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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쿠데타를 지지한 동아일보동아일보 대해부 3권 - 0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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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2.03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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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월 16일자 동아일보 석간 1면은 충격적인 기사들로 뒤덮였다. 1면 머리에는 아래와 같은 기사가 나와 있다.

  16일 새벽, 군 쿠데타 발생 / 수도 서울을 완전 점령 / 장도영 중장·박정희 소장·김윤근 준장 지휘 / 서울중앙방송 보도 / 공정(空挺) 2개 대대·해병 1개 여단 참가

  해병 제1여단과 2개 공정대대를 선봉세력으로 삼은 혁명부대는 16일 새벽을 기해 수도 서울 일원을 완전히 점령하여 모든 지배권을 장악했다. 집권 9개월째 되는 장면 정부를 불신임하는 이 군부 쿠데타 때문에 3부의 기능은 일체 마비되어 버렸으며 군사혁명위의 포고에 따라 금융기관도 일체 동결, 문을 닫은 채 삼엄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다.
  군사혁명의 지도자들은 서울 점령군의 일부를 육군 예비사단을 투입시켜 대체, 곧 중앙방송국을 점령했으며 혁명위원회를 조직하고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은 장도영 육군참모총장 명의로 발표되었으나 그가 혁명군에 직접 가담했는지의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으며 육군의 현역 전투부대와 해군 및 공군은 무장을 갖추고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군부 쿠데타의 계획과 추진은 육군 제2군 부사령관 박정희 소장 및 해병대 제1여단장 김윤근 준장 등을 핵심으로 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혁명부대를 지휘한 장성과 고급 장교들로 구성된 혁명위원회는 포고를 내려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금융관계를 완전히 동결시켰으며 국내 전역에 걸쳐 항만과 공항을 봉쇄한다는 명령을 발했다. 혁명위는 곧 각 지구의 계엄사령관도 임명했다. 그러나 제(諸) 명령을 발하고 있는 혁명위를 구성한 장성과 기타 장교들의 명단은 전혀 발표되지 않고 있다. (·····)
  쿠데타의 주동세력은 현 육군 제2군 부사령관 박정희 소장과 4·19 혁명 후 부정선거에 가담했거나 또는 부정축재를 한 군 장성급의 숙정을 주장하다가 하극상을 이유로 군에서 추방당한 전 육군 정보국 근무 김 모 중령과 석 모 중령 등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공정대와 해병대를 중심으로 한 직접 행동부대가 새벽 4시경 남대문을 거쳐 서울시청 앞에 다다를 무렵 공정대 2개 대대는 중앙방송국을 점령했고 모 육군소령이 지휘한 병력은 시청과 반도호텔을 장악한 후 그 소령이 직접 반도호텔로 장면 총리를 찾았으나 그는 이미 행방을 감추어 버렸고 그때 장 총리를 방문하러 온 현 국방장관을 시청으로 연금했다고 한다.

이 머리기사의 옆과 밑에는 이런 기사들이 실려 있었다.

· 「윤 대통령 연금 상태 / 혁명위 장성들과 회담」
· 「장 총리 피신? / 미대사관·8군에 은신설」
· 「휴전선 대비 만전 / 유엔군 장병에 금족령」
· 「전국에 비상계엄령 / 옥내·옥외 집회 금지, 언론·출판 검열 /하오 7시부터 야간통행금지 실시」


헌정을 뒤엎은 쿠데타

  “쿠데타에 동원된 총병력은 장교 250명, 사병 3천5백여 명이었다. 현역 해병준장 김윤근과 예비역 해병소장 김동하가 지휘하는 해병 제1여단 병력 1천여 명, 중령 이백일이 지휘하는 육군 제30사단 병력 1천여 명, 대령 문재준과 중령 신윤창이 지휘하는 6군단 포병단 1천여 명, 대령 박치옥 휘하의 제1공수단 500여 명, 6관구 통신대 40여 명 등이었다(김세진, 「한국군부의 성장과정과 5·16」, 김성환 외, <1960년대>, 거름, 1984, 143쪽)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1권>, 265쪽에서 재인용).

공수단 1개 소대는 남산 북쪽 자락에 있던 KBS(서울중앙방송국)로, 해병대 주력은 치안국과 서울시청으로, 해병 수색소대는 중앙전신국으로 치달았다. 새벽 6시 KBS를 통해 ‘군사혁명위원회’의 이름으로 ‘혁명공약’이 발표되었다.

  첫째,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일의(第一義)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 구호에만 그친 반공체제를 재정비, 강화한다.
  둘째,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셋째,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한다.
  넷째,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 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다섯째,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 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여섯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는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이른바 ‘혁명공약’은 무엇보다도 먼저 ‘반공’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 대해서는 쿠데타를 주도한 박정희의 ‘좌익’ 전력 때문이라는 해석이 설득력이 있다(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다루기로 하겠다).

  (···) 쿠데타가 일어난 것은 통일운동 때문도 아니고, 장면 정권의 무능 때문도 아니었다. 전쟁 이후 비대해진 군부는 정치권을 넘보았다. 군부 내 인사가 정체되면서, 불만이 많았던 육사 8기와 9기 중심으로 쿠데타가 모의되었다. 이승만은 군부의 동향을 예의 주시하며 군부 지도자들을 상호 견제하게 하여 군부를 지배했다. 그런데 장면 총리와 민간인 국방장관은 군부 잘 몰랐고, 미국이 민간정부를 지켜줄 것으로 기대했다.
  이승만 정부 붕괴 직후부터 정군(整軍)을 주장했던 김종필·길재호·김형욱 등 육사 8,9기생들은 장면 정부가 출범한 지 3주도 안 된 1960년 9월 10일 부서를 정해 쿠데타 음모를 진행시켰다. 11월에는 김종필의 장인의 아우로 일찍부터 김종필과 가까웠던 박정희 소장을 쿠데타 지도자로 끌어들였다. 쿠데타 모의자들은 1961년에 들어와 4·19 1주년에 시위가 빈발할 것으로 예상하고 3,4월 위기설을 퍼뜨리면서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했지만, 별다른 시위가 없자 5월로 미루었다. (·····)
  쿠데타가 성공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군에서 여러 차례 박정희의 직속상관으로 있었던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은 장 총리와 박정희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그는 장면이 박정희 중심의 쿠데타설에 대해 추궁했을 때에도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고, 5월 16일에도 쿠데타 진압에 소극적이다가 오후에 쿠데타에 가담해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직을 맡았다. 민주당 구파 출신으로 장면 정부에 비판적이었던 윤보선 대통령은 5월 16일 아침에 “올 것이 왔다”라고 말하면서 사실상 쿠데타를 묵인했다. (···) 장 총리는 쿠데타가 발발하자 수도원으로 피신해 미대사관과 연락을 취하다가 18일 오후 중앙청에 나타났다. 그는 구금되었던 국무위원들과 함께 16일 쿠데타 주동자들이 임의로 선포한 비상계엄령을 추인하고 총사퇴했다(서중석, <한국현대사 60년>, 역사비평사, 2011, 89~91쪽).

박정희와 김종필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5월 16일의 쿠데타는 명백히 헌법을 위반한 것으로서 주동자들은 사형 또는 무기징역을 받아야 마땅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7·29 총선으로 구성된 국회가 선출한 국무총리 장면이 내각을 책임지고 있는 바로 그 정부를 전복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쿠데타 주동자들은 실정법을 무시하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는가 하면 공공기관과 방송국을 불법적으로 점거했다.

쿠데타세력이 ‘혁명공약’을 통해 주장한 대로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바로잡는” 일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주권자인 국민들이 선거를 통해 정권교체를 이룬 뒤에 합법적 절차와 방법을 통해 실행하도록 새 정부에 위임해야 하는 일이었다.

5·16 쿠데타는 결과적으로 국민이 세운 민주정부를 총칼로 뒤엎는 선례가 되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비명횡사한 뒤 전두환과 노태우는 박정희가 일으킨 헌정 쿠데타를 되풀이 하면서 민주주의의 부활을 가로막았다.


쿠데타를 지지한 동아일보 사설

5월 16일 오전 동아일보는 ‘호외’를 통해 「오늘 미명(未明) 군부서 반공혁명」이라는 제목으로 쿠데타를 혁명으로 미화한 반면, 조선일보는 「오늘 새벽 군부 쿠데타」라고 표현했다.

그날 오전 9시 ‘군사혁명위원회’는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뒤 ‘포고 제1호’를 통해 언론 활동을 규제했다. 계엄령 제3항은 ‘언론·출판·보도 등의  사전검열’을 강제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들은 보도를 일절 금지한다고 명시했다.

  1)적을 이롭게 하는 사항
  2)군사혁명위원회의 제 목적에 위반되는 사항
  3)반혁명적 선동·선전을 목적으로 하는 사항
  4)치안 유지에 유해한 사항
  5)국민 여론 및 감정을 저해하는 사항
  6)군 사기를 저해하는 사항
  7)군 기밀에 저촉되는 사항
  8)허위 및 왜곡된 사항
  9)기타 지시하는 사항

‘군사혁명위원회’가 이렇게 ‘보도 금지 사항들’을 발표했는데도 동아일보 16일자 석간 1면 머리기사의 제목은 「16일 새벽 군 쿠데타 발생」이라고 되어 있었다.

  “5·16 첫날 「군 일부 쿠데타 일으키다」라는 표제는 검열군인들에 의해 당장 말썽을 빚었다. ‘군부’라고 할 것이지 왜 ‘일부 군인’이라고 했느냐는 것이었다. 이밖에 ‘혁명군이 육군사관학교를 접수했다’는 민족일보의 기사, ‘혁명정부는 앞으로 정부 형태를 내각책임제가 아니라 대통령책임제로 할 것’이라는 대한일보의 보도 등으로 관계기자들이 모두 구속, 실형을 받았다.”(송건호, <한국현대언론사>, 삼민사, 1990, 130쪽).

동아일보는 5월 17일자 석간 1면에 5·16 쿠데타를 지지하는 사설(「당면 중대 국면을 수습하는 길」)을 실었다.

  16일 미명을 기해 난데없이 일어난 요란스러운 총성에 전 시민은 4·19 그 날을 연상시킬 정도로 불안과 공포에 빠졌었으니, 이것이 곧 군의 쿠데타에 의한 장 정권 타도의 신호였음은, 우리로 하여금 놀라움을 금할 수 없게 하였다.
  두말 할 것도 없이 4·19 학생혁명의 산물로서 장면 정권은 집권 아홉 달을 넘도록 그 빈곤하고 우유부단한 정치역량이 이승만 시대에 못지않게 부패성을 내포, 국민의 혐기(嫌忌)와 반발의 대상이 아니 되지 못하게 하였다. 그뿐 아니라, 그의 모든 행정은 창의성과 박진력을 잃어 진정한 청신(淸新) 정치를 기대하기엔, 국민의 신뢰를 완전 상실했다는 것은 이미 공지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장 내각은 그처럼 내정 면으로나 외교 면으로나 모두 무능·무위한 데다가 그나마 자주·자활력을 상실, 마치 병약한 인간이 한 대가(大家)의 치산(治産) 중책을 맡아가지고 허우적거리는 그런 양태를 방불케 해온 것도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그리하여 날로 민생고가 가중해 감에 따라, 민심의 이반도 시일의 흐름과 함께 점점 더해서 오늘에 이르렀지만, 우리는 그때그때 민의의 동향을 살피면서, 이 순간과 같은 초비상 사태가 발생할지도 모를 만일의 경우를 경고해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들은 시종여일 그 아무런 반성과 그에 따르는 발본·획기적인 혁정(革正)이 없이 세월을 도연(徒延)하면서 정권 유지의 일념에만 사로잡힌 듯한 불신의 인상을 국민에게 붙박아 주었음은 극히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으니, 그 같은 적원(積怨)이 곧 오늘과 같은 중대 사태에까지 발전시켰다는 것을 먼저 자괴(自愧)·자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쿠데타와 함께 우리가 느끼는 것은 무엇보다도 ‘피를 보지 않은’ 그것이 불행 중 다행한 일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에 4월 혁명 그때처럼 인명의 희생자를 냈더라면 어찌 됐을까에 생각이 미칠 때, 우리는 지나간 날을 회상하면서 다시 한 번 율연(慄然)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을 것이었지만, 그것이 천행으로 없었다는 것을 우선 국민과 함께 다행스럽게 여겨야 할 일이다. (·····)
  그러면 이 위구(危懼) 속에 빠진 국민, 이 불안 속에 감도는 정국을 어찌 수습·진정시킬 수 있을 것인가. 청와대 회담에서도 논의되었을지 모르거니와, 장 내각은 어째서 국민의 불신을 사기도 했으려니와, 이번과 같은 군부 내의 거사를 보게 되었는가를 황성(晃醒), ‘최후의 결의’가 촉구되는 마지막 단계에 이르지 않았는가 한다. 여기서 우리가 ‘최후의 결의’라 함은 곧 정치도의적 전 책임을 지고 흔연히 용퇴, 국민 앞에 진사(陳謝)하는 성의의 일단을 분명하고 솔직하게 표명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강조하는 까닭은, 앞으로 장면 씨나 민주당의 장래 정치적 재생의 길을 영원히 막아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렇고, 아울러 앞으로 최악의 사태를 빚어내지 않기 위해서도 그렇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혼란이 날짜를 끌수록 철벽같은 반공태세에 만의 일이라도 균열을 일으키지 말게 하기 위해서라도 또 아니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뿐더러, 그것은 대부분의 국민 여론이 그와 같은 이상, 장면 내각은 이제 마지막 태도를 결정 아니치 못하게 됐다. 그러고 나선 어떠한 대책이 있을 것인가는, 종차(從此)의 문제이므로 다음 단계에 논할 성질의 것이다.

5·16 쿠데타는 장면 정부를 무력으로 뒤엎었다. 국가의 근본을 뒤흔드는 ‘군사반란’이 일어났을 때 언론사가 선택할 길은 두 가지뿐이다. 경영진부터 사원들까지 일치단결해서 쿠데타 자체를 부정하면서 ‘헌정 수호’를 위해 비상계엄에 따른 검열을 거부하면서 제작을 포기하거나, 쿠데타를 순순히 인정하고 군사정권에 굴복하는 길이 있었을 것이다. 앞의 방법은 여간한 용기로는 택할 수 없었을 터이므로 동아일보를 비롯한 모든 신문이 두 번째 길로 간 것은 이해는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이후에 입증되었듯이 박정희와 김종필이 주동한 쿠데타를 주요 언론매체들이 서둘러 합법화하고 지지함으로써 1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한국사회는 독재와 전체주의적 압제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쿠데타 직전에 쓴 것이 확실한 5월 16일자 동아일보 1면의 무기명칼럼 <횡설수설>은 4월 혁명 이후의 통일운동을 ‘용공 좌경’으로 몰아붙임으로써 쿠데타의 명분을 미리 ‘인정’한 느낌을 주었다.

  무능부패한 정부, 정당 아닌 도당, 혁명을 팔고 다니는 학생 아닌 정상배, 심지어 김일성 앞잡이들까지 멋대로 놀아나서 바야흐로 세상은 난장판이 되었다. 이 틈에서 좌경기회주의 분자, 회색분자, 부역자들이 때를 만난 듯이 실없는 통일방안이라는 것을 쳐들고 돌아다니면서 사회는 더욱 어수선만 해갔다. 「적기가」를 부르는 무리가 나와도 겨우 15일의 구류, 공산괴뢰들과 판문점에서 만나 같이 부둥켜안고 울겠다고 괴상한 연극을 꾸미는 분자들도 법이 없다는 핑계로 수수방관하는 세상이다.


  ‘혁명정부’의 ‘범국민운동’을 높이 평가

동아일보는 5월 23일자 석간 1면 사설(「내핍·근로의 기풍을 활발히 전개하자」)을 통해 ‘혁명정부’가 추진하겠다고 발표한 정책을 적극 지지했다.

  장도영 내각수반은 22일 5개 항목에 걸친 범국민운동 대강(大綱)을 발표한 바 그중 제2 및 제3항에서 ‘내핍생활’과 ‘근로정신’을 강조하였다. 혁명정부는 이미 용공·중립주의분자들을 비롯하여 깡패·소매치기·댄스광·밀수배 등을 철저히 단속하고 무허가 건축물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수립하는 등 일체의 사회악을 발본색원하는 데 과감히 나섰거니와, 여기서 본란이 특히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국민 일반의 내핍 및 근로생활이다.
  과거에 우리는 우호국의 원조로 적자예산을 보전(補塡)하여 가는 처지에서 일부 국민 간에는 턱없는 사치·허영의 풍조가 휩쓸고 있었다. 외국산 양복을 입어야 하고 외국산 화장품을 써야 하고 외국 담배를 피워야 행세하는 그릇된 작풍이 만성적으로 퍼져서 사회의 한 개 고질로 화하였다. (···)
  대다수 국민이 농촌과 탄광과 공장 기타 작업장에서 열심히 일하면서도 끼니를 이어가기 힘든 현실을 외면한 이들은 오히려 이 같은 비생산적 낭비를 자랑으로 알고 근로를 천시하는 버릇으로 일관하였었다.
  혁명정부는 혁명의 주체인 전 장병들에게 솔선수범할 것을 시달하고 재빨리 실천에 옮겨서 군량미를 절약하여 절량(絶糧)농민들에게 분배하였고, 장병의 요정 출입을 엄금하였고, 요식업자에게는 잡곡을 혼합할 것을 시달하였다. 또 23일부터는 전국적으로 양담배를 일제 단속하여 판매하는 자나 끽연하는 자를 다 같이 입건 조치할 것을 시달하였다. 혁명적인 새 출발을 위해서는 지극히 시의에 적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국민은 누구나 이 같은 새로운 기풍을 자진해서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국가의 재건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이상은 말할 것도 없이 건전한 민주국가를 재건하는 데 있다. 이와 같은 국가를 재건함에는 경제적 기반을 혁명적으로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 절대적 요건임은 물론이려니와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국민 개개인의 머리의 혁명이다. 독재·부패정권 하에서 사회의 기강은 문란할 대로 문란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온갖 독소가 국민의 머릿속에 파고들었다는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머리의 혁명을 과감히 실천해야겠다.

박정희 일파는 쿠데타 직후부터 ‘전시적 효과’를 노리는 정책과 구호를 남발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국가 재건’을 위한 ‘범국민운동’이었다. 나중에 드러났듯이 그 운동은 군사정권의 어용조직을 만드는 데 ‘기여’했을 뿐 국민경제나 정신적 풍토를 개선하는 데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동아일보는 그 과정을 지켜보지도 않고 처음부터 그 운동을 높이 평가하고 나선 것이었다.

동아일보는 5월 24일자 석간 1면 사설(「국가계획위 발족에 기대함」)에서도 쿠데타세력에 대한 ‘찬양’을 계속했다. “이번 5·16 혁명의 성과는 궁극적으로는 북괴경제를 압도할 수 있는 경제성장을 이룩한다는 것일 것이니 국가계획위원회가 발족한 데 대해서는 큰 기대를 아니 걸 수가 없을 것이다. 과거 이 정권 하에서도 장 정권 하에서도 적지 않은 경제계획들이 입안되었었지만 있으나 마나 한 휴지 노릇밖에 못하고 말았다는 것은 그 계획들이 애초부터 실천한 의욕에 불타 있는 자들에 의해서 입안된 것들이 아니라는 데 그 원인을 두고 있었던 만큼 국가재건최고회의의 불붙는 실천의욕에 의해서 뒷받침을 받고 있는 국가계획위원회가 세울 계획이 한층 믿음직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동아일보 5월 26일자 조간 1면 사설(「혁명 완수를 위하여 총진군하자」)은 쿠데타세력의 ‘대변지’ 같은 느낌을 준다.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장도영 중장은 18일 상오 기자회견 석상에서 이번 혁명을 가리켜 “민주적인 절차를 밟은 것은 아니었지만 가능한 유일한 길”이었다고 그 만부득이한 조치였음을 해명하고, 혁명의 목적을 규정하여 방공(防共) 태세를 강화하고 진정한 민주정치를 건설하는 데 있다고 말하였다. 우리는 장 총장의 견해에 전폭적인 동의를 보내면서 다음 몇 가지 사항에 유의하고자 한다.
  첫째는 기성정치인들의 부패·무능·비능률·무궤도한 정권욕과 이조의 4색 당쟁을 능가하는 사투(私鬪)로 말미암아 이번의 군사혁명을 불가피하게 만들어 놓았다는 사실을 심히 유감으로 생각한다 하는 것이다. (···)
  원래 진정한 민주사회를 건설하려는 우리 민족의 열망은 독재를 타도하던 작년 4월에 집중적으로 폭발하였다. 그러나 기성정객들은 정권을 지중(至重)한 책임 아닌 일종의 이권으로 착각하고 독재자의 유산을 쟁탈·분배하는데 혈안이 되었다. 그들의 안중에는 국가도 민족도 없었다. 장황한 수식사(修飾辭)를 입버릇처럼 뇌까리는 배후에서는 추잡한 거래가 흥청거렸다. 생산기관은 차례로 쓰러지고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김일성의 주구들과 그 동맹군은 때를 만난 듯이 사회를 교란하는 데 발광하였다. (·····)
  실로 군사혁명은 구국을 위해서 ‘가능한 유일한 길’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 세대에 이와 같은 사태가 야기된 데 대해서 후세의 역사를 위해서 이 사실을 분명히 기록해 두고자 한다.
  다음은, 이 엄숙한 시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군·관·민을 막론하고 온 국민이 혁명과업의 완수를 위해 총진군을 해야 한다 함이다. 그것만이 진정한 민주체제를 부활시키는 첩경이기 때문이다. 혁명과업이란 장 의장도 천명한 바와 같이 반공과 민주건설이다. 김일성과 그 동맹자들을 우리 사회에서 철저히 뿌리 뽑아 우선 사회를 정화해야겠다. (·····)
  또한 우리는 실로 위대한 건설에 일치단결하여 총진군해야겠다. 종이 사이를 내왕하는 이른바 ‘계획’이라는 것은 휴지통에 쓸어 넣자. 그러고서 당장 괭이를 들고 일어서서 건설을 실천하자. 이 건설은 조국을 번영으로 이끄는 건설, 위대한 조국을 구현하는 건설이어야 한다. 너절구레한 것들을 건설이라고 부르던 과거의 악몽을 깨끗이 떨어버리자. 그리하여 온 민족의 희망과 정열을 총집결하는 엄청나고도 위대한 건설사업을 시작해야 하겠다. (·····)
  이것만이 빈곤을 이 땅에서 영원히 몰아내고 복된 민주주의를 이룩하는 길이요, 북한을 강점한 김일성 역도(逆徒)들을 타도하고 공산노예노동에 신음하는 동포들을 구출하는 길이요 우리 세대가 자손들에게 남겨줄 유일한 역사적 유산이다.


이 사설은 헌정체제를 무력으로 뒤엎은 쿠데타를 합리화하는 면에서 단연 ‘발군(拔群)’이라고 할 만하다. 4월 혁명 뒤 주권자들의 선택에 따라 수립된 장면 정부시기의 모든 것은 너절한 쓰레기라고 단정한다. 그러면서 “군사혁명은 구국을 위해서 ‘가능한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한다.

장면 정부 시기에는 바람직한 민주주의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민주화를 지향하는 절차와 노력은 있었다. 그것을 무참하게 짓밟은 쿠데타세력이 나라를 구했다는 말은 쿠데타세력에 아부에 불과하다.

만약 1961년 5월 16일 새벽 한국 군부의 양심적 세력이 박정희와 김종필이 주동한 군사반란을 제압했다면 그 이후 18년의 역사가 독재와 암흑으로 점철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사설을 내보낸 지 몇 해도 지나지 않아 동아일보는 민정이양을 둘러싼 박정희의 ‘번의 소동’을 비판하는 입장이 되고 말았으니, 그때 이 사설에 관해서는 어떤 반성을 했을까? 


난데없이 나타난 ‘중앙정보부장 김종필’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군부는 5월 18일 국무총리 장면으로부터 ‘비상계엄 추인(追認)’을 받는 형식으로 정권을 인수했다. 헌법에 따라 총선거를 치른 뒤 다수당이 국회에서 총리를 선출해서 내각을 구성하도록 하는 합법적 절차를 무시한 초헌법적 ‘정권 인수’였다. 군사혁명위원회는 5월 19일 국가재건최고회의(이하 최고회의)라고 이름을 바꾸고 조직을 확대한 뒤, 이튿날 ‘혁명내각’ 구성원들을 발표했다.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장도영과 부의장 박정희는 최고회의에서도 같은 직책을 맡았다. 최고회의 위원은 김종호, 박임항, 김신, 채명신, 길재호 등 29명이었고, 고문은 김홍일과 김동하였다.

국가의 ‘최고통치기구’를 자임(自任)한 최고회의는 6월 6일 헌법 기능을 정지시키고 입법·행정·사법 3권을 장악한다는 내용의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공포했다. 비상조치법이 헌법을 대신하는 초법적 통치체제가 만들어진 것이다.

최고회의는 6월 10일 비밀첩보기관이자 실질적인 ‘국민 통제 조직’인 중앙정보부를 창설했다.

  (···) 이미 쿠데타 기획 단계부터 강력한 정보조직을 구상했던 김종필은 육사 8기생들과 함께 중앙정보부 창설을 주도했다.
  중앙정보부는 미국 CIA와 일본 내각조사실 기능을 절충하여 정보수집 업무와 함께 수사업무를 동시에 수행했다. 그 목적은 국가재건최고회의법에 잘 나와 있다. 이 법에는 “공산세력의 간접 침략과 혁명과업 수행의 장애를 제거하기 위해 최고회의 아래에 중앙정보부를 둔다”라고 되어 있다. 즉 중앙정보부는 처음부터 단순 정보기관이 아닌 통치의 “장애를 제거하기 위”한 억압기구로 출발한 것이다. 또한 뒤에 공포된 ‘중앙정보부법’은 중앙정보부 직원이 필요에 따라 타 기관 소속 직원을 지휘, 감독할 수 있게 한 반면 검사의 지휘를 받지 않도록 했다. 한마디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부여한 것이다. 동시에 중앙정보부는 권력의 집행기구를 넘어서 정책 기획과 입안에까지 관여하여 자체에 싱크탱크로서 ‘정책연구실’을 두었다. 여기에는 학자들과 관료들이 참여하여 군정기간 동안 주요 법안 개정뿐 아니라, 농어촌 고리대 정리, 민정이양, 한일국교 정상화 등 굵직굵직한 정책들을 다루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엮음, <한국민주화운동사 1>, 돌베개, 2010, 355~356쪽).

6월 6일자 조선일보 조간 1면에는 난데없는 기사가 나타났다. 「기성정치인은 반성 있기를 / 군부 단결 정치 안정 도모 / 김 중앙정보부장 혁명 경위를 언급」이 바로 그것이다.

  5·16 군사혁명을 성공시킴에 있어 주요한 역할을 하였고 현재 국가재건최고회의 중앙정보부장인 김종필 중령은 5일 앞으로의 한국 경제체제에 언급하여, “그 궁극적인 목표는 자유경제체제이나 거기에 이르기까지 혁명 직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초기의 일정한 기한은 계획경제를 거쳐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하고 혁명 후 오늘날에 있어서도 “기성정치인들은 자기중심적인 책동을 저지르고 있는데 많은 반성을 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김 중령은 이날 하오 3시부터 동 5시까지 2시간여에 걸쳐 최고회의 본회의실에서 내외기자들과 회견하고 혁명이 성공하기까지의 경위에 대하여 문답하였는데 김 중령은 이번 혁명을 일으키는 데 사용된 자금 총액은 860만 원이었다고 말하여 기자들을 웃기기도 하였다.

이 기사가 ‘난데없다’는 까닭은 김종필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중앙정보부장’으로서 기자회견을 했다는 6월 5일에는 아직 중앙정보부가 설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앙정보부는 법률 제619호인 ‘중앙정보부법’에 따라 6월 10일 최고회의 직속기관으로 발족했다. 김종필이 “내가 중앙정보부장이다”라고 신분을 밝히고 기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그것은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기구의 수장을 사칭한 셈이 되고, 오히려 “닷새 뒤에 창설될 중앙정보부장 내정자”라고 했어야 할 것이다. 조선일보가 ‘중앙정보부장 김종필 중령’의 기자회견이라고 보도한 것은 고의적이든 미필적 고의적이든 명백한 오보(誤報)였다.

  김종필은 5·16 쿠데타를 일으키는 데서 박정희 다음 가는 ‘제2인자’ 구실을 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지만, 5월 18일에 발표된 ‘군사혁명위원’ 30명의 명단에는 들어 있지 않았다.


군사 정권의 ‘군대식 사회 정화 운동’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군사 정권은 ‘헌정 파괴’ 또는 ‘군사반란’에 대한 국내외적 비판을 의식했는지, 아니면 장면 정권보다 사회를 정화할 의지가 강하다는 것을 과시하려 했는지, 쿠데타 당일인 5월 16일부터 ‘깡패 소탕’에 나섰다.

  (···) 5월 21일 자유당 시절에 정치깡패 두목이었던 이정재를 비롯한 2백여 명의 깡패들이 “나는 깡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습니다. 깡패 생활을 청산하고 바른 생활을 하겠습니다”라는 피켓을 들고 서울시내를 행진했다. 5월 22일에는 전국 각 도시에서 폭력을 휘두르던 4천여 명의 깡패를 체포했다는 발표가 있었다. 이 후 몇 주 동안 1만명이 넘는 깡패가 체포되었다. 깡패뿐이 아니었다. 5월 24일에는 댄스홀에서 춤추고 있던 청춘 남녀 45명을 ‘옥내집회금지령’으로 체포했다. 명분은 “국가 재건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사람들이 대낮에 춤을 춘 것은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퇴폐적인 다방, 찻집, 술집, 댄스홀을 폐쇄하였다. 또한 440명의 포주를 체포하고, 4,441명의 성매매 여성을 귀가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수입 사치품들을 수거해 불태우기도 했다(같은 책, 360쪽).

동아일보를 비롯한 신문들은 쿠데타세력이 ‘깡패들’을 강제로 ‘행진’시키는 데 관해서 ‘인권 유린’이라는 비판을 하기는커녕 “나는 깡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습니다‘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가슴에는 크게 이름을 써 붙인 사진을 곁들여 기사를 내보냈다. 동아일보 5월 23일자 조간 3면 기사는 아래와 같다.

  깡패 두목들 속죄 행진 / 폭력사회 주름잡던 이정재 등 150여 명 / ‘까까’ ‘개고기’ 등 명패 달고

  사회악 일소를 위해 21일 150여 명의 ‘깡패’ 두목 급들을 검거, 시가행진을 시켜 그들의 속죄를 촉구하는 한편 불안에 떨던 시민들의 가슴을 후련하게 하였다.
  이날 하오 3시경 이 깡패 두목들은 공정부대 장병들의 감시 아래 “깡패 생활을 청산하고 선량한 사람이 되겠습니다”라고 쓴 플래카드를 선두로 남대문로 등 시내의 주요 번화가를 ‘속죄 행진“하였다.
  이들의 앞장에서는 지난날 폭력사회를 주름잡던 이정재가 옅은 밤색 ‘싱글’에 명예롭지 못한 자기 이름이 쓰인 꼬리표를 달고 찬 채 풀죽은 모습으로 걷고 있었으며 그 중 이름이 알려진 두목들은 모두 ‘까까’ ‘개고기’ 등의 별명을 쓴 꼬리표를 가슴에 차고 있었다.
  천하에 무서운 것 없이 날뛰던 이 깡패들도 그 ‘악의 행장’이 새삼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여 땅만을 보며 걷고 있었으며 인도에 구경 나온 수많은 시민들도 일말의 동정을 보내기는커녕 ‘이제야 살았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군사 정권의 ‘사회 정화 운동’ 가운데 일부는 대중의 호응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쿠데타로 권력을 잡음으로써 그 어떤 것보다 심한 불법행위를 자행한 군부가 자신의 도덕성과 윤리의식을 강조하고 ‘구악 청산’의 의지를 보이려고 인권을 탄압한 것은 비판받아야 마땅한 일이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사건이 이미 수감되어 있던 ‘정치깡패들’을 거리로 끌어내서 위에 인용한 것 같은 피켓을 들고 ‘행진’을 시킨 것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들은 ‘무죄 추정의 원칙’을 적용받아야 할 피고인들일 뿐이었다. 그리고 댄스홀에서 춤을 추던 남녀들을 체포한 것도 지나치게 파쇼적인 행위였다. 그들이 계엄령을 어기고 ‘옥내’에서 집회를 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춤을 추고 있었다는 사실 만으로 체포한 것은 명백한 인권 유린이자 사생활 침해였다.

동아일보는 이런 사실들에 대해 아무런 비판도 하지 않은 채 군사정권의 ‘사회 정화 운동’을 중계방송 하듯이 보도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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