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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조선기자대회와 동아일보동아일보 대해부 1권 - 1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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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3.24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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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2월 2일자 동아일보 2면에는 전조선기자대회를 예고하는 기사가 올랐다.

  신문사와 잡지사 등 언론기관에 재직한 조선인 기자로서 조직된 무명회(無名會)에서는 재작일 오후 7시 반부터 시내 돈의동 명월관에서 다수한 회원이 모여 간친회를 겸하여 임시총회를 개최하고 임시 석장(席長) 이종린 씨 사회로 회의록 낭독, 경과보고, 회계보고 등을 마치고 신 사항의 회의에 들어갔는데 금후로부터는 회무를 더욱 충실히 하기 위하여 간사를 두자는 제의가 있어 석장의 추천으로 이을 씨가 피선되고 재래의 위원 열 사람 중에서 책임을 떠나게 된 이재갑, 오삼주 양 씨의 대신으로 보선하자는 제의가 있어 전형위원 안재홍, 박동완 양 씨의 추천으로 김형원, 설의식 양 씨가 피선되었으며 최원순 씨의 제의로 오는 3월경에 전 조선에 있는 각종 언론기관의 본사나 지분국 조선인 기자가 모여 전조선기자대회를 개최하자는 의견을 수납한 후 모든 절차와 대회 내용에 대한 일체의 연구와 준비를 위원회에 일임하기로 하고 금후로부터는 실지 방면의 사업을 조금씩이라도 잘하여 나가자는 희망으로써 동 12시경에 회는 마치고 식탁에 나아갔다더라.

한국 현대 언론사상 최초의 전조선기자대회가 1925년 4월 15일 열렸다. 동아일보는 대회 개막에 관한 내용을 같은 날짜 신문 2면에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군용(軍容)을 정제(整齊)한 조선의 필진 / 억압된 언론계에 활약의 제1보」라는 기사에는 이런 부제목이 붙어 있다. 「죽어가는 조선을 붓으로 그려보자! / 거듭나는 조선을 붓으로 채질하자!」

  조선인 신문 잡지 기자로 조직된 무명회의 발의와 각 관계 방면의 응원으로써 계획된 전조선기자대회는 누누이 보도하여 온 바와 같이 기자대회준비회의 비상한 활동과 다대한 노력으로 모든 준비가 착착 진행되어 드디어 금 15일로써 대회의 첫 막을 열게 되어 전 조선에 흩어져 있는 가지가지의 필봉은 때를 같이하고 뜻을 같이하고 힘을 뭉치고 거름을 가지런히 하여 조선의 중앙 서울에 모이게 되었다.
  장해 많은 조선사회에서 언론의 권위를 신장하고 아울러 이에 헌신한 기자의 연락과 간친을 도모하여 언론계의 꾸준한 발전을 도모하려는 수단 방법의 한 가지로 조선에서 처음으로 계획된니 전조선기자대회는 준비를 시작한지 시일도 오래지 아니함을 불구하고 관계자의 비상한 향응으로 전 조선을 통하여 갖은 방면으로 필봉을 휘두르는 20여 종의 기자가 참가하게 되어 실로 예기한 이상의 대성황과 상상 이상의 수확을 얻게 되었으며 따라서 조선에서는 처음인 것만큼 일반사회의 기대와 주시가 비상하여 침체하기 짝이 없던 조선의 언론계는 금 15일 오전 10시부터 천도교기념관에서 우렁차게 울리는 대회의 주악 소리를 비롯하여 새로운 활기와 거룩한 암시를 잠잠한 조선사회에 던지게 되었더라.

동아일보는 같은 날짜 1면에 「전조선기자대회」라는 제목으로 사설을 올렸다.

  금일부터 무명회의 발의와 주선으로 계획하던 전조선기자대회가 성대히 개최하게 되었다. 금번에 이와 같이 대성황을 이루게 된 이유는 회합 자체가 시기에 적의(適宜)한 것과 또한 전자에 없던 회합인 것도 있겠지만 이를 위하여 진력한 인사의 공이 적지 아니한 줄 믿는다. (·····)
  관헌의 압력과 부자의 횡포가 나날이 민중을 위협하고 강제하여 불안이 계속하고 비리가 잠행하는 목하의 생활 장리(場裡)에서 능히 독자(獨自) 엄립(嚴立)하여 탁연불발(卓然不拔)한 기절(氣節)과 면목을 유지할 수 있는 자는 위무(威武)나 황금이나 지위나 명예가 감히 범하지 못하고 유혹하지 못하는 고결한 인격자에게 있을 뿐이다. 이러한 인격자라야 비로소 이 난마착잡한 분규의 권내에서 진정한 그 천직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
  (···) 이번에 열리는 이 전조선기자대회는 익익(益益) 패멸(敗滅)하고 황량처참한 민중의 현실생활에서 발아하는 의지를 존중하고 사상이 사상만을 위하여 방종하는 폐를 금하며 또는 운동이 운동만을 위하여 활약하다가 최초의 운동을 일으킨 목적까지 포기하며 운동의 정체를 몰락케 하는 오류를 방지하는 동시에 일방으로는 포악무도한 무리(無理)의 압박에 대하여 그 대책을 강구하여 완전히 전부를 기대할 수는 사실상 불가능할지라도 기분(幾分)의 1이나 기십분의 1이라도 금번 이 대회의 결실로 그 효과를 수득(收得)하고 우리사회에 실연되는 행동이 진정한 민중의 생활에 근저한 인격자의 활동으로 인간을 살게 하는 생명력의 신장으로 즉 사상은 실생활의 반영이 되며 사상 실체와 그 행동 자체가 그대로 생활이 되게 하는 데에 다소라도 공헌이 있을 수 있는 줄 믿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인은 금번 대회가 의의 심장함을 느끼는 동시에 시기에 적합한 줄로 믿는다. 물론 이 회합에서 무엇을 작정하고 그 작정을 각기 돌아가서 실행하려는 것에서 이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회합하는 그중에서 이것이 이해되고 섭취되어 널리 융화됨으로써 그에서 이것을 얻기를 기망(企望)할 뿐이다.

제2일에 의장 이상재의 개회선언으로 시작된 전조선기자대회는 5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1)우리는 친목과 협동을 공고히 하여 언론의 권위를 신장 발휘하기를 기(期)함.
  (2)신문 및 출판물에 관한 현행 법규의 근본적 개신(改新)을 촉(促)함.
  (3)언론 집회 및 결사 자유를 구속하는 일체 법규의 철폐를 기함.
  (4)동척을 위시하여 현하 조선인 생활의 근저를 침식하는 각 방면의 죄상을 적발하여 대중의 각성을 촉함.
  (5)대중운동의 적극적 발전을 촉성하기를 도(圖)함.

총독부 경무국은 5개항 가운데 언론·집회 및 결사의 자유에 관한 제3항의 발표를 금지했다.

동아일보는 전조선기자대회가 열리는 사흘 동안 2면에 관련 기사를 크게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기사와 사설을 통해 전조선기자대회의 의의를 높이 평가했는데, 정작 <동아일보사사 권1>은 그 대회가 ‘적색 기자들’이 주도한 ‘불순한 모임’인 듯이 폄하하고 있다.

  (···) 이 대회에는 “참가 인원은 조선일보의 지방기자가 압도적으로 제1위를 차지”했고, “동 대회가 소집하게 되기까지는 서울시내 각 사의 사회부기자 중심으로 조직된 철필구락부와 조선일보의 홍증식 이하 화요회 계통의 세칭 적파(赤派) 기자들이 그 주동이 되었던 만큼 당시의 소위 사회주의 색채를 띤 지방기자가 태반 이상이었다”고 최준의 <한국신문사>에도 쓰여져 있지만, “동아일보에 대립하여 새로 민족신문으로 혁신한 조선일보에 계속 사회주의자들이 자리를 잡게 되어 어느덧 조선일보는 사회주의 신문이란 세인의 평(전기 <한국신문사>)까지 받게 되어 있었다. 그들이 주동이 되어 태반의 조선일보의 기자로 대회가 연 3일 열리어 세인의 관심이 여기에 집중되고 있던 17일, 아서원에서는 사회주의자들이 모여 ‘공산당’을 창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중요 간부로는 김재봉(책임비서), 홍증식, 박헌영, 조봉암, 홍남표, 권오설, 박순병, 이준태, 조동우, 김찬, 최원택, 김약수, 안종건, 윤덕희 등 거의 조선일보 기자들이 선출되었던 것이다.
  이런 점으로 미뤄 전조선기자대회는 ‘공산당’ 결당을 위한 연막작전이었다는 설도 있다(249쪽).

그러나 조선일보사가 펴낸 공식 기록물에 실린 전조선기자대회에 관한 내용은 <동아일보사사 권1>과는 아주 다르다.

  1925년에는 계속되는 일제의 언론탄압에 맞서 전국 언론인들이 모두 들고 일어난 ‘전조선기자대회’가 최초로 열렸다. 이 언론인 ‘집단항의’를 주도한 것은 조선일보였다. (·····)
  (···) 이 대회는 1924년 언론압박탄핵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던 유진태가 2만 원이라는 큰돈을 자금으로 마련해서 전국의 기자들을 불러 개최했다. 조선일보 임직원과 기자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대회를 이끌었다. 대회 의장에는 이상재 조선일보 사장이, 부의장에는 안재홍 조선일보 논설반원이 추대돼 사회를 맡아보았을 뿐만 아니라 조선일보 간부인 최선익·최국현 등 조선일보의 본사와 지방 기자들이 111명이나 참석해 마치 조선일보기자대회 같은 인상을 대회장에 남겼다(<간추린 조선일보 90년사>, 70쪽).

  <개벽> 1925년 5월호 60~61쪽에 실린 「조선기자대회 잡관(雜觀)」이라는 글은 전조선기자대회의 주최집단에 대해 아래와 같이 ‘판정’을 내렸다.

  (···) 이 전조선기자대회는 조선일보 사원이 전 출석자의 약 반수를 점하였고 그 의장, 부의장이 조선일보의 사장과 이사인 이상재, 안재홍이 됨으로써, 조선일보사가 주축이 된 것처럼 보이기는 하였으나 그 발의 자체가 동아일보 정치부장인 최원순의 발의였으며 사장 송진우와 간부기자들 중에서도 김동진, 한기악, 한위건, 설의식 등이 준비위원으로서 기자대회의 준비과정을 맡기도 한 전 언론계의 성사로서, 당시 동아일보도 「전조선기자대회」 제목의 사설로 시의에 적합한 대회로서 기대와 그 의의가 큼을 강조하였다. 또 평양지국장 김성업은 의안작성위원으로, 사장 송진우는 제종(諸種) 안건 기초위원으로서 의장후보로까지 추천되었다가 ‘그의 솜씨 없는 말은 장내 소란을 진정하려다가 반(反)히 소란을 야기해 일반의 민망이 적지 않은’ 사태를 빚기도 하는 등 기자대회 준비과정에서부터 참여하였던 것이다 (<일제하 민족언론사론>, 380쪽에서 재인용).


동아일보, 신간회 출범과 활동을 외면

1927년 1월 20일자 동아일보 2면에는 신간회(新幹會)의 창립총회가 2월 15일에 열린다는 예고기사가 나왔다. 제목은 「민족주의로 발기된 신간회 강령 발표 / 창립총회는 2월 15일 / 기회주의를 일체로 부인」이다.

  조선민족의 정치적 의식이 발달됨을 따라 민족적 중심단결을 요구하는 시기를 타서 순민족주의를 표방한 신간회 발기인 28 씨 연명으로 작일 아래와 같은 3개조의 강령을 발표하였는데 책임자의 말을 듣건댄 신간회의 목표는 모든 우경적 사상을 배척하고 민족주의 중 좌익전선을 형성하려는 것이라 하며 실지 정책과 사업은 2월 15일에 열릴 창립총회에서 결정할 터이라더라.
  강령
(1)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2)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함.
(3)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절 부인함.
  발기인 씨명(가나다순)
  김명동 김준연 김탁 권동진 정재룡 이갑성 이석훈 정태석 이승복 이정 문일평 박동완 백관수 신석우 신채호 안재홍 장지영 조만식 최선익 최원순 박내홍 하재화 한기악 한용운 한위건 홍명희 홍성희

그런데 정작 2월 15일에 신간회 창립대회가 열리자 동아일보는 거기 관한 기사는 물론이고 논설도 싣지 않았다. 다분히 흥분한 듯한 필치로 창립대회를 보도한 조선일보와는 정반대였다.

  신간회 창립대회 회중(會衆)은 무려 천여(千餘) /  회원에 섞여 방청객도 쇄도 / 회장(會場)은 숙연 중 긴장

  순민족주의단체인 조선민흥회와 신간회가 주의와 운동을 위하여 합동한 후 편의상 신간회라는 이름으로 개최한 신간회 창립대회는 예정과 같이 15일 오후 7시에 시내 종로 기독교청년회 대강당에서 개최하였는데 신간회의 창립대회는 이야말로 조선에 있어서 획기적인 모임인 만큼 회원과 방청인을 물론하고 정각 전부터 조수 같이 밀려들어 방청석은 정각이 되기 약한 시간 전부터 입추의 여지가 없으리만큼 만원의 성황을 이루었으며 정각보다 15분 후인 오후 7시 15분에 신석우 씨 사회로 개회를 선언한 후 회원을 점명(點名)하니 출석회원이 2백여인으로 방청인과 합하여 무려 천여명에 달하였으며 점명을 마치니 장내는 숙연한 중에도 매우 긴장미를 띠운 공기가 넘치어 자못 삼엄한 빛이 가득한 중에 순서를 좇아 의사를 진행하였다.

신간회 창립대회는 규약을 통과시킨 뒤 회장에 이상재를 선출했다.

  (···) 회장 이상재, 부회장 권동진 등 51명의 간부 및 발기인 중 조선일보계가 9명으로 가장 많았고, 기독교계 7명, 조선공산당계 5명, 천도교계 3명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신석우·안재홍 등 조선일보의 간부들은 모두 신간회의 주요 간부였고, 조선일보 기자들은 대부분 신간회 회원이었다. 조선일보가 신간회인지, 신간회 지부가 조선일보 지국인지 총독부가 판단하기 어려웠을 만큼 조선일보는 신간회 활동의 중심이었다. 지면에는 신간회 소식을 전하는 고정란을 두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신간회는 일부 지식계층이 들고 나온 자치운동에 대한 반대운동으로 태동됐다. 일제의 지배를 인정하는 범위 안에서 자치권 획득을 주장한 자치운동은 전체 민족운동에 혼란과 분열을 초래했고, 일제에 반사 이익을 안겨주었다. 조선일보는 처음부터 자치운동을 반대함으로써 신간회의 이론적 근거를 뒷받침했다(<간추린 조선일보 90년사>, 74~75쪽).

<간추린 조선일보 90년사>에서 인용한 위의 글을 보면 동아일보가 왜 신간회 창립대회를 외면했는지를 추측할 수 있다.

첫째, 51명의 발기인과 간부 가운데 조선일보계가 9명으로 가장 많았고 조선일보 기자 대다수가 신간회에 가입했으므로 창립대회는 ‘동아’의 경쟁지인 ‘조선’의 잔치마당으로 보였을 것이다.

둘째, 발기인과 간부에는 조선공산당계가 5명이나 들어 있었다. 당시 동아일보에도 좌익계 인물 몇 사람이 성분을 감춘 채 일하고 있었지만 조선일보처럼 그 세력이 강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신간회가 창립될 무렵의 동아일보에는 1924년 후반과 1925년 초와는 달리 진보적 기사나 논설의 수가 크게 줄어들어 있었다.

가장 주목할 것은 위의 인용문에 나오는 ‘일부 지식계층이 들고 나온 자치운동’을 대표하는 집단이 동아일보사 경영진과 다수 편집간부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동아일보가 1924년 1월 초 연속 사설 「민족적 경륜」으로 자치론을 펼치는 데 앞장섰다는 사실은 앞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

신간회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한국 현대사상 처음으로 결합한 ‘좌우 합작 독립운동단체’로서 “민족적·정치적·경제적 예속의 굴레를 과감히 벗어나며 타협주의를 배격한다”고 밝히면서 언론·집회·결사·출판 등의 자유를 쟁취하고 청소년과 부인을 위한 형평운동을 지원하는 것을 투쟁의 목표로 삼았다. 신간회는 일제강점기는 물론이고 한국의 현대 정치사에서 대표적인 ‘좌우합작운동’으로 꼽힌다. 현대사를 온전하게 기록하려면 신간회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동아일보만 보는 사람들은 1925년 2월 15일에 열린 신간회 창립대회는 물론, 그 이후 그 단체가 어떤 일을 했는지도 전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1927년 7월에 설치된 신간회 서울지회를 시작으로 1928년 말에는 국내외에 143개의 지회가 만들어지고 회원이 3만여 명에 이르렀다. 신간회의 조직이 그렇게 커지자 일제는 신간회를 탄압하면서 대규모의 전체 대회를 일절 허용하지 않았다.
  신간회는 1929년 6월 ‘복(複)대표회의’를 열어 새 임원진을 뽑고 새 규약을 채택했는데, 임원진의 절반 가까이가 사회주의자였다. 집행위원장이 된 허헌 역시 사회주의 계열이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진상조사단을 현지에 파견해서 학생운동 탄압을 엄중히 항의했다. 신간회가 12월 13일에 광주학생운동 탄압의 실상을 보고하고 일제를 규탄하는 ‘민중대회’를 열기로 하고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조병옥, 이관용, 허헌 등 간부 44명 등 90여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민중대회 사건’을 계기로 신간회는 회원 수가 느는 등 조직이 확대되어 나갔으나 지도부에 갈등이 일어나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허헌에 이어 집행위원장이 된 보수파의 김병로가 최린, 송진우 등 자치론자들과 함께 신간회를 자치운동의 매개체로 삼으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1930년대 들어 구성된 신간회 집행부가 타협적 운동 노선으로 기울어 가면서 일제의 탄압에 미온적으로 대처하자 좌파 진영에서 신간회 ‘해체론’이 강력히 제기되었다. 결국 신간회는 1931년 5월 16일, 창립대회 이후 처음으로 전체 대회를 열고 찬성 43, 반대 3, 기권 30으로 해소안을 가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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