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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제주4‧3 개입과 친일 경찰 등의 양민학살 ①[연재] 고승우의 ‘미국의 한반도 개입 151년’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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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4.28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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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의 진상에 대해 미군 비밀자료 등에서 확인된 미국의 개입, 친일경찰과 군인들의 양민학살 등에 대해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공개한 관련 자료 등을 2회에 걸쳐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미 군정 조사단 제주도에 파견

제주도에서 1947년 3월 1일 경찰 발포로 민간인 6명이 숨지고, 6명이 총상을 입은 사건에 항의해 3월 10일부터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민‧관 합동총파업이 시작되자 미군정은 카스티어(Casteel) 대령이 인솔하는 조사단을 제주에 파견했다.

미군 보고서는 파업원인을 ‘경찰발포로 도민 반감이 고조된 것을 남로당 제주조직이 선동해 증폭시켰다’고 분석했다. 또한 “제주도 인구의 70%가 좌익에 동조자”라고 기술했다. 한술 더 떠 경무부 최경진 차장은 기자들에게 “제주도 주민 90%가 좌익색채”라는 발언까지 했다.

카스티어 대령이 제주를 떠난 다음날인 3월 14일 조병옥 경무부장과 응원경찰 421명이 급파됐다(당시 제주경찰은 330명). 조병옥은 15일 파업 주모자를 검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틀 새 200명이 연행됐다.

본토에서 파견된 수사요원들에 의해 연행자에 대한 고문이 시작됐다. 1947년 4월 중순께 검속자가 500명으로 늘어났다. 수감자들은 유치장 안이 비좁아 앉지도 못한 채 서서 수감생활을 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이에 대해 미군 감찰보고서는 “10×12피트(약 3.3평)의 한 방에 35명이 수감됐다”고 기록했다.

중문 발포사건(3월 17일), 종달리 6·6사건(6월 6일), 북촌 발포사건(8월 13일)과 1948년 2·7사건 등 민중과 경찰이 충돌하는 사건이 잦아지면서 검속자들은 계속 늘어났다. 3‧1 발포사건 이후 4‧3 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검속자가 무려 2,500명에 이르렀다<1947년 12월 13일자 미군 CIC 보고서>.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 기슭 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주도한 무장봉기가 시작되었다. 350명의 무장대는 12개 경찰지서와 서북청년회 등 우익단체 단원의 집을 지목해 습격하였다.

무장대는 무장봉기가 경찰의 탄압에 대한 저항임을 주장했다. “탄압이면 항쟁이다”라는 삐라의 구호가 이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이라는 구호를 통해 남한만의 단독선거와 단독정부를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다.

딘 군정장관은 4월 17일 경비대 제9연대가 진압작전에 나설 것을 명령하면서 맨스필드 중령에게 “대규모 공격에 앞서 항복을 유도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맨스필드는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에게 무장대와의 협상을 명령했다.

대규모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노력하던 김익렬 제9연대장은 4월 22일 평화협상을 제안하는 전단지를 만들어 비행기를 통해 살포했다. 그 결과 4월 28일 마침내 김익렬 연대장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 간에 평화협상이 성사됐다.

평화협상 결과는 ①72시간 내에 전투를 완전히 중지한다 ②무장해제는 점차적으로 하되 약속을 위반하면 즉각 전투를 재개한다 ③무장해제와 하산이 원만히 이뤄지면 주모자들의 신병을 보장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토대로 평화협상 제안하는 제9연대장의 전단지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친애하는 형제 제위에

우리는 과거 반삭(半朔) 동안에 걸친 형제 제위의 투쟁을 몸소 보았다. 이제부터는 제위의 불타는 조국애와 완전 자주통일 독립에의 불퇴전의 의욕을, 그리고 생사를 초월한 형제 제위의 적나라한 진의를 잘 알았다. 이에 본관은 통분한 동족상잔, 골육상쟁을 이 이상 백해무득이라고 인정한다. 우리 국방경비대는 정치적 도구가 아니다. 나는 동족상잔을 이 이상 확대시키지 않기 위해서 형제 제위와 굳은 악수를 하고자 만반의 용의를 갖추고 있다. 본관은 이에 대한 형제 제위의 회답을 고대한다. 우리가 회합할 수 있는 적당한 시일과 장소를하한 방법으로든지 제시하여주기 바란다.

1948년 4월 22일
제9연대장 육군중령 김익렬

전투 중지 사흘 만인 5월 1일 대낮에 제주읍 오라리에 괴청년들이 들이닥쳐 민가에 불을 질렀다. 경찰은 “폭도의 소행”이라고 몰고 갔으나 김익렬 연대장은 현장조사를 벌인 끝에 우익청년단원들이 자행한 방화임을 밝혀냈다.

미군 방첩대(CIC)는 김익렬 연대장의 보고를 묵살한 채 “폭도의 소행”이라는 경찰의 주장만 받아들였다. 김 연대장은 방화 주동자를 체포‧감금하는 등 평화협상을 유지하려 애썼으나, 미군이 경비대에게 총공격을 명령함에 따라 평화협상은 결국 무산되었다.

미군은 불타는 오라리의 모습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지상과 상공에서 촬영하였고, 각종 동영상 필름을 덧붙여 ‘제주도 메이데이’(May Day on Cheju-Do)라는 무성 영화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마치 ‘오라리 방화’가 무장대가 저지른 것처럼 편집되어 있다.


미국, 4,3 당시 가짜뉴스로 토벌 정당화

<헤드라인제주> 신문은 2018년 10월 4일 "미국, 소련 잠수함 ‘가짜뉴스’에 제주4‧3 학살 당위성 부여"라는 제목의 기사를 아래와 같이 보도했다.

---미국이 제주에 소련 잠수함이 출몰한다는 가짜뉴스 등을 근거로 제주4‧3 학살의 당위성을 부여했고, 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알고도 우려를 표하기 보다는 공산주의자 제거를 명분으로 진압을 격려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2018년 10월 4일 열린 ‘제주4‧3, 진실과 정의-지속가능한 정의를 향해’ 제주4·3 제7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에서 토론자로 참석한 한겨레신문 허호준 부국장은 ‘제주4‧3의 전개와 미국의 역할’을 주제로 발표하며 이같이 밝혔다.

허 부국장은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일으킨 1948년 4월3일 무장봉기 발발의 직접 원인은 경찰과 극우 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항거와 5월10일 치러진 제헌국회선거, 이른바 ‘5‧10선거’의 반대였다”면서 "미군정은 5‧10선거의 성공적인 실시를 한반도 점령기간에 수행하게 될 핵심사안으로 인식하고, 제주도 사태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1947년 3‧1사건 이후 제주도 출신 박경훈 지사가 사임하자 유해진이 제주도지사로 부임했고, 이후 경찰과 극우단체의 제주도민에 대한 체포와 테러가 공공연하게 이뤄졌다”면서 “특별감찰관 넬슨 중령은 제주도의 상황의 엄중함을 알리는 보고서들을 제출하고, 유해진의 교체를 건의했지만 미군정의 군정장관 딘은 거부했다”며 넬슨의 건의가 이뤄졌다면 당시 제주도의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발표자가 만나거나 서신을 교환했던 4‧3당시 제주도 근무 미군 고문관과 서울 고문단사령부 근무 미군은 제주도 대량학살을 목격하거나 보고 받은 사실이 없다고 말했지만, 2연대 미군 고문관은 1949년1월 제주읍 오라리에서 97명에 이르는 남녀 및 어린이 시체를 목격했고, 한 달 뒤에는 도두리에서 76명이 민보단에 의해 죽창으로 학살되는 현장을 목격 했다”면서 “그럼에도 이 정보보고서 외에는 후속 보고 또는 처형 중단 요구나 군경의 행위를 문제 삼았다는 기록은 아직까지 찾을 수 없다”며 미국이 당시 관련 자료를 숨기고 있을 가능성이 있음을 꼬집었다.

허 부국장은 제주4‧3의 전개과정에서 소련 연계설로 등장하는 것이 소련 잠수함 ‘출현설’로, “잠수함이 제주도 연안에 나타났다는 보고가 나올 때 마다 외신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면서 “이러한 정보보고나 언론보도는 모두 가짜로 판명됐고, 이런 ‘가짜뉴스’들은 제주도를 소련의 전초기지이자 미국의 대소봉쇄를 위한 전진기지로 간주하도록 하는데 기여했다”며 이 ‘가짜뉴스’가 당시 미 당국 관계자들에게 제주도 토벌의 당위성을 부여했다고 분석했다.

그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일어난 초토화 시기에도 미국의 개입은 지속됐고, 제주도에서 이뤄진 작전에 대해 일관된 것은 제주도민에 대한 학살에 대한 우려보다는 공산주의자 제거를 명분으로 한 군‧경의 진압을 격려하고 고무한 것”이라며 “주한미군사령부는 (한국군)9연대가 민간인 대량학살계획을 채택했다고 평가하지만, 주한미군사고문단은 이를 저지하기는 커녕 초토화 작전을 감행한 지휘관을 높게 평가했다”고 비판했다.

이어 “제주4·3시기 국내에 있던 미 당국의 제주도 관련 보고서에 등장하는 ‘대량 처형’(mass execution), ‘대량 학살’(mass slaughter), ‘대량 집단학살’(mass massacre) 등의 표현은 그만큼 제주도에서 이뤄지는 대량 학살을 미국이 인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딘 군정장관 제주에도 비밀회의 개최

1948년 5월 5일 딘 군정장관은 안재홍 민정장관, 조병옥 경무부장, 송호성 경비대사령관 등 군경 수뇌부를 이끌고 제주를 방문해 비밀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는 제주 주둔 제59군정중대장인 맨스필드, 제주도지사 유해진, 제9연대장 김익렬, 제주경찰감찰청장 최천, 딘 장관 전속통역관 등 모두 9명이 참석했다.

조병옥 경무부장은 4‧3사건을 ‘계획된 공산폭동’으로 규정하며 강경작전을 주장했다. 그러나 김익렬 연대장은 입산자들이 늘어나는 것은 경찰의 실책 때문이라고 분석하면서, 무장대와 주민을 분리시키고 무력위압과 선무공작을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다 조병옥과 몸싸움을 벌였다. 미군정은 군경수뇌부 회의 다음날인 5월 6일, 그동안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노력하던 김익렬 연대장을 전격 해임하고 후임에 박진경 중령을 임명했다.

5‧10선거를 반대하는 유혈 사태가 전국적으로 줄을 이어 발생하고 좌파 뿐만 아니라 대중의 지지를 받는 김구, 김규식 등 우익과 중도파 민족주의자들까지 선거 반대에 나서는 가운데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한 무장봉기가 제주도에서 벌어지자 미군정은 크게 긴장했다.

무장대는 5‧10선거를 무산시키기 위해 주민들을 산으로 올려 보냈다. 선거 당일 마을에서는 경찰가족이나 우익청년단 간부, 선거관리위원 등 극소수를 제외하고 사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주민들은 산이나 숲으로 가서 머물다 선거가 끝난 후에야 돌아왔다.

1948년 5월 10일 총선거 투표장 모습. [사진출처 - 위키미디어]

1948년 5월 10일 200개 선거구에서 일제히 실시된 선거 결과, 제주도는 남제주군과 제주읍내를 제외하고 대부분 선거가 치러지지 못했다. 남제주군 선거구에서는 무소속 오용국 후보가 당선됐으나, 북제주군 갑구와 을구는 투표율이 과반수에 미치지 못했다.

미군정은 북제주군 갑구와 을구에 대해 선거무효를 선언하며 재선거를 명령했다. 그러나 사태가 진정되지 않자 재선거마저 무기한 연기했다. 이로써 제주도는 5‧10선거를 거부한 유일한 지역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미군정은 제주도에서 5‧10선거가 무산되자 미군 제6사단 제20연대 연대장 브라운(Brown) 대령을 제주지구 미군사령관으로 파견해 모든 작전을 지휘·통솔하도록 했다.

브라운 대령은 당시 사태가 억압 때문에 민심이 폭발한 것이므로 그 원인을 치유하라는 여론이 높았으나 “원인에는 흥미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 뿐”이라며 강경 진압 작전을 본격화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브라운 대령은 “계획대로만 간다면 2주일이면 평정될 것”이라면서 경찰은 해안에서 4㎞까지 지역의 치안을 확보하고, 경비대는 제주도 서쪽부터 동쪽까지 빗자루로 쓸 듯 휩쓸어버리는 작전을 펴고, 해안경비대는 제주 해안을 봉쇄하도록 각각 역할을 분담시켰다.

박진경 신임 연대장은 미군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강경작전을 벌였다. 미군 보고서는 대대적인 체포 작전의 전과에 대해 “6주간 4천 명을 체포했다”고 기록했다. 미군정은 경비대의 이 체포 작전을 ‘성공적 작전’으로 평가하면서 제주에 부임한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박진경 연대장을 대령으로 특진시켰다.

1948년 6월 18일 새벽, 박진경 연대장이 진급 축하연을 마치고 잠을 자던 중 부하의 총에 맞아 피살되었다. 이 암살사건 연루 혐의를 받은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가 총살됐다.

이승만 정권 수립이후 발생한 제주4‧3학살극은 제9연대장 송요찬이 1948년 10월 17일 ‘정부의 최고 지령’에 따라 “해안선에서 5㎞ 이외에 있는 사람은 이유여하를 불구하고 총살하겠다”는 포고령을 발포하면서 예고됐고, 11월 17일 계엄령이 선포됨에 따라 본격화됐다. 그 포고령 내용은 아래와 같다.

포고령

본도의 치안을 파괴하고 양민의 안주를 위협하여 국권 침범을 기도하는 일부 불순분자에 대하여 군은 정부의 최고 지령을 봉지(奉持)하여 차등(此等) 매국적 행동에 단호 철추를 가하여 본도의 평화를 유지하며 민족의 영화와 안전의 대업을 수행할 임무를 가지고 군은 극렬자를 철저 숙청코자 하니 도민의 적극적이며 희생적인 협조를 요망하는 바이다.

군은 한라산 일대에 잠복하여 천인공노할 만행을 감행하는 매국 극렬분자를 소탕하기 위하여 10월 20일 이후 군 행동 종료기간 중 전도 해안선부터 5㎞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함. 만일 차(此) 포고에 위반하는 자에 대하여서는 그 이유여하를 불구하고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임. 단 특수한 용무로 산악지대 통행을 필요로 하는 자는 그 청원에 의하여 군 발행 특별통행증을 교부하여 그 안전을 보증함.

1948년 10월 17일
제주도주둔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


미군 비밀보고서 “제9연대 대량학살계획 채택했다”고 기록

경비대는 중산간마을 주민들이 무장대에게 협조하고 있다며 중산간마을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학살극을 벌였다. 이 작전에 대해 미군 비밀보고서는 “제9연대가 대량학살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을 채택했다”고 기록했다.

제9연대는 모든 중산간마을 주민들이 공공연하게 게릴라에게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을 채택했다. 1948년 12월까지 제9연대가 점령했던 기간 동안 섬 주민에 대한 대부분의 살상이 발생했다.

1948년 5월 제주 4.3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시민들. [사진출처 - 위키미디어]

서귀포경찰서장을 역임했던 김호겸은 서북청년회 출신 경찰들의 행위에 대해 “서청은 무고한 주민들을 죽인 후 보고서에는 ‘현장 답사 차 갔는데 도주, 정지명령에도 불구 계속 도주, 불가피하게 발사, 명중, 사망’이라고 썼다”고 증언했다.

1948년 11월 15일, 군인들은 가시리에 들이닥쳐 마구 총을 쏘아댄 뒤 소개령을 내렸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해변마을인 표선리로 소개돼 표선국민학교에 수용됐다. 12월 22일 토벌대는 호적을 대조하며 ‘도피자 가족’ 76명을 속칭 ‘버들못’에서 학살했다.

서청 출신의 삼양지서 주임은 “하루라도 죽이지 않으면 밥맛이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학살을 일삼던 제9연대 정보과장은 매일 모르핀을 맞아야 하는 마약 중독자였다. 당시는 이런 자들이 제주도민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었다.

1949년 1월 군인 2명이 북촌리 인근에서 무장대 기습으로 사망하자, 대대 병력이 출동해 마을을 불 지르고 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해 이틀 동안 300명 이상이 희생됐다. 젊은 남자가 다수 희생돼 한동안 북촌리는 무남촌(無男村)이라 불렸다.

무장대는 4월 3일부터 경찰과 서북청년회, 대동청년단 등 우익청년단원을 지목해 살해했다. 5‧10선거를 전후한 시기에는 선거 관련자를 집중 공격했다. 무장대는 이 과정에서 경찰과 우익인사 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까지 학살했다.

무장대는 1948년 11월 중순 이후 토벌대의 초토화작전이 벌어지자 자신들에게 협조하지 않는 마을을 습격했다. 이 때 남원리·위미리·성읍리·세화리 주민들이 크게 희생당했다. 이 같은 행위는 향후 주민들과 무장대를 갈라놓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무장대가 궤멸 상태에 놓인 이후에는 굶주림에 처한 잔여 무장대원이 식량을 약탈하러 마을로 들어갔다가 보초 서던 주민들을 살해하기도 했고, 세력 확보를 위해 젊은이들을 납치하는 사례도 종종 발생했다.

중산간마을 주민들은 토벌대 명령에 따라 해변마을로 소개했지만 토벌대의 학살극이 그치지 않자 다시 한라산으로 피신했다. 당초 소개 작전의 목적은 무장대와 일반 주민을 분리시킨다는 것이었는데, 토벌대의 무분별한 행동은 오히려 주민들을 산 쪽으로 쫓아내는 결과를 빚었다.

남편이 어디론가 사라져 ‘도피자 가족’이 된 부인은 늙은 시부모와 어린 자식의 손을 잡고 눈 덮인 한라산으로 향했다. 토벌대의 총부리에서는 벗어났지만 피난생활은 너무나 처절했다. 겨울철 한라산에는 살을 에는 추위만 있을 뿐 먹을 것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많은 피난민들이 굶어 죽고, 얼어 죽었다.

1948년 12월 말, 경비대 총사령부는 대전 주둔 제2연대와 제주 주둔 제9연대를 맞교대시켰다. 제9연대장 송요찬과 마찬가지로 제2연대장 함병선도 일본군 지원병 준위 출신이었다. 제2연대는 여순사건 때 전투경험을 했고, 특히 제3대대는 서북청년회 출신으로만 구성됐다.


이승만, 제주 토벌부대 전투력 강화 속 다랑쉬굴 참극 발생

1949년 3월 2일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유재흥 대령)가 설치됐다. 이 전투사령부는 제2연대와 유격대대 그리고 제주경찰과 새로 증파된 경찰특별부대를 통합 지휘했다. 이처럼 제주 토벌부대 전투력을 강화한 까닭은 1년 전 무효화된 선거를 재실시하는 문제와 미국 원조에 관한 대통령의 초조감 때문이었다.

1948년 12월 18일, 제9연대 제2대대는 다랑쉬마을 근처에서 피난민과 그들의 은신처인 작은 굴을 발견했다. 군인들은 굴 밖에 있던 사람들을 총살한 후 굴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오라고 외쳤다. 굴속으로 수류탄을 던져도 사람들이 나오지 않자 밖에서 불을 피워 질식사시켰다. 희생자는 11명으로, 이 중에는 50대 여성도 있었고 아홉 살 난 어린이도 있었다.

다랑쉬굴을 발견한 제주4‧3연구소는 1992년 3월 29일 제민일보 4‧3취재반과 합동으로 현장조사를 했다. 언론은 1992년 4월 2일 첫 보도 이후 집중적인 취재를 통해 사건 날짜 및 상황, 희생자의 신원과 유족 등 사건의 전모를 밝혔다.

사건의 실체가 알려진 뒤 유족과 도민 여론은 “양지바른 곳에 안장(安葬)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행정·정보기관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해 화장으로 결정되었다. 유해는 1992년 5월 15일 불에 태워져 바다에 뿌려졌고, 다랑쉬굴은 봉쇄되었다.

다랑쉬굴의 유해는 발견 당시부터 4‧3참극의 상징이 되었다. 그 희생은 저항도 못하는 주민들을 무참히 살해한 초토화작전의 실상이었고, 캄캄한 굴속에 갇혔다가 40여 년 만에 햇빛을 보았지만 허무하게 화장된 것은 진실을 은폐하고 외면하려고 했던 당시대의 현주소였다. 다랑쉬굴 유해 발굴 직후 경찰과 행정기관은 굴 입구를 시멘트로 막았고, 주변에 철조망을 쳤다.

함병선 연대장은 유재흥 사령관이 제주에 온 1949년 3월 말까지 실질적인 진압 책임자였다. 미군 비밀문서는 “함병선은 신분이나 무기 소지 여부를 가리지 않고 폭도 지역에서 발견된 모든 사람을 사살하는 가혹한 작전(severe tactics)을 폈다”고 기록했다. 이 때 ‘북촌 사건’이 발생했고, 봉개리 주민들이 집단 학살됐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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