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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혁명(1)동아일보 대해부 2권 - 23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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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12.08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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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거위원회는 1960년 3월 16일 오후, 전국 개표소 187 곳(군 제외)의 개표 결과를 발표했다. 자유당 대통령후보 이승만은 총 유효투표수의 88.7%인 966만3,376 표, 이기붕은 79%인 833만7,059 표를 얻었다는 것이었다. 그에 비해 민주당 부통령후보 장면은 184만3,758 표로 이기붕에 무려 649만37만여 표나 뒤졌다는 것이 선관위의 발표 내용이었다.

마산에서 타오른 부정선거 규탄의 횃불

중앙선관위의 발표를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대통령후보 조병옥이 사망한 이후 민주당을 대표해서 고군분투한 장면이 이기붕이 얻은 표의 4분의 1도 못 되는 득표를 기록했다는 것은 그 어떤 이유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 선거 결과는 경찰 지휘부와 내무부에 의해 완전히 날조되었다. 한희 석 선거대책위원장 겸 기획위원장 등 자유당 간부들은 1960년 3월 15일  기획위원회 사무실에서 개표 상황을 지켜보다가 대표적 야당 도시인 대구에서 이기붕 5,000 표, 장면 32 표라는 비공식 보고를 받고 놀랐다. 국무위원들도 일부 지역의 개표 상황을 지켜보면서 자유당 후보가 95% 또는 97%를 넘지 않을까 ‘걱정’을 할 정도였다. 최인규·이강학 등은 한밤중에 경비전화로 이승만은 80%, 이기붕은 70~75% 선으로 조정하라고 지시했다. 각지에서는 부랴부랴 감표(減票)에 들어갔는데, 일부 지방에서는 최병환 내무부 지방국장이 50% 선 조정을 지시해 혼란을 빚기도 했다(<한국민주화운동사 1>, 113쪽).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이 ‘기획’하고 집행한 3·15 부정선거는 개표 자체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것이었다. 전국적으로 대리투표, 사전투표, 3인조 투표가 자행되었다. 자유당의 완장부대는 경찰, 반공청년단과 함께 투표장 언저리에서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민주당 참관인들 다수는 투표소에서 쫓겨났다. 민주당은 전남과 경남에서 오전부터 참관인을 철수시키고 ‘선거 포기’를 선언했다. 민주당 광주시당은 한낮인 12시 50분경 “민주주의는 죽었다”고 외치며 부정선거를 규탄했다. 민주당 마산시당은 오전 10시 30분에, 경남도당은 오후 1시 30분에 선거 무효를 선언했다. 투표가 끝나기 전인 오후 4시 30분 민주당 중앙당은 “3·15 선거는 불법 무효임을 선언한다”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3월 15일 오후 3시경 마산에서는 뒷날 ‘마산 항쟁’ 또는 ‘마산 의거’라고 불리게 된 역사적인 투쟁이 시작되었다. 항쟁의 불길을 댕긴 주체는 민주당 마산시당이었다. 시당 간부들은 그날 아침 투표소 안으로 들어가서 ‘40% 사전투표’와 3인조 공개투표의 현장을 목격했다. 그들은 오전 10시 30분경 선거 무효를 선언하고 부정선거를 폭로하는 시위에 나섰다. 

  (···) 시위는 자연발생적인 행동으로 나타났다. 3월 15일 오후 3시경 민주당사에 모여 있던 수천 명의 민중들이 민주당 경남도 의원 정남규를 선두로 “협잡선거 물리치자”라고 외치면서 시위를 하다 마산시 남성동파출소 앞에서 경찰과 충돌했다. (·····)
  시청에서 개표가 진행된 오후 7시30분경 시민과 학생 1만여 명이 “부정선거 다시 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다시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도 선거 무효를 부르짖었을 뿐 그 이상의 극렬한 구호는 사용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경찰은 사태의 긴박성을 예측했음인지 전원 실탄을 장전한 소총으로 무장하고, 시청 입구는 물론 파출소마다 엄중한 경계를 폈다. 이때 정전이 되면서 시위대를 향해 경찰의 발포가 시작되었다. 국민의 안전을 위해 치안을 담당하도록 되어 있는 경찰이 무장도 하고 있지 않은 민간인에 대한 발포를 명령받고 사격과 최루탄을 무차별 발사한 것이다. 총격을 피한 시위대는 변절 의원 하윤수(5·2 총선에서 민주당으로 당선되어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김)의 집과 자유당 당사, 서울신문사(친이승만계로 정부 기관지 역할) 마산총국, 국민회 마산지부, 남성동파출소 등을 부수었다. 평화적 시위가 경찰의 발포와 폭력적 진압으로 격화되었고, 시위는 민중 봉기로 발전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는 독재정권의 하수인과 말단 통치기구인 자유당사와 자유당 의원, 경찰서, 각종 관제 어용단체를 공격했다. 이날의 시위는 경찰의 발포로 사망자 8명(9명이라는 설도 있음), 80여명의 중상자를 내고 밤 11시 30분경 완전히 진압되었다.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한 것은 건국 이래 최대의 불상사였다. 경찰에 연행된 사람은 모두 253명으로 이들은 예외 없이 경찰로부터 무자비한 보복성 폭행을 당했다. 이 중 주모자로 구속된 26명이 공산주의자로 취급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같은 책, 114~115쪽).


‘마산 항쟁’에 대한 동아일보의 첫 보도와 사설

선거 이튿날인 3월 16일자 동아일보 1면 머리에는 「마산 사건 긴급 수습책 협의 / 심야에 군·경·검 연석회의 개최 / 송 참모총장 참석 / 최 내무, 민주당 선동 기인(起因) 주장」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최 내무부장관은 16일 상오 0시 30분 마산 사건에 관한 경위 발표를 통하여 마산 사건이 민주당 측의 선동에 의하여 발생된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이와 같은 사태가 발생하게 된 데 대하여는 국민 앞에 대단히 죄송하다는 뜻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최 장관은 동 발표에 있어 사상자가 총탄에 의한 것인지 화재로 인한 것인지 여부에 대하여는 밝히지 않았다. 한편 마산 사건이 내무부에 보고된 후 최 장관은 밤 10시 10분경 송 육군참모총장을 내무부에 초치하여 이 내무차관, 이 치안국장 등과 요담한 바 있으며 계속하여 내무장관, 치안국장, 이 특정과장 등은 모종 회의를 하였는데 밤 11시 10분경에는 오제도 대검 검사가 그리고 11시 35분경에는 이존화 자유당 조직위원장 등이 모여 연석회의를 하였는데 동 회의 내용은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마산 사건을 검토하고 이에 대한 긴급수습책을 협의한 것으로 보인다.

자유당은 15일 밤 긴급기획위원회를 열고 마산 사건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다. 자유당은 공식 담화를 내지 않았는데, 선전위원장 조순은 그것을 ‘폭동’이라고 단정하면서 “우선 사태 진압에 전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동아일보는 16일자 석간 3면 머리에 「마산서 데모군중이 지서를 습격 / 한 곳 파괴 한 곳 소실 / 경찰 응원대 출동·밤 11시경 진압 / 7명 사망 70여 부상 / 대부분 총탄 맞은 듯」이라는 기사를 크게 실었다. 이 기사에는 ‘폭동’이나 ‘소요’라는 표현은 없다. 경찰이 민주당원 3명과 학생 20여 명을 ‘폭동’ 혐의로 연행, 문초 중이라는 문장이 들어 있을 뿐이다.
동아일보는 3월 17일자 석간 1면에 「유혈의 비극인 마산 사건의 교훈」이라는 사설을 올렸다.

  당국자가 평온한 가운데 공명선거를 진행하고 있다던, 투표일인 15일 하오 경남 마산에서는 뜻밖에도 수천 군중이 데모를 하다가 7명 사망, 근 50명이 중·경상했으며, 또 데모대의 투석·방화로 경찰지서 3개소를 파괴 혹은 소실한 불상사를 일으킨 뒤에, 심야에 이르러서야 흥분된 군중을 겨우 진압했다 한다.
  사건의 발단인즉, 민주당 마산시당부에서 ‘선거 불법 무효 선언’을 한 선전방송에 앙분(昻奮)한 군중들은 돌팔매질을 막으려던 경찰대와 충돌을 일으킨 끝에, 그러한 중대 사태에까지 이른 것이라고 전한다. 그런데 데모에 참가했던 사람은 대부분이 중·고교생들로서, 그들은 “협잡선거를 하지 말라” “공명선거를 실시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하다가 다른 데모대와 합류됐다는 것으로서, 이번 사건의 경위와 윤곽을 짐작할 수가 있다.
  이번 마산 사건은 우연한 것이 아니요, 그동안 경·향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난 학생 데모 사건에 자극을 받은 데다가, 더욱이 막상 투표일을 당해서는 부정선거가 공연(公然)하게 자행된 데에 더욱 충격이 된 것임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이러한 비극적인 사고가 발생 아니치 못하게 한 그 자초(自初) 책임이 어디 있는가를 묻고 싶다. 그러고 나서, 데모에 참가한 학생 또는 일반인의 거조(擧措)가 잘됐느냐 못됐느냐를 따지는 것이 순서일 줄로 믿는다.
  애당초 선거일이 공고된 뒤부터 투표일에 이르기까지, 집권당이나 행정부 당국자의 아전인수 격인 독선적 선거운동 방식은, 단순히 ‘비민주적’이라든가 ‘불법적’이라고만 표현하기엔, 그 용어조차 무기력할 만치 자심(滋甚)했던 것은, 그동안 지상에 연일 보도된 것으로써 증명할 수가 있다. 부정·불법은 둘째 치고, 폭력·살인 등 온갖 인권 유린이 자행되었음은, 부인 못할 엄연한 사실이 아니던가. 더군다나, 투표일에 전국적으로 전개된 공통적인 현상-안으로는 공개·대리·무더기 투표 등과, 밖으론 야당 선거운동원·참관인의 접근 방해, 야당 동정투표자에 대한 강압 등, 형용키 어려운 가지가지의 ‘행패’가 허다하였음은, 이 또한 신문 지면에 나타난 사건들만으로도 족히 알 수가 있는 것이다. (·····)
  (···) 이번 선거기간 중에 곳곳에서 일어났던 시위운동-특히 마산 사건 같은 것은, 단순히 부정·불법 선거에 앙분한 데서 유래했다는 근인(近因)에 서보다는, 여당과 정부 당국의 다년간 ‘비정(秕政)’에 대한 쌓이고 쌓인 불평이, 급작스레 반항의식으로 발로된 것이 원인(遠因)의 하나가 아닌가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당은 선거 때마다 유권자·국민 앞에 여러 가지 공약을 내세웠지만도, 실제 면에선 한두 가지 외엔 별로 이렇다 할만한 실적을 대중 앞에 보인 일이 있었던가. 그뿐 아니라 모든 행정 면에서 경국·제세하는 두드러진 업적이 없이 여당 자가의 당리에만 몰두한데다가, 멀리 ‘2·4 파동’ 같은 반민주적 폭거에까지 이른 것임은, 자신들도 긍정 아니치 못할 것이다.
  물론, 이번 마산 사건은 극히 불행한 일이었고, 또 없었던 것만 못하게 크나크게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우리이긴 하지만, 여당이나 정부 당로자는 모름지기, 그 잠재적인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깊이 캐들어 가서 그 악소(惡素)를 발본 제거함으로써, 앞으로는 그와 같이 ‘피’를 보는 사건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먼저 자성할 필요가 긴절하다고 본다.
  ‘마산 사건’에 대해서 최 내무는, “정치적 및 사상적 배후를 추궁해서 엄단할 것”이라 했고, 또 “공산 침투의 정보도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확증을 잡고 한 말인지는 몰라도, 그 어떤 단서를 분명히 잡기 전엔 막연하게 “공산분자의 사주일 것”이라든가, 또는 “그 거조가 공산당 식”이라든가 유의 추상적·피상적 관찰로써만, 속단하는 위험성을 또한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
  어찌 됐든 당국자와 여당은 이번 마산 사건을 의법 처단하는 것까지는 좋으나, 사상자에 대한 적절한 처리와 사후 수습책에 있어, 그들이 연소학들이니만치 정상을 참작, 온건한 조치가 취해지기를 각별히 바란다.


김주열의 참혹한 주검이 일으킨 ‘제2차 마산 항쟁’

3월 15일에 터진 마산의 부정선거 규탄 항쟁은 이튿날부터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주로 고등학생들이 중심이 된 시위는 3월 16일 오전 서울 안국동에 있는 민주당 중앙당사 앞에서 시작되었다. 자연발생적으로 모인 5백여 명의 시위대는 “독재정치 배격한다” “마산동포 구출하자”는 구호를 외쳤다. 17일 오후 1시경에는 서울 영등포로터리에서 성남고 학생 2백여명이 “경찰은 자숙하라” “정의를 위해 싸우는 학생을 구타하지 말라”는 내용의 ‘삐라’를 뿌리며 영등포구청 앞까지 데모를 했다. 3월 24일에는 부산고 1·2학년생 9백여명이, 25일에는 동성고 학생 250여명이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나섰다. 같은 날 저녁에는 경남공고, 혜화여고 학생들의 시위에 중학생들까지 가세했다.
학생들의 시위가 잠잠해진 듯하던 4월 11일 이승만의 독재와 종신집권을 끝장내는 4월 혁명의 불씨가 될 결정적 사건이 일어났다. 그날 오전 11시30분경 마산시 신포동 중앙부두에서 낚시질을 하던 사람의 낚시에 교복을 입은 소년의 주검이 걸려 올라왔다. 눈에서 뒤통수까지 최루탄이 박힌 채 참혹한 모습으로 인양된 소년의 이름은 김주열(1944년 10월 7일생)이었다. 전라북도 남원군 금지면 옹정리에서 태어나 남원 금지중학교를 졸업한 뒤 마산상고 입시에 합격한 김주열은 4월 초의 입학을 앞두고 마산에 머물면서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참여했다가 참사를 당한 것이었다.
김주열의 머리에 박힌 최루탄은 직경 5센티미터, 길이 20센티미터로 알루미늄으로 덮여 있었고 꼬리 부분에는 프로펠러가 달려 있었다. 그것은 미국산 고성능 원거리 최루탄으로 건물 벽을 뚫고 들어갈 정도의 위력을 지닌, ‘무장한 폭도들’에게나 사용하는 ‘살상 가능한’ 무기였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 최루탄은 마산경찰서 경비주임 박종표가 경찰관에게 지급한 것이었다.
김주열의 참혹한 주검을 담은 사진과 함께 그 끔찍한 현장을 가장 먼저 보도한 사람은 부산일보 기자 허종이었다. 현장을 목격한 시민들이 입으로 전한 소식을 들은 데다 부산일보 보도를 보고 격분한 마산시민들은 김주열의 주검이 옮겨진 도립병원으로 몰려들었다. 11일 오후 6시경 3만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시체를 내놓아라” “살인선거 물리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자유당과 관련이 있는 건물, 그리고 여당에 속한 인물들의 집을 부수기 시작했다.

  (···) 남성동파출소에 이어 마산시청, 마산경찰서, 자유당 허윤수 의원의 집, 북마산·오동동·중앙동·신마산 파출소를 휩쓴 성난 군중들은 다시 창원군청, 허윤수가 경영하는 동양주정과 무학소주 공장을 부수고 재차 마산경찰서 앞으로 밀려갔다. 「애국가」 「전우가」 「」방가’를 부르며 다시 마산경찰서 앞에 모인 시위대는 경찰서 마당에 세워놓은 서장 지프차를 불지 른 후, 경찰 무기고를 부수고 수류탄 13개를 들고 나와 그 중 1개를 경찰서 건물에 던졌다. 
  시위대의 기세에 눌린 경찰은 밤 9시까지는 마산경찰서를 중심으로 경비하면서 시위를 방관했다. 그러나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밤 9시 0분경 경찰들에게 카빈총이 지급되었고 발포가 개시되었다. 이때부터 경찰과 시위대의 공방이 계속되었다. 쫓기던 시위대는 자유당 시당부, 서울신문 지사, 국민회 사무실, 마산경찰서장 관사, 마산소방서, 마산시장 박영수의 집 등을 부수고 12시경 해산했다. 이날 시위로 2명이 죽었다(<한국민주화운동사 1권>, 118~119쪽).


제2차 마산 항쟁에 관한 동아일보 기사와 사설

동아일보 1960년 4월 12일자 석간 1면 머리에는 마산에서 다시 ‘소요’가 일어났다는 기사가 대서특필되었다. 기사의 제목과 전문(前文)은 아래와 같다.

  마산서 11일 밤 또 소요 / 경찰서 파괴·서장 부상 / 처음엔 3천, 수만 군중으로  확대

  [마산지국 12일 발 지급전] 11일 밤 6시 반부터 마산시내엔 미중유(未曾有)의 중대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날 상오 제2차 데모 당시 행방불명이 된 소년 시체가 발견됨으로써 흥분된 3천여 시민이 하오 2시경 마산도립병원에 집결, 시체를 인도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되자 하오 6시 15분부터 일대 데모를 개시, “시체를 내놓아라” “살인선거 물리치자”라는 구호를 외치는 남녀노유 시민의 수는 각일각 급증, 수만의 군중은 마침내 도처에서 관공서를 습격하기 시작, 폭력화하였다.

동아일보가 4월 13일자 석간 1면에 올린 사설(「경찰의 자제와 민중의 냉정이 필요」)은 제목은 온건하지만 내용은 아주 강경했다.

  마산에 또 다시 유혈 사태(沙汰)가 벌어졌다. 제1차 마산 사건 당시 행방 불명이 되었던 소년의 시체가 발견됨으로써 흥분한 수천 명의 시민이 시체 인도를 요구하다가 이것이 거절되자 일대 시위가 벌어졌고 경찰의 발포로 사망자가 또 생겨났다. 마산에 이런 유혈 사태가 또  새로이 벌어지게 된 것은 경찰의 복수정책에 대한 반항이요 고문경찰을 적발, 처벌치 않은 데 대한 분노의 표시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불상사의 발생은 실로 국가적인 불행이라 할 것이니 이 사건 및 이 사건의 처리 방향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사건 발생의 기본 원인이 집권당이 3·15 부정선거를 가지고 국민주권을 강탈한 데 대한 대중의 저항권의 발동이요 이 저항권 발동을 무단정책으로 강압하는 정부에 대한 반항임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이런 불상사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자유당 정부가 3·15 선거의 불법 무효를 솔직히 자인하고 자유선거를 다시 실시하는 것이 가장 현책(賢策)이라 할 것인데 국민주권을 강탈해서까지 재집권을 하게 된 자유당 정부에게 이런 기대를 건다는 것은 아마도 그림 위의 떡을 먹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니 이 점 우리는 낙관적인 기대를 걸지 않는다.
  제2 마산 사건의 근인(根因)은 경찰이 무단정책을 가지고 다수 시민을 살 상하였고 또 무고한 시민을 수많이 잡아 가두어 놓고 악독한 고문을 가했었는데 이 살인·고문 경관을 적발하여 형사적 책임을 엄격히 따지려고 하지 않는 정부의 태도에 대한 대중의 불만과 분노가 터져 나온 데 있다. 정부는 살인·고문 경관의 형사적 책임을 추궁한다면서 은근히 그들을 비호하는 정책을 써왔던 것이니 이런 민중 우롱정책에 대한 정의의 반발이 오늘과 같은 비극적 사태를 조성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격분한 민중의 감정을 무마하기 위해서는 우선 당장에 제1 마산 사건 당시의 살인·고문 경관을 색출하여 전원을 구속해버려야 한다. 만약에 그러지 아니하고 정부가 이런 악질적인 범법 경관에 대한 온정적인 관대(寬大)정책을 지속해 나간다면 이 이상 더 불행한 비극적인 사태가 생겨날는지도 모른다.
  제2차 마산 사건에 있어서는 데모에 참가했던 군중들이 냉정과 이성을 잃어 건물을 파손하였다는 것은 분노가 극에 달했기 때문일 것이지만 평화적 시위가 폭력성을 띠게 되었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지만 이것은 경찰의 발포를 정당화하는 것이 결코 아닌 것이니 비무장 군중에 향해 무려 1백여 발의 실탄을 난사하였다는 것은 정당방위가 아니라 일종의 살인행위로 보아야 할 것이니 이 사건에 있어서도 발포 경관은 전원 입건 구속하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앞으로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국민주권을 다시 찾기 위한 민중의 시위는 전국적으로 벌어질 가망이 있는데 그 어느 경우에 있어서도 경찰은 실탄을 난발(亂發)하여 시민을 살상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이 사설은 제2차 마산 항쟁의 원인이 철저히 자유당 정부의 3·15 부정선거에 있다고 지적하면서 마산 시민들은 국민주권을 강탈당한 데 대해 저항권을 발동했다고 주장한다. 당시 이런 내용을 사설을 내보낼 수 있는 신문은 동아일보뿐이었다. 야당지로서 쌍벽을 이루던 경향신문이 폐간 상태로 있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가 위의 사설에 동원한 직설적 표현들은 독자를 통쾌하게 했음은 물론이고 이승만 자신과 그 추종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무단정책을 가지고 다수 시민을 살상” “살인·고문 경관을 적발하여 형사적 책임을 엄격히 따지려고 하지 않는 정부의 태도에 대한 대중의 불만과 분노” “비무장에 향해 무려 1백여 발의 실탄을 난사하였다는 것은 정당방위가 아니라 일종의 살인행위” 같은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동아일보가 사설에서 경고한 대로, 이승만 정권은 “악질적인 범법 경관에 대한 온정적인 관대정책을 지속해” 나가다가 결국 4월 19일 전국적 민주 항쟁의 거센 파도에 부닥치게 된다. 

동아일보는 4월 13일에도 자유당 정권을 강력히 비판하는 사설(「마산시민을 공산당으로 몰지 말라」)을 내보냈다.

  마산에서는 아직도 사태가 가라앉지 않고 흥분과 불안과 공포가 뒤덮고 있다. 처음 후퇴하는 기세를 보이던 경찰은 데모가 연 3일째 계속되자 강경 태세로 전환하고 평화적 시위에 대해서도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자유당 당무회는 제2 마산 사건의 주동자와 배후관계를 철저히 규명하고 관련자를 엄중 처단한다는 기본방침을 세웠다고 하는데 정부와 여당의 이러한 움직임은 앞으로 정부 당국이 마산 시민에 대해 무자비한 복수를 하겠다는 적신호로서 우리는 경계를 게을리 할 수 없다.
  제2 마산 사건은 경남 도지사가 현지 시찰 후 언명한 대로 사전계획 밑에 발단된 것이 아니며 김 소년의 시체 인도 거부에 격분한 군중들이 자연발생적으로 데모를 하다가 나중에는 흥분과 격앙이 도를 지나쳐 대불상사가 난 것이요 적어도 현재까지는 이 사건을 공산당이 개입 조작했다는 증거는 하나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사당국이 마치 이 사건을 공산당이 조작하기나 한 것 같은 선입관을 가지고 사건을 수사 처리코자 한다는 것은 사태의 안정이 아니라 가일층의 악화를 가져올 우려가 있는 것이다.
  데모 방식이 공산당과 흡사하다는 이유로 마산 시민에게 누명을 덮어씌우겠다는 당국의 의도야말로 위험천만한 것이다. 마산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이 3·15 불법선거에 있고 그 근인이 발포·고문 등으로 다수의 시민을 살상한 경찰을 처벌치 아니한 데 있다는 데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
  반공의 구실 하 국민의 기본적인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박탈하며 일당독재의 체제적인 완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자유당 정부는 제 권리를 찾으려는 민중을 ‘빨갱이’로 모는 악작풍(惡作風)을 가지고 있는데 빼앗긴 자유와 권리를 찾으려는 선량한 시민에게 공산당의 누명을 뒤집어씌우려는 정부의 정책이야말로 오늘날 자유당 정권이 민중의 신뢰를 거의 완전히 상실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
  앞서 정부는 홍 내무의 담화 형식으로 평화적 시위마저 탄압할 것 같은 협박·공갈을 국민대중에게 가했는데 이는 3·15 부정 사태 시정을 위한 원외 대중투쟁을 경찰력을 발동하여 탄압·저지하겠다는 선언인 것이다. 묻노니 정부는 무슨 낯으로 자유선거제도를 부활하려는 대중투쟁을 억압하겠다는 것인가. 도둑을 현장에서 붙잡지 못했으니 아예 잡을 생각을 집어치우라는 것인가. 책임 있는 확답을 듣고 싶다. 불과 수만의 경찰을 가지고 3천만의 국민을 통치하고 있는 자유당 정부는 경찰력을 과신하는 나머지 무소불능을 착각하고 있지만 우리 국민이 세금을 내고 국립경찰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총탄에 얻어맞아 죽기 위한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자유당 정부는 오늘의 사태를 직시하여 경찰력을 발동하여 민중을 적대시하는 정책을 버리고 자가 숙청부터 단행하여 민원(民怨)을 풀어주도록 해야 할 것이다.

동아일보는 4월 15일자 석간 1면에 「자유당 혁신파 의원들의 태도 경화」라는 사설을 실은 데 이어 4월 16일자 1면 머리에 국회 조사위원들의 마산 현지 조사 결과를 크게 보도했다. 그 기사의 긴 제목은 다음과 같다.

  공산당의 사주 아니다 / 마산 사건 국회 조사위 현장 검증서 확인 / 여당 의원도 배후 문제엔 침묵 / 통금 위반자를 데모 가담자로 조작 / 수류탄 투척설도 신빙성 박약 / 야당 측서 주장

동아일보는 4월 16일자 석간 1면에 「마산 사건 적색으로 몰려는 정책은 위험천만」이라는 사설을 내보낸 데 이어 4·19 전날인 18일자 조간 1면에 이승만의 담화를 반박한 민권수호국민총연맹의 공개서한(13일과 15일 두 차례)을 지지하는 사설(「민총의 공개서한을 보고」)을 실었다.

  (···) 동 서한은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 내용은 현 실정과는 너무도 거리가먼 것이며, 그 진의도 또한 납득할 수 없는 것이므로 앞날을 염려한 나머지 이 서한을 보내게 된 것”이라고 전제하고 “한 시라도 바삐 실정을 파악하기 위하여 이 대통령은 재야인사나 언론인들을 접견할 필요”가 있고 “마산 사태를 수습할 수 있는 현명하고도 용단적인 조치가 즉각 강구되어야 할 것”이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민권수호총연맹의 위와 같은 공개서한의 내용이 사리를 잘 밝혔고 따라서 백 번이나 지당한 말이라 함은 누구에게든지 이의가 있을 까닭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공개서한이 이 대통령에 의하여 수락되거나 청허(聽許)될 가능성은 과거의 허다한 실례와 경험에 비추어, 거의 없는 것이다. (·····)
  마산 사태에 대한 정부 당국의 처리방안의 기본원칙은 어디까지든지 ‘위협’과 ‘탄압’이다. 권력의 만능과 존대(尊大)를 확신함에 있어서 조금도 동요가 없는 현 집권층은 어떠한 난국이든지 권력으로써 타개 못할 것은 있지 않다, 하는 미신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 (·····)
  국민이 정부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은 아니고 반대로 “정부가 국민을 위하여 존재한다” 하는 사리는 현행법상 추호의 의문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현 집권층은 이것을 거꾸로 해석하여 모든 국민을 그들의 뜻대로 복종케 하고 마음대로 부려보려 하고 있다.
  “이승만 정부는 물러가라” 하는 민주당의 데모 구호를 마산 시민들이 외치고 데모를 강행한 데 대하여 앞서 검찰과 경찰에서는 그 국가보안법(이 대통령에 대한 명예훼손) 여부를 검토 중에 있다고 전하는 등은 대표적인 일례이다.
  대통령이란 국가공무원이 국민의 공복(公僕)으로서 국민에게 성실히 봉사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다 함은, 헌법(제54조)이 대통령에게 “나는 국헌을 준수하고 국민의 복리를 증진하며 국가를 보위하여 대통령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에게 엄숙히 선서케 하고 있다는 사실로 보아 논의의 여지가 없고, 국민이 “이승만 정부 물러가라”고 외칠 수 있음은 헌법 제27조 제1항의 정문(正文)상 당연한 일에 속한다. 그러므로 국가보안법 중의 ‘헌법상 기관에 대한 명예훼손’ 조항이 헌법의 전기 규정을 개폐할 수 없는 한, 전기 구호가 문제시될 까닭이 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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