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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극단적 반공주의와 김구 암살 사건동아일보 대해부 2권 - 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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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9.29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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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부의 초대 내각 구성에서 따돌림을 당한 한국민주당은 1949년 2월 10일 신익희와 지청천의 세력을 흡수해서 민주국민당(민국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강한 보수야당으로 탈바꿈했다. 민국당은 1949년 4월 말 소속의원 69명의 원내 제1당으로 부상했다. 독자적으로는 국회를 지배할 수 없었던 이승만은 어쩔 수 없이 민국당과 연합을 하면서 내무부장관에 김효석, 재무에 김도연, 상공에 윤보선, 교통에 허정, 체신에 장기영 등 민국당 사람들을 기용했다.


이승만 세력 강화 위한 ‘법외 사조직’ 양산

1949년 3월 남로당 지도부의 김삼룡과 이주하가 체포되면서 남한의 좌익세력은 재기 불능의 상태로 빠져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승만이 꿈꾼 건 정당 체계를 우회한 국가기구와 관제적 민중 동원을 근거로 한 유사 국가기구에 의한 통치였다. 그런 계획 하에 탄생된 것이 바로 학도호국단이었다. 학도호국단은 이미 48년 10월에 구성된 대한청년단과 49년 8월에 재편성돼 나타날 국민회와 함께 3대 반관(半官) 또는 유사 국가기구적 대중조직으로 ‘3위1체’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국민회는 기존의 독립촉성국민회에서 독립촉성을 떼고 49년 8월에 확대 개편된 조직으로 회장은 대통령이었다. 목표는 신국민운동 전개였다. 구체적인 임무는 반공사상으로서의 사상통일, 공산주의 잔재 일소, 국방계획 협
조 등을 위해 관제데모, 관제국민대회 등에 동원되는 것이었다. (·····)
  대한민국 국적이 있는 18세 이상의 모든 남녀는 모두 국민회에 가입해야만 했으며, 그와 동시에 성년 여성은 대한부녀회, 청년은 대한청년단, 학생은 학도호국단에 가입해야만 했다. 이것 말고 청년들은 민보단, 소방단, 의용단에도 가입해야 했다. 국민회비를 내지 않으면 식량배급통장이나 물자의 배급을 중지한다고 위협했고, 청년단비를 내지 않으면 38선에 보낸다고 위협 했다.
  이 모든 조직의 총재나 명예총재는 모두 이승만이었고, 대한부녀회만 (그의 아내) 프란체스카가 총재를 맡았다. 그러나 어느 하나도 법률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매우 기이한 이중적 국가체제 운영 방식이었던 것이다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 226~227쪽).

이승만 세력이 조직한 ‘법외 사조직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학도호국단 창설을 주도한 사람은 극우단체인 족청의 부단장으로 일하다가 초대 내무부장관이 된 안호상이었다. 그는 이승만이 주창한 ‘일민주의(一民主義)’를 보급하는 데 주력하는 문교행정을 펼치다가 학도호국단에도 그것을 활용하려고 했다.

일민주의 및 일민주의에 대한 해설은 애매하거나 앞뒤가 맞지 않거나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아 일민주의에 대한 접근을 어렵게 한다. 사상이나 국론을 하나로 통일하고, 그렇게 만드는 데에 장애가 있으면 이를 제거해야 한다는 논리에는 전체주의적 발상 또는 파시즘적 사고가 내포되어 있는데, 그런데도 이승만과 그의 추종자들은 여러 곳에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해 일민주의를 철저히 이행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단군신화와 결부되어 나오는 홍익인간이란 단순하고 추상적인 말이 어째서 현대의 교육이념이 될 수 있는지도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일민주의가 단군 한배검의 홍익인간 정신과 신라의 화랑도 사상을 이어받았고, 현대의 모든 이론체계를 없애가진(지양한) 가장 깊고 큰 주의라는 안호상의 주장도 애매함, 논리의 모순, 허황함을 보여주는데, 일민주의와 그 해설에는 이와 같은 주장이 많이 나온다(서중석, <이승만의 정치 이데올로기>, 역사비평사, 2005, 18쪽).


학도호국단을 극구 칭송한 동아일보

학도호국단은 1949년 3월 8일에 창설되었다. 동아일보는 서울에서 중앙 학도호국대가 결성되는 4월 22일자 1면에 「학도호국대와 조국의 진로」라는 사설을 실었다.

  오늘 성동 원두에서는 중학, 대학의 학도 대표 4만여 명이 참집하여 중앙 학도호국대의 결성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그 결성을 보게 되었는데 이 민족과 국가의 장래를 쌍배(雙背)에 걸머진 ‘민족의 태양’ 학도 제군이 민족정기에 입각하여 학원을 수호하고 영토를 방위하고 국가에 헌신 봉사하기 위하여 궐기함이라니 국가 재건의 중대 관두에 있어서 그 의의의 위대하고 그 의도 또한 장하다 아니 할 수 없다. 학도호국대의 의의와 사명을 재고하여 격려의 사(辭)에 대(代)하려 한다.
  학도의 임무는 지·덕·체의 원만한 발전에 있다는 의미에서 또 학도의 군대 화는 군국주의의 고취라는 의미에서 호국대 결성을 반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민족과 국가에 대한 충분한 인식의 결여에서 나오는 오해라고 생각한다. 왜 그런고 하니 국가라는 것은 민족의 유지와 발전을 위하여서만 존재하는 것이요 한 민족은 한 국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민족자결의 원칙도 이러한 국가 정의(定義)에서만 비로소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국가민족 존속 문제를 떠나서 학도의 임무를 운위함은 한 개의 관념 유희에 불과한 것이다. 국가를 지배계급의 옹호 기관 시(視) 하는 공산주의의 국가관은 일체의 과거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규정하는 유물사관에 입각한 정의요 유물사관에 의하면 역사의 추진력은 물질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추진력은 손문(孫文)이 정당히 지적한 바와 같이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존에 있는 것이다. 환언하면 우리가 잘 사느냐 못 사느냐 생존할 수 있느냐 없느냐 요컨대 어떻게 생존하느냐가 우리의
역사를 추진시키는 중심 과제인 것이다. (···) 이 나라에 있어서는 선진자본주의국가에서와 같이 무산계급과 자산계급이 뚜렷이 형성되어 있지 않으며 따라서 계급 대립이 첨예화한 것도 아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현단계적 임무는 계급 해방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민족 해방에 의한 완전독립의 전취에 있는 것이며 재래의 부르주아혁명의 결함이었던 부의 편재를 제거하며 농민을 노동자화하는 것이 아니라 경자기유전(耕者其有田)케 하는 것이며 인권을 옹호하여 개성을 발휘시키는 데 있으며 이상의 제 기본정책에 의하여 봉건적 신분관계와 소유관계와 착취관계를 기양(棄揚)함으로써 봉건적 잔재를 일소하는 데 있는 것이다.

이 사설은 이승만이 극우·반공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사조직 겸 ‘정치적 도 구’로 창설한 학도호국단을 찬양하는 데 급급한 나머지 설득력이 없는 논리를 펴고 있다. 학도호국단을 만든 목적을 아무리 미화한다 해도 “학도의 군대화는 군국주의의 고취”라는 비판을 면할 수는 없는데 동아일보는 “이것은 민족과 국가에 대한 충분한 인식의 결여에서 나오는 오해”라고 주장한다. 학생들을 군국주의적 조직에 강제로 편입시키는 것이 ‘국가와 민족의 존속’에 크게 도움이 된다는 뜻일까?

나아가서 위의 사설은 학도호국단의 존재를 합리화하기 위해 희한한 ‘학설’을 펼친다. ‘계급 해방’이 아니라 ‘민족 해방에 의한 완전독립의 전취’, “봉건적 신분관계와 소유관계와 착취관계를 기양함으로써 봉건적 잔재를 일소”하는 일과 학도호국단이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학도호국단은 모든 중·고등학생들과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군사훈련과 반공교육을 실시했다. 학생들의 비판적 활동을 봉쇄하고, 관제데모 등으로 학생을 정치도구화했다. 학도호국단의 총재는 대통령, 부총재는 국무총리, 중앙 단장은 문교부장관이었다. 그렇지만 학도호국단에 무슨 경제적 지원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학생들로부터 징수한 학도호국단비가 학교 경영 전반의 재원이 되었다.
  학도호국단은 소련의 공격으로 국제적인 유명세까지 타게 되었다. 소련 대표 말리크는 유엔 총회에서 “한국의 학도호국단은 히틀러 유겐트요, 안호상은 파쇼”라고 비난하였으며, (주한) 미국대사 무초까지 안호상을 만나면 “히틀러 유겐트’가 왔다며 가시 돋힌 농담을 던졌다. 이에 대해 안호상은 “학도호국단은 히틀러 유겐트를 본뜬 것이 아니라 우리 화랑을 본뜬 것이요, 나치스 사상이 아니라 국조 단군 한배검의 한백성주의를 따른 것”이라고 대꾸했다(<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 230쪽).


김구를 ‘여순 반란의 배후’로 몰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서 제14연대 장병들이 ‘군사반란’을 일으킨 지 사흘째인 10월 21일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 이범석은 기자회견을 열고 ‘반란의 진상 전모’를 발표했다.

기자회견의 내용을 보도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기사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 동아일보의 기사 가운데는 “군정 이양 전인 수삭 전에 공산주의자가 극우의 일부 정객들과 결탁하여 반국가적 반란을 일으키려는 음모가 있었다”는 이범석의 주장이 들어 있으나 그 말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 전혀 없다. 그에 반해 같은 날짜 조선일보 2면 기사에는 ‘극우의 일부 정객’에 관한 이범석의 ‘공언’이 상세하게 나와 있다. 다음은 조선일보 기사이다.

  이번 반란의 성질을 말하면 본래 좌익계열은 수삭(數朔) 전부터 공산분자가 가장 싫어하던 극우의 일부 정객과 결탁하여 반국가적 반란을 일으키려고 국내는 물론 국외까지 책동 상통하였다. 그때는 불행히도 정권 이양을 받기 전이었으므로 이 책동은 그 진공상태를 틈타서 교묘한 방법을 다하여 급기야 국군의 소령 장교급에까지 숨어들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여수 14연대장 오동기(소령)로서 이 자는 여수에 가서 하사관 훈련을 기화로 젊은 하사관들의 단순한 심리를 이용해서 좌익의 주의 사상을 불어넣고 교묘히 선동하는 한편 극우진영의 국내 국외에 결합된 정객과 손을 맞추고 러시아의 10월 혁명 기념일을 전후해서 기술적인 반란을 계획했던 것이다. (·····)
  현재까지 그들의 죄상을 알아보건대 정확한 숫자는 아직 모르지만 근자에 새로 부임했던 여수연대장 이하 수십명의 장교를 살해하였고 순천에서는 그 반수 이상의 경찰관을 살상하였다. (···) 여수 역시 이와 같은 비참한 도탄 속에 민중을 몰아넣어 신인(神人) 공노할 공산주의자들의 죄악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보다도 시대에 몰락된 유치한 정치욕과 사리사욕을 만족시켜 반란을 조장케 한 일부 극우진영의 죄악이 백번 가증한 바이다. 정의에 입각한 세계의 사초 앞에서 이렇듯이 인민의 자유와 평화를 파괴하는 폭동으로써는 결코 정치적으로 성공하는 법이 없다. 이 죄상이 백일하에 폭로되는 날 우리 대중은 더욱 분개할 것이요 정부는 결코 용인 않을 것이다.

이범석은 10월 22일 「반란군에 고한다」라는 제목의 포고문을 발표하면서 “반란군이 일부 그릇된 공산주의자의 음모와 정치가의 모략적 이상물이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여순사건에서 ‘극우정객’의 역할이 매우 컸음을 암시했다. 수도경찰청장 김태선도 거기에 장단을 맞추었다.

이범석을 비롯한 정권의 실력자들이 주장하는 ‘극우정객’이 김구라는 사실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동족상잔으로 피바다를 만들고 있던 ‘여순 사건’의 주모자로 자신이 지목되자 김구는 10월 27일 그런 모략을 격렬하게 비판했다. 조선일보는 10월 28일자 1면에 그 내용을 2단 기사(「극우 관여 운운은 이해난 / 김구 씨 중앙사 기자에 담화」’로 보도했다. (동아일보 같은 날짜 지면에는 이런 기사가 없다).

  [서울 27일 발 중앙사] 한국 정부 방면에서 반란 배후의 인물로 지목하고 있는 한국독립당 위원장 김구 씨는 지방 여행으로부터 귀경하여 중앙사 특파원과 회담하고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나는 극우분자가 금번 반란에 참여하였다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들은 극우라는 용어에 꽂히어 다른 해석을 내리는 자신의 사전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금번 반란을 우려하고 있다. 이 불행한 사건은 제주도의 전투와 더불어 민생에 중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리고 순진한 청년들을 유혈사태로 오도한 자들은 용납할 수 없는 죄를 범하였다. 현재까지의 당국 발표에 의하면 반도(叛徒)들의 목적은 북한정권을 남한에 연장시키려는 것으로 보인다. 금번 반란의 반향에 관하여는 예측키 어렵다. 그러니 이는 한국 정세에 대하여 중립적 입장에 있는 일부 유엔 회원국의 견해에 영향을 미칠는지도 모른다.”

김구의 이런 해명 겸 반박은 그가 당시 이승만 정권의 모략을 얼마나 황당하게 느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조선일보를 비롯한 일부 언론은 김구의 주장을 ‘중앙사’ 특파원의 기사를 통해 전하기만 했을 뿐 국무총리 이범석과 그의 부하들이 끈질기게 퍼뜨린 ‘극우정객의 여순 반란 배후설’이 증거가 없는 것이라는 점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정지환(월간 <말> 취재차장)이 2001년 10월 30일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에 올린 글(「김구, 여순반란 수괴 될 뻔했다」)가 좋은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중요한 부분을 아래에 소개하겠다.

  (···) 한국 언론은 여순 사건이 터지자 이승만 정부와 군 당국의 발표를 확인과 검증도 없이 일방적으로 기사화하는 행태를 보였다. 그러다 보니 이승만 정부의 정치적 의도에 철저히 이용당한 것은 물론이고 그 과정에서 숱한 오보를 양산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자칫하면 김구 선생이 이승만 정부의 정치모략에 걸려들어 희생당할 뻔한 충격적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여론 조작을 통해 이 사건을 철저하게 자신들의 정치적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한 전화위복(?)의 수단으로 활용하려 했던 것이다. (·····)
  이승만 정부는 처음에는 1948년 10월 1일 발생한 ‘혁명의용군 사건’과 10월 19일 발생한 여순 사건이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처럼 여론을 조작함으로써 해방정국에서 최대의 정적(政敵)이었던 김구를 견제하려 했으며, 나중에는 반란의 실질적 주체가 14연대의 장병들이 아니라 계획적으로 조직된 민간 좌익이라고 몰아감으로써 예상치 못한 주민들의 대규모 반란 동참에  따른 정부의 실정(失政)에 대한 비난과 진압 과정에서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했다. (·····)
  거의 모든 언론이 두 개의 발표(이범석과 김태선의 주장-인용자)를 천편일률적으로 대서특필했는데, “소위 혁명의용군사건은 그 주모자 최능진, 오동기, 서세중, 김진섭 등이 남로당과 결탁하여 무력혁명으로 대한민국 정부 를 전복하고 김일성 일파와 합작하여 자기들 몇 사람이 숭배하는 정객을 수령으로 공산정부를 수립하려고 공모했다”(동아일보, 1948. 10.23)는 것이 요지였다.
  (···) ‘혁명의용군사건’이 처음 언론에 보도될 때만 해도 최능진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그런데 여순 사건이 터진 뒤에 이 사건이 발표되면서 추가적 으로 포함된 것이다.
  수사당국은 최능진을 “유엔 감시 하의 남한정부 수립을 방해하고 남북협상이 실패한 후에는 마지막 수단으로 국방경비대를 이용하여 무력혁명을 감행하려 한 인물“로 발표하였다. 그러나 최능진은 “남북협상에 나서려는 김구·김규식을 남한 우익진영이 ‘공산주의자’로 매도하고 비난했음에도 이에 대항하지 못한 남한 청년들은 다 썩었다고 분개한 민족주의자”(연합신문, 1949. 2. 9)에 불과했다.
  그런데 최능진에게는 색다른 전력이 있다. 1948년 제헌의회 선거 당시 이승만이 출마했던 동대문 갑구에 출마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결국 ‘국부 이승만’과 감히 겨루었던 최능진을 한 번 손봐주려 했던 수사는 최능진의 선거운동원으로 참가했던 군인을 신원보증했던 오동기(전 14연대장)로 이어졌고, 여순 사건이 오동기가 근무했던 14연대에서 일어나 게 되자 최능진에게는 무력혁명의 죄까지 뒤집어씌우게 된 것이다. (·····)
  이승만 정부는 최능진이 주장했던 단독정부 수립 반대, 남북협상 등의 정치적 입장이 김구와 한독당의 노선과 상당한 친화력을 갖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그러나 ‘혁명의용군 사건’은 나중에 조작된 사건이었음이 증명되었다. 당장 재판 과정에서 무력공산혁명 혐의가 인정되지 않았던 것인데, 이 기록은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유건호의 저서 <전환기의 내막>에 나온다.

 
동아일보가 왜 ‘극우 정객(김구)’이 여순 반란의 배후라는 이범석의 발표를 소홀하게 다루었는지, 아니면 묵살했는지는 밝혀진 바가 없다. ‘반란의 수괴’로 몰리던 김구는 그로부터 8개월 뒤 결국 암살당하고 만다.


  ‘김구 암살’ 첫 보도는 헌병사령부 발표

1949년 6월 26일 한낮, 김구의 거처인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경교장 2층 거실에서 총성이 울렸다.

동아일보 6월 27일자 2면 머리에는 「어제 하오 1시 20분 경교장서 / 김구 씨 피습 절명 / 범인은 군에서 수감 중 / 음울한 현장 / 군경만이 출입」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조선일보 28일자 2면 머리 기사 제목은 「김구 선생 조난 상보 / 조국통일의 비원을 품은 채로 / 희(噫)! 노애국투사 영영 가도다」이다. 동아일보 기사는 제목부터 ‘김구 씨 피습 절명’으로 조선일보와는 사뭇 다르다.

  70 평생을 조국광복에 바쳐온 노혁명가 한독당 위원장 백범 김구(74) 씨는 26일 하오 1시 20분경 시내 충정로 1가 경교장 2층 거실에서 정체불명의 괴한의 권총 피습으로 흉부를 관통당하고 약 10분 후 절명하였다. (·····)
  김구 씨 피습 사건으로 말미암아 경교장에는 헌병과 경찰관 외에는 출입을 엄금하고 있으며 부근 일대에는 군경이 삼엄한 경계진을 펴고 있어 일반의 통행을 엄금하고 있다. 때때로 요인들의 자동차가 출입하고 있을 뿐 일대는 침울한 공기 속에 잠기어 있다. (·····)
  헌병사령부 부사령관 전봉덕 중령은 김구 씨 저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범인은 현장에서 즉시로 체포되어 곧 헌병사령부에 수감 중이며 범인은 현장에서 받은 상처로 말미암아 의식이 회복되기를 기다려 그 소속과 그 배후관계를 엄중 조사할 것이나 현재 판명된 정도로는 다만 범인 단독행위인 듯싶다.”

동아일보는 6월 28일자 1면 머리에 「국민장 결정 / 김구 선생 명복을 / 겨레 총의로 기원」이라는 기사를 올리고 같은 면에 사설(「김구 선생의 급서[急逝]를 애도」)을 내보냈다.

  백범 김구 선생이 26일 괴한의 흉탄에 급서하였다는 비보에 접하자 정치적 노선의 여하를 막론하고 다 같이 비통한 애도를 금할 수 없으니 선생이야말로 일생을 조국광복에 바친 열렬한 애국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선생은 19세의 약관(弱冠) 시에 일군에 의한 명성황후의 살해를 보자 분연히 궐기하여 일본 헌병을 타살한 것을 계기로 이후 1923년 상해 망명 시까지 수차의 옥중생활의 신산(辛酸)을 겪었고 풍찬노숙의 망명생활의 갖은 고초도 선생의 투지를 꺾을 수는 없었으니 이봉창, 윤봉길, 최창식 의사의 의거는 실로 선생의 지도에 의함은 물론이요 그밖에 허다한 독립열사의 의거가 오로지 선생의 불요불굴의 투지의 표현이 아님이 없었던 것이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이와 같이 지성(至誠)한 백범 김구 선생의 급서는 천수를 다하지 못함에 있어서 더욱 우리의 마음을 애통하게 하는 것이다.
  선생의 공적과 덕을 추모하여 지난 27일 국무회의에서 국민장을 하기로 결정함은 실로 당연한 처사로 국민이 다 같이 애도의 충정을 표시할 기회를 가진 것이니 선생의 애국혼을 우리가 답습함으로써 선생의 명복을 빌어야 할 것이며 추호라도 탈선적 행동이 있다면 이것은 오히려 선생의 영혼을 괴롭게 하는 것으로서 명복을 비는 소이가 아닐 것이니 선생의 급서를 계기로 삼아 또 한 번 강조하고자 하며 명심하기를 바라는 바는 일체의 테러 행동을 철저히 근절시키자는 것이다. (·····)
  해방 이후 조국의 민주재건의 과정에 있어서 우리는 누차 민주주의 상식으로써는 이해하기 어려운 테러의 흉변을 당했으니 고하 송진우 선생을 비롯하여 설산 장덕수, 몽양 여운형 선생의 흉변에 단장(斷腸)의 애통을 느낀 것이 엊그제 같이 새로운데 이제 또 다시 백범 김구 선생의 흉변의 보(報)에 접하게 되니 이러고서야 우리 자신의 상식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으며 조국의 민주재건에 커다란 지장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 국가사회의 시비는 여론과 법률로 결정되는 것이며 개인적인 독단과 지나친 행동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금후 일체의 테러행동을 근절할 것을 선생의 영전에 맹서함으로써 선생의 급서를 애도하고자 한다.

일제강점기 후반에 동아일보는 김구가 이끌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대일본제국의 적’인 장개석 정권의 ‘하수인’ 격으로 다루거나 임시정부의 존재 자체를 아예 부정했다. 그리고 1948년 4월 말 김구가 김규식과 함께 평양의 남북회담에 참여하고 있던 때는 “임정의  수뇌부로 자처하는 인사들이 자기의 정권욕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적도 평양에서 공산파에 아유하고 소련에 국궁하는 것을 본다”고 극도의 비난을 퍼부었다. 김구는 싸늘한 주검으로 변한 뒤에야 비로소 동아일보 사설에서 “일생을 조국광복에 바친 열렬한 애국자”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성한 백범 김구 선생”으로 추앙되었다.


암살 진상 파악을 외면한 동아일보

동아일보 7월 1일자 2면에는 김구를 살해하고 현장에서 체포된 안두희가 한독당 ‘비밀당원’이라는 내용의 기사(「안의 비밀당원증 압수 / 범행 동기는 상금(尙今) 문초 중」)가 2단으로 나왔다. 

  백범 김구 선생을 저격한 범인 안두희를 인치(引致)한 헌병사령부에서는 그 범행에 관한 전모를 하루바삐 추궁하여 맹백한 진상을 세간에 알리고자 매일 같이 준엄한 문초를 하는 동시에 태평로 1가 4의 2에 있는 범인의 가택을 수사한 바 물적 증거품으로서 고 백범 선생의 친필로 된 ‘안두희 군존념’이라는 두 폭의 글씨와 비밀당원 번호 9라는 당원증이 발견되어 곧 범인에 이 증거품을 제시하였으나 끝까지 당 규칙에 비밀당원제는 있을 리가 만무하다고 버티던 범인도 오늘에 와서는 이 같은 증거품을 시인하는 나머지 포탄 탄창 2개를 백범 선생께 화병(花甁)으로 써 달라고까지 갖다 준 사실도 자백하여 앞서 발표된 한독당 조직부장 김학규 씨의 성명 내용의 “범인 안은 고 백범 선생과 무관할 뿐더러 당과는 전혀 관계 없다”라고 운운한 것도 범인의 공술로 완전히 일소되었거니와 30일 헌병사령관 전봉덕 씨는 다음과 같이 부언하여 주었다.
  “한독당 조직부장 김학규 씨가 범인인 안두희를 한독당원이 아니었다는 의미의 담화 발표를 한 후 그 왜곡된 사실을 진상과 같이 선전하여 고의적으로 진상을 은폐하려는 모략적 언동이 유포되어 심히 유감된 바이므로 이상의 증거와 같이 명백한 사실에 비추어 일반 국민 여러분들은 안이 한독당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비밀당원이었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하고 모략적 언동에 넘어가지 말아주기를 굳게 믿어 마지않는 바이다.”

헌병사령관 전봉덕은 여러 가지 ‘증거’를 들어 한독당 비밀당원 안두희가 그 당의 대표를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동아일보를 비롯한 보수언론은 그런 주장에 관해 심층 취재를 하지 않았음은 물론 아무런 의문도 제기하지 않았다.


권력의 은폐와 언론의 외면으로 파묻힌 암살 진상

김구의 국민장이 치러지던 열흘 동안 전국에 차려진 빈소에 1백만 명이 넘는 조문객이 모여들었고, 장례식 날에는 서울에서만 50만여 명이 거리를 메웠다.

  김구의 죽음을 슬퍼하는 통곡 소리가 울려 퍼지던 6월 28일 권력 내부에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다. 서울지검장인 최대교도 모르는 사이에 조직부장 김한규 등 한독당 간부 7명에게 살인교사죄로 구속영장이 발부된 것이다. 아무 조사도 하지 않고 증거도 없이 검찰총장 김익진이 “경무대 노인이 최대교 모르게 하라”고 지시해서 김익진 자신이 직접 영장을 발부했다는 것이었다. 이는 사건 당시 헌병사령관이었던 장흥이 훗날 증언하는 바와 같이, 김구 암살을 한독당 집안싸움으로 돌리기 위한 음모의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 254쪽).

최대교는 91세 때인 1992년 봄, 집필 중인 회고록의 일부를 중앙일보에 기고했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누리집’에 소개된 중앙일보 1992년 4월 16일자 기사(기자 이규연이 정리)는 아래와 같다.

  1949년 6월 26일 낮 1시쯤 검찰청 정원에서 산책을 하고 있을 때 이원희 부장검사가 황급히 달려왔다. “검사장님, 김구 선생께서 당했습니다.”
  “뭐요!” 순간 강한 충격에 몸이 떨렸다. 즉시 이 검사와 함께 지프를 타고 경교장으로 향했다(검찰청에서 경교장까지는 차로 5분 거리). 도중에 현장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잠시 관할 서대문경찰서에 들렀다. 뜻밖에도 이하성 서장은 지하 숙직실에서 부자를 쓴 채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관내에서 태풍이 불고 있는데 관할서장이 뭐 하고 있는 거요!” 대뜸 나무라자 이 서장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손을 내저으며 “헌병들이 지키고 있어 접근도 못합니다. 들어가려다가 헌병들에게 얻어맞았습니다”라는 어이없는 설명이었다.
  경교장 주변에는 헌병들이 깔려 있었고, 신분을 밝히고 들어가려 하자 한 헌병 대위가 ‘보안상 출입 금지’라며 가로막았다. 할 수 없이 돌아서며 “헌병들이 폭력을 써 현장검증을 막았다고 상부에 보고하겠다”고 엄포를 놓은 뒤 검찰청으로 돌아왔다. 잠시 후 그 대위가 검찰청까지 찾아와 “상부에서 허락이 떨어졌다”고 안내, 광목에 싸여 있는 김구 선생의 유해에 대한 검시만 20분 실시했다. 수사의 기본인 현장조사는 물론 안두희의 얼굴도 볼 수 없었다. 검시 직후 곧바로 김익진 검찰총장에게 전화했으나 외출 중이어서 권승렬 법무장관에게 갔다. (·····)
  권 장관과 함께 이범석 국무총리 집으로 갔으나 대문에 ‘수렵 출장 중’이라고 적힌 큼지막한 종이가 붙어 있었다. 다시 발길을 돌려 신성모 국방장관 집으로 갔다. 대문 앞에는 뜻밖에 최용덕 공군참모총장이 서성이고 있다가 우리와 마주치자 깜짝 놀라며 “신 장관은 몸이 불편해 누워 있다”고 했다. 우리가 중대한 일이니 뵙겠다고 하자 최 총장은 잠시 안으로 들어갔다 나온 뒤 안채 침실로 안내했다. 잠옷 차림의 신 장관은 김구 암살에 대한 보고를 받은 뒤 묘한 표정을 지으며 “이제 민주주의가 됐군” 하며 짤막한 한 마디를 던졌다. 신 장관은 언제 몸이 불편했느냐는 듯 유쾌한 얼굴로 “경무대로 가자”고 했다. 경무대에 연락해 보니 이 대통령은 낚시를 갔다는 것이었다. 우연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도 이상했다.
  암살과 관련, 검찰은 아무런 조사를 하지 않았고, 모든 것은 군에서 이루어졌다. 안두희는 군인(당시 소위)이므로 군 수사기관에서 담당하는 게 일면 수긍이 가지만 그 외 부분은 검찰이 담당해야 마땅한 것이다.
  암살 사건 1주일 후였다. 검찰청 출근길에 법원 울타리를 손질하고 있는 한 격만 법원장을 보고 옆에서 일을 거들다 뜻밖의 말을 들었다(당시 서소문 에 검찰청과 법원이 담 하나로 위치하고 있었다). “원, 이런 일이 있었소. 한독당(위원장 김구) 간부들에 대한 구속영장을 날더러 직접 떼라고 합디 다. 그래서 떼기는 했지만·····. 다시는 그런 짓 안 할랍니다.” 깜짝 놀라 누가 청구했느냐고 묻자 “김 검찰총장이 직접 신청했다”는 설명이었다. 곧바로 검찰총장에게 달려가 터무니없는 영장 발부 경위를 따졌다. 김 총장은 몹시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을 경무대 쪽으로 가리켰다. “저 영감탱 이(이 대통령 지칭)가 노망이 들었는지 최 검사장에게 일체 비밀로 하라고 해서 그리  된 거요. 양해하시오.” 순간 피가 솟구쳤다. 곧바로 사무국장에게 “형편에 의해 사직합니다”라는 짤막한 사직서를 제출하고 고향인 전북 익산으로 내려가 1주일 동안 은거하다 대충 마음이 정리돼 상경했다.
  그 뒤 권 법무부장관이 사표를 반려하고 설득, 복직했지만, 당장 살인교사 죄로 영장이 신청된 김학규 조직부장 등 한독당 간부에 대한 재판 과정에 서 검찰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이 글을 보면 이승만 정권이 김구 암살 사건 직후부터 헌병대를 동원해 검찰 수사를 방해했음을 여실히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이런 상황을 국민들에게 정확히 전달하지 않은 보수언론은 권력에 굴종하거나 진실을 외
면했다는 비판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안두희가 이승만 정권의 지시에 따라 김구를 살해했는지, 그리고 구체적인 배후는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안두희가 법정에서나 공개석상에서 확실한 진술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이 ‘살인범’으로 현장에서 체포된 안두희에게 갖은 특혜를 베푼 것은 사실이다. 그는 1949년 8월 3일 군사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11월에 15년으로 감형되었다. 안두희는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진 뒤 잔형집행정지처분으로 석방되어 육군특무대 문관으로 채용되었고 7월 10일 육군 소위로 복직했다. 그는 9월 15일 중위로 진급했고 이듬해인 1951년 2월 15일 잔형을 면제받은 뒤 12월 15일 대위로 진급했다. 그야말로 ‘초고속 승진’이었다.

부산 피난국회에서 야당 의원들이 안두희가 받은 특혜에 대해 정부에 항의하자 그는 1953년 12월 15일 소령으로 특진한 뒤 예편되었다. 강원도 양구군에서 군납업을 하다가 1960년 4월 혁명 뒤 ‘김구선생살해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하자 잠적한 안두희는 1961년 4월 18일 진상규명위원회 간사 김용희에게 붙잡혀 경찰에 넘겨졌으나 공소시효 소멸로 풀려났다. 1965년에는 백범독서회장 곽태영에게 칼로 목을 찔렸지만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그 뒤 20여 년 동안 안영준이라는 가명을 쓰면서 도피생활을 하던 그는 1987년 3월 28일 서울 마포구청 앞에서 민족정기구현회장 권중희에게 몽둥이로 매질을 당한 뒤 다시 언론에 노출되었다.

1996년 10월 23일 오전 11시 30분쯤 안두희는 인천 중구 신흥동의 집에서 경기도 부천 소신여객 소속 버스운전사 박기서가 휘두른 몽둥이에 여러 차례 맞아 목숨을 잃었다. 그의 나이 79세 때였다. 박기서는 재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98년 3월 8일 대통령 김대중의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 그의 죽음과 함께 김구 암살의 진상도 땅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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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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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실의빛v 2021-10-10 17:21:36

    ★심석희 선수 응원합니다 심석희 선수 파이팅★

    심석희 선수가 2014년 소치 동계 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계주 3000m 결승에서
    나이도 가장 어린 막내인 심석희 선수가 너무 잘해서 역전 우승하고
    금메달 따는걸 보고 쇼트트랙 경기를 좋아했던 사람이 심석희 선수를 응원합니다


    ★심석희선수 2014년 소치 올림픽 쇼트트랙 여자계주 3000m 결승 역전우승 동영상보기★

    ★심석희 선수 레전드 역전 우승 금메달 경기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WB_kx8kJi4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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