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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기록17-이부영 위원(1)등록일 : 2010/09/28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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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9.14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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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와 나의 삶 이 부 영 1. 들어가는 말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위원인 필자 이부영은 나의 삶에 관한 이 글을 동아투위의 성립 이전과 이후로 나눠 기술하려 한다. 동아일보 해직 사태는 나 자신 뿐만 아니라 우리 투위원 모두의 삶에 지울 수 없는 고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20대 후반 이후부터 40대 초반에 이르는 연배의 투위원들이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하려던 시기에 부닥쳐야 했던 사회로부터의 배제와 격리, 이단자(아웃사이더)의 굴레는 우리들의 삶을 한 순간에 ‘체제의 금 밖으로’ 내던져버리는 것이었다. 1975년에 시작된 동아투위원들의 스산한 삶의 역정은 무려 35년의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되고 있다. 그 세월은 일제 식민지배 35년과 같은 기간이다. 6명의 대통령 치세를 지냈고 더욱이 민주화 시대의 대통령 2명의 치세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잡히지 않고 있다. 15명의 동료들이 그 동안 유명을 달리했다.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판정에 근거해서 민사소송이 뒤늦게나마 진행되는 것에 만시지탄의 희망을 걸어 본다. 나는 동아투위의 민사소송 제출용 참고자료로서는 지나치게 장황한 글을 제출한다. 나는 담당 재판부가 이 글을 인내심을 가지시고 진지하게 읽어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쓰고 있다. 1975년에 자유언론운동을 벌이다가 해직되어 언론으로부터 축출된 한 기자가, 자기가 쓸 지면을 잃어버리고 살아온 한 기자가 그 이후 세월 동안 부딪치며 살면서 겪어온 일들을 재야 활동가나 정치인이 아닌 기자의 입장에서 기록한 것으로 읽어주셨으면 한다. 이 글을 읽게 되실 담당 재판부께서 글 쓴 이가 자신이 참여한 민주화운동이나 정치활동에 집착하면서 자신의 입장만을 편향되게 정당화하려고 노력하지는 않았다고 평가하실 것으로 기대한다. 나는 민주화운동과 정치참여의 길을 35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걸어왔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민주화운동가나 정치인이기 보다는 해직언론인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나는 1975년에 독재정권이 저지르고 유신법원이 추인했던 ‘동아 자유언론 탄압행위’가 민주 대한민국 법원에 의해서 복권되기를 바랄 뿐이다. 대한민국 헌법정신과 4·19 민주혁명정신의 자유언론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여러 동료 위원들께서 동아투위의 자유언론운동에 관해서 그 정당성과 당위성에 대해 상세히 기술해 주었으므로 나는 될수록 지난 35년 동안 동아투위 소속 언론인 입장에서 내가 듣고 본 것 위주로 사실들을 서술하려고 한다. 2. 동아투위 성립 이전의 삶 나는 홀어머니 밑에서 어려운 학창생활을 보냈다. 서울 영등포의 외진 당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종전 직후 용산중학교에 입학, 1961년에 서울대 정치학과에 진학했다. 고3 때 4월 민주혁명을 맞았다. 서울대 공대에 진학할 거라고 열심히 공부하는 동안, 친구가 철조망을 넘어나가서 데모에 참여했다가 동대문서 앞에서 경찰이 쏜 총탄에 맞아 사망하는 일이 < 1 > 벌어졌다. 옳은 일에 나서서 죽은 친구 앞에, 공부한다고 책상머리에 앉아 있던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고 학생들을 죽이는 정치라는 것에 대해 분노하고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공대 기계공학과로부터 정치학과로 지원학과를 바꿨다.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기 석 달 전에 입학한 서울대 문리대의 분위기는 4월 혁명의 여진으로 용광로 같이 들끓고 있었다. 곧 밀고 들어온 쿠데타군은 5월의 라일락향기 짙은 캠퍼스를 무참히 짓밟았다. 선배들과 교수들도 사라져버린 교정을 어쩔 줄 모르는 신입생들이 배회했다. 우리 세대들은 군사쿠데타에 대한 분노로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문리대 학생회 일에 참여하면서 군정연장 반대데모, 그리고 막 시작된 대일굴욕외교 반대데모에 참여하던 참에 나의 어머니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시고 나는 군에 입대했다. 군복무 중에 많은 학우들이 이른바 6·3사태로 제적당하거나 감옥으로 끌려가는 사태를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1966년에 다시 복교한 대학은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 같았다. 2년 뒤에는 대학 문을 나서야 할 처지여서 앞으로의 진로를 고민해야 했다. 학과의 교수 한 분이 공법을 전공해서 학교에 남을 생각이 없는가라고 권했지만 그 제의를 받아들일 심경이 아니었다. 박정희 정권의 독재와 독점경제에 저항하는 현실적인 일에 참여하고 싶었다. 당시 6·3학생운동으로 수감되었다가 출옥한 김도현 최혜성 김정남 등과 함께 장준하 선생과 백기완 선생이 세운 백범사상연구소(명동 소재)에 자주 들렀으며 장 선생님을 사숙하게 되었다. 그 뒤 한국일보, 중앙일보를 거쳐 당시 가장 선망의 대상이었던 동아일보에 수습기자로 들어갔다. 수습 11기로 입사한 1968년은 3선 개헌을 앞둔 해였다. 박 정권은 언론에 대해 온갖 압박과 회유를 일삼았다. 예를 들면 서울 봉천동 같은 달동네에서는 한겨울에 으레 연탄파동이 일어났다. 연탄업자들의 사재기 때문에 산꼭대기 동네에서는 아래 동네의 2~3배의 값을 내고도 연탄을 구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 사태를 보도하면 중앙정보부에서 기자와 데스크를 연행해서 민심선동으로 대북이적행위를 저질렀다면서 구타해서 내보냈다. 정치부나 경제부 등 핵심부서보다는 일선 경찰기자들에게 겁을 줘서 언론 전반에 공포 분위기를 서서히 퍼뜨리는 수법이었다. 편집국에는 중앙정보부와 보안사 등 정보기관원들이 상주하고 있었다. 1971년 대통령 선거를 거쳐 1972년 유신체제가 선포되자 언론은 완전히 침묵했고 오히려 독재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분위기로 전환했다. 당시 언론이 서서히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간다는 자조적 탄식이 번지고 있었다. 그래도 동아일보에서는 최소한의 기자정신을 지켜가려는 몸부림이 계속되었다. 나는 신문사에서도 상사들에게 자주 불만을 말하다가 눈총을 받았고 다른 동료들이 기피하는 부서인 문화부에 자원했다. 유신체제 아래서 정치부 경제부 사회부 등 주요부서에서는 정부의 보도자료 이외에는 거의 기사를 쓸 수 없었던 것이 현실이었다. 그래도 문화부의 취재대상은 목사 신부 스님 인권변호사 작가 시인 예술인 대학교수 등 지식인들이어서 우회적 은유적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신문제작에 반영할 수 있었다. 동아일보에서 자유언론운동을 펼치는데 있어서 문화부 기자들의 입지는 지식인 사회의 광범한 지지 성원을 이끌어내는데 큰 힘이 되었다. 문화부 기자로 일하면서 형성한 지식인 네트워크는 이후 동아투위원으로 재야민주화 운동의 중심에 서서 일해 가는데도 적지 않은 보탬이 되었다. 자유언론운동에서 우리의 중심인물은 천관우 주필이었다. 유신체제 선포 전후에 동아일보에서 퇴사와 복귀를 거듭했던 천관우 선생은 유신 직후 회사에 복귀한 뒤, 아예 ‘민주수호국민협의회’(약칭 민수협)대표를 맡아 재야인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천 선생은 함석헌, 김재준, 장준하, 유진오, 이병린, 김정한 선생 등 재야인사들과 함께 성명을 낼 일이 있으면 < 2 > 나와 몇몇 기자들을 불러 성명서 원고를 주고 서명을 받아오라는 심부름을 보내시곤 했다. 서울이 아닌 대전에 머물고 있던 유진오 선생 댁에 감시형사들의 눈을 피해 새벽에 들러 서명을 받아온 다음 아무 일 없는 듯이 출근하기도 했다. 1973년 천관우 선생은 나와 손수향 양(장준하 선생의 비서)의 결혼식에 주례를 서주셨다. 아버지가 없었던 두 사람에게 장준하 선생은 대부가 되어 주셨다. 유신체제가 선포되고 두 차례 언론자유선언 사건이 있었지만, 박정희 독재정권은 언론의 숨통을 질식시키고 있었다. 언론자유운동에 열심이고 정권에 비판적인 기사를 쓰는 기자를 하루아침에 편집부서가 아닌 광고국으로 전보하기도 했다. 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산업화로 대형화하기 시작한 재벌기업들이 사원들에 대한 처우를 비약적으로 올리자 언론사들의 급료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격차가 생겼다. 이때부터 적지 않은 수의 유능한 언론인들이 재계나 관계로 자리를 옮겨갔고 또 일부 언론인들은 언론의 장래에 깊은 회의를 품고 유학길을 떠나기도 했다. 언론자유의 마지막 보루라고 믿으면서 동아일보에 근무하던 젊은 언론인들은 요즘에는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독립운동 하는 심경’으로 자유언론운동에 매달렸다. 대학생들이 동아일보사 앞에 몰려와서 ‘민중의 소리 외면한 죄, 무엇으로 갚을 텐가’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언론화형식 시위를 벌일 때, 후배들에게 그 같은 욕을 먹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했다. 제대로 특종기사를 쓰고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논설을 쓰는 일이 신분상의 불이익을 당하고 정보수사기관에 끌려가 온갖 모욕과 구타를 당하는 시국을 맞아 동아일보 동아방송의 언론인들은 비상한 결단을 하지 않으면 안됐다. 개인적으로 아무리 유능한 기자가 되어도 쓸데없는 노릇이었다. 체계적인 독재정권에 대해서는 개인이 아니라 집단으로, 개인 재능이 아니라 집단 지성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안됐다. 그 대응방안이 언론노동조합의 결성이었다. 1974년 3월 동아일보의 언론인들은 당시에 언론노조가 없었으므로 전국출판노조 동아일보 분회를 결성했다. 그러나 사주 측은 즉시 대량해임, 무기정직 처분으로 대응했다. 당시 박 정권은 노조결성 사태를 다소 복잡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노조의 간부진이 유신체제에 대해서 적대적인 것은 분명하지만 동아일보 경영진과는 대립적 입장이었으므로 동아일보 사주 측과 노조 측이 내부 갈등을 벌이는 것이 정권 입장에서는 나쁠 게 없다는 판단을 했던 것이다. 노조 측에서 부당해고취소청구소송을 제기하자 법리적으로 불리하다는 판단을 한 사주 측은 1개월 뒤 해임 등 징계를 일괄철회하고 복직조치를 취하되, 노조설립에 대한 신고필증이 교부되지 않았으므로 노조는 성립되지 않았다는 입장을 취했다. 노조 측은 노동조합의 성립을 기정사실화하고 조합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동아일보사에서 노동조합 결성 문제로 긴장이 조성되고 있던 1974년 4월초 민청학련, 인혁당 사건이 중앙정보부에 의해 발표되었고 수백 명의 학생, 지식인, 종교인, 작가, 예술인들이 구속되었다. 무더기 구속에 따른 고문조작수사 의혹이 제기되었고 종교계를 비롯한 지식인 사회에서는 공포감 속에서도 그대로 있을 수 없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명동성당, 기독교회관 등지에서 열리는 민청학련, 인혁당 구속인사를 위한 기도회는 문화부 기자가 담당하는 행사였다. 다른 신문사와 방송사의 기자들은 아예 행사장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동아일보와 동아방송 기자들만 나타나 열심히 취재했다. 그러나 우리들이 취재해 송고하는 기사들도 실리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른바 시국사건 기사들은 중앙정보부 등 정보수사기관의 간섭과 통제로 철저히 보도되지 못했다. < 3 > 그런 현장에 나가 취재하는 동아 기자들에게도 구속자 가족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나가지도 않을 기사를 왜 취재하느냐”, “너희들 중앙정보부의 하청 받고 대리 정보 수집하는 것 아니냐”는 등의 항의를 하면서 취재기자들의 멱살을 잡고 흔들기도 했다. 유신군사법정에서는 사형, 무기징역, 20년~15년 징역형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법정에서 변론하던 변호사가 변호했다는 이유로 구속되던 시절이었다. 이런 사태를 맞아 동아노조는 다시 결단의 시기를 준비해야했다. 우리가 언론노조를 만들어 조직을 확대. 강화했던 것도 단지 신분보장 받고 월급 몇 푼 더 받자고 한 일은 아니었다. 독재를 강화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구속하고 고문수사를 통해 사형, 무기징역형을 무더기로 쏟아내는 민주주의 파괴행위에 맞서 자유언론의 책무를 다하려고 언론노조를 결성한 것이었다. 우리는 1974년 10월 24일 국제연합 창립일(유엔데이)인 공휴일에 ‘자유언론 실천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그 이전에 몇 차례 있었던 언론자유선언이 아니라 ‘자유언론을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동아 언론인들 입장에서는 자유언론을 지키기 위해 유신독재정권과 정면으로 대결하겠다는 것을 선언한 것이었다.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에 대한 국민의 지지와 성원은 정말 뜨겁고 눈물겨운 것이었다. 동아의 지면과 전파를 통해 오랫동안 보도가 통제되었던 수많은 시국사건들이 제대로 보도되기 시작했다. 동아가 앞장서서 자유언론을 실천하자 다른 신문 방송들도 따르려했다. 그러나 1974년 연말에 다가서자 동아일보의 지면에서는 점차 광고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유신정권의 동아에 대한 광고탄압이 시작된 것이었다. 성탄절 임박해서는 완전히 광고가 사라졌다. 사라진 백지 광고지면에는 민주주의 회복, 구속자 석방, 유신헌법 개정, 학원의 자유 등을 기원하는 격려광고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백지광고 지면에는 민주주의의 성찬(盛饌), 축제가 벌어졌다. 세계 언론사에 전례가 없는 백지광고 탄압사태는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동아노조의 대변인(섭외부장)을 맡고 있던 필자는 동아일보사로 찾아오는 국내외의 외신기자들의 취재에 응해야 했다. 기자 자신이 취재원이 된 것이다. 1975년에 들어서자 동아일보사 내외에서는 박정희 정권이 사주 측을 압박하여 자유언론에 앞장서고 있는 언론인들을 축출하려는 것이 백지광고탄압의 공공연한 의도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사주 측은 2월에는 기구축소라는 이유를 내세워 자유언론운동에 앞장서고 있던 기자들이 소속된 부서를 없애면서 해임시켰다. 이에 항의하는 기자들을 기다렸다는 듯이 대량 해임. 징계했다. 동아의 언론인들은 제작거부를 하면서 사내 농성에 들어갔다. 1975년 3월 17일 새벽 사주 측은 폭력배들을 동원, 농성하던 남녀 언론인들을 몽둥이와 쇠파이프를 휘둘러 사외로 내쫓았다. 유신정권과 이에 야합한 동아 사주가 합작하여 동아 언론인들을 축출한 것이었다. 동아 언론인들의 35년에 걸친 거친 들판의 삶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3. 동아투위 성립 이후의 삶 가. ‘청우회 사건’ 1차 투옥 유신체제 아래서 체제 밖의 삶이란 바로 국가폭력에 내맡겨지는 것이었다. 언제 어디서 개인이 사라지고 구속되고 고문당하는지 알 수 없던 시절이었다.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에서 해직된 134명의 언론인들은 축출된 바로 다음날 한국언론회관에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약칭 동아투위)를 결성했다. 초대위원장에는 나와 함께 < 4 > 문화부에서 차장으로 일했던 권영자 선배가 맡았다. 나는 동아노조에 이어서 동아투위의 대변인 역할도 맡았다. 동아투위는 동아 언론인들의 대량축출의 부당성과 자유언론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전방위적으로 뛰어다녔다. 필경(筆耕)과 등사판을 이용하여 매일 유인물을 수백 부씩 만들어서 외신기자들, 다른 언론사 기자들, 대학교수들, 문화예술인들에게 배포했다. 시간이 흐르자 중앙정보부 등 수사정보기관에서는 동아투위원들의 그런 활동을 주시하기 시작했고 특히 나의 외신기자 접촉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드디어 여러 가지 이유로 동아투위원들이 구속되거나 구류처분 당하는 일이 계속 벌어졌다. 서울대 학생회에서 동아 언론인 집단해고사태의 부당성을 알리고 자유언론투쟁의 정당성을 알리는 연극 ‘진동아굿’을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공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에 갔다가 학생들의 요청으로 ‘동아사태’의 전말을 설명한 것이 필자가 구류처분을 당한 이유였다. 동아 언론인들을 회사 밖으로 축출한 이상, 그들의 자유언론 투쟁이 정당한 것이 아니라는, 그래서 그들이 축출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그럴듯한 이유가 만들어져야 했다. 필자가 미리 각오한 바이기는 했지만 정권탄압의 촉수가 점차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1975년 5월초 미국 AP통신의 부사장 겸 대기자인 존 로더릭이 서울을 방문, 동아일보 사태를 취재하겠다고 해서, 자유언론 농성현장을 우리와 함께 지키다가 함께 쫓겨난 제임스 시노트 신부의 안내로 그를 플라자 호텔 로비 커피점에서 만났다. 우리 회견 자리 주변에는 중앙정보부원을 비롯한 여러 정보기관원들이 촉각을 세우고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의 화제는 동아사태 뿐 아니라 민청학련 사건과 처형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인혁당 희생자들에 관한 것 등 꽤 광범한 내용이었다. 워싱턴포스트의 돈 오버도퍼, 뉴욕 타임스의 리차드 핼로런 등 미국 영국 유럽 일본의 여러 외신기자들을 만날 때마다 숨바꼭질이 있었고 기관원들이 주변을 맴돌았다. 동아 언론인들이 축출되기 얼마 전에 유신국회에서는 외국인에게 대한민국 정부를 비판하는 발언을 하는 경우, 국가모독죄로 처벌할 수 있는 형법 104조 2항이 개정, 신설되었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고 했던가, 나 자신 뿐만 아니라 우리 동아투위원들에게 닥쳐오던 가혹한 운명은 너울처럼 겹쳐왔다. 학교 다닐 때 같은 서클 선배였고 동아일보에 먼저 들어왔다가 민주화운동에 전념하겠다고 회사를 그 얼마 전 떠난 이창홍이 중앙정보부에 자수하여 필자와 성유보 그리고 정정봉이라는 또 다른 선배와 만나 나눴던 이야기들을 모두 털어놨다는 것이었다. 우리들과 그는 동아일보 안의 여러 문제들에 관한 이야기도 나눴지만, 그보다는 민청학련 사건의 주모자급 후배들을 이창홍이 만나 간여한 것 때문에 수배를 당했는데 주모자급 후배들이 사형과 무기징역형을 받는 것에 대해 충격과 공포에 짓눌려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졌다가 제 발로 중앙정보부에 걸어 들어갔다고 그의 부인이 나에게 알려왔다. 이창홍은 민청학련에는 간여한 것이 아니었고 나와 성유보 등과 동아의 자유언론운동에 간여했다는 쪽으로 정보부에서 진술했다는 것이었다. 즉 무거운 쪽으로부터는 빠져나오고 가벼운 쪽을 넘겨주겠다는 의도였다. 나눈 이야기라는 것이 대단한 것이 못돼서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1975년 6월초 나는 돌을 갓 넘긴 첫 딸과 함께 둘째 아이의 출산을 위해 처가가 있는 부산에 머물고 있던 아내를 만나러 갔다. 둘째 아이는 아들이었다. 출산 사흘 만에 서울에 돌아오자 말자 언론회관 투위모임에 나갔다가 중앙정보부원들에게 < 5 > 동지들이 보는 앞에서 연행됐다. 두 어린 것을 데리고 처가에 머물고 있던 아내의 얼굴이 연행 순간 떠올랐다. 그리고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나는 중앙정보부 6국, 이른바 정치적 사건을 다루는 수사국에서 조사받았다. 민청학련, 인혁당 사건, 최종길 교수 고문치사 사건 등을 다룬 악명 높은 부서였다. 수사관들은 나를 의도적으로 조금 먼 거리에 있는 3층 화장실로 데리고 가서 그곳이 최 교수가 뛰어내려 자살한 곳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나를 담당한 수사관은 3명이었는데 2명은 경찰 수사관 출신이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헌병 출신이었다. 경찰 출신 가운데 한 사람은 50대 중반의 나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나를 넘겨받자 말자 지하실의 골방으로 끌고 내려갔다. 그곳에는 한쪽에 야전침대 몽둥이들이 잔뜩 쌓여 있었는데 그는 다짜고짜 나를 엎드려뻗쳐 자세를 시키고 이른바 ‘빠따’를 치기 시작했다. 짙은 평안도 사투리를 쓰는 그는 “너희 서울대 놈 새끼들은 힘들여 가르쳐 놓으니까 빨갱이나 된다. 무엇이 부족해서 역적이 되느냐”고 미친 듯이 소리치면서 때렸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조사나 해보고 말합시다”고 실랑이를 벌였다. 그 뒤의 조사과정에서도 그는 선임자로서 옆에 서있으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커다란 삼각뿔자로 나의 등과 어깨를 때리고 때로는 찌르기도 했다. 사흘 동안 실랑이를 벌이는 과정에서 나는 심한 설사증세를 보였다. 그는 나를 지하 조사실로 끌고 가서 다시 구타했다. 나는 참지 못하고 설사를 해버렸다. 그를 수행했던 공채출신 보조 수사관이 그를 만류했고 나를 샤워실로 데리고 가서 씻도록 해주었다. 그날 밤 지하 3층 조사실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데 문을 열고 누가 들어섰다. 겁이 덜컥 났다. 들어선 사람은 큰 주전자를 들고 있었다. 물고문을 하려고 왔나보다고 긴장했다. “야 부영아, 나다. 성태경이야.” 나의 고등학교 1년 선배, 유명한 럭비선수 성태경이 서 있었다. “마음 놔, 네가 너무 고생하는 것 같아서 찾아왔다. 술이나 한 잔 하자”면서 반말들이 대주전자에 생맥주를 가득 담고 점퍼 주머니에 닭튀김을 넣고 나타났다. 그가 정보부 수사관으로 일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풍편으로 들은 바 있었다. 그날 그와 나는 새벽 3시에 가깝도록 술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언론자유 문제로 이렇게 다루는 것에 불만을 말하자 자기도 잘 이해하고 있으며 이런 시국에서는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는 도리 밖에 없다고 위로했다. 오래 고생하지 않을 것이니까 몸만 상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충고해 주었다. 정말 그 다음날부터 평안도 말씨의 서북청년단 출신은 나타나지 않고 다른 수사관이 보충되었다. 수사는 이창홍의 진술대로 진행되었다. 고대총장을 지낸 김상협의 ‘모택동 사상’과 육군사관학교 교재인 버트람 울프의 ‘레닌에서 흐루시쵸프까지’라는 책(미국 브루킹스연구소 시리즈)이 내가 공산주의에 심취해서 읽은 책으로 압수목록에 들어갔다.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그리고 긴급조치 9호와 형법 104조 2항(국가모독)이 나에게 적용된 위반법령이었다. 이른바 ‘청우회’ 사건이라는 대단한 사건으로 포장되어 발표되었다. 중앙정보부로부터 서울지검으로 송치되자 검사의 신문에 응해야 했다. 그는 정보부 조서를 토씨 하나 고치지 않고 그대로 베끼고 있었다. 물정을 잘 모르던 나는 이창홍의 자의적 진술대로 작성된 정보부 조서는 나 자신의 임의성이 무시되었다고 항의하자 그러면 정보부에 다시 가서 조사받는 도리 밖에 없다고 정보부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정보부에 다시 보내겠다는 협박이었다. 나는 웃으면서 그대로 하라고 말했다. 1심 재판에 나의 경우 서울지법과 영등포지원 두 곳을 번갈아 가면서 출정했다. 이른바 ‘청우회’ 사건의 경우엔 서울지법에서, 서울대 데모 배후조종 혐의에 대해선 영등포지원에서 < 6 > 재판 받았다. 사건들이 폭주해서 재판을 늦게 시작한 탓으로 한 주일에 3회 이상 재판정에 나갔다. 1심 재판의 형량은 ‘청우회’ 사건의 경우 구형 15년에 선고 8년, 서울대 데모배후조종의 경우는 구형 3년에 선고 1년, 도합 구형 18년에 선고 9년이었다. 한겨울 추운 날씨에 구치소로, 재판정으로 쫓아다니던 아내는 1심 선고가 있던 날, 장기형을 선고받고 나오는 나에게 “여보, 밥 잘 먹고 기운내요”라고 소리쳤다. 기죽지 말고 건강해야한다는 뜻이겠지, 나는 미소로 답했다. 많은 동료 동아투위원들이 재판정에 응원 나와 주었다. 박정희 유신정권이 나와 성유보가 관련된 ‘청우회’사건을 통해 동아자유언론운동을 왜곡하고 유린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꿋꿋하게 우리를 믿고 성원해 주었다. 내가 서울지법에서 재판받는 동안 취재하러온 지난날의 언론사 동료 기자들과 자주 얼굴을 마주쳤다. 동아 기자들은 차마 내 앞에 나타나지 못했다. 다른 언론사 기자들은 다가와 따뜻한 위로의 한 두 마디 말을 건네고 갔다. 시세 흐름에 빠르기로 소문났던 몇몇 기자들은 “꼴좋다. 그렇게 날뛰더니 이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모욕적인 시선을 던졌다. 그들은 박정희 정권 뿐 아니라 전두환, 노태우 정권 그리고 김영삼, 김대중 정권에서도 언론계에서 승승장구했다. 어떤 정치상황에서도 더 빨리, 오히려 앞서 순응해나가는 저들을 어떻게 봐야 할까, 그 뒤로도 계속 고민한 주제였다. 1심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영등포 구치소에 갇혀 있었다. 1975년 한여름 8월 20일 경 아내가 초췌한 얼굴로 면회 왔다. 장준하 선생께서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포천 약사봉 계곡에서 추락사하셨다고 발표되었지만 믿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내는 장 선생께서 8월 17일 돌아가시고 장사를 치른 다음 바로 면회 왔다는 것이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심경이었다. 나는 나의 작은 독방(0.72평)에서 사과와 참외, 그곳의 밥과 찬으로 제상을 차리고 홀로 예를 올렸다. 선생님의 독립, 민주, 통일의 유지를 이어갈 것을 다짐하면서. 항소심 재판은 싱겁게 끝났다. 심리할 것이 없었다. 항소심은 1심 선고 9년 형을 2년 6월 징역형으로 줄였다. 정치범들에 대한 형의 선고에 중앙정보부의 개입 조정이 있었던 것은 이제 공지의 사실이 되어 있다. 중앙정보부장이 신직수로부터 김재규로 바뀐 것이 정치범의 형량이 대폭 줄어든 원인이었다. 보안법이나 긴급조치로는 정치범을 될수록 잡아들이지도 않았다. 1976년 중반 이후의 추세였다. 반성문만 쓰면 웬만하면 석방했던 것도 김재규의 방침이었다. 우리들을 변호해준 분들은 홍성우 황인철 이돈명 강신옥 조준희 이범열 변호사였다. 홍성우 황인철 변호사는 동아 노조 때부터 한 결같이 우리와 함께 해주었다. 그 뒤 숱한 나의 송사에 그 분들은 선배가 되고 동지가 되어 주었다. 나의 대학 동기이자 민주화운동을 뒷바라지해온 김정남은 홍성우 변호사와 황인철 변호사를 위해 재판 준비를 도왔다. 1심 재판 동안 머물렀던 영등포구치소에서 많은 서울대생들을 만났다. 1975년 긴급조치 9호에 정면으로 대항한 서울대 5.22사건 때문에 구속된, 신입생으로 아직 미성년이었던 박원순 변호사, 나의 같은 사건 공범이었던 이신범 전 의원, 이호웅 전 의원, 그리고 그 뒤 나와 재야운동을 함께 했던 문화운동가 김도연, 시인 김정환, 지금은 고인이 된 시인 채광석 등 많은 서울대 졸업생과 재학생 활동가들을 만났다. 그렇게 많은 학생들이 구속되어 재판받는 것을 보면서 유신체제는 오래 갈 수 없는 체제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항소심 재판 동안에 머물렀던 서울구치소에선 더 많은 시국사범 인사를 만날 수 있었다. < 7 > 영등포 구치소가 서울대생들 천지였다면 서울구치소는 전국의 남녀노소 정치범들의 집합소 같은 곳이었다. 함세웅 문정현 신부 같은 종교인, 김지하 시인, 한승헌 변호사, 지금은 특임장관이 된 이재오 의원, 최열 환경재단 대표, 조성우 민화협 공동대표, 서상섭 전 의원 등등 많은 민주인사들이 갇혀 있었다. 김지하 시인에게 나로서는 마음의 큰 부담을 지고 있었다. 1975년 2월 그가 민청학련 사건에서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을 때, 나는 그로부터 ‘고행 1974년’라는 제목의 옥중수기를 받아 동아일보에 실었다. 무엇보다 그 글에 인혁당 사건이 고문으로 조작되었다는 사형수 하재완의 증언이 최초로 공개됐다. 이제는 인혁당 사건이 고문 조작으로 8명의 생명을 사법살인한 치욕적 사건으로 판결되어 법원에 의해 명예가 회복되었지만 당시에는 그 진실을 밝힌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김 시인은 바로 재수감되어 그 자신이 박 정권의 사법살인의 희생양 처지를 피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를 살리기 위한 ‘양심선언’ 반출 작전이 내가 서울구치소에 머무는 동안 진행되고 있었다. 김정남-전병용 라인이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비밀리에 그 소식을 전해 듣고 성공하기만 빌었다. 김지하를 살린 사람들은 많았다. 나중에 인권변호사로 큰 역할을 했던 조영래가 양심선언의 문장을 다듬었으며 김수환 추기경과 윤형중 원로신부님을 비롯해서 한국과 일본의 천주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이 움직였고 이름 없는 소년수 출소자까지 기여했다. 그런가 하면 이병철의 삼성재벌의 승계문제 때문에 형제 골육상쟁이 일어나 그 둘째 아들 이창희가 나와 같은 사동에 갇혀 있기도 했다. 그는 폐쇄공포증 때문인지 감방 안에 갇혀 있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항상 문을 따놓기를 바라니 딱한 노릇이었다. 당시 서울구치소 교도관들 가운데 상당히 많은 인사들이 유신반대 취지에 동조하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여러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민주인사들을 돕고 있었다. 지금은 모두 은퇴했지만 전병용, 한재동, 김제술 등 여러 헌신적인 동지들을 만났다. 지금도 그 때 만났던 교도관 출신 인사들의 친목모임에서는 가끔 나를 불러 함께 산에도 가고 회식을 하기도 한다. 항소심에서 2년 6월형이 확정되자 나는 안양교도소로 이감되었다. 역시 그 곳에도 30여명의 정치범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정치범들과 함께 수용되기 전 한 달 동안 5평 남짓 되는 감방에 14명의 일반수들, 다시 말해 강절도범과 사기범들과 함께 생활했다. 한 여름 뜨거운 슬라브 지붕 밑의 2층 감방 안은 사람들의 체열까지 더해져 한증막이나 다름 없었다. 용케 참다가 자주 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팬티만 걸치고 있어도 더웠다. 대법원 확정 판결이 있자 이른바 형 확정방으로 옮겼는데 그곳이 정치범들만 모아 놓은 곳이었다. 나는 연세대 출신으로 나중에 농민운동가가 된 강기종 군, 그리고 서울대 출신으로 노동운동가가 되었다가 지금은 변호사가 된 송병춘 군과 한 방에 살게 되었다. 그곳에는 이미 영등포와 서울 구치소에서 만났던 이호웅 최열 조성우 이명준 그리고 민청학련 사건의 김효순 등 학생운동 출신들과 이창복 김종대 황현승 정만진 이재형 등 인혁당 사건 인사들이 함께 모여 있었다. 하루 한 번 30분 동안의 운동시간에 넓은 운동장에서 함께 축구시합을 하는 것이 큰 낙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30분을 뛰고 나서 세면장에서 찬물로 목욕하고 나면 상쾌했다. 감방 안에서는 열심히 공부했다. 여러 차례 감옥생활 가운데 꽤 충실한 생활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책 검열이 엄격해서 성경 등 종교서적과 문학 서적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 총서 12권을 처음부터 읽어나갔다. 수메르 바빌로니아 에집트 등 상고사에서부터 고대 중세 근현대를 차례로 읽었다. 희랍어 라틴어까지 나오는 방대한 문헌을 내 빈약한 어학으로 모두 읽어내는 건 불가능했다. < 8 > 그래도 개략적으로 살펴보는 재미는 오랜만에 맛보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맺어진 인연들은 그 후 민주화운동을 전개해 나가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안양교도소의 행복한(?) 수용생활은 1976년 연말에 끝났다. 나는 인혁당 사건 관련자 이창복 김종대 선생과 학생운동 관련자 이명준 등과 함께 전주교도소로 이송됐다. 이제 본격적인 고생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주교도소의 특별사동에 수용됐다. 특별사동이란 정말 특별한 사람들만 수용된 곳이었다. 이미 먼저 와있던 인혁당 관련자 전창일 유진곤 김한덕 강창덕선생과, 오래 전 그러니까 20여년~10여년 전부터 수용되어 있던 미전향 장기수 15명 정도가 그 특별사동에 갇혀있었다. 특별사동의 왼쪽 남향으로만 0.72평짜리 독방 32개가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중앙정보부의 직할통제를 받는 ‘전향공작반’이 교도소의 교무과 안에 배속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우리 반정부 정치범들을 미전향 장기수들 감방 사이사이에 끼워 넣어 수용했다. 그리고 미전향 장기수들과 통방하면 국가보안법 추가기소를 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첫 번째 환경변화는 좁은 방안에 높이 달린 스피커를 통해 고음으로 흘러나오는, 전날 방송된 10분짜리 KBS 대북방송이었다. 오승용이라는 성우가 진행하던 그 프로는 “김일성이 이 놈, 네가 제 명에 죽을 줄 아느냐.....” 뭐 그런 내용이었다. 좁은 방안에서 하루에 10차례 이상 같은 내용을 반목해서 듣도록 하는 ‘전향공작’이었다. 소리를 피하기 위해 창문 쪽으로 달린 변소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아 봐도 사동 전체를 울리는 방송 소리를 피할 길은 없었다. 그것은 심리전 고문이었다. 그러나 우리보다 먼저 와서 생활하고 있었던 수용자들 쪽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나는 작심하고 일종의 난동(?)을 부렸다. 감방 문짝을 발로 차고 소리를 질렀다. “방송 고문 중단하라”면서 교도소장 면담을 요구했다. 그러자 교무과장이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나는 방송을 중단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는 그 조치는 오래 전부터 해온 것으로 중단할 수 없으며 오히려 나와 같은 국가보안법 위반자들의 전향공작을 더욱 강화할 예정이라고 통고했다. 혹 떼려다 혹을 붙인 꼴이 되었다. 나는 전향해야 할 대상이 없는 대한민국 국민이니까 전향공작을 거부한다고 통보했다. 다시 감방 안으로 들어와서 방송이 나오면 계속 방문을 걷어차고 소리를 질렀다. 며칠 이런 상태가 계속되자 방송의 횟수가 줄어들더니 나중에는 중단되었다. 어느 겨울날 하루 30분 두 명씩 운동하도록 하는 운동시간에 옆방 미전향 장기수 고광인 선생이 나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그 방송소리 시간 조금 지나면 자장가처럼 들려요. 그런 건 아무 것도 아니에요. 1973년 사회안전법(**미전향수가 전향하지 않으면 2년마다 심사하여 수감을 연장토록 한 법)이 생기고 나서 이 독방에 깡패를 함께 넣어서 두들겨 패도록 했고 한 겨울에 방 안에 찬물을 끼얹어서 폐렴이 걸려 죽게 만들곤 했어요.” 전향공작반원들은 전향에 성공하면 성공보수를 받도록 했기 때문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래도 75년부터 긴급조치로 반정부 정치범들이 들어오면서 전향공작이 부드러워졌다는 것이었다. 1976년의 겨울 추위는 혹독했다. 밖의 기온이 영하 10도 정도이면 독방의 실내 온도는 13~4도로 내려갔다. 시멘트 응달의 냉장효과가 더해지는 탓이었다. 잠자고 일어나면 빰과 코가 얼었다. 마루 바닥에 깔고 자는 가마니와 요는 찬 바닥공기와 체온 탓으로 습기에 흠뻑 젖었다. 한 겨울에 말릴 곳도 마땅치 않아 다시 그대로 깔고 잤다. 1977년 2월 문익환 목사께서 전주교도소로 이감 오셨다. 76년 3·1구국선언이 있은 뒤 < 9 > 대법원 확정판결이 내려진 것이었다. 절친한 친구 장준하 선생이 1975년 8월 의문의 죽음을 당하신 것에 격분, “장준하의 혼이 나를 씌웠다”면서 민주화운동에 뛰어든 문 목사는 그 뒤 80년대 동안 내가 모시고 운동을 벌인 어른이었다. 우리의 인연은 전주교도소에서 맺어졌다. 그 분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청년이셨다. 나는 그 분의 동생이신 문동환 목사는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 분은 전주에서 처음 만났다. 아직 한 겨울인데도 사모님 고생시키지 않겠다면서 세면장에서 손수 빨래를 하시고 우리들에게는 요가수행 방법이나 심신단련법을 가르치셨다. 그 즈음에는 정치범들 사이의 통방(뒤 창문으로 수감자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이 수월해져 있었다. 내가 이감 온 이후 특별사동을 내려다보는 바로 옆의 2사 상층의 일반 재소자들이 특별사동의 정치범들이 통방하는 것을 내려다보고 전향공작반에 고자질해서, 공작반이 국가보안법 추가기소하겠다고 소동을 벌이고 특별사동의 각개 독방 뒤 창문을 나무판자로 막아버린 사건이 있었다. 방 안에서 하늘을 바라볼 수 없게 만든 것이었다. 하늘이라도 바라볼 수 있게 해달라고 항의해서 겨우 나무판자를 제거할 수 있었다. 일반 재소자들은 정치범들의 통방을 고발하면 감형과 가출옥의 혜택을 볼 수 있었다. 그에 대한 대응방안으로 정치범들은 호를 지어 서로를 부르면서 통방했다. 그래서 한문에 능한 강창덕 선생이 나에게는 청우(靑牛)라는 호를 지어 주셨다. 나는 강 선생께 “하필 공화당의 상징인 소를 붙여 호를 지어 주셨느냐”고 항의했더니, “젊게 왕성하게 일할 사람이어서 그랬다”는 말씀이었다. 예를 들면 문익환 목사님이 나에게 통방하시려면, “9방 이부영 동지 좀 나오시게”처럼 일반재소자들이 모두 알아듣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청우 동지, 좀 나오시게”라고 부르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작은 오해가 생기곤 했다. 나의 사건 이름이 ‘청우회’(靑友會)여서 호도 그렇게 지은 것이 아니냐는 게다. 그것은 전혀 관계없는 일이었다. 지금도 나는 강 선생께 감사하게 생각한다. 비록 강 선생이 자신의 호를 나의 호 보다 더 멋있는 야성(野星) 또는 들별이라고 지은 것에 불평을 말하곤 했지만. 1977년 5월에 접어들면서 전향공작반에서는 전향서가 아니라 반성문을 쓰면 석방하겠다는 제의를 했다. 그것도 모든 반정부 정치범에 대해서가 아니라 형량이 얼마 남지 않은 극히 일부 인사들을 대상으로 한 공작이었다. 확신범의 경우 자신의 신념을 굽혔다는 죄의식 때문에 더 이상 민주화운동에 나서지 못하게 만들려는 저의가 깔려 있었다. 우리는 단식투쟁으로 저항했다. 교도소 측은 나를 특별사동에서 떼어내 병사로 옮겨놓았다. 그곳에서 의외의 인물 강문봉 장군을 만났다. 그는 1976년 10월 국군의 날 행사장에서 박정희를 저격하려 했다는 혐의로 구속됐다고 했다. 그가 1956년에 일어난 특무대장 김창룡 장군 저격암살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구속되었던 것을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강 장군은 해방 직후부터 76년 그 당시까지도 한국 정계와 군부를 배후에서 움직이던 미8군 사령관 고문 하우스만을 만난 것이 박정희를 저격하려했다는 혐의로 둔갑하여 구속된 것이었다. 중장으로 예편한 강 장군은 4·19혁명으로 석방되었다가 5·16 뒤에 공화당 국회의원, 대사로 기용되었고 유신 선포 뒤에는 유정회 국회의원으로도 활동했다. 박정희와는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 선후배 사이였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사흘 동안 아무 말도 없이 매만 맞았다고 했다. 1977년 11월의 교도소 안의 바람은 벌써 겨울이었다. 대법원 형이 확정된 강 장군이 머리를 깎는 날이었다. 병사 작은 뒷마당의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강 장군이 머리를 깎고 있었다. 그 앞을 전향한 좌익 무기수 몇 사람이 출역(出役)차 지나가다가 강 장군을 보고 “당신 강문봉 장군 아니시오. 어찌 된 일이요?”라고 묻는 것이 아닌가. 지난 1957년 처음 강 장군이 구속되었을 당시 서대문형무소에서 만났던 장기수들을 20년 만에 다시 만난 < 10 > 것이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서로 건강히 지내시라는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나는 1977년 12월 28일 2년 7개월 만에 옥문을 나섰다. 아내와 동아투위의 여러 동료들이 마중 나와 주었다. 아직 유신체제는 계속되고 있었다. 민주주의 파괴와 인권탄압으로 미국과 갈등을 겪고 있었다. 바탕에는 월남패망과 주한미군 철수압박으로 불안해진 박정희 정권의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이 미국의 경계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강문봉 장군과 하우스만의 만남이 떠올랐다. 내가 구속되었을 때 나의 거처는 불광동 천관우 선생 댁 부근 전세 집이었지만 아내는 내가 없는 동안 집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청와대 바로 뒤 인왕산 기슭의 청운 아파트 10평짜리였다. 내가 없는 2년 7개월 동안 여섯 차례 삭월 셋방을 전전한 모양이었다. 연년생 어린 아이들이 딸렸다고 해서 삭월 셋방을 얻지 못해 고통을 겪은 얘기도 들려주었다. 생활비는 부산에서 한성여대 교수로 계시던 장모님이 감당하셨다. 또한 동아투위와 여러 민주인사들의 도움이 있었다고 했다. 아내는 두 어린 것을 데리고 교도소 면회에 나다니면서도 근검절약해서 나의 출옥에 맞춰 작은 보금자리를 마련해 놓은 것이다. 친구들은 내가 없어야 우리 재산이 늘어나는 모양이라고 놀렸다. 동아투위는 1977년 송년회를 나의 출소를 환영하는 모임으로 삼아 많은 민주인사들을 초청, 민주화와 자유언론의 성취를 다짐하는 자리로 만들었다. 고마웠고 새로운 결의를 다짐했다. 청운아파트 새집에서는 두개 방을 하나로 터버린 넓은 방에서 백기완 선생, 고은 시인 그리고 많은 투위 동지들과 후배들이 함께 모여 나의 출소를 축하해주었다. 나. 10·24민권일지 사건과 2차 투옥 동아투위의 동료들은 세 가지 정도의 갈래로 나뉘어 생계를 모색하고 있었다. 처음 해직 당했을 때보다는, 복직문제가 곧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를 접고 유신체제가 끝날 때를 기다리자는 자세였다. 첫째, 적극적으로 자유언론운동을 촉발하기 위해 언론 내부에 영향을 미치고 ‘대화’ 같은 월간지 등에 글을 싣거나 출판사를 세워 비판적인 사회과학 서적을 출판하는 방향, 둘째, 민간기업에 취업해서 생계를 해결하되 언제라도 복직할 기회가 오면 복직하겠다는 방향, 셋째, 연구소 등에 취업하거나 대학원에 진학하여 대학교수로의 진출을 모색하는 방향 등이었다. 투위 동료들에 대한 유신 정권의 감시 통제는 해직 초기보다는 다소 완화된 것이기는 해도 언론계에만은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했다. 전문 특수신문이나 주변부 주간신문 등을 제외하고는 주류언론에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통제했다. 나의 경우는 택할 수 있는 길이 더 좁았다. 정권과 타협하는 길을 택하지 않는 이상, 나는 국보법 반공법 긴급조치 등을 위반한 전과자였으므로 감시대상일 뿐 아니라 언제라도 재수감할 수 있는 사회안전법 대상이었다. 실제로 해당경찰서 정보과에서는 사회안전법 대상자로 분류하여 수시로 호구조사를 나왔다. 나는 우선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영미 소설, 사회과학 서적의 번역에 매달렸다. 당시 동아투위는 안종필 위원장을 중심으로 안성열 박종만 등이 제도언론에서 1년 동안 외면하고 보도하지 않는 사건들을 수집, 1978년 10월 24일 자유언론선언 4주년을 맞아 ‘10·24민주·인권일지’ 발간을 계획하고 있었다. 나는 출옥한지 얼마 되지 아니하였다고 해서 빠져 있기로 했다. 이 사건으로 해서 안종필 위원장과 홍종민 총무를 비롯해서 안성열 장윤환 윤할식 박종만 성유보 이기중 김종철 정연주 등 10명의 동아투위원들이 구속되는 ‘언론인 대거 구속사건’이 일어났다. 주요 투위원들이 구속되고 상당수가 < 11 > 불구속 기소되었으므로 나서더라도 달리 방관할 길이 없었다. 구속된 투위원들의 법정투쟁과 옥바라지, 가족들과의 연락 등을 떠맡게 되었다. 78년과 79년은 이렇게 눈코 뜰 새도 없이 지나갔다. 신문로로 옮긴 투위 사무실에서 구속된 투위원들에게 넣어줄 책, 영치금 등을 가지고 서대문 구치소로 가는 일이 일과가 되었다. 이쪽에 넣어준 책을 다시 받아서 저쪽에 넣어주는 일, 가족들의 어려운 일 상담 등이 일상 업무였다. 아직 다수의 투위원들의 재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10·26 박정희 피살사건이 일어났다. 27일 새벽 4시 30분경 누군가로부터 박정희가 피살당했으니 우선 몸을 피하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우리의 고난이 끝나는 것인가 라는 희망을 가져보면서도 위기에 처한 집권세력이 어떤 선택을 할지는 알 수 없었다. 피신한 상태에서 사태추이를 관망하도록 했다. 이틀 동안 관망했지만 민주화운동 세력에 대해서는 별다른 조치를 취한다는 방침이 없고 김재규 부장을 비롯한 중앙정보부 세력에 대한 거세조치들이 신속히 이뤄지고 있었다. 그러나 계엄령이 선포된 가운데 10월 말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열어 최규하 권한대행을 새 대통령으로 다시 뽑겠다는 발표가 나왔다. 박정희 개인을 위한 유신체제였다면, 그 장본인이 사망했을 경우 그 헌법을 폐기하고 새로운 헌법을 만들어 새로운 민주체제를 구성해야함에도 불구하고 기득권 세력은 구체제를 그대로 이어갈 의도를 드러냈던 것이었다. 이름뿐인 야당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제2기 유신대통령을 내서는 안 된다는 국민의 소리가 나와야 했다. 나는 해직교수협의회,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동아·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그리고 제적학생들의 모임인 민주청년협의회 등 5개 단체 이름으로 ‘나라의 민주화를 위하여’라는 성명서를 작성하여 윤보선 전 대통령 자택에서 발표했다. 5개 단체의 대표 급 인사 18명이 계엄당국의 체포로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어 조사받았다. 그러나 나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백낙청 이우정 김찬국 교수 등 나머지 인사 17명은 모두 석방되었다. 나는 보안사 서울분실로 넘겨졌다가 곧 서울구치소와 육군형무소(일명 남한산성)로 옮겨졌다. 그 사이에 신군부의 12·12반란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나는 김재규 중정부장의 의전실장인 박선호 예비역 해병대령을 비밀리에 만났다. 그들은 10·26사건에 대한 군법회의의 재판을 받고 있었다. 서울구치소에서 어느 간부직원의 호의로 감독의 눈이 거의 없는 휴일에 그와 단독으로 만날 수 있었다. 내가 그를 만나려고 한 까닭은 그가 김재규 부장의 측근이었으므로 동아투위 사건에 대해 무엇인가 알고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나는 그를 만나자 말자 그의 손을 맞잡고 “귀하들의 손이 역사를 바꿔 놨다”고 치하했다. 그는 무인답게 호방했다. 1976년 김재규 건설부 장관이 중정부장으로 취임하면서 현안(懸案)으로 인계받은 것 가운데 동아투위 문제가 들어 있었으며 그 문서 속에 “정부의 방침에 적극 협력하겠다는 김상만 동아일보 사장의 각서가 들어 있었다”고 기억해 주었다. 중정 안가에서 박정희를 위한 술자리를 준비하는 업무를 책임졌던 그는 수많은 여성 연예인들과 가수들을 불러 들였다고 했다. 그는 81년 5월 김재규와 함께 사형집행 당했다. 나는 수도경비사 보통군법회의에서 계엄법 위반 혐의로 구형 3년에 법정최고형인 3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육군고등군법회의 재판은 국방부 청사 경내의 군법정에서 받았지만 나의 항소는 기각이었다. 바로 대전교도소로 이감되었다. 이 때는 이미 12·12군사반란으로 신군부의 기세가 등등해서 분위기가 군부에 반대하는 우리 같은 정치범들에게는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대전에는 나를 비롯해서 이른바 ‘통대반대 위장결혼식 사건’의 박종태, 양순직, 임채정, 최열, 홍성엽, 최민화 등이 모여 있었다. 임채정은 같은 동아투위원으로 나보 다 조금 늦게 구속되었다. 이들은 전두환의 12·12신군부반란 직후 구속되는 바람에 훨씬 모진 고문을 받았다. 대전교도소에서 우리는 1980년 5.18계엄 확대조치와 광주학살사태를 맞았다. 소총에 착검한 군인들이 교도소 사동을 점거하고 교도관들을 대신했다. 그들은 우리들을 감방 안에서 꼼짝도 못하게 앉혀놓고 일일이 감시했다. 일체의 언동도 못하게 만들었다. 6·25한국동란의 후퇴 와중에 대전교도소에서 일어났던 엄청난 학살 사건이 떠올랐다. 나중에 전해들은 이야기였지만, 광주에서 시민군이 광주교도소를 습격하여 민주인사들을 구출하려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대전에서도 그런 소동이 벌어졌다고 했다. 이틀 정도 지난 뒤 군인들이 철수했다. 그해 여름 7월에 나는 홀로 대구교도소로 옮겨갔다. 대구교도소는 유신시대나 전두환 시대에 반정부 정치범들에게 가장 가혹한 처우를 하던 곳으로 악명이 높아서 기피 1호 시설이었다. 운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시련을 통해 더 많은 것을 얻도록 하늘이 시험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대구교도소 2사 하의 독방에 갇혔다. 일반재소자들 뿐인 사동의 독방에 내가 왔으니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내 방의 맞은 편 방에는 70대 초반의 건강한 스님이 생활하고 있었다. 그곳 담당 교도관은 나에게 그 스님과는 일체 이야기를 하지 말고 지내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다. 무슨 꼬투리라도 잡히면 고소 고발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살인으로 무기수가 된 그 스님은 끊임없이 송사를 일으켜 교도소 당국이 골치를 앓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노스님이 운동을 나다니거나 세면장에 물 길러 나올 때나 반드시 나의 방을 기웃거리면서 말을 거는 것이었다. 나는 웃으면서 겸손히 응대했다. 가을이 짙어가는 어느 날, 1사 특별사동 쪽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부영 형, 나 서승이요. 창문으로 나와 보세요.” 재일교포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1971년 구속되어 수사 받다가 난로를 뒤집어써서 얼굴과 손 등 온 몸에 화상을 입고 10년째 징역을 살고 있던, 지금은 일본 리쓰메이칸 대학 교수인 서승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내가 그곳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통방을 시도한 것이었다. 나는 즉시 그의 부름에 응답했다. 그는 교무과에 나갈 테니 나에게도 함께 교무과 연출(직원 면담요청)을 신청하라고 말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그 노스님이 내가 빨갱이와 통방했다고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소하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통방을 하려던 것이 아니라 누군가 불러서 대답한 것이라고 해명, 해명해서 겨우 가라앉혔다. 그 스님은 모든 재소자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있었지만 완력이 젊은이 못지않아 아무 것도 개의치 않는 태도로 생활했다. 승려였고 내연의 여인을 살해했고 그리고 모든 일에 공격적이고 고소를 일삼는다, 도저히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냥 먼 산 바라보듯 생활하는 수밖에 없었다. 늦가을에 접어들자 교도소 안이 웅성거리고 교도관들이 군복으로 갈아입는 등 심상치 않은 분위기로 바뀌었다. 삼청교육 혹은 순화교육을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수감되어 있는 재소자는 예외 없이 교육을 이수한다는 것이다. 국가보안법으로 복역하고 있는 미전향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1980년 11월말부터 12월말까지 한 달여 동안 나는 군대의 PT체조, 봉체조, 포복 등 군부대의 삼청교육대에서 실시했다는 악명 높은 폭력적 훈련을 받았다. 80년 겨울엔 대구에도 눈이 많이 내렸다. 연병장에 눈이 내리면 눈을 쓸어 쌓았다. 쌓인 눈 더미는 흙과 잔돌들이 뒤섞인 채 젊은이 키 한 길 정도 높이로 연병장 군데군데 무더기를 이뤘다. < 13 > 군대에서 나온 조교들은 빨간 모자를 쓰고 국보위 몽둥이를 휘둘렀다. “앞으로 포복, 좌로 굴러, 우로 굴러, 뒤로 포복” 장난감 다루듯 훈련생들을 부리다가 그들은 별안간 “포복 전진 앞으로, 눈 더미 굴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소리 지르면서 국보위 몽둥이로 훈련생들 엉덩이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내려치는 몽둥이를 피하고자 눈 더미를 열 손가락으로 허우적거리면서 파헤쳤다. 그 순간 저쪽 눈 더미에서 건장한 청년 한 명이 벌떡 일어서면서 “에이 씨팔!!” 소리 지르면서 국보위 몽둥이를 휘두르는 훈련조교를 노려봤다. 그 청년에게 몽둥이질을 하던 훈련조교는 전체 훈련생을 집합시켰다. 그리고 그 청년의 옷을 팬티 한 장 남기지 않고 모두 벗겼다. 그 청년에게 자신의 생식기를 잡도록 했다. 가는 지휘봉으로 그 생식기를 내려쳤다. 그 청년은 눈 녹은 진창 속에서 지렁이처럼 몸을 떨면서 꿈틀거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 청년은 기절했고 퉁퉁 부어오른 그의 생식기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나는 몸을 떨면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나 자신도 겁에 질려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인간의 근본을 짓밟는 그런 야만행위에 항의 한 마디 못한 나 자신에 대해 모멸감을 느낀다. 일벌백계(一罰百戒)로 얼차려를 주는 방법은 많을 것이다. 공포감을 불어넣는 이른바 기합을 준다고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이런 짓을 수백 명의 공중 앞에서 자행한 것은 반드시 기록으로 남겨야 할 것이다. 그런 삼청교육을 나는 이수했다. 그 순화교육을 이수했다고 1981년 2월 25일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에 맞춰 시행된 특별사면으로 나는 대구교도소 문을 나섰다. 1년 4개월만의 출소였다. 아내와 동아투위를 비롯한 많은 민주인사들이 영접해 주었다. 대구에서 탄 고속버스 안에서는 전두환의 취임연설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폭력으로부터의 해방’ ‘정의사회 구현’이런 말들이 전두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바로 며칠 전까지 겪었던 일들을 떠올리면서 현실과 말의 괴리, 말이 현실과 동떨어져서 허공에 둥둥 떠 다니는듯한 환각에 사로잡혔다. 다. 민통련과 3차투옥, 박종철, 6월항쟁 나는 석방되자 말자 다시 생계를 위해 번역에 매달렸다. 세종문화회관 뒤편 당주동에 있는 고교 동기생의 음악출판사 한구석에 책상과 한글타이프라이터를 놓고 번역 일에 매달렸다. 한길사에서 부탁한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미국 민주주의론’과 두레 출판사가 의뢰한 해롤드 라스키의 ‘국가론’을 82년 중반까지 끝냈다. 역자의 이름을 내 이름으로 하는 것이 출판사에게 누가 될 것 같아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냈다. 내가 1975년부터 잇따라 투옥되는 동안에, 어린 두 아이는 벌써 유치원을 거쳐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에 이르렀다. 민주화운동에 매달려 있던 나는 아이들 성장에 아비 노릇을 하지 못했다. 아이들을 키워가면서 가정을 지키는 아내에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지금은 부산의 부경대학교로 이름이 바뀐 당시 한성여대 가정과 교수로 재직 중이시던 장모님(박기숙)은 토요일 오후에 기차로 상경하셔서 일요일 저녁에 부산으로 가시는 일과를 계속하셨다. 아이들과 한나절 놀아주시려고 그러신다는 것이었다. 나는 정보기관원들의 계속적인 감시에 시달렸다. 그들도 항상 우리 아파트 앞에 서있을 수는 없는 일이어서 1층인 우리 집을 바로 지척에서 건너다 볼 수 있는 담배 가게주인에게 부탁하여 감시했다. 그때는 내가 아직 담배를 피울 때여서 담배가게로 담배를 사러 가면 그 주인은 이유 모를 증오의 눈초리로 나를 쏘아 보았다. 그럴수록 나는 그 집에 가서 담배를 < 14 > 샀다. 바로 옆 아파트에는 동아투위의 조양진이 살고 있었다. 그에게 나의 아들 딸과 같은 또래의 두 딸이 있었다. 두 집 아이들이 함께 어울려 잘 놀았다. 81년 말부터 우리 부부는 10평에 큰 방 하나 뿐인 청운 아파트가 두 아이와 살아가기엔 너무 좁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연탄을 사용하던 그 아파트는 본래 청와대 경호원들의 주거용으로 지었다고 했는데 그 당시 이미 청와대 직원들은 한 사람도 살고 있지 않았다. 먼저 조양진이 강동구 길동의 삼익파크 아파트로 옮겼다. 24평형의 6층 남향으로 옮겼는데 주거환경이 좋다는 것이었다. 우리 형편으로는 어려울 것 같아 선뜻 결정하지 못했다. 청운 아파트를 팔아도 새 아파트의 반값도 될 수 없었다. 우리도 조양진의 옆동 동향 24평형으로 정해서 옮겨 가기로 했다. 마침 삼익 파크 아파트의 건설사가 삼익건설이었는데 이창수 사장이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내 친구 김선우와 막역한 사이였고 나와도 잘 아는 처지여서, 회사가 보유하고 있던 미분양분 아파트를 청운 아파트 판돈에 800만원 20년 장기할부주택부금을 보태 구입할 수 있었다. 82년 여름에 옮겨온 이 집에서 우리 가족은 28년이나 살게 되었다. 지금도 이창수 사장에게 감사히 생각한다. 이 집에서 딸 근하와 아들 도균은 초·중고·대학을 마쳤다. 그리고 근하는 시집가서 네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도균은 이제 배움을 마치고 사회에 진출할 채비를 갖췄다. 길동 삼익파크로 옮겨와서도 정보기관원들의 감시는 이어졌다. 아파트 입구의 복덕방에 진을 치고 감시했다. 1985년 여름엔가 서울에서 세계은행(IBRD)총회가 열렸다. 그 총회를 저지하려는 시위를 우려한 전두환 정부는 주요 재야인사들을 가택연금하거나 지방으로 강제 여행시킨 일이 있었다. 강동 경찰서 정보형사 3인이 한 조가 되어 나를 끌고 승용차에 태워 서울을 떠났다. 그들은 한창 공사가 진행되던 충주호로 갔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수석광(壽石狂)이어서 나를 끌고 다니는 업무를 탐석(探石)의 기회로 활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승용차 트렁크에 무거운 돌을 지고 옮기는 도구들을 싣고 다녔다. 이른바 남한강의 검은 오석(烏石)을 수집하러 온 것이었다. 총회가 끝나는 사흘을 채우기 위해 그들은 다음 날에는 충주에서 강릉으로 달렸다. 낙산사 해안가로 가서 생선회도 시켜 먹었다. 고성에 위치한 통일전망대도 관광했다. 나를 핑계로 강산유람하자는 심산인 듯 했다. 호텔비, 식비, 승용차 연료비 등 적지 않은 비용이 들었을 것이다. 독재정치를 하려면 정말 돈이 많이 들 것 같았다. 그들을 골탕 먹이려고 기회를 봐서 빠져나갈까 궁리도 했지만 거의 매일 보고 살아야 하는 그들을 궁지에 빠지게 만드는 것도 좋은 일이 못 된다는 생각에 그만뒀다. 1981년 초 두 번째 출옥한 이후의 삶은 질식할 것 같은 분위기 속에 이어졌다. 사회 도처에는 광주 학살의 피 냄새가 배어났다. 학살자들은 밀리면 자신들도 죽을 수밖에 없다는 방어적인 공포심을 가지고 폭력적 정책을 밀고 나갔다. 작가 한수산이 신문연재 소설이 문제 있다고 연행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하고 나왔다. 여기저기서 공포정치의 흔적들이 과시됐다. 민주화운동 진영도 상황을 되돌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나는 우선 학생운동 지도자들로서 도피중인 장기표· 심재권 등을 만나 그들을 돕고 다른 도피자들과의 연결도 시도했다. 독재정권 아래서도 비교적 안전지대로 여겨지던 개신교 천주교계와도 접촉했다. 특히 광주와 함께 민주화운동의 주요 거점이던 원주의 장일순 선생을 만나 뵙고 김지하·박재일·이창복과도 만나 전반적 상황을 점검했다. 원주에서는 이창복 선생이 민주화운동의 전면에 나서도록 합의해 주었다. 1983년에는 야당의 양축의 한 사람인 김영삼 씨가 정치범 석방과 민주화 조치를 요구하면서 23일 간 단식투쟁을 벌였다. 장기표와 나는 미국에 망명 중이던 김대중 씨와 김영삼 씨가 양김 공동성명을 내도록 추진했다. 문익환 목사와 안병무 < 15 > 교수를 움직였다. 이른바 동교동계 쪽에서는 아무 투쟁도 하지 않았던 YS 측의 위상을 높여주는 것이라고 반대하는 분위기였다. 우리는 이른바 YS-DJ 양측의 미래의 분열을 미리 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그 공동성명의 당위성과 절박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서 1983년 서울과 워싱턴에서 동시에 8·15 양김 공동성명이 발표됐다. 그 성명은 그 후 이른바 유화국면을 만들어내는데 크게 작용했다. 그 성명의 파급효과가 이어져서 동교동·상도동계가 힘을 합쳐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그 이듬해에 결성했고, 재야에서는 민중민주운동협의회(민민협)를 결성했다. 민민협의 공동대표에는 천주교의 김승훈 신부, 개신교의 김동완 목사 그리고 재야의 내가 맡았다. 구성 부분에는 천주교 개신교 문화예술계 언론계 노동 농민 청년 등이 합류했다. 민민협의 구성 부분 가운데 가장 의미 있는 부분은 김근태가 의장을 맡은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이 함께 한 것이었다. 민민협은 1985년 2.12총선에서 민추협을 기반으로 김영삼·김상현을 중심으로 탄생한 선명야당 신민당을 지원했다. 민정당과 들러리 야당인 민한당 후보들을 공격하는 유인물을 대량 제작하여 해당 지역들에서 살포했다. 선거 결과는 신민당의 약진으로 나타났다. 전두환 정권은 당황했지만 다시 강공으로 민주화운동 세력을 탄압했다. 민민협은 70~80년대에 등장한 수많은 명망 있는 인사들이 거의 참여하지 않고 주로 부문 조직운동의 활동가 중심으로 이뤄졌다. 이런 흐름은 광주학살 이후 민주화운동 전반에 나타난, 조직 중심이 아니면 군부의 탄압을 견디어낼 수 없다는 인식이 반영된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또 다른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본격적인 탄압이 가해질 경우, 공개운동 조직으로서 대단히 취약한 방어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명망 있는 지도자들이 활동가들과 결합하여 민주화운동을 벌여 나가야 방어력도 있고 폭발적인 운동으로 확산될 수 있다는 주장이 그것이었다. 이런 주장에 따라 장기표· 이창복이 문익환·계훈제·백기완 등 민주화운동의 지도자들을 모시고 민주통일국민회의를 1984년 연말에 창립했다. 이런 흐름은 어차피 민민협과 민주통일국민회의가 통합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2.12총선 이후 강화되는 전두환 정권의 공안탄압도 두 단체 통합의 당위성을 뒷받침했다. 여기에는 80년대 내내 불붙었던 시민민주주의(CD)-민족민주주의(ND)-민중민주주의(PD) 논쟁, 이른바 사회구성체론에서의 CNP논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끈질긴 이 논쟁은 지금의 민주당-민주노동당-진보신당으로 그 흐름이 이어졌다는 것으로 대략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두 개 조직의 통합으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탄생했다. 의장에 문익환 목사, 부의장에 계훈제·백기완 선생이 나서시고 나는 사무처장을 맡았다. 상임위원장에 이창복, 정책실장에 장기표가 나섰다. 그러나 운동의 핵심인 민청련과 개신교 측이 합류하지 않았다. 그것은 큰 흠결이자 약점이 되었다. 민청련과 개신교 측이 합류하지 않았어도 민통련의 등장은 한국전쟁 이후 한국 사회에서 부문과 지역을 아우르는 최대의 재야 민주화운동단체가 탄생했다는 것을 뜻했다. 그것은 신민당의 등장과 더불어 범야권도 1980년의 신군부의 집권과 광주학살 이후 최초로 전열을 정비하고 전두환 집단과 정면 승부를 벌일 수 있게 된 것을 의미했다. 1983년 이후 유화국면에서 전두환 정권은 학생들의 집단 시위를 제외하고는 재야단체의 활동에 대해서는 구류로 대응했다. 나는 1975년부터 86년 말 세 번째로 구속당하기 전까지 12차례의 구류처분을 당했는데 10차례가 84년부터 86년 초까지였다. 구류 기간은 일주일에서 30일까지 다양했다. 20일이나 30일 구류처분에 대해서 정식재판을 청구하면 1주일 만에 석방됐다. 1주일 구류 사는 것을 우리는 격무 중에 1주일 휴가 간다고 했다. 정식재판으로 쌓인 잔형(殘刑)은 정식 구속되어 징역형을 받으면 거기에 얹어서 살고 나와야 했다. 민민협과 민통련의 등장과 궤를 함께 해서 민주언론운동도 기지개를 켰다. 1984년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협)가 송건호 선생을 의장으로 모시고 만들어졌다. 동아·조선투위, 80년해직언론인들이 주요구성 멤버들이었다. 동투의 윤활식 성유보, 조투의 신홍범, 80년 해직언론인 가운데 김태홍 등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민통련에도 동투의 성유보 임채정 김종철 등이 참여했다. 민언협에서는 독자적으로 ‘말’지를 냈고 거기에 발표된 5공 정권의 ‘보도지침’사건으로 신홍범, 김태홍, 김주언이 구속되었다. 신민당은 국회에서 간선제 대통령제를 직선제로 개헌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에 대해 전두환은 호헌선언을 했다. 그러자 정국의 양상은 한 순간에 호헌 대 직선제 개헌으로 바뀌었다. 신민당의 이민우 총재가 민정당 측과의 협상에서 내각제를 받아들일 것 같은 태도를 보이자 양김 측은 즉각 신민당으로부터 탈당,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 이민우 체제는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 야권의 친구 정치인으로부터 전두환의 청와대 정무수석 허문도가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연락이 왔다. 원주의 김지하 시인으로부터도 보안사의 처장급 인사가 찾아와서 나를 비롯한 민통련의 몇 사람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다고 말하고 갔다는 전갈이 왔다. 나는 허문도를 만나보기로 했다. 그들의 의도, 즉 직선제 개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민통련 같은 재야단체에 대해 탄압을 하지 않고 공존할 의사가 있는지 등을 타진해볼 생각이었다. 강남의 조그만 카페 양주 집이었다. 두 사람만 마주 앉았다. 조선일보 출신인 허 수석의 성향은 조선투위 동료들을 통해서 그리고 81년의 ‘국풍’행사 등을 통해서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가 어떤 태도로 나올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수로 나왔다. “민통련에서 손을 떼라. 그렇지 않으면 험한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이쪽에서는 모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일방적인 협박이었다. 서울에서도 광주 같은 일을 겪어내지 않으려면 소수의 희생자를 만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잘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술 마시면서 김지하 시인의 건강 이야기, 문화 부분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헤어졌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진 셈이었다. 이미 저들은 민청련의 김근태 의장을 남영동에 끌고 가서 살인적인 고문을 했다는 것이 공개되어 있었다. 1986년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통일민주당·민통련의 범야권과 전두환 정권은 직선제 개헌을 놓고 일대 공방에 돌입했다. 1986년 봄 마산을 기점으로 시작된 통일민주당의 개헌현판식은 야당과 민통련이 함께 직선제 개헌투쟁을 벌이는 마당이 됐다. 전국적으로 진행된 개헌현판식에 민통련의 박계동 조직국장은 민첩하게 지방의 재야단체들을 연계하고 홍보물을 배포하여 정보기관으로부터 ‘홍길동’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학생 노동자 농민을 비롯해서 야당과 재야세력을 지지하는 수많은 시민들이 모여들고 경찰은 집회를 원천봉쇄하기 위해 최루탄을 무차별로 쐈다. 각 대학들에서도 80년대 초에 활성화된 학생회가 직선으로 총학생회장을 선출, 대규모의 학생시위대를 동원하게 되었다. 각 대학에서는 총학생회장이 구심점이 되어 자연스럽게 연합시위로 발전시켰다. 노학연대, 농학연대 시위가 이뤄지기도 했다. 야당과 민통련의 직선제 투쟁은 바로 학생들과의 연대운동으로 발전했다. 그런데 당시 급격히 세력을 확장하던 PD(민중민주)계열의 노동운동이 직선제 개헌운동에서 급진적 ‘노동해방의 기치’를 들어 올리면서 전두환 정권은 직선제 개헌운동을 이념적으로 몰아세울 < 17 > 구실을 찾게 되었다. 직선제 개헌보다 노동해방 기치를 자극적으로 앞세운 예가 5·3인천개헌현판식이었다. 노동자들의 격렬한 거리시위로 현판식은 무산되었고 민통련 간부들은 시위를 배후조종했다는 혐의를 받고 수배 당했으며 민통련은 해산명령을 받아 기능이 정지상태에 빠졌다. 나도 수배 당했다. 서울의 개헌현판식이라는 대회전을 앞두고 전두환 정권이 인천대회를 과격화하도록 방치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서울대회를 막을 구실을 인천에서 만들었다는 추론이었다. 이미 나는 김정남의 주선으로 고영구 변호사 댁에 피신하고 있었다. 나를 비롯한 민통련 간부들은 마산대회 이후 수배 상태에 놓여 있었다. 대전 대회 때는 현장에 나가 대회 진행 상황을 살피다가 당시 안기부 국내담당 차장이던 이해구씨와 맞닥뜨리기도 했다. 그도 상황을 살피러 나왔던 모양이었다. 수많은 군중 가운데서 마주쳤으므로 순간적으로 서로 외면하고 헤어졌다. 뒷날 국회의원이 되어 다시 만나 당시 얘기를 하면서 웃고 넘어간 일이 있다. 1986년 가을에 접어들어 건국대 사태가 벌어지면서 전두환 정권은 1천5백 명이 넘는 학생들을 검거하는 폭거를 저질렀다. ‘통일이 대한민국의 국시가 되어야 한다’고 원내발언을 한 유성환 국회의원이 구속되기도 했다. 나도 민통련의 활동 재개를 위해 수배 중에도 지원활동을 하다가 검거되어 남영동 대공수사단에 잡혀갔다. 당시 내가 몸을 의탁하고 있던 고영구 변호사댁은 노모가 80여세로 노환을 앓고 계셨고 부인 황국자 여사도 위경련을 앓고 있던 환자였다. 고 변호사가 나 때문에 구속되기라도 하면 집안이 풍비박산이 날 지경이었다. 김정남과 이 문제를 상의한 결과 그는 이돈명 변호사에게 이부영이 이 변호사님 댁에 숨어있었던 것으로 하자고 말씀드려 그리 하도록 하자는 동의를 얻었다. 이돈명 변호사는 당시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직을 맡고 계셨다. 그 직책은 교황청 직속의 공식기관이었으므로 이 변호사를 녹록히 대하지는 못할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러나 오산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기다렸다는 듯이 국가보안법상의 범인은닉 혐의로 이 변호사를 구속했다. 이미 60대 중반에 이르신 이 변호사의 구속사태에 직면해서 나에게는 자신의 구속은 관심 밖이었다. 고 변호사는 어떠했겠는가. 홍성우, 황인철, 고영구, 김정남 등 제씨들이 만난 자리에서 김정남이 큰 죄를 저질렀다고 후회했고 함께 눈물을 흘렸다고 나중에 전해 들었다. 1986년 겨울 내내 고영구 변호사는 불 때지 않은 냉방에서 지냈다고 했다. 이 변호사님은 민주화운동을 위해 일하던 사람을 숨겨주었다는 정당성이 있다고 해도 변호사로서 당신 댁에 머물지도 않았던 내가 머물렀다고 ‘거짓 진술’을 해야 하는 부담감이 적지 않으셨을 것이다. 나는 전전긍긍하는 마음으로 징역살이를 했다. 그러나 이번 징역살이는 그 나름의 의미가 있었음이 곧 판명되었다. 뒤에 김정남은 내가 영등포교도소에 갇힌 것을 우연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신의 오묘한 손길이 느껴지는 일이라고 말했다. 1987년 1월 17일 자정 쯤, 내가 갇혀있던 영등포교도소 격리사동에 두 명의 경찰관이 수감되었다. 그 사동은 본래 여재소자들을 수용하려고 담 안에 다시 담을 쌓아 지은 격리사동으로서 당시에는 여재소자들을 다른 교도소로 옮기고 출역하는 일부 모범수들과 나를 그곳에 수용하고 있었다. 낮에는 모범수들이 출역하고 나면 나와 그 두 경찰관들만 담당 교도관들의 감시 속에 남아 있었다. 이틀째에 그들이 서울대생 박종철 군을 고문하여 죽인 남영동 대공수사단 소속인 것을 알게 되었다. 밖의 민주화운동 진영에서는 고문살인 사건에 대해서 항의, 농성, 단식 등 여러 가지 형태의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3월3일의 49재에 맞춰 나도 20일간의 항의단식을 시작했다. 나는 창살을 통해 조한경, 강진규 두 경찰관들에게, “당신들도 독재의 희생자들입니다. 저 세상으로 간 박종철 군을 위해 함께 명복을 빌어 줍시다”라고 권했다. 그들은 곧 심상치 않은 행동을 보였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조한경 경위는 밤새도록 찬송가를 불렀으며 젊은 강진규 경사는 밤늦도록 흐느껴 우는 것이었다. 토요일 늦은 시간에 한정해 가족면회가 허용됐던 두 사람은 몹시 괴로워했고 특히 강진규 경사의 부친은 “네가 정말 사람을 고문해 죽였느냐”고 확인했다는 사실을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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