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표신문 ‘르몽드’는 지금 “혁명중”
[백병규의 글로벌포커스] 40대 여성 사장·편집국장, 현장성 강조하고 종이-디지털 뉴스룸 통합
[0호] 2013년 05월 11일 (토) 백병규 언론인 bkb21@hanmail.net
조금 거리를 두고 카메라로 잡은, 신문을 펼쳐 들고 있는 그의 모습은 전형적인 파리지엔느다. 가까이서 보면 다르다. 응축된 단아함을 읽을 수 있다. 15년 이상 체첸과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등 동유럽 분쟁지역과 모스크바의 크레믈린을 취재하며 단련된 강인함도 엿보인다.
그는 거의 해외 현장 취재로만 돌았다. 단 한 번도 데스크나 관리직을 맡은 적이 없다. 체첸 내전 취재로 프랑스의 퓰리처상 격인 알레르 롱드상을 수상했다. 그런 그가 40대 중반의 나이에 프랑스의 대표 신문 <르몽드>의 사장과 편집국장을 맡았다. 지난 3월 취임한 나탈리 루게레드, 40대 중반으로 <르몽드> 사상 최연소 사장이자 편집국장이다. 프랑스 일간 신문 최초의 여성 사장이기도 하다.
40대 CE0 겸 편집국장 선택한 좌파 주주들
그의 취임은 <르몽드>의 최근 변화를 대변한다. <르몽드>는 2010년 파산 직전까지 갔다. 좌파 재력가들인 ‘트리오’의 투자로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세계적 패션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작고)의 동업자이자 동성 연인이었던 문화 사업가 피에르 베르제, 90년대 성인채팅방으로 떼돈을 벌고 지금은 인터넷통신회사 등을 운영하고 있는 자비에 니엘, 라자르 투자은행장인 마티외 피가스 3명이 1억1천만 유로(1584억 원)를 투자했다. 이들은 <르몽드>의 편집권 독립을 약속했다. 편집국장 임명에 대한 기자들의 거부권도 존속시켰다.
그들은 단순히 돈만 투자한 것은 아니었다. 2개의 좌파 인터넷 뉴스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던 니엘이 경영에 적극 참여했다. 신문 배달의 신속성을 높이기 위해 인쇄를 지역 단위로 위탁 분산하는 등 경영 측면에서 그동안 가장 큰 짐이 돼 왔던 인쇄부분의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인쇄노조와의 힘든 협상 끝에 지난해 인쇄 인력 260명 가운데 220명을 해고했다. 기자도 40명을 명예 퇴직시키고, 전체 기자의 15%를 ‘젊은 기자’로 대체했다.
지면도 크게 바뀌었다. 디자인의 변화는 혁신적이다. <르몽드>는 과거 무미건조한 지면구성으로 악명이 높았다. 지금 지면은 그 때와 비교하면 천지개벽 수준이다. 사진과 그래픽, 컬러 삽화의 적절한 배치와 세련된 디자인으로 ‘읽는 맛’은 물론 ‘보는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젊은 층을 겨냥한 기사 발굴에 힘쓰고 있다. 패션과 럭서리 위주의 주말판도 만들었다. 인터넷 사이트도 전면 개편하고, 온라인과 오프라인 뉴스룸의 통합도 시도했다.
지면 혁신을 이끌던 에릭 이즈라엘레비츠 편집국장이 지난해 11월 회사 근무 중 과로로 사망하자 이들 세 주주들은 40대 사장․편집국장이란 카드를 꺼냈다. 나탈리 루게레드를 ‘혁신’의 아이콘으로 내세웠다. 기자들은 80%의 찬성으로 그에게 신임을 보였다.
현장 중심 분쟁 취재 전문기자 출신의 '혁신 아이콘'
그가 주도할 변화의 요체는 현장성과 독립성이다. 신뢰할만한 뉴스는 철저한 사실 확인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독보적인 뉴스, <르몽드>만의 분석이 중요한 때라는 판단이다. 온갖 정보가 난무하고, 정치와 경제 어느 곳 할 것 없이 이른바 ‘홍보머신’이 정보와 여론을 관리하려는 요즘 시절엔 더 그렇다.
프랑스 언론은 정치적인 견해를 밝히는 데 익숙하다. 기자들도 마찬가지다. 취재하기 보다는 논평하는 쪽을 더 선호한다. 자칫 당파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렇다고 논평을 중시하는 프랑스 언론의 전통을 아예 외면하자는 것은 아니다. 논평 또한 탄탄한 사실의 기반위에 설 때 그 힘이 배가될 수 있다고 믿는다. 사실에 기초한 독립적인, 독자적인 논평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프랑스 언론은 정치권과 너무 밀착돼 있다. 고위층과의 밀접한 관계가 취재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 폐해가 더 크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기자가 취재하는 데 있어 권력층과는 어떤 친분관계도 성립될 수 없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기자의 독립성과 취재의 독자성을 해칠 수 있는 것은 철저하게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체질과도 같다. 2005년 그가 파리에 돌아와 외교부처를 취재할 때 그는 완벽한 아웃사이더였다. 파리의 외교가는 전형적인 사교클럽이다. 그런 곳에서 그는 공격적으로, 집요하게 묻고 또 묻는 골칫거리였다. 예의라곤 찾아보기 힘든 문제 기자였다. 오죽하면 외교부장관이 업무에 방해된다고 경찰을 시켜 그를 쫒아냈을 정도였다.
현장성에 대한 강조는 실용성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5월 들어 ‘에코 앤 엔터프라이즈( Éco & Entreprise)라는 경제 섹션을 만들었다. 경제가 곧 정치라고 보기 때문이다. 글로벌 경제와 첨단 산업 분야에 집중할 방침이다. 프랑스 신문 최대의 해외 특파원 네트워크와 탐사보도 방식을 적극 활용할 계획이다.
동성결혼 반대 전면광고에 "르몽드 일할 자격 없다" vs "우리 일은 우리가 한다"
▲ 사진=<르피가로> 인터뷰 기사에 실린 나탈리 루게레드.
현장성과 실용성, 그리고 독립성에 대한 그의 단호한 태도는 최근 ‘광고사태’에서도 잘 드러난다. 동성결혼법에 대한 격렬한 반대시위가 한창이던 지난 4월 <르몽드>는 동성결혼에 반대하는 전면 의견광고를 실었다. <르몽드>가 이런 광고를 실으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트리오’ 가운데 한 명인 피에르 베르제는 격분했다. “그런 광고를 받으려는 자는 <르몽드>에 있을 자격이 없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루게레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주주들은 광고를 포함한 편집권에 관여할 자격이 없다고 일축했다. <르몽드>는 지면에서 ‘동성결혼’ 이슈를 충분하게, 또 심도있게 다뤘으며 편집지면과 광고는 별개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는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주주들의 ‘뚜렷한 개성(좌파 성향의 정치적 입장)’도 존중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일은 한다”고 밝혔다. “나는 신문의 독립성과 고품격의 컨텐츠, 그리고 우리 기자들의 웰빙을 모두 책임져야 하며, 그것을 위해 전력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이런 신념이 너무 앵글로색슨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미국과 영국 언론 모델을 그대로 따라 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의 생각은 분명하다. 저널리즘을 위해서라면 굳이 이를 마다 할 이유가 없다. 물론 프랑스 언론의 전통도 소중하다. 세상사를 이해하는 독특한 프랑스식 관점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게 그의 믿음이다. <르몽드>만의 깊이 있는 분석과 논평의 자산도 계속 살려갈 계획이다. 탐사보도는 특히 그가 방점을 찍고 있는 주된 방향이다.
드골이 만들고 좌파 재력가들이 되살린 '국민신문'
▲ <르몽드> 디지털판. 혁신적인 종이지면 쇄신 못지않게 디지털 판에서도 감각적이고 매력적인 인터페이스를 선보이고 있다. 사진=<르몽드> 디지털 지면.
<르몽드>는 경영과 지면 혁신, 디지털 강화와 유료화로 지난 2년 동안 독자 수를 계속 늘려왔다. 한 때 30만부 이하로 떨어졌던 신문 구독자 수는 31만4000부로 늘었다. 디지털판을 포함해 매일 하루 독자수는 190여 만명에 이른다. 디지털판 유료독자도 최근 10만 명을 넘어섰다. 지난 2년 계속 경영도 흑자로 돌아섰다. 루게레드는 현재 각각 운영되고 있는 종이신문 뉴스룸과 디지털 뉴스룸도 통합할 계획이다. 그는 “르몽드로서는 혁명과도 같은 일”이라고 했다.
<르몽드>는 전후 프랑스 체제의 ‘핵심문화’다. 프랑스 우파의 상징 샤를르 드골의 작품이기도 하다. 드골은 전쟁이 끝나자 나치에 협력했던 언론인들을 가장 먼저 숙청했다. 공산당 기관지 <르마니테>, 가톨릭 계열의 <라클롸>, 우파계열의 <르피가로>를 제외한 모든 신문을 폐간시켰다. 그런 다음에 만든 게 <르몽드>다. 양심적인 언론인 위베르 베브 메리에게 제호처럼 ‘세계’에 내놓을 만한 프랑스 대표신문을 만들어 줄 것을 요청했다. 나치에 협력해 몰수한 신문사의 자산과 시설을 제공했다. <르몽드>를 프랑스 국민들이 각별하게 생각하는 뿌리다.
드골의 요청으로 탄생한 <르몽드>는 그러나 <드골>의 가장 호된 비판자였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대한 비판적 논조로 드골정부와 불화를 빚은 베브 메리는 결국 사직한다. 기자들과 독자들의 거센 항의로 복귀한 그는 <르몽드>의 독립성을 지켜나가기 위해 기자들에게 지분의 28%를 양도했다. 임원과 사원들에게도 지분을 나눠져 이들의 지분이 최대 52%에 이르기도 했다. <르몽드>는 이후 세계적으로 사원주주방식의 ‘독립언론’의 표상이 됐다.
<르몽드>는 한 때 미테랑 좌파정부와의 유착으로 정체성 위기를 겪어야 했다. 사장과 편집국장 선임을 둘러싼 내홍도 있었다. 90년대와 2000년대에는 경영진과 편집국장의 권력화와 방만 경영으로 호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며, 디지털화로 신문산업이 어려워지면서 파산 직전까지 내몰렸다. 우파 정치인의 발상으로 창간되고, 좌파 재력가들의 지원으로 되살아난 <르몽드>가 40대 기수의 지휘하에 어떤 길을 걸을지 주목된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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