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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대선-이승만과 신익희의 대결동아일보 대해부 2권 - 1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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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11.03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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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2월 18일 동아일보 사주이자 전 부통령 김성수가 65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혈전증이라는 난치병으로 병석에 누워 있다가 운명했다. 일제강점기의 친일 행적에 관계 없이 그는 1953년 5월 29일 이승만의 독재와 악정을 강하게 비판하는 사임서를 국회에 제출하고 부통령직을 물러남으로써 야당권에서 가장 존경을 받는 지도자로 다시 태어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성수 별세와 동아일보 사설

장례식 날인 2월 24일자 동아일보는 「애도 인촌 선생의 영결」이라는 사설을 1면에 실었다.

  오늘 1955년 2월 24일로써 인촌 김성수 선생의 유해는 전 국민이 애도하는 가운데 이 세상을 마지막 하직하신다. 선생의 부보(訃報)가 전해지자 조야와 당파를 가릴 것 없이 통석(痛惜)함을 말지 않으면서 선생의 위덕(偉德)과 거업(巨業)을 추모하는 찬사가 연연하게 끊이지를 않는다. 그것이 곧 ‘국민장’이란 성의(盛儀)로 나타나서 선생에게 서후(逝後)나마 가장 큰 광영을 갖게 한 것임을 생각할 때 우리는 뜨거운 감루(感淚)가 어린다.
  선생이 재세(在世) 시에 65 평생을 ‘나라’와 ‘겨레’밖에는 그 마음속에 ‘사념(私念)’이나 ‘아욕(我慾)’이란 터럭만치도 없이 담담(淡淡)·결결(潔潔)하게 살아왔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선생의 가지가지의 찬연한 업적이 말하는 것이니 선생 일 개인으로서는 그만하면 할 일을 다 했다 할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우리가 지통(至痛)·지한(至恨)하게 생각하는 것은 ‘선생이 좀 더 연수(延壽)를 했었더라면 국리로 보아서나 또는 민복을 위해서나 얼마나 이바지하는 바가 더욱 컸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선생의 향수(享壽)가 60 유(有)5라면 인생으로서 결코 단수(短壽)라고는 말할 수 없겠으나 그러나 민족의 여망을 받는 선생의 경우에서 볼 때엔 더 오래 생존했어야만 되었을 일이다.
  그것은 선생이 평일에 포회(抱懷)하였던 그 구구절절한 우국심과 그 연연비비(戀戀泌泌)한 애족심의 폭원(幅圓)을 따질 양이면 묘망(渺茫)한 해(海)·양(洋)과도 같이 광대할 것인데 그 대지(大志)를 품은 대로 다 펴지 못한 채 영면했으니 우리가 연년익수(延年益壽) 못한 것을 못내 구슬퍼 하는 까닭은 실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선생에겐 이미 정명(定命)이 그것뿐이었음인지 이젠 유명(幽明)의 길로 갈리어 타계의 몸이 되었으니 여기서 아무리 애달파하면 무엇할 것이냐.
  강의(强毅)·영발(英拔)하고 원대·심오한 지개(志槪)가 모든 사업을 만년 반석 위에 올려놓게 한 ‘기틀’이 된 것이지만 그보다 그다지도 국민 전반의 추앙과 회모(回慕)를 받게 된 주요 이유는 선생의 중후공겸(重厚恭謙)하고 관인현자(寬仁賢慈)한 그 덕성에서 언제나 ‘공(公)’을 먼저 말하고 ‘사(私)’를 뒤로 하는 ‘성근(誠勤)하고 충실한 동포에의 봉사심’으로 그 파란 많은 일생을 바쳤다는 데에 있다 할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선생은 ‘공’을 빙자하면서 ‘사’를 영위하는 위선사업가나 가면정상배의 그러한 불순성은 호말(毫末)도 없고 범백사에 있어 오로지 애국·애족의 봉공열(奉公熱)로 시종일여 하였다. (·····)
  누구나 다 아는 바처럼 선생은 일정 말기에 소위 총독부 당국자들이 혹은 감언이설로, 또 혹은 위협공갈로써 끊임없이 유혹 또는 강압을 했으나 금석과 같이 움직이지 않고 그 지조와 절의(節義)를 사수하면서 끝끝내 민족혼을 추호도 더럽히지 않고 또 애국심을 미진(微震)만치도 깎이지 않았다.
  말하자면 ‘순결·담백’ 그대로 고이고이 간직했다가 해방이 되자 이 나라 이 겨레 앞에 풀어 헤쳐 내놓았다.
  이 점에서 우리는 또한 선생의 고매한 인격을 우러러 흠앙하면서 다시금 추념·애곡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그리고 선생은 희게 태어나서 희게 살다가 희게 돌아갔으니 명계(冥界)에서도 또한 깨끗한 영혼이 희게 영생할 것으로 믿는다.

이 세상을 떠난 인간에게 경건한 조의를 표하는 것은 마땅한 예의이다. 그런데 고인이 공인이거나 널리 알려진 인물일 때 그의 공적과 과오를 구분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찬사를 보내는 것은 대중을 기만하는 일이 된다. 이 사설이 그 본보기이다.

김성수가 생시에 한 일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1920년 봄에 동아일보 창간을 주도한 뒤 실질적인 사주가 되어 그 신문이 1930년대 중반 이래 ‘친일·매족’을 하도록 이끈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동생 김연수와 함께 경성방직을 창업해서 일제의 비호를 받으면서 대기업으로 키워나갔다. 그런데 그에게 바치는 ‘조사(弔辭)’인 이 사설은 그런 사실은 깡그리 모른 척하면서 김성수를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그에 대한 헌사(獻辭)는 최상의 것들뿐이다. ‘위덕과 거업’ ‘강의·영발’ ‘심오한 지개’ ‘중후공겸’ ‘관인현자’ ‘애국·애족의 봉공열’ ‘우리나라에서의 가장 표본적인 거인’ ‘순결·담백’ ‘고매한 인격’ ‘담담·결결’ ‘찬연한 업적’ ‘구구절절한 애국심’ ‘연연비비한 애족심’ ‘자성과 위덕’·····.

석가모니도 공자도 예수도 무함마드도 이렇게 현기증 나는 추모사를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민중의 존경과 사랑을 받던 김구를 비롯한 독립투사와 지사들이 세상을 떠났을 때도 이렇게 아부와 과장으로 가득 찬 조사가 ‘헌정’된 적은 없었다.

동아일보가 사주의 별세를 담담하게 추도하면서 말년에 이승만 독재에 맞서 싸운 업적만을 강조했다면 독자들이 오히려 더 경건한 마음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을 것이다.


이승만의 ‘불출마 선언’ 쇼와 ‘우의, 마의’ 동원

김성수가 세상을 떠난 지 한 해 남짓 뒤인 1956년 3월부터 제3대 대통령선거가 국민의 관심을 끌었다. 이승만이 종신집권을 하는가, 아니면 강력한 야당후보가 그의 3선을 저지하는가가 초점이었다. 대통령선거 날자는 5월 16일로 정해졌다.

이승만은 3월 6일 열린 자유당 정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 보낸 메시지를 통해 “금년 8월에 임기가 만료되는데, 이번 대통령선거에는 출마하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밝혔다. “3선은 민주주의적이 아니므로 야(野)에서 국사에 협조하겠다”는 것이었다. 81세 고령인 그가 건강 때문에 대통령 직무를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을 것 같아 출마하지 않기로 했다면 대중이 납득할 수 있었을 텐데 그는 ‘민주주의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불출마 통보를 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왜 1954년 후반기에 ‘현직 대통령 중임 제한’을 명시한 헌법의 조항을 고쳐서 “이 헌법 공포 당시의 대통령은 이 조항의 제한을 적용받지 않는다”는 내용을 넣으려고 갖은 수단을 동원했던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결과를 보면 이승만은 ‘우의(牛意) 마의(馬意)’까지 동원한 충성분자들의 ‘열성’과 ‘국민의 뜻’을 못 이겨 출마하겠다고 나섰다. 그것은 이승만의 정치적 행태를 주의 깊게 짚어본 보통사람들도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승만의 ‘불출마 선언’이 나온 3월 6일 부산에서부터 관변단체들이 출마를 ‘간청’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3월 8일 오후 국민회 각도 및 시군회장들에게 “차기 대통령 입후보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오래 전부터 작정한 것이니 이번에는 연부역강한 사람이 나서서 해야겠으니 내 일은 잊어주기 바라며 이것은 내가 의도가 있는 말인 것이다”라고 말했다(동아일보 3월 10일자 1면).

이승만은 하루가 멀다 하고 불출마 의사를 거듭 밝혔다. 동아일보 3월 11일자 1면 머리에는 「민중과 같이 국정 시정 / 다른 자리 앉게 해 달라 / 이 대통령, 장관들에 은퇴 의사 표명」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이 대통령은 9일 국무회의 석상에서 차기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종전의 태도를 재천명하였다고 한다. 이 대통령은 이날 “대통령을 다른 사람을 시켜놓고 그가 잘못할 경우 민중과 더불어 그 잘못을 시정할 수 있는 위치에 나를 앉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한다.
  그런데 이 대통령의 재출마를 호소하는 민중운동이 점고되는 이때에 있어 전기(前記)와 같은 대통령의 확고한 태도 천명은 자못 큰 관심을 정계에 환기시키고 있다.
  (···) 이 대통령은 9일 국무회의 석상에서 “국무위원들도 좋은 대통령후보를 추천해 줄 것”을 말한 바 있으며 이 대통령 자신도 전일 국민회 대표들에 대해서 “이기붕 씨를 대통령으로 시키면 좋지 않으냐”고 웃으며 언급한 사실이 있다는 것을 이날 국무회의에서 재차 말한 바 있다는데 국무위원들도 이대통령의 재출마를 종용하였다 한다.

  3월 10일 이승만은 외국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를 차기 대통령으로 지명한 사람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만일 공산 침공 당시 내가 그대들을 지도하고 있지 않았던들 그대들은 굴복을 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대들은 자유를 상실하고 하나의 위성국가로서 예속되었을지도 모른다. (···) 때때로 나는 자살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나는 그들 자유당 지도자에게 나는 물러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다. 나는 잃어버린 4백만 동포들을 생각한다. (···) 우리 국민은 나의 생명은 그들의 것이라는 점을 인식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다. 만일 그들이 나의 자살을 원한다면 나는 자살이라도 하겠다. 만일 그들이 내가 그들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면 나는 그렇게 하겠다.”(동아일보 3월 12일자 1면).

이승만은 외신기자들이 집요하게 재출마 여부를 묻자 “국민이 강청하면 재고려하겠다”고 말했다.

  (···) 그날부터 더욱 뜨겁게 불붙기 시작한 시위는 3월 12일 동원된 노동자와 농민들이 경무대 앞으로 우마차 8백대를 끌고 행진한 사건에서 백미를 이루었다. 우차와 마차는 서울시 통행이 규제되었기 때문에 이 행진은 불법이었지만, 자유당이 동원한 노동자들은 “이승만 박사의 3선을 지지한다”는 함성을 질러대니 감히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서울 거리는 우마의 분뇨로 인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14일에는 마사회의 마상 시위가 벌어졌고, 선거권이 없는 남녀 중고등학생들도 수업 시간에 교기를 앞세우고 비를 맞으며 시위에 돌입했다(<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 편 3권>, 27~28쪽).

그때부터 언론과 야당은 ‘우의, 마의’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 동아일보는 3월 15일자 1면에 올린 사설(「양심·이성·질서」)을 통해 ‘우의, 마의’까지 동원된 혼탁한 선거 풍토를 비판했다.

  이 대통령의 3·5 성명의 진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보는 사람마다 해석이 다를 수 있을 것이고 또 그중 어느 것이 가장 정확한 견해였던가는 정부통령 입후보 등록 마감날이 돼 보아야 할 터이므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경솔 또 조기(早期)의 판단을 삼가고자 한다. 그러나 3·5 성명 이후의 사태는 결코 심상치 않다. 이른바 ‘민의대’가 경향 각지에서 시위를 하고 있으며 지난 13일에는 노조의 파업소동이 일어나 다만 두 시간이나마 서울시민은 발을 절단당하는 결과를 가져와 적지 않은 혼란을 자아낸 바 있다. 들리는 바 노총에서는 산하 노조의 대표자회의를 열고 이 박사가 재출마하기를 수락할 때까지 총파업을 하도록 결의하였다 하니 이러한 파업은 절대 불가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다고 하지만 사태의 진행은 결코 낙관을 불허한다.
  이러다가는 과거 제2대 대통령 선출 시와 같은 불명랑한 사태가 또 다시 벌어지지 않으리라고 누가 보장할 수 없는 터이므로 공명 또 평화로운 선거를 위해 국민 일반이 가져야 할 심적 준비 내지는 정신적 요소를 여기 한 번 제시 해명해 둘 필요를 느끼는 바이다. (·····)
  우리는 오랜 역사를 두고서도 정권의 평화적 수수(授受)에 습관되지 못했다. 봉건시대의 고사(故事)는 막론하고 근대에 들어와서는 왜족의 통치를 받아 정권을 담당하는 수련을 쌓을 수가 없었다. 건국 후 우리 손으로 정권을 만들고 키우게 되었지만 대소 제종(諸種) 선거를 통하여 거듭 민주정치 사상 불명랑한 사실을 남겼다는 것은 아직도 세인의 뇌리에 새로울 것이다. 만약 이런 전례가 앞으로 되풀이된다면 우리는 그런 불명랑한 사태를 주기적으로 겪으면서까지 선거를 할 필요가 있는가에 대해서마저 상당한 의혹을 느끼는 바다. (·····)
  앞으로 3개월간 우리 국민은 실로 시험대에 올라 세워져 있는 감이 있다. 과연 질서있게 선거운동을 전개하는가 못하는가 자유 또 명랑스러운 분위기 속에 선거전이 전개될 것인가 그렇지 못할 것인가 엄격히 합법 또 평화의 테두리 속에서 일체 현상을 야기치 않고 움직여 나갈 것인가 그렇지 못할 것인가 온 세계는 우리를 주시하고 있고 우리의 자손과 역사는 우리의 행동을 엄격히 심판하리라는 것을 촌시라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질서와 정의와 양심을 위해 참다운 용기를 국민 각자가 발휘함으로써만 우리는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이 사설은 자유당과 보수극우단체들이 갖은 수단을 동원해서 이승만의 재출마를 ‘강청’하고 있는 현상을 완곡하게 비판하고 있다. 당시 조선일보가 전혀 그런 사설을 내지 않은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3월 19일 치안국 집계에 따르면, 이승만의 재출마를 요구하는 시위 횟수는 1천4회, 참가 연인원은 450만5천890명, 메시지 2천152통, 전보 7천300통 등이었다. 관제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유당 산하단체들의 회원이었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이승만 박사 재출마 요청 궐기대회에 댄서·다방마담·창녀까지 동원한 인원이 420만이었는데 그 중 거의 전부가 학생이었다는 주장도 있다(같은 책, 29~30쪽).

이승만은 3월 23일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겠다고 밝혔다. “이 대통령은 올해 선거에는 출마 않기로 작정한 바 있으나 전국 방방곡곡에서 치열하게 전개된 재출마 요청 운동과 연일 경무대에 전달되고 있는 수만 통의 번의 요청 메시지를 받고 재출마를 희구하는 국민의 간절한 뜻을 저버릴 수 없어 제3대 대통령선거에 다시 입후보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동아일보 3월 24일자 1면).

동아일보는 이승만이 거듭 불출마를 고집하다가 출마로 방향을 바꾼 ‘정치적 쇼’를 정면으로 비판하기보다는 공정한 선거를 촉구하는 미적지근한 사설(「명랑선거로 진일보키를」)을 3월 25일자 1면에 내보냈다. “이 박사가 재출마 결의를 확인하였다는 것은 지난 3·5 성명 이후 정국의 불투명성을 해소하고 적어도 재출마를 촉구키 위한 민의운동에 종지부를 찍는 것으로서 이 방면에 경주되는 국민의 노력과 시간과 경비의 희생을 이 이상 더 증가하지 않게 된 것을 다행으로 안다”는 것이었다.


민주당 한강변 유세-동아와 조선 보도 천차만별

민주당은 3월 28일 전당대회를 열고 대통령후보에 신익희, 부통령후보에 장면을 지명했다. 민주당은 선거구호로 “못살겠다 갈아보자”를 내세웠는데 이 구호는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이승만 정권 8년 동안 쌓이고 쌓인 악정과 실정이 국민 다수의 반감을 일으키면서 정권 교체를 열망하게 했던 것이다.

당시 서울 인사동 탑골공원 근처에 있던 민주당 중앙당사 옥상에 설치된 확성기에서는 “못살겠다 갈아보자”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그러자 자유당은 민주당 당사 맞은편에 대형 확성기를 걸고 “갈아봤자 소용없다. 구관이 명관이다”라고 맞받았다.

대통령선거는 이승만, 신익희, 조봉암(무소속)의 3파전이었는데, 그 가운데서 신익희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그의 유세는 5월 3일 서울 한강 백사장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당시 서울 인구는 150만여명이었는데 무려 30만명이 넘는 인파가 백사장에 들어찼다. 투표권이 없는 어린이들을 빼면 서울 시민 네 명 가운데 한 명이 신익희의 연설을 들으러 몰려간 셈이었다.

그것은 한국 정치사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장관’이었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한강 백사장에 가지 못한 많은 국민까지 열광시킨 그 ‘대사건’을 아주 미미하게 다루었다. 5월 4일자 2면 중간에 실린 가로 제목 2단 기사(「인도교 근방은 교통 차단 / 어제 민주당 정견 발표에 시민 운집」)에는 군중의 일부를 담은 사진이 얹혀 있다. 기사도 아주 짤막하다.

  3일 하오 2시경 한강 모래사장에는 때 아닌 사람의 홍수로 한때 인도교 근방에는 모든 차량이 통행을 못하는 일대 혼잡을 이루었다.
  이날 민주당 대통령 입후보자 신익희 씨와 부통령 입후보자 장면 씨의 정견 발표를 듣고자 모여든 수만 청중들이 한강 보트장 근처에 자리 잡은 연단을 둘러싸고 모여든 것이 이날의 혼잡을 일으킨 것이다.
  약 한 시간 동안 각지에서부터 차가 밀려 일대의 교통은 마비되었던 것이다.

이 기사는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의 연설 내용이나 유세장에 몰려든 청중의 반응은 단 한 줄도 전하지 않으면서 ‘교통 혼잡’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조선일보와는 정반대로 동아일보는 민주당의 한강변 유세를 5월 5일자 3면 머리에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사상 최대의 인파 / 20여만의 청중 운집 / 민주당 정견발표회 한강변서 대성황

  서울에서는 두 번째로 민주당 정부통령 입후보자 신익희·장면 양씨의 정견 발표회가 3일 하오 2시 한강 모래사장에서 열리게 되자 개회 두 시간 앞서부터 시내 각처에서 모이기 시작하는 수많은 시민들로 모래사장을 꼬박 메워 청중 수 추산 23, 4만, 말 그대로 ‘지상 최대의 정견발표회’로 일대 성황을 이루었다.
  이날 한강으로 밀려드는 시민들은 도중에서 닥치는 대로 버스, 전차를 집어타고는 “빨리 가자!”고 호령호령-때 아닌 손님들로 차안이 터져나갈 듯하자 영문도 모르는(?) 운전수들은 눈이 동그래진 채 차를 몰아대는데·····.
  하오 1시경 “삑삑” 소리도 요란하게 달려온 수많은 교통순경들은 순식간에 남대문 앞서부터 서울역, 갈월동, 용산, 한강에 이르는 사이에 쭉 깔려 즉시 교통정리차 교통 차단에 착수, 먼저 노량진행 전차가 일제히 정지되고 이어 버스도 일시 총스톱되고 말았다.
  불퉁거리면서 차안에서 내려선 시민들은 계속 한강으로 걸어나가 양쪽 인도 위는 대혼잡, 교통순경들은 이를 정리하느라고 진땀을 빼기 시작, “벌써 시작했겠다!” “빨리 가보자!”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
  청중들 중에는 가족 동반으로 도시락까지 들고 온 사람도 있는데 한편 이 구석 저 구석엔 군용 트럭, 지프차들이 멈춰 있어 이채를 띠고, 젊은 남녀들이 쌍쌍을 지어 열심히 연설을 듣고 있는 것은 모두가 이날 처음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신익희의 급서, 이승만 당선

1956년 5월 4일 새벽 민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가 갑자기 사망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전주에서 정견발표를 하고자 4일 하오 10시 서울역을 출발한 신익희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5일 상오 4시 45분경 강경~논산간 열차 속에서 돌연 심장마비를 일으켜 동 5시 30분 이리역 도착 즉시로 하차하여 호남병원에 입원 가료하였으나 동 5시 45분 애석하게도 서거하였다. (···) 고 신익희 선생은 향년 63세이다.”(동아일보 5월 6일자 1면).

신익희의 갑작스런 죽음은 평화적 정권교체를 바라던 많은 국민을 비탄에 빠뜨렸다. 특히 그가 서울역을 떠나기 전날 한강변에 모인 수십만의 청중 앞에서 “못살겠다 갈아보자”를 외치면서 열렬한 환호를 받던 광경을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악몽 같은 사건이었다.
동아일보는 같은 날짜 1면에 「신익희 선생의 장서(長逝)를 조(弔)함」이라는 사설을 올렸다.

  해공 신익희 선생은 5월 5일 아침 유세 도중 전북 이리에서 급서하셨다. 서인(逝因)은 심장마비로 알려져 있을 뿐 그 외 자세한 것은 속보를 기다려서 판명되겠거니와 선생이 5·15 선거에 있어서 민주당 공인(公認)으로 대통령에 입후보한 이래 면접, 유세 등 너무도 다망한 일과에 시달려 피로를 극한 끝에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와 같은 불행을 당하게 된 것으로 짐작된다. 선생이 물 끓듯하는 여망을 걸머지고 사라져가는 이 땅의 민주주의를 기사회생코자 분연 궐기한지 몇 삭 동안에 그 고매한 인격, 탁월한 식견, 그 관후한 성품은 민중의 존경, 흠모, 신뢰를 받아 민심이 귀추하는 바 민주정치 확립의 대업이 착착 진행되어 가는 무렵 그 결과를 보지 못하고 장서하고 말았으니 이 어찌 슬픈 일이라 아니 하겠으며 이 어찌 거대한 국가적 민족적 손실이 아니겠는가. (·····)
  해방 후 10년 동안 국사(國事)가 내외로 다사다난하여 반드시 그 인물의 생명이 지속되어야 할 객관적 요청이 절대적인 찰나에 우수한 지도인물이 자연사 혹은 변사로써 이 세상을 떠나는 일이 많아 국가적 사회적 입장에서 커다란 손실을 보곤 했던 것이니 해공 선생의 경우 역시 여기 해당하는 것이지만 그가 정쟁의 치열한 와중에서 급서하였다는 것은 때가 때이니 만큼 말할 수 없이 아까운 손실로서 국가의 비운을 상징하는 듯하다. 천도가 무심하여 우리 대중으로부터 훌륭한 지도자를 꼭 필요로 하는 시기에 빼앗아 가는 것인지 혹은 국운이 열리질 않아 그렇게 되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으되 어쨌든 간에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신익희가 갑자기 타계했으나 민주당은 선거법 규정 때문에 다시 대통령후보를 내세울 수가 없었다.

민주당 후보가 없이 치러진 제3대 대통령선거는 이승만과 조봉암의 대결로 압축되었다. 개표 결과 이승만은 총 유효표의 52%인 504만여 표, 조봉암은 23.8%인 216만여 표를 얻었다. 조봉암이 예상을 넘어 그렇게 많은 표를 받은 사실은 그를 이승만의 강력한 경쟁자로 떠오르게 하는 한편 장차 ‘사법살인’의 희생자가 되게 만드는 단초가 되었다.

신익희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이승만의 압승이 기정사실화한 가운데 뜨거운 관심을 모은 부통령선거에서는 민주당의 장면이 401만여 표(46.4%)를 얻어, 380만여 표(44.0%)에 그친 자유당의 이기붕을 눌렀다. 이승만의 후계자로서 입지를 굳게 다지고 있던 이기붕에게는 결정적 타격이었다.

특히 서울에서 이승만이 얻은 표보다 신익희에 대한 ‘추모표’가 더 많은 것으로 확인되자 ‘국부(國父)’로 떠받들어져온 이승만은 자존심이 크게 상했을 뿐 아니라 미래의 정치 전망에 큰 불안을 느꼈을 것이다.

이승만과 자유당은 선거 과정에서 음양으로 갖은 부정을 저질렀다. 특히  이승만은 신익희가 사망하기 전에 그에 대한 흑색선전을 일삼는가 하면 그의 사후에는 조봉암에게 ‘색깔공세’를 퍼부었다.

  신익희가 “만약 내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일본 지도자들과 회담할 용의가 있다. 한일 양국 정부는 먼저 부당한 감정을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승만과 자유당은 신익희를 친일분자로 비난하였다. 이들은 ‘평화통일’을 말하는 조봉암을 용공세력으로 몰아붙였다.
  이승만은 5월 3일 논산훈련소에 수만 장병이 도열한 가운데 행한 연설에서 “일본과 회동하여 국가의 독립과 자유를 발전케 하겠다든가 또는 공산당과 싸우지 않고 평화적으로 통일을 하겠다든가 하는 것은 다시 국권을 일본에 빼앗겨도 좋다는 것이나, 또 소련을 조국이라고 하는 유의 언동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승만은 그날 유세에서 심지어 “공산주의자와 친일파들이 권력을 추구하고 있음”을 경고하고 그들은 “일본과 북괴에 비밀리에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까지 하였다. 이승만은 담화를 통해선 “이러한 사람들에게 투표를 해주어 이들이 정권을 잡게 되면 이것은 반역분자들이 나라를 팔아먹는 것뿐이 아니라 민중이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라는 매우 과격한 주장을 펼쳤다.
  이승만의 이런 과격성은 자유당의 선거운동이 나아갈 바를 지시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지방에서 “이 동리에서 만약에 야당계 표가 나온다면 이 동네는 몰살을 해버린다. 만약에 우리가 북진할 때는 너희들부터 전부 다 죽이고 가버린다”라고 주민들을 위협하는 경우도 있었다(<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3권>, 35~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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