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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언론사상 최초의 기자 중심 노조 탄생동아일보 대해부 3권 - 2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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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7.20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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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장의 내용은 1974년 3월 동아일보사에서 노동조합이 결성되던 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가 해직당한 바 있고 <동아일보 대해부> 연작의 공동집필자이기도 한 김종철이 지은 <폭력의 해부> 190~199쪽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대우가 가장 좋다는 동아일보사에서 노조 결성

동아일보사의 젊은 기자들이 주도한 1973년의 언론자유 수호운동이 유신체제 반대투쟁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사실은 앞에서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1974년 정초에 발동된 긴급조치는 언론의 숨통을 다시 조였다.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일체의 행위’ 뿐 아니라 ‘헌법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발의·제안 또는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까지 금지하는 데다 ‘이런 사실을 알리는 일체의 행위’조차 못하게 한다는 조항 때문에 언론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유신체제에 관해서는 찬양 말고 그 어떤 보도도 하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만일 어떤 기자가 개헌청원서명운동에 관해 쓴 기사를 데스크가 점검을 한 뒤 편집국장에게 보이고 활자화하거나 방송기자가 같은 절차를 거쳐 그런 내용을 전파에 실어 보낸다면, 그들은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15년 이하의 실형을 선고받게 될 것이었다.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대중에게 전달하는 행위가 그렇게 가혹한 형벌의 대상이 되던 시기에 기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었다. ‘미담’이나 써야 하던 1971~1972년의 국가비상사태 때보다 더 엄혹한 시련이 닥쳤던 것이다. 게다가 1974년 초 현재 한국 언론계의 노동조건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그 무렵 언론계에서 대우가 가장 좋은 곳은 동아일보사라고 알려져 있었다. 삼성그룹이 경영하던 중앙일보사보다 신문 판매와 광고를 통한 수입이 월등히 많아서 임금이 조금 더 높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아일보사 사원들이 받던 급여조차도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이들에게는 생활급으로 빠듯할 정도였으니 군소 신문사들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서울에서 발행되던  한 일간지는 외근기자들이 부당하게 거두어들인 돈을 보태서 내근기자들의 임금을 준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 있었다.

근무조건이 제일 낫다는 동아일보사의 기자들이 가장 불만을 품고 있던 것은 사주와 경영진이 사원들을 ‘마름’이나 가속(家屬)처럼 다룬다는 사실이었다. 근로기준법에 규정된 사용자와 노동자가 아니라 봉건적인 상하관계가 불문율처럼 되어 있었다. 그렇다 보니 젊은 기자들의 언론자유 수호운동조차도 경영진과 편집간부들이 상명하복의 군대 식으로 제압하려 드는 일이 잦았다.

그런 상황에서 1974년 3월 5일 동아일보사 경영진이 불합리한 인사발령을 냈다. 3월 1일자로 방송국 인사를 하면서 정경부 기자 서창식과 사회문화부 기자 고준환을 제작1부 프로듀서로, 사회문화부 기자 홍승국을 방송영업부 영업과 사원으로 전격 발령했던 것이다.

인사이동을 당한 세 기자는 기자직으로 선발되어 입사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같은 회사 안의 편집국으로 전보시키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기자직이 아닌 방송국 프로듀서나 일반직 사원으로 보내는 것은 전례도 없을 뿐 아니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언론자유 수호운동을 하던 젊은 기자들은 그 부당한 인사의 표적이 고준환 이라고 보았다. 그가 1974년 1월 18일자 기자협회보에 「언론의 나아갈 길」이라는 제목으로 아래와 같은 내용의 칼럼을 썼기 때문이다.

  기자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은 각자가 서 있는 위치에서 써야 할 기사를 내보내는 일이다. 우리가 알릴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우리 자신이 깨끗해야 한다. 그렇다면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어떻게 사나. 자비로운 언론 기업인이 나오지 않는 한 우리가 일한 만큼의 임금을 쟁취해야 한다. 경영자와 맞설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 그러려면 노조를 만들어야 한다. (<자유언론>, 85쪽)

동아일보사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의 모든 언론사는 노동조합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불온 조직’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노동조합을 결성하려는 움직임은 전혀 없었고, 설령 있다 하더라도 주동자는 가차 없이 해직을 당했을 것이다. 그런데 고준환이 노동조합 결성의 당위성을 공개적으로 주장했으니 동아일보사 경영진이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겠는가?

세 기자가 인사발령을 받은 3월 5일 저녁 동아일보사 방송국 사회문화부 기자들은 회사 부근 무교동의 한 식당에서 송별회를 가졌다. 침통한 분위기에서 젊은 기자들은 인사의 부당함을 비판했다. 그러던 중 한 기자가 “노조를 만들지 않으면 이런 사건이 계속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 회식의 좌장 격이던 사회문화부의 한 차장도 그 말에 동조했다. 순식간에 의기투합한 젊은 기자들은 당장 노동조합을 결성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사회문화부 기자 몇 사람이 언론자유 수호운동의 주역인 동료들에게 긴급히 전화를 걸었다. 우연히 같은 식당의 옆방에서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던 기자들인 조학래, 박순철, 박종만, 양한수가 합류해서 여러 사람에게 연락을 했다. 그들은 식당 밖으로 나가서 유인물을 인쇄할 수 있는 등사기 한 대를 구입했다. 집결장소는 약수동의 김두식(사회문화부 기자) 집으로 정해졌다.

그날 밤에는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공채 ‘막내’인 강정문이 등사기를 약수동으로 날랐다. 김두식의 집에 모인 사람은 모두 12 명으로, 대부분이 공채 10기 이하의 소장 기자들이었다. 그들은 밤늦게까지 토론을 벌인 끝에 노조를 설립하자는 데는 합의했으나 그 자리에서 조합을 출범시키기에는 숫자가 너무 적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 합의를 일체 비밀에 붙이고 이튿날 뜻을 같이 하는 이들을 모아 노조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3월 6일 저녁 김두식의 집에 33명이 모였다. 모두가 편집국, 방송국, 출판국의 기자들이었다. 그들은 노조 결성이 타당한지에 관해 진지한 토론을 벌이고 나서 노조를 결성하기로 만장일치로 합의했다.

「노조 설립 발기문」은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33명의 기자들은 전국출판노조 동아일보사 지부 창립총회를 열고 발기문을 채택한 뒤 조학래(편집국 과학부 기자)를 지부장으로 하는 임원 및 집행기구를 구성하고 운영세칙을 확정했다.

당시 노동조합은 산업별 체제였으므로 노조를 설립하려면 특정 산업노조의 인준필증을 받아야 했다. 그렇게 하려면 전국출판노조의 지부로 출범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법학을 전공한 김두식과 정영일은 첫날 모임 이후 노동조합 전문가들을 만나서 자문을 받아 노조에 가입할 수 있는 범위를 편집국, 방송국, 출판국의 차장급 이하 사원으로 한정하기로 했다. 그 까닭은 공무국과 총무국, 광고국 등은 하나의 조합으로 묶기에는 업무와 노동의 형태가 기자나 프로듀서, 아나운서와 달랐기 때문이다.
이제는 역사적인 문서가 된 ‘발기문’을 아래에 소개한다.

  우리는 언론인으로서의 신분 보장은 물론 최소한의 생활급조차 보장 받지 못하는 근로조건 아래서 허덕여 왔습니다. 업주가 사기업으로서의 논리를 지향하는 이상, 우리 역시 법이 보장하는 테두리 안에서 자구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헌법은 모든 국민이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와 함께 그 구체적인 실현을 위해 단결할 권리도 보장하고 있습니다. 근로자의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 즉 노동삼권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에 오랫동안 숙원이던 언론노조를 발기하는 바입니다. 더 이상 권리 위에 낮잠 자는 바보가 될 수 없습니다. 누구를 위해서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뭉칩시다.

    1974년 3월 6일
    전국출판노동조합 동아일보사 지부 발기위원회(<자유언론>, 87~88쪽)

당시의 법에는 전국출판노조로부터 인준필증, 서울시청으로부터 신고필증을 받으면 노동조합이 자동적으로 설립되는 것으로 명시되어 있었다. 출판노조 위원장 김상곤은 노동운동계에서 평판이 좋았고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라서 노조 집행부가 은밀하게 접촉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 시절에는 정보기관의 눈길이 안 뻗친 데가 거의 없어서 지부장 조학래와 사무장 정영일 등 노조 임원들은 3월 7일 오전 서울 서부역 근처에 있던 전국출판노조 사무실을 조심스럽게 찾아갔다. 김상곤과 사무국장 황태수는 자리에 없었다. 황태수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3월 7일 오전 중앙정보부로부터 전화가 왔다. “동아일보 기자들이 노조를 결성한 사실을 아느냐”고 물어 ‘모른다’고 대답하자 “지금 기자들이 그쪽으로 가고 있으니 서류와 도장을 감추고 자리도 아예 피해버리라”고 압력을 넣었다.
  곧바로 이 문제를 김상곤 위원장과 상의했다. 우리는 기자협회 발족 이후 이 단체를 출판노조의 산하기관으로 두기 위한 교섭을 계속 추진해 오던 참이어서 동아 지부의 창립을 절대적으로 환영하는 입장이었다. 우리 조합에 동아일보가 들어오면 우리의 힘도 강화되리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중정의 압력이 두려웠다. 그래서 인준필증에 미리 도장을 찍어 동아일보 기자들이 그냥 가져가면 되도록 해놓고 자리를 피해버렸다.(같은 책, 88~89쪽)

인준필증을 확보한 노조 임원들은 설립신고를 하려고 서울시청으로 갔다. 서류를 접수시키고 접수증을 받는 것은 아주 중요한 절차였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지부장 조학래 등은 시청 정문으로, 사무장 정영일 등은 뒷문으로 들어갔다. 누군가가 서류를 탈취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시청 담당자는 서류를 꼼꼼히 검토한 뒤 접수증을 발급했다. 거기까지 과정을 보면, 중앙정보부는 전국출판노조가 인준필증을 내주지 않으리라고 믿고 방심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한국 최초의 기자 중심 노동조합은 그렇게 해서 태어났다. 노조 임원 몇 사람은 동아일보사 부근 여관에서 국내 언론기관과 외신기자들에게 설립 사실을 알렸다. 창립총회 참석자들은 회사로 들어가서 노조 설립을 알리는 유인물을 배포하기 시작했다.

노조 설립신고를 마친 3월 7일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 엔지니어 등 무려 103명이 가입했다. 9일까지 조합원 수는 173명으로 늘어났다. 가입 대상자 가운데 3분의 2 이상이 노조원이 된 것이다.


인사위원회가 일방적으로 노조 집행부 해고 결정

동아일보사 경영진은 노조가 설립 신고를 한 이튿날 ‘회사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이유로 지부장 조학래 등 노조 임원 11명과 조합원 박지동·심재택을 전격 해고했다. 노조의 당사자들을 불러 사정을 듣지도 않고 하루 사이에 긴급 이사회와 인사위원회를 열어 봉급생활자에게는 사형이나 다름없는 조치를 일방적으로 발표했던 것이다. 동아일보사 인사위원회 회의록에 기록된 해고 사유는 아래와 같다.

  과거 2,3년 이래에 여러 차례에 걸쳐 발생했으며 최근 다시 새로이 태동하기 시작한 편집국, 출판국 및 방송국의 하급기자들을 중심으로 한 집단소요행동에 관하여 논의하고 이를 근절하기 위한 방안 중의 하나로서 상습적인 주동, 가담자들에 대하여 이제까지 보류해 온 처벌조치를 금회에 단행키로 결정한 후 본사가 현재 당면하고 있는 감원의 긴박성과 집단소요행동이 회사에 미치는 위해를 감안하여 해임하기로 결정함(동아일보사 노동조합 펴냄, <동아자유언론실천운동 백서>, 1989, 45쪽).

이 ‘결정문’에는 노동조합이라는 말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합법적으로 결성된 노조의 집행부 전원을 해고하면서 ‘집단소요행동을 근절하기 위한 방안’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동아일보사 경영진이 언론자유수호운동을 ‘해사(害社) 행위’로 보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단서였다.

게다가 해고된 박지동과 심재택은 노조 임원이 아니었다. 박지동은 대학 시절의 ‘민족주의 비교연구회’ 활동이 문제가 되어 동아일보사 사원으로서 구속된 적이 있고 심재택은 1971년 이후 언론자유수호운동을 주도하다가 중앙정보부의 압력을 받은 회사의 ‘권유’ 형식으로 사직한 뒤 한 해 남짓 만에 복직한 사람이었다.

회사가 인사규정에 따른 절차도 밟지 않고 한밤중에 사내 게시판에 해고 사실을 발표하자 노조에 가입한 기자 13명은 ‘부당해임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대책위원의 수를 13명으로 한 것은 회사가 1차로 해고한 노조 임원 등의 숫자와 맞춘 ‘작전’이었다. 대책위원회 명단에 들어가면 해고당할 것이 명백한 데도 노조원들은 서로 대책위원을 맡겠다고 나섰다.

회사 측은 노조의 기세가 꺾이기는커녕 갈수록 사기가 높아지자 조합에 가입하지 않은 사원들 가운데 반(反) 노조세력을 동원해서 갖은 유언비어를 퍼뜨리게 했다. 회사가 직장을 폐쇄하거나 신문을 휴간하는 일도 불사하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노조 임원들이 해직되었으므로 조합은 없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노조 집행부는 경영진과의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했으나 사장 김상만은 대화 자체를 거부했다. 노조는 다시 경영진 면담을 요청했다가 거부당하자 3월 13일 ‘해고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을 서울민사지법에 제출했다.
동아일보사는 가처분신청에 대량 해고와 징계로 맞섰다. 바로 13일 밤 대책위원회 6명을 해고하고 6명을 무기정직 처분한 것이다. 노조는 이튿날인 14일 김병익 등 15명으로 2차 ‘부당해임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2차 대책위는 “노조의 존재가 회사 측의 우려처럼 결코 사세를 해치리라 생각하지 않으며 오히려 노조를 통한 원만한 노사관계의 확립만이 동아의 활력소가 된다”고 강조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노조의 정당성 인정과 부당해임 및 징계 철회를 요구했다.

1차 해고자들에 대한 해고효력정지 가처분신청에 대한 첫 심리가 3월 21일 서울민사지법에서 열렸다. 변호사 황인철·김상훈·강신옥·홍성우·민병국·박철우가 노조 측을 위해 무료로 변론을 맡았다.


사장 김상만, 법원 판결 앞두고 해직된 노조원들 ‘사면’

동아일보사의 부당해고와 징계에 대한 가처분신청 병합심리를 며칠 앞둔 4월 12일 사장 김상만이 갑자기 ‘특별담화문’을 발표했다. ‘두 차례에 걸친 징계를 4월 13일자로 향후 모두 사면’하지만 ‘노조 명의의 일체 언동, 유인물 배포 및 집회는 엄금’한다는 내용이었다.

노조의 핵심적 조합원 30여 명은 회사 복귀를 두고 토론을 벌인 끝에 “회사가 물리력으로 막아서 출근을 못했으니 당연히 돌아가서 정상근무를 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동아일보사가 ‘사면’ 조치를 취한 배경에는 회사 측 고문변호사의 정보가 작용했다고 한다. 노조가 제기한 가처분신청이 회사 측의 패소로 끝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선고에 앞서 ‘사면’을 발표했다는 것이다.

가처분신청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던 기간에 서울시는 동아일보사 노조의 설립신고서를 반려했다. 노조 임원들이 해고되었기 때문에 노조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노동조합이 합법적으로 결성된 뒤에 사용자 측이 집행부를 해고하면 노조는 해산해야 한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동아일보사 노조는 서울시장의 처분을 취소해 달라고 요구하는 행정소송을 7월 11일 서울고등법원에 냈으나 패소했다. 대법원은 노조의 상고를 기각했다. 법 위에 군림하던 유신독재정권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사법부가 양심적인 판결을 내리리라고 기대하기 어려운 시절에 늘 벌어지던 일이었다.

‘법외 노조’가 된 동아일보사 노동조합은 단체교섭 같은 활동은 할 수 없었지만 조합비를 정기적으로 받아 활동비로 쓰는 한편 전국출판노조에 회비를 꼬박꼬박 내기도 했다.

  동아일보사 기자들의 노조 결성은 한국 언론사상 최초의 기자 중심 노조라는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신문사 공무국 중심의 노조는 1960년대에 동아일보사를 비롯한 몇몇 지방 신문사에서 결성되었으나 그 규모가 아주 작거나 회사 측의 방해로 해체되었다.
  권력에 의해 노동운동이 극도로 제약받고 있는 사회적 상황과, 경영자와 사원의 관계를 부자 간과 같은 관계로 보는 낡은 노사관을 가진 경영진과의 투쟁 과정에서 동아일보사 노조는 큰 어려움을 겪었으나 나름대로의 성과도 거두었다.
  첫째, 동아 노조는 발기문에서 보듯이 표면상으로는 최소한의 생활급과 신분 보장 등을 요구하고 나섰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목표는 자유언론 실천에 있었다. 노조의 설립과 회사 측의 해고, 노조의 법적 투쟁과 전원 복직 등의 과정을 통해 얻은 노조원들의 자신감은 같은 해 10월 24일의 ‘자유언론실천선언’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동아일보사에 노조가 결성되자 각 언론사들은 1974년 상반기에 대폭적인 임금인상을 단행했다. 동아일보사가 4월에 하후상박 원칙으로 18~47% 인상한 것을 비롯해서 서울신문사(30~45%), 조선·한국·신아일보사와 합동통신사(30%), 중앙일보사(32.5%), 경향신문사(25%) 등 중앙과 지방의 신문과 방송이 다투어 임금을 인상했다(<자유언론>, 101쪽).

동아일보사에서 노조가 결성되자 당시 우리나라 언론사 경영자들이 얼마나 충격을 받고 당황했는지는 ‘경영난’을 구실로 사원들에게 저임금을 강요하던 그들이 파격적으로 임금을 올린 데서 여실히 확인되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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