했다. 그 과정에서 제주 4·3 항쟁이 발생하자 역시 소련을 의식해 초강경 진압작전을 발동하면서 그 결과 많은 양민이 학살당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소련과 중국 견제를 위해 유엔 깃발을 앞세워 참전한 뒤 정전협정이후 평화협정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핵무기를 남한에 들여와 소련과 중국을 견제했다.

오늘날 미국의 대북정책은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취해지고 있으며 그 결과 평화적 방법에 의한 한반도 비핵화 추진 협정이 물거품이 되었다. 미국은 중국 견제를 위해 사드, 고고도미사일방체계를 한국에 배치한 뒤 문재인 정부 당시의 남북 정상회담 합의사항 이행을 중단시켰다. 북한이 최근 비핵화는 없다면서 핵과 미사일 개발, 무력시위를 계속하자 ‘북한 핵 사용하면 김정은 정권 멸망’이라는 대북전략을 확정했다.

▲ 2013년 9월 사드 미사일이 미국 미사일 방어청(MDA) 등 여러 개의 미군 사령부 주관아래 실험 발사되고 있는 모습. 사진=위키미디어

미국의 대북 전략은 북한을 겁박하기 위한 목적이라 해도 한반도 지형적 특성을 고려할 때 전쟁 방지를 위한 평화노력이 절실하다는 점 또한 명백하다.

미국의 대북 정책이 북한 핵을 저지하려는 목적이라고 한다면 남북 정상회담 등에서 합의한 남북한 평화공존과 공동번영이라는 로드맵 또한 문제 해결의 한 방법으로 동시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 주목할 때 최근 미국 국민을 상대로 실시된 한반도 문제 해결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가 눈길을 끈다.


미국인 10명 중 7명, 바이든이 김정은에 회담 제안해야

북한이 전쟁준비태세 완비와 작전전투훈련 확대 강화 등을 결정하고 한미가 맞대응하는 조치를 취하는 가운데 미국 국민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68%가 북미간 긴장 완화를 위해 미국이 적극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미국 여론조사 기관 ‘해리스 폴’(The Harris Poll)이 지난 달 3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국민의 68%는 ‘미국 대통령이 북한 지도자에 직접 회담을 제안해야 한다’고 답했으며 58%는 미국이 북한 비핵화 조치의 대가로 외교적 또는 경제적 인센티브, 즉 유인책을 제공해야 한다고 밝혔다(rfa 2023년 2월7일).

‘미국친우봉사단’(AFSC)의 의뢰로 실시된 이번 여론조사는 지난 1월17일부터 19일까지 18세 이상 미국민 2천63명을 대상으로 진행됐다(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2.8% 포인트).

그 밖의 조사결과를 보면 ‘미국이 북한과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한다’는 미국민도 과반이 넘는 52%로 나타나 지난 2021년 같은 조사보다 11% 포인트 상승했다. 지난해 북한이 역대 가장 많은 미사일을 발사하는 등 북미 관계가 경색되고 있는 가운데서도 미국민들은 여전히 외교적 수단을 통해 평화적으로 북한 문제를 해결하길 원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또  미 정부가 북한에 연락사무소와 같은 외교적 기능을 수행하는 시설을 개설하는 것에 대해서는 지난 조사보다 7% 포인트가 상승한 59%의 미국민이 찬성한다고 했고 미국민의 45%가 ‘미 정부의 규제없이 미국민이 북한에 자유롭게 여행갈 수 있어야 한다’고 답했다.

미 정부는 미국인 대학생 오토 웜비어가 북한에 억류됐다 혼수상태로 풀려난 뒤 일주일 만에 숨진 사건을 계기로 2017년 9월부터 현재까지 북한 여행금지 조치를 시행하고 있다.

63%의 미국민은 ‘미국정부는 미국 민간 자선단체가 북한 주민들을 위한 인도주의 물자를 제공하도록 허용해야 한다’고 답했는데, 이는 지난 조사보다 7% 포인트 상승한 것이다.

rfa는 여론조사 결과에 대해 과반 이상의 미국민은 ‘미정부가 북한에 부과한 제재를 해제해야 한다’고 답하는 등 제재보다는 북한 내 인도주의 문제 해결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고 평가했다.

▲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 지도자. 사진=Flickr, ⓒ 연합뉴스


한반도 핵문제 평화적 해결 외면하는 국내언론, 그리고 머리 검은 미국인

이런 여론조사 결과는 국내 언론이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 국내 언론은 한미동맹을 통한 안보 튼튼을 주로 강조하면서 평화적 방법에 의한 한반도 핵문제 해결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박진 외교부 장관은 22일 CNN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을 분명하게 실재하는 위협으로 규정하고, 미국의 확장 억지만이 이에 대응할 유일한 해법이라고 강조했다.

국내 언론이 한미 두 나라가 혈맹을 앞세우며 추진하는 대북정책이 자칫 전쟁을 유발할지도 모르는데도 무비판적으로 중계 방송하는 식의 보도를 하고 있는 것은 심각한 현상이다. 한반도의 지형적 특성상 전쟁은 엄청난 비극적 참화를 피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이럼 점과 함께 20세기 초 미국이 한반도에서 보여준 파렴치한 국가이기주의가 오늘날 한반도에서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미국 정책을 추종하는 머리가 검은 미국인이 국내 여론 주도층에 지나치게 많은 것이 아닌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 필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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