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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사 기자들의 ‘자유언론 실천운동’동아일보 대해부 3권 - 2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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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8.03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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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으로 많은 학생과 교수, 종교인들이 구속되자 종교계를 중심으로 석방운동이 일어났다. 1974년 5월 7일부터 6월 10일까지 40일 동안 한신대 교직원과 학생들이 ‘구속학생과 교역자를 위한 연속 기도회’를 열었고, 5월 11일부터 14일까지 기독교장로회 전국연합회, 예수교장로회(통합) 7개 노회장들, 예수교장로회 서울 각 노회가 ‘양심수들’을 석방하라는 성명서를 내거나 그들을 위한 기도회를 가졌다.


민주세력의 민청학련 총력 지원

구속자 석방운동이 계속되는 중에도 재야인사들이 긴급조치 4호 위반으로 계속 구속되었다.

  1974년 5월 8일 연세대 김동길 교수가 긴급조치 4호 위반으로 구속되었고, 1974년 7월 6일 귀국하던 지학순 주교가 김포공항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강제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이에 김수환 추기경이 주교단 상임위원회를 소집하였고, 10일에는 전국 6개 교구의 주교, 신부, 수도자, 평신도 등 1천5백여 명이 명동성당에서 지학순 주교를 위한 기도회를 열었다. (···) 7월 15일 지학순 주교는 성모병원에서 ‘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나의 입장’을 발표하여 부정부패가 만연한 현 체제는 3권 분립이 안 된 1인의 장기집권이며 인간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으므로 현 정부에 반대한다고 선언하였고, 이어 7월 23일 같은 장소에서 양심선언을 발표한 이후 중앙정보부에 다시 연행되어 구속되었다. (···) 그리고 윤보선 전 대통령, 박형규 목사, 김동길 교수, 김찬국 교수 등이 7월 16일 민청학련을 배후 지원한 혐의로 첫 공판을 받았다. 한편 7월 11일 김상근, 이해동, 조승혁, 오충일 목사 등이 중심이 되어 구속자 가족과 교역자, 평신도들이 참여한 목요기도회를 개최하기 시작하였다. 목요기도회는 구속자 가족들이 소식을 전하고 교회와 가족들이 의견을 발표하는 중요한 기회가 되었다. 가톨릭계에서도 석방운동은 계속되었다. 7월 30일 원주교구에서, 8월 5일에는 대전 대흥동성당에서, 8월 12일에는 명동성당에서, 14일 왕십리성당, 15일 원동성당, 16일 인천 답동성당에서 각 교구나 성당 혹은 전국의 사제들이 모여 지학순 주교와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기도회와 미사를 열었다. 이런 기도회와 미사는 지학순 주교만이 아니라 부당하게 구속당한 모든 사람들의 인권과 민주회복을 위한 것으로 확대되어 유신정권 내내 지속되었다(같은 책, 138~139쪽).

당시 진보적 개신교의 근거지인 서울 종로 5가(실제로는 연건동)의 기독교회관에서 매주 열린 목요기도회는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된 사람들의 가족과 재야인사들, 그리고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모여 뜨거운 마음을 주고받던 명소가 되었다. 천주교 사제들이 전국을 돌며 개최하던 ‘인권회복기도회’ 역시 반유신·민주화운동의 보루로서 신자들은 물론이고 많은 시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런데 동아일보를 포함한 주요 언론매체는 목요기도회와 인권회복기도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다. 긴급조치 4호에 저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감옥 밖에서 뜨거운 반유신·민주화운동이 계속되고 있던 1974년 초여름부터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군사재판이 시작되었다.

  6월 15일 오전, 국방부에 인접한 비상보통군법회의 법정에서 학생운동 지도자급 34명(이철, 유인태, 여정남 등)에 대한 첫 공판이 열렸다. (···) 국방부 출입기자들이 자리를 메우고 앉아 있었으나 그야말로 ‘방청’만 했지 ‘메모’를 하는 사람도 없었고(그들은 국방부 대변인의 발표문을 데스크에 전달하는 일밖에 없는 듯했다) 군재 관계자 및 기관원들이 더 많은 자리를 점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공개재판의 원칙을 무시했다는 국내외의 비난이 자자했다. (·····)
  피고인들은 정부를 전복하거나 국가를 변란시킬 목적이 없었다고 한결같이 변소하고, 더구나 그런 목적을 가진 단체를 구성한 바가 없음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이 나라에 팽배해 있는 부정과 불법을 규탄하고, 사회정의와 민주정부의 확립을 촉구하고자 광범한 학생데모를 기도하였으며, 유신체제하의 비리를 바로잡는 것이 구국의 길임을 확신한다는 요지로 공소사실을 부인하였다. (·····)
  한여름의 염천이 국민의 답답한 심정만큼이나 달아오르던 7월 13일, 사상 유례 없는 전격적인 ‘스피드’ 재판이 끝나고 군재에서의 1심 판결이 선고되었다. 사형 7명, 무기징역 7명, 징역 20년 12명, 징역 15년 6명이라는 가히 천문학적 형량이었다. 당초의 구형과 대비해보면 32명 중 29명에 대하여 ‘정찰제 판결’이 떨어졌으며, 사형과 무기징역을 면한 18명의 형기만을 합산해도 340년의 징역이 떨어진 셈이었다(민청학련운동계승사업회 엮음, <실록 민청학련 1-1974년 겨울>, 학민사, 2003, 332~334쪽).

7월 11일에 열린 비상고등군법회의 선고공판에서 재판부는 7월 8일 군 검찰부가 구형한 대로 ‘인혁당재건위’ 사건 관련자 23명 가운데 서도원, 김용원, 이수병, 우홍선, 송상진, 여정남, 하재완, 도예종에 대해 사형을 선고했다. 9월 7일에 열린 비상고등군법회의 선고공판에서도 그들의 항소는 기각되었다.


동아일보사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선언’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으로 많은 청년·학생들과 진보적 운동가들이 최고 사형 선고를 받기까지 그들의 최후진술은 물론이고 변호인들의 변론 내용조차 신문에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는 것을 보고 가장 괴로워 한 젊은이들이 있었다. 바로 동아일보사의 기자들이었다. 특히 개신교의 목요기도회와 천주교의 인권회복기도회에서 구속자 가족들의 피 맺힌 호소를 듣고 기사를 작성해서 동아일보나 동아방송에 내보내려고 해도 부·차장이나 편집국장 또는 방송뉴스 담당 부국장의 손에서 원고가 휴지통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분노와 수치심에 몸서리치던 기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동아일보사 기자들은 1974년 3월 8일 사장 김상만을 비롯한 경영진의 부당한 인사조치와 독선적 회사 운영에 맞서 노동조합을 결성한 바 있었다. 박정희 정권의 방해로 노조설립신고필증을 받지는 못했지만 동아 노조는 조직을 강화하면서 빼앗긴 언론자유를 되찾기 위한 준비작업을 하고 있었다.

  1974년 10월 24일이 밝았다. 당시 한국은 유엔(국제연합)에 가입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유엔데이’인 그날을 공휴일로 지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동아일보사에서 외근을 하던 기자들은 아침부터 회사로 출근해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오전 9시 30분쯤 기협 분회장 장윤환이 신호를 보내자 기협 집행부 사람들이 편집국 한가운데 있던 사회부장 자리 앞으로 모여들었다. 조사부에 근무하던 기자 이계익이 자신이 붓으로 직접 쓴 ‘자유언론실천선언-동아일보사 기자 일동’이라는 세로 두루마리를 기둥에 걸었다. 편집국 안에는 감격의 외침과 함께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편집국 기자들은 물론이고 출판국과 방송국 사원들도 달려왔다. 순식간에 180여명이 모였다. 장윤환이 “한국기자협회 동아일보사 분회 자유언론실천선언 기자총회 개회”를 선언하자 사회를 맡은 기협분회 보도자유부장 장성원이 기자총회를 소집한 이유와 경위를 설명했다. 이어서 분회 집행부 총무를 맡은 편집부 기자 홍종민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낭독했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처한 미증유의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언론의 자유로운 활동에 있음을 선언한다. 민주사회를 유지하고 자유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한 기본적인 사회 기능인 자유언론은 어떠한 구실로도 억압될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것임을 선언한다.
  우리는 교회와 대학 등 언론계 밖에서 언론의 자유 회복이 주장되고 언론의 각성이 촉구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뼈아픈 부끄러움을 느낀다.
  본질적으로 자유언론은 바로 우리 언론 종사자들 자신의 실천 과제일 뿐 당국에서 허용 받거나 국민 대중이 찾아다 쥐어 주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유언론에 역행하는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자유민주사회 존립의 기본 요건인 자유언론 실천에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을 선언하며 우리의 뜨거운 심장을 모아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1)신문·방송·잡지에 대한 어떠한 외부 간섭도 우리의 일치된 단결로 강력히 배제한다.
  1)기관원의 출입을 엄격히 거부한다.
  1) 언론인의 불법 연행을 일절 거부한다. 만약 어떠한 명목으로라도 불법 연행이 자행될 경우 그가 귀사할 때까지 퇴근하지 않기로 한다.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사 기자 일동
                      (<폭력의 자유>, 212~213쪽)


그것은 한국의 현대언론사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이었다. 한국기자협회 동아일보사 분회의 집행부가 정보기관에 연행되어 모진 고문을 당할 것이 뻔한데도 자유언론 실천의 깃발을 높이 들었을 뿐 아니라 ‘저승사자’나 다름없던 ‘기관원’의 언론사 출입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나섰던 것이다. 게다가 동아일보사 경영진은 유신독재정권의 압력을 못 견뎌 그들을 해직할 가능성이 컸다. 정신과 육체가 극한적 고통을 당하고 직장까지 잃을 수도 있는 ‘거사’를 과감하게 일으킨 집행부, 그리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도운 노동조합은 10월 24일 박정희 정권을 향해 선전포고를 한 셈이었다.

기협 동아일보사 분회 집행부는 그날의 기자총회 관련 기사와 ‘자유언론실천선언’ 전문을 동아일보 1면에 5단 이상으로, 동아방송에는 신문에 상응하는 비중으로 보도하기로 결정하고 경영진과 접촉하기로 했다.

집행부는 편집국장 송건호를 통해 기자총회의 결의를 경영진에게 전달했다. 송건호는 언론계에 처음 발을 디딘 이래 자유언론의 대의에 충실하게 살아오면서 기자들의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다. 그는 동아일보사가 언론의 바른 길을 걷기 위해 기자들의 건의를 받아들이자고 경영진에게 권유했다. 그러나 경영진은 “편집국장이 기자들을 통제하지 못하느냐”고 질책하면서 기자총회의 결의사항을 보도하기를 거부했다.

기협 분회의 지시에 따라 기자들은 신문 제작을 보류했다. 송건호가 기자들과 경영진 사이에서 중재를 하려고 애썼으나 회사 쪽의 태도는 완강했다.

  10월 24일자 신문 1판이 나와야 하는 오후 1시에도 신문은 제작에 들어가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후 1시부터는 방송뉴스도 중단됐다. 기자들과 경영진의 피 말리는 대결이 그날 밤 10시가 넘게 계속됐다. 회사 쪽은 선언문 내용 중 ‘기관원 출입 거부’ 부분을 삭제하자고 집행부에 제안해 왔다. 신문·방송·잡지 제작에 외부의 간섭을 배제하겠다는 마당에 ‘기관원 출입거부’를 빼자니 말이 되는가. 집행부는 당연히 그 제안을 거부했다. 그 대신 선언문 전문을 게재하는 것을 조건으로 보도의 크기를 ‘최소한 1면 3단’으로 축소할 수 있음을 통보했다. 회사 쪽은 밤 10시 40분쯤 기자들의 요구를 수락한다고 통고해 왔다. 기자들은 즉시 신문 제작에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1974년 10월 24일자 동아일보는 그 다음 날인 10월 25일 새벽 1시에 제작돼 나왔다.”(<자유언론>, 117~118쪽).


‘자유언론실천 특별위원회’의 활동

동아일보사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선언’은 곧 전국의 신문·방송·통신사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신문과 방송의 보도와 논평은 종전과 달라진 것이 별로 없었다. 기자총회의 선언문을 1면에 3단으로 실은 동아일보사 자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왜 그랬을까?

  언론사 경영진과 편집·제작 간부들의 해묵은 공포증과 피해의식이 가장 심각한 문제였다. 당시 언론계에서는 그것을 ‘연탄가스 중독’이라고 불렀다. (·····)
  무엇보다도 ‘자유언론실천선언’이 발표된 이튿날에 나온 동아일보 자체가 문제였다. 여러 언론사의 ‘언론자유수호선언’과 언론 탄압 중지를 요구하는 야당의 주장, 외신의 반응이 1면에 조그맣게 실렸을 뿐이었다. 10월 24일 오전부터 동아일보사에 출입하던 기관원이 자취를 감추었는데도 지면은 그렇게 나타났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기협 동아일보사 분회는 ‘자유언론 실천 의지를 더욱 질서 있게, 효율적으로 반영하기 위해’ 10월 26일 각 부서에서 뽑힌 30여 명의 기자로 ‘자유언론실천 특별위원회(실천특위)’를 구성하고 그 안에 상임위원회를 두었다. (·····)
  동아일보사에서 자유언론실천운동이 큰 성과를 거두게 된 데는 실천특위와 노동조합의 조직적 연대 활동이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기자인 동시에 ‘노동자’라는 자각을 강하게 품고 있던 젊은 사원들이 낮 시간 근무를 마치고 밤을 새우면서 신문과 방송, 잡지의 기능을 되살리는 데 온갖 힘을 쏟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면과 전파의 쇄신은 짧은 시일 안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관원들의 ‘원격조종’을 받거나 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간부들의 방해공작과 몸사리기 때문이었다. 11월 들어 동아일보 지면에는 대학가의 시위 기사가 ‘1단의 벽’을 넘어 2,3단으로 실리기도 했으나 소극적인 보도라는 비판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11월 11일 실천특위가 보도 금기의 벽을 깨뜨리기로 작정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왔다. 그날 저녁 서울의 명동성당을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의 천주교 교회들에서 ‘인권 회복을 위한 기도회’가 열렸는데, 실천특위는 그 기사의 중요성이 아주 크다고 보고 동아일보 1면이나 사회면의 머리에 올려야 한다고 판단했다.
  기협 분회는 11월 12일 아침 편집국에서 기자총회를 열고 “천주교의 인권회복 기도회를 7면 머리기사 이상으로 사진과 함께 보도해야 하며, 이런 요구조건이 거부되거나 확답이 없을 때는 제작을 거부한다”고 결의했다. 그러나 회사 쪽이 그 요구를 거절하자 기자들은 곧바로 제작 거부에 들어갔다. 경영진과 기자들이 팽팽히 맞선 가운데 타협시한인 12일 하루가 지나가서 결국 그날 동아일보는 휴간되고 말았다. 1945년 8월 해방 이후 한국전쟁 기간 말고는 없었던 일이라고 한다.
  결국 편집국장 송건호가 경영진과 협의한 끝에 “내일부터는 언론인의 양식에 따라 정상적인 신문을 제작할 테니 믿어 달라”고 기자들에게 호소했다. 그는 인권회복 기도회에 관한 기사를 사회면 중간 머리에 사진과 함께 보도하겠다고 약속했다. 11월 13일자 동아일보는 그렇게 제작되었다.
  이 사건은 동아일보와 동아방송, 신동아와 여성동아가 독재권력에 대한 굴종을 떨쳐버리고 자유언론으로 태어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1월 14일자 동아일보 1면 머리에는 신민당 총재 김영삼의 기자회견에 관한 기사가 올랐다. ‘10월 유신’ 이래의 금기가 깨어진 것이었다. 그날부터 동아일보사의 모든 매체는 실질적으로 자유와 해방의 세계를 향해  힘찬 걸음을 내디뎠다(<폭력의 자유>, 218~221쪽).

11월 12일의 제작거부를 통해 천주교의 인권회복기도회를 사회면에 사진과 함께 크게 싣게 된 것을 계기로 동아일보사 기자들과 동아방송 피디와 아나운서들이 자유언론실천운동을 활발하게 펼친 것과 달리 조선일보는 반유신·민주화투쟁 관련 보도에서 굳게 침묵을 지켰다. 10월 24일 밤에 ‘언론자유 회복을 위한 선언문’을 발표한 기자들의 실천의지가 약해서 때문이라기보다는 조선일보사 경영진과 편집간부들의 방해와 간섭이 너무나 심했던 것이다.


  동아일보사에 대한 광고 탄압과 민중의 ‘격려광고’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이 자유언론의 길로 들어서서 한국 사회에서 ‘금기’로 되어 있던 사항들, 곧 야당의 정부 비판, 대학생들의 시위와 집회, 종교계의 인권회복 운동, 진보적 문인들의 활동 등을 사실 그대로 보도하자 박정희 정권은 위기의식을 크게 느꼈을 것이다. 동아일보사 젊은 언론인들의 그런 움직임을 방치하면 정권의 존립 자체가 위협을 당할 것이라고 여겼음이 분명하다.

  그런 위기의식은 동아일보사에 대한 광고 탄압으로 나타났다. 첫 징조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12월 16일이었다. 그날 동아일보사의 광고주인 한 회사의 간부가 광고국에 전화를 걸어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에 대한 광고 배정을 신중히 알아서 하라고 지시했다”고 알린 뒤 광고 동판을 회수해 갔다. 그런 일은 일제강점기에도 이승만 정권 시절에도 없었다.
  동아일보사에 대한 광고 탄압이 명확히 드러난 것은 12월 20일이었다. 그날 오후 4시께 오랜 광고주이던 한일약품의 실무자가 “사장의 지시이니 더이상 아무 것도 묻지 말아 달라”면서 광고 동판을 가져간 데 이어 오후 6시 30분께에는 대한생명보험이 연말까지 계약되어 있던 제호 밑의 돌출광고를 일방적으로 해약했다.
  12월 24일에는 광고 해약 사태가 무더기로 벌어졌다. 럭키그룹, 롯데그룹, 태평양화학을 비롯한 대광고주 10여 곳이 일제히 광고계약을 취소했다. 25일부터는 극장 광고도 모두 끊어졌다.
  그 무렵 동아일보는 평소 하루 8면에 총 48단의 광고를 실어 왔다. 그러나 12월 26일에는 그 절반도 안 되는 23단밖에 광고가 차지 않았다. 그래서 그날 신문은 2면 전체를 기사로 채울 수밖에 없었다. 27일자 신문은 3,4,5,7면을 백지로 발행했다. 탄압이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1975년 1월 25일 현재 평소 상품 광고의 98%가 떨어져 나갔다.
  동아방송에 대한 광고 탄압도 1974년 12월 20일부터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미원과 남양분유를 시작으로 25일에는 13개 광고주들이 해약을 통고했 다. 이듬해 1월 7일부터는 탄압이 훨씬 더 심해져서 광고가 무더기로 떨어져 나갔다. 2월 7일 현재 광고량은 탄압 이전의 8.3%에 불과했다. 신동아와 여성동아의 광고량도 평소보다 90%나 줄어들었다.
  동아일보사의 목을 조르는 ‘검은 손’이 누구의 것인지는 보지 않아도 능히 알 수 있었다. 자유언론실천특위를 중심으로 모인 기자들은 그들의 정체를 밝히기보다 진실을 보도하는 데 힘을 쏟기로 결의하고 취재 현장과 회사 안에서 맡은 일에 충실하려고 애썼다(같은 책, 223~225쪽).

동아일보사는 광고 탄압이 본격화한 지 한 달 만인 1975년 1월 25일자 신문 1면 머리에 「동아 광고 전면 탄압 한 달째」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동아일보 및 동아방송에 대한 광고 탄압은 지난 74년 12월 중순께 모 기관의 지시에 따라 행정부의 관련부처 당국자들이 각 부처 소관별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각 기업체 책임자들을 불러 동아일보 및 동아방송에 광고를 내지 말도록 압력을 넣음으로써 시작됐다. 이러한 모 기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본사와 관련이 깊은 P, Q 기업 등이 지난 1월 초순까지 계속 광고를 내자 모 기관은 그 기업 대표들을 자기네 사무실로 소환, 광고 게재 중지 지시를 어겼다고 힐난한 다음 다시는 동아일보에 광고를 내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거듭 쓰게 하고 동아방송 및 신동아, 여성동아, 동아연감에까지 광고를 내지 말도록 압력을 넣었다.

동아일보사의 광고가 무더기로 해약당하는 사태가 알려지자 범국민적 분노가 폭발했다. 12월 26일 한국기자협회는 “언론기업의 주 수입원을 이루는 광고의 무더기 해약 사태는 자유언론을 억압하려는 미증유의 음성적 조작”이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같은 날 신민당은 동아일보사 광고 탄압에 대한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정부가 언론 탄압을 중지하라는 국내외 여론에 몰리게 되자 탄압수법을 바꾸어 교활하고도 악랄하게 언론기관의 광고주에게 압력을 가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12월 27일에는 재야단체인 민주수호국민협의회와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가, 28일에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의 자유언론실천 투쟁을 지원하려고 국민들에게 호소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30일 명동성당에서 ‘자유언론 회복 기도회’를 열고 “부당하게 억압 받는 언론을 지원하는 뜻에서 범국민적 구독운동을 전개하겠다”고 밝히면서 “압력에 굴복하여 광고를 기피하는 기업체의 상품에 대한 불매운동을 불사하겠다”고 선언했다.

  광고 탄압을 받는 동아일보사를 돕자는 운동은 일반 시민들 사이로 불길처럼 번져나가서 성금과 격려전화, 구독료 선납이 줄을 이었다. 민주수호청년협의회와 구속자가족협의회는 성금을 모으는 일에 앞장섰다.
  동아일보사가 광고 탄압을 하는 ‘보이지 않는 손’에 맞서 신문 지면과 방송 전파로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데도 대부분의 신문들은 ‘일부 신문에 대한 광고 해약’ 같은 제목으로 지면 한 구석에 1단 기사를 실었다. 대구의 매일신문과 부산의 국제신보만이 ‘동아일보사’라는 이름을 명기하고 상당히 크게 보도했을 뿐이다.
  조선일보사와 한국일보사의 기자들이 1975년 1월 13일 모임을 열고 동아일보사에 대한 부당한 압력이 중단될 때까지 공동 투쟁을 하겠다고 선언했으나 경영진과 편집 간부들은 그런 내용이 신문에 보도되지 못하게 막았다.
  1975년 새해가 밝아오면서 성금, 독자 확장, 구독료 선납 같은 ‘동아 돕기 운동’은 ‘격려광고’ 로 바뀌었다. 민주주의와 인권 회복, 사회정의 실현을 요구하는 의견광고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1월 1일자 동아일보 1면에 「언론탄압에 즈음한 호소문」을 광고 형식으로 실었다. 7면에는 「민권의 시대를 창조하자」라는 제목으로 신민당의 격려광고가 나갔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1월 4일자 신문 8면 전체를 차지한 사제단의 의견광고 「암흑 속의 횃불」이었다. 거기에는 구속된 원주교구 주교 지학순의 ‘양심선언’, 1974년 7월부터 1975년 1월 3일까지 열린 64차례의 인권회복 기도회에서 발표된 결의문 등이 들어 있었다. 그 내용은 박정희 정권의 반민주적 행태와 폭압정치에 관한 ‘백서’나 다름없었다.
  1월 10일께부터 동아일보의 지면은 기사와 논설을 빼면 격려광고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종교계와 시민단체, 정당은 물론이고 노동자, 농민, 직장인, 해외동포가 동아일보사 언론인들의 자유언론 실천운동을 격려하는 광고를 보냈다(같은 책, 226~227쪽).

 
1975년 1월부터 3월 중순까지 동아일보에 실린 격려광고는 다양한 목소리를 담고 있었다. 특히 독자들의 눈길을 끈 문안들은 아래와 같다.

· 동아! 너마저 무릎 꿇는다면 진짜로 이민 갈거야.(이대 S생)
· 약혼했습니다. 우리의 2세가 태어날 때 아들이면 ‘동아’로, 딸이면 ‘성아(여성동아)’로 이름을 짓기로 했습니다.(이묵·오희)
·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여백을 삽니다.(밥집 아줌마)
· 직필은 사람이 죽이고 곡필은 하늘이 죽인다.(부산 어느 기자)
· 유신체제 반대, 자유 민주 동아 만세.(아현동 고바우)
· 이 시대에 있어 사람은 폭군, 배반자 또는 죄수 그 어느 쪽이 되어야 하는가 선택하지 않으면 안된다.(시노트 신부)
· 그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시오.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하는 법입니다.(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광주대교구 사제 일동)
· 압제로 못 이룬 총화가 여기에서 이루어져가고 있음을 광고하나이다.(중학 졸업생)
· 예수가 현대에 살아 있다면 그의 직업은 목수가 아니라 신문기자일 거야.(백양로에서)
· 당당하게 버티는 거야. 도깨비는 날이 새면 허깨비가 되나니.(동화작가)

1975년 2월 동아일보 지면에 실린 격려광고는 날마다 300 건이 넘었다. 세계 언론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당시 독자들 가운데는 동아일보를 펼치면 기사보다 광고란을 먼저 본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지면은 ‘민중의 함성’이 울려 퍼지는 광장이었다.


동아방송의 ‘자유언론실행총회’

1974년 10월 24일 아침에 출근한 방송국 사원들은 “3층 편집국에서 자유언론실천 선언을 위한 기자총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선언문 낭독이 끝나자 기자들이 돛을 올린 운동에 박수로 호응했다. 그 시간부터 기자와 프로듀서, 아나운서는 ‘자유언론 실천의 전선’에서 한 몸이 되었다.

프로듀서들은 개신교와 천주교의 인권기도회를 비롯해서 ‘금단의 영역’에 갇혀 있던 취재원들을 찾아 나섰다. 현장에서 따온 녹음 기록은 뉴스보다 생생하고 강렬했다. 그러나 동아일보와 마찬가지로 동아방송의 제작·편성 간부들 가운데 요직에 있던 사람들은 그런 소재를 전파에 싣는 작업을 집요하게 방해했다.

동아방송의 프로듀서와 아나운서들은 자유언론을 본격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노조를 중심으로 뭉쳐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1975년 1월 10일, 동아일보사 기자들은 홍수처럼 밀려드는 격려광고에 보답한다는 뜻으로 편집국에서 총회를 열고 ‘자유언론 실천강령’을 채택했다.
  1)우리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종교 등 모든 영역에서 반민족적, 반민주적, 반문화적 잘못을 색출, 이를 고발, 보도한다.
  1)우리는 자유와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싸우다가 고난을 겪고 있는 모든 민주인사와 그 가족들의 안위를 성실하게 취재, 보도한다.
  1)우리는 이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불의와 부정부패를 과감히 파헤쳐 그 실상을 보도한다.
  1)우리는 관 일변도의 기사보다는 정부의 경제·사회 정책에서 소외당하고 있는 많은 불우한 국민의 편에 서서 그 고통을 함께 나누는 자세로 충실하게 취재, 보도한다.
  1)우리는 광고 탄압으로 빚어진 난국을 다 같이 힘을 모아 이겨내고 자유언론을 굳게 지키며 그것을 성공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특히 불순한 책동과 패배적인 타협을 경계하면서 거사적인 단결을 더욱 공고히 한다.
1)우리는 탄압 받고 있는 동아일보사에 뜨거운 성원을 보내고 있는 국내 민주국민의 열의에 보답하기 위해 자유언론 실천에 더 한층 분투 노력한다(같은 책, 229쪽).

1975년 1월 7일 동아방송에 대한 광고 탄압이 시작되자 프로듀서, 아나운서, 엔지니어, 업무사원 등 115명은 이튿날 모임을 열고 ‘동아방송자유언론실행총회’를 결성했다. 총회는 아래와 같은 결의문을 채택했다.
 
  동아방송자유언론실행총회는 동아방송의 광고 무더기 해약 사태에 즈음해서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첫째, 우리는 지금까지 지켜온 동아방송의 주지를 다시 한 번 다짐한다, 동아방송은 언론의 자유와 편성의 자주성을 견지하고 방송의 권위와 공신력을 높이며 문화 발전과 경제 번영, 사회 순화에 이바지하기 위해서 방송의 품격을 높인다. 그리고 자유와 정의 편에 서서 어떠한 독재에도 반대한다. 앞으로도 계속 이와 같은 동아방송의 주지에 따라서 프로그램을 제작, 방송한다.
  둘째, 우리는 앞으로 동아방송과 동아일보에 대한 외부 세력의 어떠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이 사실을 국민에게 알린다.
  셋째, 우리는 언론의 자유가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투쟁할 것을 다짐한다(<자유언론>, 230쪽). 

실행총회는 광고 탄압에 대한 구체적 대응책을 마련해서 실천에 옮기기 위해 15 명으로 ‘동아방송자유언론실행위원회’를 구성했다. 실행위원회는 1월 9일 부정기 회람인 <알림>을 발행한 뒤 이름을 <SPOT>로 바꾸고 3월 17일 농성 중 강제 해산되기 전까지 14차례 발행을 계속했다. 

실행총회는 1월 8일 광고 탄압과 관련해서 SB(스테이션 브레이크)와 CM 자리에 아래와 같은 내용을 방송하기로 결의했다. “동아방송의 광고주들이 오늘 무더기 해약을 통고해 왔습니다. 이와 같은 사태에도 불구하고 동아방송은 자유와 정의의 편에서 계속 방송할 것을 청취자 여러분께 굳게 다짐합니다. 청취자 여러분의 애청을 계속 바랍니다.”

  동아일보사의 편집국에서 요직에 있던 간부들이 그랬듯이 동아방송의 편성·제작 간부들도 위와 같은 ‘알림 광고’를 보류하자고 실행총회 구성원들을 설득했다. 그러나 실행총회는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안 된다는 결의에 따라 8일 정오부터 위의 문안을 방송했다.
  방송국 사원들이 실행총회를 결성한 지 20여 일 만인 1월 29일 중대한 사태가 벌어졌다.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인 <정계야화> 재방송을 폐지한다고 간부회의가 결정한 것이다. 그 프로는 일요일 밤 9시에 본방송이 나가고 다음 주 아침 8시 30분에 재방송되고 있었다. 동아방송 간부회의는 청취율이 훨씬 더 높은 재방송을 폐지하고 본방송만 존속시키겠다고 일방적으로 사원들에게 통보했다.
  <정계야화>는 4월 혁명 전후 정치권에서 일어난 사건이나 일화를 드라마 형식으로 구성한 프로그램으로서 박정희 정권의 독재와 인권 유린을 연상시키는 내용을 많이 담고 있었다. 실행총회는 회사 방송국 간부들이 외부의 압력을 받고 <정계야화> 재방송을 없애기로 결정했다면 편성의 자주성을 포기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당시 인기 절정이던 프로그램을 스스로 폐지할 까닭이 없었기 때문이다. 실행총회 집행부는 <정계야화> 재방송 폐지가 시사성이 짙은 다른 프로그램들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간부회의 결정을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실행총회가 최종시한으로 통보한 2월 1일 오후 4시가 지나서도 간부들은 응답을 하지 않았다.
  그 무렵 동아일보사에서는 전문 분야가 다른 기자들과 방송국 사원들이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으로 일체감을 가지고 협력하고 있었다. 방송국 사원들이 <정계야화> 재방송을 요구하면서 밤샘 농성에 들어가자 편집국과 방송뉴스부의 기자들이 합류했다. 당시 농성장에는 방송 편성의 자주권을 지키겠다는 결의가 넘쳤다.
  결국 2월 2일 아침 8시 30분에 방송국 사원 전체와 편집국 일부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정계야화> 재방송이 나갔다. 그것은 한국 방송의 역사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편성권 독립을 위한 투쟁이었다(<폭력의 자유>, 231~232쪽).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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