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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일본, 한반도 점령과 군정 실시[연재] 고승우의 ‘미국의 한반도 개입 151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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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3.2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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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전쟁부주1)는 일본이 예상보다 일찍 항복하면서 최종적으로 일본에 대한 간접통치 정책을 채택하고 ‘태평양군 사령관이 천황을 포함한 일본 정부의 기구를 통해 자신의 권한을 행사하며 연합군간의 이견이 있을 경우 미국이 결정권을 행사한다. 미국은 천황제를 포함한 일본 정부 형태의 지속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정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천왕을 포함한 일본 정부의 지배력을 중단시키고 맥아더 미군 최고사령관이 천왕과 일본 정부 기구를 총괄하는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다. 동시에 연합군 사이에 이견이 발생할 경우 미국이 주도권을 갖게 되었다.주2)

미 전쟁부의 일본에 대한 통치계획은 일본의 식민지로 미국이 인식하고 있던 북위 38도 이남 한반도에서도 적용되었다. 미국은 한반도를 연합군이 주도하는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계획만을 세웠을 뿐 한반도에 대한 별도의 점령 정책은 전혀 검토하지도 않았다.

이에 따라 맥아더의 지휘를 받은 하지 중장이 한반도 미군 점령군 사령관으로 부임해 군정 초기에는 일본에 대한 통치계획을 액면 그대로 실시했다.주3)

맥아더는 미 정부가 만든 일본 점령 정책 수행한 군인에 불과

일본 항복 이후 미국의 일본 점령정책에 대해 흔히 맥아더가 주인공인 것처럼 기술하거나 남한 군정의 경우 군정사령관 하지 장군에게 초점을 맞춰 맥아더나 하지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과 같은 인상을 주고 그런 인식이 팽배해 있다. 그러나 맥아더는 그의 상층부에 미국 대통령, 미 전쟁부, 합동참모본부 등이 존재했고 그는 미국 정부가 1942년부터 준비해온 일본 점령 정책을 실행하는 역할에 불과했다.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맥아더의 지휘를 받았기 때문에 일본에 진주한 점령군의 일부에 불과했고 미국의 남한에 대한 군정의 기본적인 틀은 이 정책에 의해 추진되었다. 이런 점을 감안해서 남한에 대한 미군정의 기본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 정부의 남한을 포함한 한반도에 대한 정책을 토대로 삼아야 한다. 맥아더와 하지 장군의 역할은 미국 행정부의 결정사항을 집행한 실행자에 불과했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태평양전쟁 이후 한반도가 포함된 일본에 대한 점령 계획을 1942년 2월부터 시작했다. 당시 루즈벨트 대통령은 ‘전후 외교 정책 자문기구’를 만들어 전후 일본, 독일, 이탈리아 등에 대한 복구 계획에 대해 조언토록 했다.주4) 일본의 경우 이 위원회는 후에 ‘극동부처간지역위원회(IDAFE)’로 대체되어 1942년 가을부터 1945년 여름까지 234회 회의를 가졌고 수시로 대통령과 협의했다.

연합군 또한 태평양 전쟁 기간 동안 독일에서처럼 일본도 분할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최종 단계에서 연합군 최고사령부(SCAP)가 일본 열도 가운데 큰 섬 4개인 홋카이도, 혼슈, 시코쿠, 규슈 등을 직접 지배하는 것으로 결정하고 이 4개 섬 외의 일본이 지배하던 지역은 연합군이 분할 아래와 같이 점령키로 했다.주5)

소련 ; 북한과 남부 사할린, 쿠릴 열도.
미국 ; 남한과 오키나와, 아마미 군도, 오가사와라 군도와 미크로네시아 군도의 일본 영토.
중국 ; 대만과 펑후 군도.

미국은 1945년 8월 초 일본의 항복이 임박하자 합동참모본부가 트루먼 대통령에게 태평양지역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을 연합군최고사령관(SCAP)으로 임명해 일본의 항복과 점령을 총괄할 것을 건의했다. 이에 맥아더는 마닐라에 있는 자기 휘하 참모들이 일본 점령에 대한 구체적 준비를 시작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주6)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피폭 이후에도 일본은 연합군이 제시한 항복 조건을 수용하지 않았다. 일본 군부는 천황이 절대 군주로 존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입헌군주제를 주장한 미국 측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소련이 8월 8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고 그 다음 날 두 번째 원폭이 나가사키에 떨어지면서 일본은 무조건 항복했다. 미국이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 다음 날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한 것은 종전을 앞당겨 소련의 동북아 진출을 압박하려는 계산이었다는 것이다.


미국,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 다음날 원폭 투하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 투하된 미국 원폭 폭발 모습. [사진출처 - National Archives Museum]


미국은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유럽에서 독일을 점령하는 등 위세를 과시한데 이어 극동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심히 우려하고 있었다. 미국의 이런 조바심은 태평양전쟁 종전 이후 미군이 일본을 우군으로 만들기 위해 전범처리 등을 약하게 하는 방식으로 노력했고, 남한에 점령군으로 진주해 친일청산을 차단하면서 친사회주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노력을 강화한 것에서 확인된다.

즉 소련의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크게 의식해 일본에 대한 원폭 투하를 결정했다는 추정이 가장 큰 힘을 얻고 있다. 미국은 소련이 만주를 더 많이 점령할 기회를 차단하기 위해 종전을 서둘렀다는 것이다.주7)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되는 시점이 가까워진 1945년 8월 미국은 유럽에서 승승장구하면서 독일 심장부로 진격한 소련의 동북아시아 진출을 저지하기 위한 전략수립에 고심했으며 그 결과 일본의 항복이 기정사실화 되었는데도 일본에 두 번에 걸쳐 원폭을 투하했다. 핵 공격을 받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두 도시에서 현장 사망 23만 명, 부상 및 후유증 피해 51만 명 등 총 74만 명의 원폭 피해자가 발생했다.

두 도시는 군수 도시로 강제로 끌려와 노동에 동원됐다가 피해를 당한 한국인 피해자는 10만여 명으로 그 가운데 5만 명은 즉사하고 5만 명이 살아서 4만 3,000명이 영구 귀국하고 7,000명이 일본에 거주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인 가운데는 원폭 투하 후에 일제에 의해 잔해 제거에 강제동원되어 피폭되는 경우도 많았는데 부상자들은 일제에서는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홀대를 받았고, 귀국 이후에도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다.주8)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태평양전쟁은 끝났다. 원자탄 두 발에 일본은 갑작스럽고 극적인 모습으로 무릎을 꿇었다.주9) 소련은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기 일주일 전에 만주에서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면서 전쟁을 개시해 전리품을 챙기는 작전을 시작했다. 소련은 파죽지세로 진격하면서 만주에 포진해 있던 일본군 2백 만 명을 무장해제 시키는 한편 한반도와 일본 본토까지 진격해 일본의 항복을 접수하려는 기세로 보였다.

중국은 장개석과 모택동 두 세력으로 이분되어 있었고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던 장개석 군이 천하를 통일할 가능성은 희박한 상황이었다. 소련과 모택동 군이 연합하면 중국 전역의 공산화가 가능했다. 미군은 당시 오키나와까지 점령했지만 일본 본토와 한반도로 군대를 진입시키려 노력한다 해도 소련군에 뒤질 수밖에 없었다.


미국, 소련에 북위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확정해 통고

당황한 미국은 1945년 8월 13일 소련의 한반도 주둔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한반도 전역 점령을 막기 위해 북위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확정해, 소련에 통고했다. 미국은 원자탄이라는 신형 무기가 일본에서 가공할 파괴력을 보인 것을 소련에게 과시하면서 제안한 것이다.

“한반도의 절반인 38도선을 경계로 소련과 미국이 분할 점령하자.”

소련은 미국의 원자탄에 기가 꺾여 미국의 제안을 수락했다.

소련은 1945년 8월 21일 해방군의 기치를 들고 원산에 상륙, 평양에 소련군사령부를 설치하였고 9월 8일에는 미국이 점령군의 위상을 앞세워 인천항을 거쳐 서울에 진주했다. 소련이 한반도 분할 점령을 요구한 미국의 제안을 실천한 것이다. 전쟁 상황에서는 연합군 체제라 해도 공정, 신뢰, 이타정신은 찾기 힘들고 국가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전리품을 챙기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소련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미국이 새로 개발한 가공할 파괴력을 지닌 핵무기의 위세에 밀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소련군은 일본이 항복 선언을 한 뒤 가능한 한 많은 일본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공격적인 군사작전을 계속했다. 이런 작전은 1945년 8월 말까지 쿠릴 열도와 남부 사할린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도 포함됐다.주10)

그러나 소련은 일본 열도의 주요 4개 섬 어느 섬도 점령하지 못했는데 이는 미국의 확고한 반대도 그 원인의 하나였다. 스탈린은 소련군이 맥아더의 직접 지휘를 받는 것을 원치 않았고 당시 스탈린의 주 관심사는 아시아보다 유럽에서 공산주의 영향력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미국의 핵 공격과 소련의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 이후 연합군에 항복하면서 일본 정부는 포츠담선언을 수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에 따라 미군은 8월 30일 일본에 도착해 연합군의 일본인 공격 금지. 일장기 사용 금지 등의 포고령을 발표했다. 미국은 1945년 말까지 43만 명의 미군을 일본에 주둔시켰다.

일본은 9월 2일 항복문서에 서명해 공식 항복했고 트루먼 대통령은 9월 6일 ‘일본 항복이후 미국의 초기정책‘을 승인했다. 이 정책은 두 개의 목표를 세웠는데 △일본군 무장해제와 일본이 향후 미국이나 세계의 평화, 안전에 위해가 되지 않게 하며 일본의 전쟁 가능성의 배제, △이 정책의 궁극적 목표는 일본 국민의 의사에 따라 일본 정부를 구성하고 일본을 유엔 헌장에 맞는 민주국가로 만드는 것이었다.주11)

‘일본 항복 이후 미국의 초기정책‘은 1945년 4월 미군의 일본 열도에 대한 공격이 임박하자 미 국무부가 전쟁부의 요청에 따라 만든 것이다.주12) ‘일본 항복 이후 미국의 초기정책‘은 일본에서의 경제정책 방안을 수립하기 위해 발족한 ’미 국무부와 전쟁부, 해군부의 합동위원회(SWNCC)‘ 산하의 극동지역 소위원회에 제출되었다. 1945년 7월 말 포츠담 선언이 발표되었을 때 직접적인 군사정부 설립 방안이 포함되었지만 8월 11일 간접적 통치 방식으로 변경되었다.


‘일본 항복 이후 미국의 초기정책‘은 미 국무부가 작성

1945년 7월 26일 포츠담 선언을 앞두고 미국 트루먼 대통령,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 등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는 모습. 이 회담에서 한국문제와 관련해서는 제8항에서 ‘카이로선언의 조항은 이행될 것’이라고 천명함으로써, 전후 독립을 재확인했다. [사진출처 - wikipedia]

포츠담 선언은 1945년 7월 26일 미국의 대통령 트루먼, 영국의 수상인 처칠, 중국의 총통인 장제스가 포츠담에서 서명해 발표하였고, 그 후 8월 8일 소련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도 대일전 참전과 동시에 이 선언에 서명했다. 선언은 연합국이 일본에 대해 최종적으로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고, 또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본에 대한 처리 방침을 포괄적으로 제시했다.

한국문제와 관련해서는 제8항에서 ‘카이로선언의 조항은 이행될 것’이라고 천명함으로써, 전후 독립을 재확인했다. 포츠담선언은 모두 13개 항목으로 되어 있다. 제1∼5항은 일본의 무모한 군국주의자들이 세계인류와 일본국민에 지은 죄를 뉘우치고 이 선언을 즉각 수락할 것을 요구하면서 제6항은 군국주의의 배제, 제7항은 일본영토의 보장점령, 제8항은 카이로선언의 실행과 일본영토의 한정, 제9항은 일본군대의 무장해제, 제10항은 전쟁범죄자의 처벌, 민주주의의 부활 및 강화, 언론·종교·사상의 자유 및 기본적 인권존중의 확립, 제11항은 군수산업의 금지와 평화산업 유지의 허가, 제12항은 민주주의 정부수립과 동시에 점령군의 철수, 제13항은 일본군대의 무조건항복을 각각 규정했다.

미국은 1945년 일본 항복 이후 한반도 남쪽에 군대를 진주시키고 발표한 맥아더 포고문 제1호에서 미군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 임을 분명히 밝히고 북위 38도선 이북에 들어온 소련군과 대치했다. 미군의 군사통치 체제인 미군정은 1919년 중국 상하이에 설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해방직후 독립정권을 수립하기 위해서 선포된 여운형 중심의 인민공화국 등 모든 정치단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미군정은 일제의 통치기구와 친일파 행정관리들을 접수해 군정을 선포한 뒤 일본총독부 소속 일본 간부들을 미군정의 고문으로 위촉하고 과장급 아래의 일본인 실무자들은 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계속 근무를 하게 했다. 미군정은 이어 한국인으로 일제 치하에서 공공기관에 근무한 사람들을 원래 자리로 복귀시켰다.

이는 맥아더가 일본에서 전범세력의 일부를 미군정체제에서 등용한 것과 동일한 조치였다. 맥아더는 일본과 남한을 소련의 동북아 진출을 저지할 교두보로 만들기 위한 미국 정부의 전략을 수행한 것이다. 그 결과 한국에서는 친일파가 해방정국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하게 되고 결국 일제 잔재를 청산치 못하게 만든 가장 핵심적 요인의 하나로 지적된다.

주)

1) 미국 전쟁부(The United States Department of War, the War Department)는 미 육군을 지휘하고 관리하던 미국 내각 중 하나였고 1949년에 미국 국방부로 이름을 바꿨다.

2) https://www.ndl.go.jp/constitution/e/shiryo/01/022shoshi.html

3) https://press.armywarcollege.edu/parameters/

4) Barnes, Dayna (2017). Architects of Occupation: American Experts and the Planning for Postwar Japan.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ISBN 978-1501703089. p. 32-33.

5) https://en.wikipedia.org/wiki/Occupation_of_Japan

6) Takemae, Eiji (2002). Inside GHQ: The Allied Occupation of Japan and its Legacy. Translated by Ricketts, Robert; Swann, Sebastian. New York: Continuum. ISBN 0826462472.. OCLC 45583413. p. 48.

7) https://www.theguardian.com/world/2020/aug/04/hiroshima-atomic-bomb-us-japan-history

8) https://namu.wiki/w/%ED%9E%88%EB%A1%9C%EC%8B%9C%EB%A7%88%C2%B7%EB%82%98%EA%B0%
80%EC%82%AC%ED%82%A4%20%EC%9B%90%EC%9E%90%ED%8F%AD%ED%83%84%20%ED%88%AC%ED%95%98

9) James F. Schnabel, United States Army in the Korean War, Policy and Direction: The First Year (Washington, 1971), 811.

10) "History News Network - As World War II entered its final stages the belligerent powers committed one heinous act after another". hnn.us.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08-12-16. Retrieved 2008-07-19.

11) text in Department of State Bulletin, September 23, 1945, pp. 423–427.

12) 미국 정부가 주도권을 쥐게 되는 것에 대해 다른 연합군이 반대하면서 논란이 되었지만 1947년 7월 19일 최종적인 합의가 이뤄졌다.(https://en.wikipedia.org/wiki/US_Initial_Post-Surrender_Policy_for_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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