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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 ‘사법살인’과 긴급조치 9호동아일보 대해부 3권 - 2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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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8.17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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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조치 1호와 4호는 반유신정권투쟁을 누그러뜨리는 데 한동안 효력이 있었다. 그러나 국내가 조용해진 데 반해 미국, 일본, 서독 등 해외에서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단체들이 결성되고, 1974년 7~8월 미국 하원 외교위원회에서 ‘한국 인권 문제 청문회’가 열리는 한편 인권 탄압과 전체주의적 사회 통제를 이유로 한국에 대한 경제·군사 원조를 크게 삭감하자는 여론이 거세게 일어나자 박정희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박정희의 유화책과 되살아난 반유신투쟁

‘철권통치’만으로는 독재권력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박정희는 1974년 8월 23일 긴급조치 1호와 4호를 해제했다.

그러나 9월에 가을학기가 시작되자 대학가에서는 민청학련 관련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9월 17일 고려대 총학생회가 구속학생 석방을 주장하는 내용의 유인물을 제작했다가 경찰에 압수당한 것을 시발점으로 23일에는 이화여대 학생 4천여 명이 교내에서 집회를 열고 구속된 인사와 학생 석방, 국민기본권 보장, 언론자유 보장 등 6개 항을 결의했다. 그렇게 뜨거워지기 시작한 대학가의 반유신투쟁은 겨울방학 직전인 12월 중순까지 계속되었다.

재야의 반유신 민주화운동도 전열을 강화해나갔다. 9월 23일 강원도 원주교구에서 열린 성직자 세미나에 참석했던 신부 3백여 명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결성하고 인권과 민주회복을 위한 기도회를 잇달아 열기로 결정했다. 9월 26일 사제단은 서울 명동성당에서 2천여 명의 성직자와 신도가 참여한 가운데 ‘순교자 찬미 기도회’를 열고, 유신헌법 철폐와 긴급조치 무효화, 국민의 기본권 보장, 민주헌정 회복을 요구하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동아일보사 언론인들의 자유언론실천운동이 한창이던 1974년 11월 18일 서울 광화문 문인협회 사무실에 문인 30여 명이 모여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결성하고 구속된 학생들과 재야인사들의 석방, 언론·출판·결사·집회·사상 등의 자유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재야세력은 12월 25일 민주회복국민회의(국민회의)를 창립하고 민주화운동의 구심점으로 첫 발을 내디뎠다. 윤보선, 이희승, 김재준, 김수환, 정일형, 김대중 등이 고문을, 윤형중, 함석헌, 강원용, 천관우, 이태영, 김영삼 등이 공동대표를 맡았다. 국민회의는 1975년 3월 초까지 7개 시도지부와 20개 시군지부를 결성했다.

이보다 앞서 신민당 정무회의는 11월 12일 개헌안을 확정했다. 그 내용은 통일주체국민회의 폐지, 주권재민의 원리와 기본권 절대화, 대통령의 4년 연임제, 국정감사권 부활이었다.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11월 14일 기자회견을 열고 “오늘의 상황에서 개헌을 거부하는 행위야말로 역사에 대한 도전이며 민족에 대한 배신임을 엄숙히 경고한다”고 말했다. 그는 “여당 측은 국회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우리의 성의있는 노력을 끝내 다수의 횡포로 짓밟아 국민의 실망과 분노가 한계선을 넘었으므로 신민당은 이제 국민의 선두에서 장외투쟁을 전개할 것을 선언한다”고 밝혔다.

  국내의 유신반대투쟁이 강화되는 가운데, 박정희 정권에 대한 세계 여론, 특히 미국의 언론과 의회 내 여론도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투표라는 새로운 카드를 꺼내 들었다. 1975년 1월 22일 박정희는 특별담화를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은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들의 찬반 여부,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신임 여부를 묻기 위해 국민투표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민주화운동세력들은 공정한 민주적 절차, 언론탄압 중지, 구속자 석방 등을 요구하고, 자유로운 찬반투표가 보장되지 않는 국민투표는 기만행위에 불과하다고 지적하였다. (·····)
  1975년 2월 12일 강행된 국민투표에는 총유권자의 79.8%가 참여하였고 그중 73.1%가 유신헌법에 대해 찬성표를 던진 것으로 발표되었다. 1972년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의 91.9% 투표와 91.5%의 지지율에 비하면 훨씬 저조한 것이었다. (·····)
  행정부 말단조직까지 동원된 ‘행정투표’로 선심 공세와 위협까지 퍼붓고, 부정행위까지 저지른 사실을 감안한다면, 투표 결과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감이 국민 다수에게로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저조한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투표 다음날인 2월 13일 압도적 다수표로 현행 헌법은 물론 대통령인 자신에 대한 신임이 확인되었다고 주장하면서, “국민총화를 바탕으로 거국적 정치체제를 발전시켜 나갈 것”이라는 내용의 특별담화를 발표하였다. 이어 2월 15일 긴급조치 1·4호 위반자 중 형이 확정되어 있던 56 명을 구속집행정지로 석방하였다. 2월 17일에는 대법원 형사부가 지학순 주교, 김찬국 연세대  교수, 강신옥 변호사, 이철 등 23명의 피고인에 대해서도 구속집행정지 결정을 내려 이들을 석방하였다(<한국민주화운동사 2>, 157~162쪽).

박정희가 일련의 유화책으로, 악화된 국내외 여론을 무마하려고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과 재야인사들을 대대적으로 석방했으나 그 효과는 오래 가지 않았다. 3월 중순부터 대학가에서 반유신투쟁이 다시 터져나왔기 때문이다. 3월 31일 고려대 학생 1천5백여 명은 대강당에서 ‘반독재구국선언문’과 결의문을 채택했다. 4월 7일 오후 5시 2천여 명이 밤늦게까지 시위를 벌였는데, 그들 가운데 50여 명은 도서관에서 밤샘농성에 들어갔다. 4월 8일 오전 고려대 학생 3천여 명이 교내에서 다시 격렬한 시위를 벌이자 박정희는 오후 5시를 기해 고려대를 대상으로 긴급조치 7호를 발동했다. “고려대에는 휴교령이 내려져 일체의 교내 집회와 시위가 금지되었다. 위반자는 3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었으며, 국방부장관이 병력을 동원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한 대학을 상대로 대통령이 비상대권을 발동하는, 유례를 찾기 어려운 조치가 단행되었던 것이다. 서강대, 한신대도 1975년 4월 석방학생 복교와 학원민주화,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계속하였다. 고려대에 이어 한신대에도 휴교령이 내려졌고, 4월 9일까지 서울대의 8개 단과대학과 한국외대, 연세대, 서강대 등이 휴교에 들어갔다.”(같은 책, 173쪽).

박정희가 짧은 기간 펼치던 유화책은 긴급조치 7호 발동과 함께 완전히 취를 감추었다.


‘사법사상 암흑의 날’

박정희가 고려대를 대상으로 긴급조치 7호를 발동하던 4월 8일 대법원은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 가운데 서도원, 도예종, 하재완, 송상진, 이수병, 우홍원, 김용원, 그리고 민청학련 관련자 여정남에게 원심대로 사형을 확정했다.
동아일보 4월 8일자 1면에 판결의 내용이 크게 보도되었다.

  (···) 이날 대법원 판결로 작년 4월 3일 박 대통령이 학원사태에 관한 대통령긴급조치 4호를 선포한 이래 진행된 민청학련 관련자에 대한 구속 및 재판절차는 매듭지어졌으며 인혁당 사건 등의 고문조작설에 대해서는 대법원에 의해 부인된 것으로 낙착지어졌다.
  이날 대법원은 1백60페이지에 걸친 판결문을 통해 피고인들에게 대통령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내란선동, 반공법 위반, 뇌물공여를 적용한 원심인 비상고등군재의 판결에 잘못이 없다는 것을 자세히 설명했으나 이일규 대법원판사만이 이강철 피고인 등 17명의 피고인에 대해서는 고등군재가 사실심리를 하지 아니하고 재판을 한 재판절차에 위법이 있으므로 원심이 파기되어야 한다는 소수의견을 내세웠다.

 
4월 10일자 동아일보(9일자는 휴간) 1면 머리에는 충격적인 기사가 나왔다.

  지난 8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도예종(50) 등 ‘인혁당 재건단체’ 사건 관련자 8명이 형 확정 다음날인 9일 오전 서울구치소에서 모두 교수형으로 사형이 집행됐다. 비상군법회의 관계자에 따르면 이날 형 집행은 비상군법회의 검찰관과 서울구치소장, 제1육군교도소 군의관, 군목, 입회서기, 구치소 형집행관 등 6명의 관여로 진행됐다. (·····)
  이날 사형수들은 태반이 종교의식을 거부했으며 유언을 할 때 도예종은 “조국의 통일을 원한다”는 말을 남겼고 나머지 7명도 사상 신념과 연관되거나 가족문제 등에 대한 유언을 남겼다고 비상군법회의 관계자가 전했다. 그는 “도예종의 유언 중 ‘조국의 통일’이라는 표현은 공산주의적 적화통일을 뜻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기사는 비상군법회의 관계자가  “도예종의 유언 중 ‘조국의 통일’이라는 표현은 공산주의적 적화통일을 뜻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는데 도예종은 그런 유언을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나중에 판명되었다.

4월 8일 대법원에서 8명의 사형이 확정되자 이튿날 아침 서울구치소로 면회를 간 가족과 친지들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 구치소 정문과 담벽을 치면서 통곡을 터뜨렸다. 마지막 면회조차 못한 남편, 아버지, 형이 이미 싸늘한 주검으로 변했거나 교수대에 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오후 법무부 직원들과 정보기관원들이 그들의 주검을 버스에 싣고 화장장으로 가려고 한다는 소식을 들은 천주교 신부 문정현 등 재야인사들과 유족은 서울 응암동 네거리에서 버스를 가로막았다. 그러나 폭력으로 유족들과 재야인사들을 뿌리친 그들은 8명의 주검을 화장해서 어딘가에 뿌려버렸다. 그들의 시신에서 고문의 흔적이 발견되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으려는 의도였음이 분명하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그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이라고 선포했다.


일제강점기보다 가혹한 ‘다카키 천국’

역사학자 최상천은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사법살인’을 일제강점기의 재판과 비교했다. 창씨명이 다카키 마사오인 박정희 정권 시기가 훨씬 더 가혹했다는 것이다.

  3·1 운동 민족대표에게 내린 일본제국의 최고형은 3년이었다. (···) 일본제국은 ‘빨갱이 두목’ 박헌영이 미친 척하자 정신이상을 이유로 풀어줬다. (···) 일본제국은 악독한 짓도 많이 했지만 그래도 지킬 건 지켰다. 독립운동가도 거의 정식 재판을 받았고 길어야 2~3년 정도 감옥살이를 했다(<알몸 박정희>, 사람나라, 2001, 274~275쪽).
  최상천은 “‘다카키 천국’에서는 인민혁명당 근처에 가보지도 않은 사람들을 잡아다 족치고는 8명에게 사형, 8명에게 무기징역, 6명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하고 그 이튿날 번개 같이 처형해 버렸다”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조차 무차별 고문하는 나라, 하루 16시간 노동을 하며 무한 착취에 시달려도 어디에도 하소연할 곳 없는 나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절규하며 분신자살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호소할 수 없는 나라. ‘오적’ 시 한 수로 졸지에 빨갱이가 되어버리는 나라. 수많은 학생을 감옥 보내고 대학에서 쫓아낸 나라. 대학에 탱크 끌고 들어가는 걸 밥먹듯 하는 나라. (···) 일제시대에도 이런 야만은 없었다. 박정희는 오직 자기의 두목 권력을 위해 감시, 협박, 매수, 미행, 전화 도청, 연행, 사생활 추적, 세무조사, 감금, 고문, 테러, 살인, 사건 날조 등등 악행이라고 생긴 악행은 다 동원했다(같은 책, 275쪽). (이상 <한국현대사산책-1970년대편 2권>, 233쪽에서).

2005년 12월 7일, 국가정보원 과거사위원회는 “인혁당 사건은 조작”이라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2007년 1월 2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는 인혁당 사건 피고인 8명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같은 해 8월 21일 서울민사지방법원은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 대해 국가의 불법행위를 인정하면서 시국사건사상 최대인 배상액수 637억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남베트남 정부의 무조건 항복과 한국의 ‘안보 열풍’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당시 한국에서는 월남이라고 불렀음) 정부 대통령 두옹 반 민이 공산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베트콩임시혁명정부(PRG)’에 정권을 정식으로 이양했다. 30년에 걸친 인도차이나전쟁이 막을 내린 것이었다. 동아일보 그 날짜 1면 머리에는 외신을 종합한 기사가 실렸다.

  월남 정부군이 투항을 명령받은 약 2시간 후인 30일 정오(한국시간 오후 1시)가 지나자 베트콩 기를 흔들면서 공산군을 태운 10여 대의 탱크가 환호하는 군중을 헤치면서 사이공 시내의 대통령관저인 독립국 광장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수백 명의 시민들이 몰려들어 초록색 군복을 입은 베트콩 군인들에게 환호를 보냈으며 미소를 짓는 베트콩 군인들은 손을 흔들었다. 이보다 앞서 베트콩 탱크들은 공중을 향해 일제사격을 했는데 이는 그들의 승리에 기쁨을 표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두옹 반 민 월남 대통령은 30일 오전 10시 14분(한국시간 11시 14분) 월남의 무조건 항복을 발표하고 정부군에 전투를 중지하라고 명령했다.
  이로써 30년 간에 걸친 월남전은 공산군의 승리로 끝났다.

동아일보는 5월 1일자 2면에 「인지전(印支戰)의 종결 / 아시아 평화시대로의 전환점 되길」이라는 사설을 올렸다.

  (···) 월남의 실함(失陷)으로 지난 4반세기 동안 인지에 깊이 관여했던 미국은 사상 최초의 패전을 맛보게 되었고 막대한 인적 물적 소모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강국이자 자유진영의 기수로서의 위신에 큰 손상을 입게 되었다. (·····)
  이제 미국은 인지의 악몽과 좌절감에서 벗어나 아시아의 우방들과 보다 긴밀한 협조 하에 새로운 대 아시아 정책을 재정비해야만 할 때가 왔다고 본다. (···)
  미국은 그동안 기회 있을 때마다 대한(對韓)방위공약을 누누이 재확인해 왔지만 이제 키신저 장관의 말마따나 일단 약속한 그러한 대한공약은 미국이 끝까지 지켜야 할 것으로 우리는 새삼 재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이 인지에 이어 다른 곳에서마저 또 다시 공약을 이행하지 못할 경우엔 미국은 모든 맹방들로부터 불신과 이탈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고 결국은 고독한 종이호랑이가 되어 서반구 안으로 움츠려 기어들어갈 수밖에 다른 도리는 없을 것이다. (·····)
  (···) 오늘날의 인지 사태는 우리로서 충격적인 것임엔 틀림없겠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위축될 필요는 없고 인지의 교훈을 되새겨 우리의 자위능력과 민주적 국민총화에 만전을 기하고 한편 전쟁 억지책의 일환으로서의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강화하면서 궁극적으로는 한반도의 문제는 결코 유혈이 아니라 평화적 자주적 방법으로 해결될 수 있도록 남북한 5천만 민족이 다 함께 각성 노력해야만 할 것으로 확신한다. 인지전의 종결이 다른 아시아 국가에의 또 다른 분쟁의 연쇄반응이 아니라 격동하는 아시아에서 새로운 평화시대의 전환점이 되기를 기대해 마지않는 바이다.

이 사설은 베트남전쟁이 북베트남의 승리로 끝난 것을 교훈으로 삼아 한국의 ‘자위능력과 민주적 국민총화에 만전’을 기하자고 강조하고 있다. 그 말은 남베트남 정부의 패망을 계기로 한국사회에 곧 불어닥칠 ‘안보 열풍’을 예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위의 글에서 심각한 문제로 드러나는 것은 베트남전쟁에 대한 인식이 피상적이고 역사적 진실에 어긋난다는 점이다. 1965년에 박정희 정권은 “6·25 동란 지원에 대한 미국과 월남에의 도의적 보답이라는 뜻”으로 월남의 대공전을 지원했다는데, 당시 상황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았다. 그 시기에 ‘추악한 전쟁’이라고 국제적 비난을 받던 베트남전쟁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은 미국의 존슨행정부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유우방’을 그 전쟁에 끌어들여야 할 필요를 절실히 느꼈다. 그래서 미국은 인도차이나가 공산화하는 것을 막는 ‘반공투쟁’에 한국이 파병하도록 음양으로 압력을 가했다. 정치·경제·군사적으로 미국에 종속되어 있던 박 정권이 존슨 행정부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음은 물론이고 파병에서 오는 막대한 ‘경제적 수입’이라는 당근은 ‘고도경제성장’을 밀고 나가던 박정희에게는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결국 박정희는 야당과 학생들, 재야 민주화운동세력이 ‘용병 파견’이라고 격렬하게 반대하는 것을 무릅쓰고 베트남에 전투부대를 보냈던 것이다.

남베트남 정부 붕괴와 북베트남의 무력에 의한 ‘통일’이 세계적인 뉴스가 되어 있던 5월 2일 오전, 재계·학계·문화계 등 각계의 원로급 인사 55명이 참여한 구국동지회(대표 이갑성) 발기총회 및 시국선언대회가 열렸다. 그 모임에서는 ‘위난의 조국을 위하여’라는 제목의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이 채택되었다.

“오늘의 조국은 중대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오늘의 우리들은 국민 상하가 합심 협력하여 무엇보다도 총력안보의 거국적인 체제를 더욱 강화시켜야 된다. (···) 공산세력의 집중포화 속에 초토화되고 있는 인도차이나 사태가 이제는 피안의 불로만 볼 수 없게 됐다. (···) 총력안보라는 지상의 명제를 저해하는 어떠한 독소라도 국민의 이름으로 과감하게 제거되어야 한다.”(동아일보 5월 2일자 1면).

동아일보사는 5월 3일자 1면에 한국신문협회와 공동 명의로 「국가안보에 관한 결의문」을 실었다.

  5천년 유구한 역사를 지켜온 우리나라는 지금 어떠한 처지에 놓여 있는가.
  온 국민은 눈을 크게 뜨고 냉엄한 현실을 직시하고 그에 과감히 대응해 나아가야 한다.
  크메르의 붕괴와 월남의 처참한 최후는 우리에게 크나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그 반면 역사적인 교훈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것은 공산주의자들의 정체를 적나라하게 다시 한 번 볼 수 있었다는 사실과 함께 자기나라의 방위는 남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힘에 의해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월남사태에 고무된 북괴 김일성의 중공 왕래와 중공의 미묘한 동태는 6·25 전야를 방불케 하는 긴박한 정세를 조성하고 있다.
  그들은 한반도에 월남의 재판(再版)을 기도할 것이 분명하다. 월남의 공산화는 그들로 하여금 무모한 침략행위를 자행할 가능성을 조장시켰다고 할 수 있다. (·····)
  이와 같이 현하의 조국의 안전보장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는 중대성에 비추어 한국신문협회는 전 회원의 일치된 합의에 의해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채택하고 우리의 나아갈 길을 소상히 밝히는 바이다.
  1)우리는 현하 조국의 안전보장이 초긴박 상태에 있음을 깊이 인식하고 조국의 안전과 민족의 자존을 위해 국론을 통일하고 단결 총화의 길로 향도하는 언론의 책임과 사명을 진다.
  2)정부는 나라를 배반하고 국민의 총화 단결을 저해하는 사회의 부조리를 조속히 정리하는 한편 건전한 사회기풍을 진작하여 조국수호의 숭고한 애국정열을 집약할 수 있는 과감한 시책이 있기를 요망한다.
  3)국가안보의 논의는 이제 정치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오직 국가적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지식인과 종교인, 예술인, 학생, 노동자, 농민 할 것 없이 모든 국민은 국론을 통일하고 우리의 조국을 우리의 힘으로 지킨다는 국민적 자각을 새롭게 하기를 호소하는 바이다.

5월 2일 열린 구국동지회의 시국선언대회를 신호 삼아 5월 5일부터 안보 또는 반공을 외치는 궐기대회가 잇달아 벌어졌다. ‘안보궐기대회’는 5월 10일 절정에 이르렀다. 동아일보 그 날짜 1면에는 「1백40만 시민 총력안보 궐기 / 여의도광장에서 결의문 채택 / 멸공구국 다짐」이라는 기사가 사진과 함께 크게 실렸다.

  (···) 총력안보국민협의회(의장 이맹기) 주관으로 열린 이날 대회에서 여의도광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은 각종 피켓과 플래카드의 물결 속에 “국론통일을 저해하는 일체의 이적행위를 배격한다” “미국은 대한방위공약을 보강 실천하라” “자주방위 결의 아래 총력안보체제를 확립하자”는 등 5개 항의 결의문을 채택한 뒤 “총력안보 굳게 다져 남침 흉계 분쇄하자” “4천만이 일어섰다 침략 망상 포기하라”는 등 구호를 드높이 외치며 멸공구국 대열에 앞장설 것을 다짐했다. (·····)
  대회장 허정 씨는 대회사를 통해 “자기나라의 안보를 남에게만 의존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는 것이 인지 사태의 교훈”이라고 강조하고 “이제 우리는 총화단결과 국론통일의 바탕을 확립, 일단 유사시엔 모두 최전선에 나가 죽음을 무릅쓰고 멸공통일을 이룩하자”고 다짐했다. (·····)
  시민들은 또 ‘대통령에게 보내는 메시지’에서 “4·29 특별담화를 지지, 멸공 구국 대열에 기꺼이 참여할 것을 선서하며 민족의 생존과 국가보위를 위해 강력한 대비책과 총력전체제를 더 한층 강화해 줄 것을 호소했다.


박정희, 긴급조치 9호 선포

남베트남 정부가 무조건 항복을 한 4월 30일 이래 북한이 당장 남한을 공격하려 한다는 구체적 정보는 전혀 없었다. 그리고 미국이 한국군에 대한 전시작전권을 장악하고 있는 상태에서 북한이 무력의 열세를 무릅쓰고 전면전을 일으킨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그러나 남한을 들끓게 하던 ‘안보 열풍’은 그런 객관적 정세를 이성적으로 고려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뜨거운 ‘총력안보’의 외침을 배경으로 박정희는 1975년 5월 13일 긴급조치9호를 선포했다. 그 날짜 동아일보는 1면 머리에 긴급조치의 내용과 박정희의 ‘특별담화’를 대서특필 했다.

  (···) 이날 오후 1시 30분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 주재로 열린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선포된 긴급조치 9호는 1)유언비어를 날조·유포하거나 사실을 왜곡하여 전파하는 행위 2)집회 시위 또는 신문·방송·통신 등 공중전파수단이나 문서·도서·음반 등 표현물에 의해 헌법을 부정·반대 또는 비방하거나 그 개정·폐지를 주장하거나 청원 또는 선전하는 행위 3)학교당국의 지도·감독 하에 행하는 수업·연구 또는 학교장의 사전허가를 받았거나 기타 의례적 비정치적 활동을 제외한 학생의 집회 또는 정치 간여 행위 4)이 조치를 공공연히 비방하는 행위 등을 규제했다.
  대통령긴급조치 9호 또는 이 조치의 위반자, 범행 당시의 소속 학교·단체나 사업체에 대해 휴업·휴교·정간·폐간·해산 또는 폐쇄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했다. (·····)
  이 조치는 이밖에 긴급조치 9호에 위반됐을 경우 1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며 이 경우에는 10년 이하의 자격정지를 병과키로 되어 있으며 이 조치 또는 주무부장관의 조치에 위반하는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구금·압수 또는 수색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 기사 밑에 실린 박정희의 특별담화 요지는 다음과 같다.

  (···) 나는 국민총화를 공고히 다지고 국론을 통일하며 국민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총력안보 태세를 갖추어 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오늘 헌법 제53조의 규정에 따라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국가안전과 공공질서의 수호를 위한 대통령긴급조치’를 선포하는 바입니다. (·····)
  우리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한반도에서 전쟁의 재발을 방지하고 항구적인 평화정착을 위해 성실한 노력을 계속 기울여 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북한공산집단이 정세를 오판하여 또 다시 남침을 해올 경우 우리는 이 기회에 단연코 이를 섬멸하고야 말 것입니다. (·····)
  지금 경향 각지에서는 총력안보와 멸공통일의 함성이 우레와도 같이 천지를 진동하고 있습니다.
  이 외침을 우리는 한낱 구호로 그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공산주의와의 대결에 있어 국론의 분열은 패배를 뜻하며 국론의 통일은 승리를 보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다 같이 이 외침과 이 결의를 난국 극복의 원동력으로 삼아 즉각 행동으로 옮기고 끈질기게 실천해 나아갑시다.
  이렇게 할 때 북괴의 남침위협은 하나의 허망된 꿈으로서 무산되고 말 것이며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긴급조치 9호는 1974년 1월부터 발동된 1호부터 4월에 선포된 4호의 내용을 종합한 것으로서, 위반자의 범위를 거의 무제한으로 확대하고 처벌규정도 훨씬 강화한 것이었다.

  (···) 특히 헌법 개정에 대한 청원 자체를 금지함으로써 유신헌법을 신성 불가침의 영역에 올려놓는 동시에,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국민의 기본권을 박탈하였다.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됨에 따라 특정 발언이나 표현이 실제로 유언비어인지 여부와는 관계없이 권력자의 비위를 거스르기만 하면 언제라도 영장 없이 체포·구금될 수 있었고, 언론 봉쇄로 인해 누가 그러한 부당한 처우를 받게 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 조치를 위반하였다고 권력자가 판단한 사람에게 취해진 징계조치는 법의 심판 대상이 되지 않았기에 사실상 권력자는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을 갖게 되었다.
  (···) 박정희 정권은 새로운 긴급조치를 발동하지 않은 채 박정희가 사망할 때까지 4년 6개월 동안 긴급조치 9호를 유지하였다. ‘한국정치범동지회’에 따르면 긴급조치 9호로 구속된 인사들은 1,387명에 달하였고, 긴급조치 9호는 히틀러의 나치독일이나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이탈리아 또는 태평양 전쟁 시기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야만적 법률들과 흡사하거나 오히려 그것들을 능가하는 것이었다(<한국민주화운동사 2>, 181~1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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