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의 남북관계는 이미 봄부터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북한은 1993년 3월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면서 핵 개발을 공식화했고 미국은 당연히 그것을 막으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94년 3월 19일 남북 특사 교환을 위해 실무 대표들이 만난 자리에서 북측 단장 박영수가 거침없이 말을 터뜨렸다.

“여기서 서울은 멀지 않습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전쟁이 일어나면은….” 약간의 망설임 후에 결정적인 한마디가 터져 나왔다. “불바다가 되고 말 거요. 송 선생 당신도 살아남기 어려울 거요.”

조선일보는 3월 20일자 1면 머리에 「〈남북관계 급속 긴장 / 특사 실무접촉 결렬 북 일방 퇴장 / 대북정책 전면 수정 방침 / 주초 전략회의 대책 강구 / 이 부총리 “대화 호응하라” 성명」이라는 기사를 올렸다. 1면의 상자기사(「북 대표 “전쟁 땐 서울 불바다” 위협 / 8차 실무 접촉 험악한 분위기 54분 시종 말싸움 / “이런 회담 필요없다” 인사도 뿌리쳐 / 북 기자 “목숨 바칠 각오 없으면 미 여권 준비하라”〉가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같은 날짜 사설(「대북정책 원점에서」)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북한의 생존전략은 현 단계에서는 새로운 남북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왜냐 하면 우리 정부와의 새로운 관계 정립은 북한의 국내 역량 강화의 기본틀을 전면적으로 개편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북한의 특사 교환이나 정상회담은 현재로서는 국제 역량 강화를 위한 모양 갖추기의 차원을 넘어설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북한이 현재 추진하고 있는 이러한 생존전략의 틀 속에서 명실상부한 특사 교환이나 정상회담, 또는 경제교류의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러한 관계 개선을 요청하면 할수록 우리만 구차한 모습이 될 뿐이다. 우리의 대북정책도 올바른 북한관 위에 서서 새로운 발상의 전환을 할 때가 되었다. 더 이상 특사 교환이나 정상회담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북한 스스로가 명실상부한 특사 교환이나 정상회담을 요청할 때까지 우리는 우리 나름의 국내 역량 강화와 국제 역량 강화를 도모하여 자타가 공인하는 한반도의 정통성 있는 정치체로서 성장하는 것이 통일의 지름길이 될 것이다.

한반도 상황이 다시 대결 국면으로 들어섬으로써 ‘안보 정국’이 시작됐다. 실제로 북한 대표 박영수의 ‘불바다’ 발언은 앞뒤가 잘린 채 전달된 것이었다. 회담 도중 북측이 “미국이 경제 제재를 한다고 하는데 미국이 경제 제재를 한다면 귀측(남한)도 거기에 가담할 것인가?”라고 묻자 남한 대표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북측은 “한국이 유엔의 대북한 제재에 동참하겠다는 것은 전쟁 선언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고 치고 나왔고 남측은 요지부동이었다. 거기서 ‘불바다’ 발언이 터져 나왔던 것이다. 박영수의 발언은 “남한이 그런 식으로 전쟁을 선언해서 실제 전쟁이 일어난다면…”이 전제된 방어적 의미가 강했던 것이다.

‘안보 불감증’

처음에는 국민들도 앞뒤 맥락이 끊어진  ‘불바다’ 직격탄을 맞은 것 치고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3월 22일자 조선일보 사회면 기사(「안보불감증인가 / 서울 불바다 협박 예상보다 “담담” / 비자 상담 한가 사재기·주가 변동 없어」)가 그런 분위기를 전해줬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날지도 모른다는 소리는 미국 등 외국에서 요란했지만 국내에서는 전혀 전쟁 위기감이 없었던 것이다.

조선일보 4월 21일자 사설(「불바다에서 낚시까지」)는 그 신문의 답답한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냈다.

(…) 한동안 한반도에 전쟁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떠들던 미국 언론이었다. 그런데 엊그제엔 또 미국의 국제전략연구소 부소장이란 사람이 김일성을 면담하고 나와서는 김의 유화적인 자세를 확인했다는 투의 발언을 하고 있다. 이런 죽 끓듯 하는 광경들에 접하면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김일성의 대남, 대미, 대언론 플레이와 장난이 그런대로 먹히고 있구나 하는 점이다.
서울 불바다 운운하니까 한반도에 전운이라며 서방 매스컴에 일대 소동이 일어나고, 며칠 뒤 다시 김일성이 “미국에 가서 낚시와 사냥을…” 하니까 미국 인사는 또 금세 전쟁 위기 없음을 전하니, 김으로서는 이쪽을 아예 가지고 노는 셈이다.
김일성이 일련의 서방인들과의 만남을 통해 드러낸 속셈은 이렇다. 즉 그는 핵에 관해 아주 잘 숙지하고 있다는 것, 핵은 계속 없다고 우기며 핵무장 원천 포기를 끝내 약속하지 않겠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무기로 미국과의 일괄 타결에 매달리겠다는 것이다. 알맹이는 바로 이것이지, 그가 공갈책을 썼다가 유화책을 썼다가 하는 것은 게임의 술수일 뿐, 본질상의 바뀜이 아니라는 것이다.
(…) 그래서 우리는 답답한 마음에서 제의한다. 제발 우리의 안보 태세나 굳건히 다지고 한·미 공조나 튼튼히 점검하면서 말의 정직성이라곤 한 푼 어치도 없는 북의 장난에 일일이 반응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회동이나 회담에도 공연히 자꾸 연연하지 말라는 것이다.

6월 들면서 드디어 국내에도 전쟁의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타임〉지는 한반도에 전쟁이 터질 경우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특집기사를 실었다. 이듬해인 1995년 워싱턴포스트의 보도에 따르면 실제 1994년 5월 미국이 대북 공격을 고려하고 있었다고 한다.

6월 7일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북한이 영변 원자로의 핵연료 제거작업을 사실상 완료함으로써 북한 핵시설의 사찰 가능성을 완전히 없애버렸다고 밝혔고 미국무장관 크리스토퍼는 북핵 시설에 대한 선제폭격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6월 6일 현충일 연휴를 맞아 행락 인파가 고속도를 메우자 ‘안보 불감증’이라는 성토가 튀어나왔다. 시국이 어느 땐데 놀러 다니느냐는 개탄이 난무하는 가운데 심지어 주식 시장이 안정세인 것도 ‘안보 의식 부재’의 정황으로 시빗거리가 됐다.

드디어 조선일보가 나섰다. 6월 8일자 사설(「문민과 군사안보」)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 대통령은 북이 도발하면 자멸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제서야 정부가 안보 기조의 분위기를 강조하는 듯한 느낌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듯이 총리는 어떤 연설을 통해 안보 불감증을 경계하기도 했다. 사실상 국민 일반도 태평무드에 젖어 있어 해외의 언론이 의아해할 정도라 한다. 보기에 따라 이런 분위기는 “한국의 정부와 국민이 그만큼 의연하다”고 평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작금의 안보 불감증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 문민이란 접두사가 도입된 후 안보라는 두 글자는 급속히 퇴색하는 분위기가 일반화되었다. 권위주의 시대의 청산, 군 개혁, 군 정신교육 교과내용의 변경, 군 출신 인사의 요직 기용 기피 등의 문민화 작업은 물론 이유 있는 측면을 가지고는 있다. 그러나 그로 인한 의외의 부작용은 없었는 지도 살펴봐야 한다.
(…) 그래서인지 북핵문제는 갈수록 군사 상황으로 진척되고 있는데도 정부의 대응 방식은 그동안 계속 낙관적 기대를 동반한 유화주의와 외교적 양태로만 나타났다. 이것이 작금의 전반적 태평무드와 안보 불감증의 원인 중의 하나였다고 하면 지나칠 것인가. 문민정부면 북이 핵 공갈을 칠 때 전군 지휘관회의라도 한 번 열어 무서운 안보 표정을 지어보이는 일도 해선 안 되는 것인지도 궁금하다.
정부부터가 이렇게 태평한 듯 보이니까 국민도 “별것 아닌가보다” “설마 전쟁 나랴” 하는 안일에 젖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쟁 방지는 정부와 국민이 결연한 안보의식으로 무장해야만 확보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우리는 군사정권 식의 안보의 정치 이용은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문민이란 것이 자칫 군사안보적 안목과 긴장감의 둔화로 이어지는 일만은 없기 바란다.

조선일보는 6월 10일자 사설(「대비하는 국민이라야」)을 통해 우리 국민이 정말 너무 풀어져 있는 게 아닌가 되돌아보자고 촉구했다.

전쟁이 만일 터진다면 (…) 북은 수십년 동안 전시체제 하에서 가난과 주림에 익숙해 있고, 잃을 것이 별로 없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복잡한 자본주의 사회에다 다원사회이며 개인주의 시대이면서 또한 잃을 것이 많다. 교통은 또 얼마나 복잡하며, 인구는 얼마나 조밀하고, 각 가정의 가스시설은 또 얼마나 위험한가.
이런 것을 생각한다면 지금의 위기 하에서 우리가 일단 유사시에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정도는 대충 정해놓는 것이 필요하리라고 믿는다. 가장 중요한 식수문제, 대피문제, 긴급구조 요령, 기타 필수적인 대책과 행동요령 정도는 반이나 통 또는 아파트 동 단위로 서로 의논해 둠직한 것이다. 그렇다고 과거처럼 공연히 내실도 없이 소리만 큰 동원체제로 가자는 뜻이 아니라, 자구적인 행동요령을 미리 생각해두는 차분함을 보이자는 것이다.

이 사설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자꾸 전쟁 위기를 부추기고 있다. 일단 유사시에 아비규환이 없으려면 정부가 유사시 행동요령을 입안해 반상회를 통해 배포하고 주민 단위로 협의를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제안하기까지 한다. 지금의 우리의 자세는 외국인들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무감각한 듯이 보인다면서 평시의 대비는 꼭 전쟁이 난다고 해서 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6월 11일자 ‘기자수첩’(「불감증 국방위」-정치부 기자 이종원)은 점심식사를 위한 정회시간을 빼고 실제 회의시간이 3시간 36분이 걸린 9일의 국회 국방위원회가 위기상황에 비추어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고 질타하고 있다.

(…) 북한의 핵 개발 상황과 전쟁 도발 능력, 우리 군의 대비 태세 등을 물었던 총 55건의 질문 가운데 과연 전쟁과 평화의 전략이란 이날 주제의 절박감을 국민이 느낄 수 있을 만큼 육박해갔던 질문이 과연 몇 개나 됐을까. 주제의 긴장감은 시간의 경과에 따라 원론적 수준을 맴돌거나, 현실성 없는 자기 주장들로 해서 바람 빠진 풍선을 닮아갔다. 기밀이 많아 공개회의에선 깊숙한 질문을 할 수 없었다.
(…) 그렇다면 회의를 비공개로 해서라도, ‘설마’의 타성에 젖은 국민에겐 경각심을, ‘혹시’의 과잉 불안감에 가위눌린 국민에겐 기댈 언덕이라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이날 회의에서 적지 않은 의원들이 국민들의 안보 불감증을 지적했다. 도대체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데 국민들이 저렇게 태평할 수 있느냐고 준엄하게 나무랐다. 그러나 의원과 정부측이 이날 회의에서 드러낸 정보의 적합성, 상황의 인식 수준이나 접근 방법, 그리고 표현 능력 등의 갖가지 문제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정부와 국회는 결코 그 국민의 수준 이상이 될 수 없다는 상식만을 다시 확인시켜준데 지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안보 불안증’

조선일보가 그렇게 주장하는 상황에서 열린 북한 핵 관련 비상대기 관계관 회의에서 서울시 부시장이 “북한의 도발 징후가 있으니 시민들에게 비상물품 확보를 권장”한다는 발언을 했다. 이 발언 이후 강남 일대의 부유층에서부터 사재기 열풍이 시작됐다.

조선일보 6월 13일자 사회면 기사(「비상용품 수요 증가 / 라면·통조림 등 공급 달려 / 슈퍼·소매점 등 “마구잡이 사재기 볼 수 없어”」)는 이렇게 보도했다. “북한 핵 문제로 안보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쌀 라면 통조림 부탄가스 손전등 구급약품 등 비상용품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11일과 12일 서울시내 거의 모든 슈퍼마켓과 산매점들에는 라면을 상자째 구입하려는 사람들이 몰렸다. (…) 그러나 현재의 비상용품 구매 행태는 83년 2월 북한 이웅평 소위의 귀순 사건과 83년 5월 중국 민항기 불시착 사건 때 빚어졌던 마구잡이식 사재기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고 산매상들은 입을 모았다.”고

정부도 조선일보의 주문에 따르는 듯, ‘전시행동요령’ 제작에 들어갔다. 조선일보 6월 16일자 사회면 기사(「무작정 피란 위험 집에서 방송 청취 / 필수품 배급제로 허가 차량만 운행 / 내무부 전시행동요령 재제작 / 곧 가정 배포 “불안 자극” 고심」)는 내무부가 북한 핵과 관련한 심상치 않은 분위기로 인해 불안해하는 국민들의 궁금증에 답하고 국민들의 안보 경각심을 높이기 위해 ‘전시국민행동요령’이라는 책자의 제작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전했다.

사재기 현상에다 주식시장까지 이상 기미를 보이자 김영삼 정부는 너무 지나쳤다는 판단을 했던 것 같다. 6월 15일 대통령 김영삼은 “우리 군의 화력과 기동 능력은 놀라운 상태여서 일단 유사시 북한의 방위와 건설은 하루 아침에 파괴할 수 있다”고 진화에 나섰다. 그는 그날 낮 금융계 인사들과의 오찬에서 “국민의 안보 불감증도 문제지만 안보 불안감을 갖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고, “우리는 한미 간에 전례 없이 확고한 공조체제를 유지하고 있고, 24시간 대북 감시체제를 운영하고 있으며, 정치군인들을 제거하여 군의 사기가 어느 때보다 높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말은 다 않고 있지만 북한이 어떠한 도발을 하더라도 국가를 보위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하는 대통령으로서 만반의 태세를 취하고 있으니 국민은 정부와 대통령을 믿어도 좋다”고 주장했다.

조선일보 6월 16일자 1면 ‘만물상’도 ‘안보 불감증’만이 아니라 ‘안보 불안증’도 문제라는 식으로 슬쩍 말을 바꿨다. 불안을 조성한 언론보다는 그에 반응하는 국민의 자세가 문제라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든지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과 같은 행동을 하려는 심리가 있다. (…) 남들과 같이 행동하지 않으면 손해를 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엊그제 서울시 당국자가 비상시에 대비해 생활필수품을 저장해두라는 말을 했다 한다. (…) 또 다른 사람은 한술 더 떠 미국 사람들이 이미 철수 훈련을 마쳤다라고 말한다 하자. 그래서 말은 번지고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히게 된다. 정말로 전쟁이 일어나면 전쟁은 하루 이틀로 끝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라면을 집안에 쌓아 두어야 하겠는가. 또 나만이 굶주리지 않으면 된다는 것일까? 라면을 끊여 먹어야 할 만큼 절박해진다면 상황은 가스며 식수도 끊기게 마련이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확고한 안보의식이지 피난 준비가 아니다. 모두가 한 마음이 되는 애국심이지 사재기의 이기심이 아니다. 전쟁이 나면 나가서 싸울 생각을 먼저 해야만 이 나라가 제대로 서는 것 아닌가.

이 글을 통렬하게 비판한 독자투고가 6월 18일자 조선일보에 실렸다.

16일자 만물상을 읽었다. 신문이 이렇게까지 일관성이 없어서야 누구를 믿고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싶다. ‘안보 불감증’이란 단어를 써 가며 북한핵 위협에 대한 국민의 반응을 우려하면서 전시 상황을 대비한 물품 내역까지 보도한 조선일보가 이제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물품을 구입하는 국민들을 향해 ‘안보 불안감’을 탓하고 있다. (…) 신문과 방송에서 그렇게 떠들고 외치기 전까지는 우리 국민은 평상시의 생활 태도를 견지하면서 사태를 예의 주시해 왔다. 그러나 조금씩 북핵 위협에 대한 언론의 내용들은 사태가 심각하다는 인상을 풍겼고 그에 따라 국민들은 조금씩 동요하기 시작했다. (…) 전쟁의 고통과 혼란, 그리고 군중의 집단공포 (…) 지금처럼 약간의 생필품을 준비해 두지 않고 있다가 전쟁이 난다면 모두가 슈퍼마켓으로 몰려갈 (…) 그 때의 대혼잡과 공포를 생각한다면 오히려 지금의 준비는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더불어 제발 우리 언론들도 눈에 보이는 현실에 대해 단편적으로만 “국민들이 너무 무감각하다”느니 “국민들이 어리석은 사재기를 하고 있다”라는 식의 비난으로 국민들을 어리둥절하게 할 것이 아니라 북핵에 대한 일관적이고도 확고한 주장과 논리로써 이 시점에서 어떠한 행동 방침과 자세가 필요한가를 역설하고 국민들을 선도하길 바란다.

조선일보는 다시 6월 19일자 ‘만물상’에서 다음과 같이 변명했다.

안보 불감증을 지적하는 것은 왜 불안감이 없느냐고 나무라는 것이 아니다. 생필품을 준비하라고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도 아니다. 정부나 국민이나 북한 핵문제가 어떻게 되어 가는가를 올바로 인식하여 그 위협에 투철한 경계심을 갖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말이다. 안보상의 위기가 닥쳤을 때는 우선 마음가짐을 또렷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만 오판을 하지 않고 정확하게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두가 함께 살 생각을 하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이 그 가운데서 솟아난다. 둔감함이나 사재기가 다 안보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을 알면 한 차원 높은 안보의식이 발양될 법도 하다.

모르는 새 왔다 간 ‘전쟁 위기’와 카터 방북

그런 해프닝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실제 한반도에는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들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전쟁의 위기가 목전에 닥쳤다가 가까스로 물러났다. 6월 16일 오전까지만 해도 주한 미국대사 레이니가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정종욱을 만나 미국의 민간인들을 철수시키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북핵 문제에 대한 외교적 노력이 절망적 상황에 이르고 제재를 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미국 대통령 클린턴 대통령 ‘재난을 불러올 수 있는 옵션’, 즉 언젠가는 미국을 겨냥하게 될 핵무기를 북한이 보유하도록 내버려두는 대안과, ‘달갑지 않은 옵션’, 즉 재래식 전쟁의 위험성이 있더라도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적극 저지하는 대안 중에서 ‘달갑지 않은 옵션’을 선택한 상황이었다. 그 옵션은 미군 공군기가 영변을 폭격하면서 터진 전면전으로 인해 발생할 한국군과 미군 및 민간인 사망자 수까지 이미 예상한 시나리오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 위기 상황에서 전 미국 대통령 카터가  6월 15일 판문점을 통해 북한에 들어갔다. 이제 유일하게 남은 평화의 길은 그의 협상 결과에 달려 있는 듯 했다. 그럼에도 조선일보는 카터의 방북에 대한 기대보다는 여전히 불신이 큰 듯 했다. 조선일보는 6월 14일자 사설(IAEA 탈퇴와 카터 방북)에서 “카터 전 대통령은 북한을 알고 북한에 가야 한다. 적어도 김일성의 술수에 말려드는 일은 없어야 한다. 카터가 이번 방북에서 실망을 가져다준다면 그의 퇴임 후 부각된 평화의 중재자로서의 이미지에도 큰 손상이 갈 것이다” 라고 ‘경고’했다.

그런데 북한 방문을 마치고 6월 18일 서울에 온 카터가 김일성의 남북정상회담 제안 사실을 전했고 김영삼이 이를 즉각 받아들임으로써 3월 이후 내내 한반도를 덮었던 전쟁의 먹구름은 순식간에 걷혔다. 그럼에도 조선일보는 여전히 불만이었다. 19일자 조선일보 사설의 제목은 「24시간도 못 돼서」였다.

우리는 북핵문제가 대화로 풀리고 거기에 남북의 모든 현안을 다루는 남북한 정상회담이 성사될 수 있다면 이는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 더 나아가 통일을 향한 진일보의 사태 발전이란 점에서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 클린턴 정부가 카터의 말만 믿고 또는 카터를 통해 제재를 피해가는 방향으로 선회하려는 것에 정부가 불만을 터뜨렸던 것도 좀 더 버티지 못하고 너무 쉽게 북한에 놀아나는 미국을 경계하고자 했던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김 정부가 24시간도 채 되지 않아 카터가 가져온 김일성의 남북한 정상회담의 보따리를 보다 면밀히 세밀하게 검토해볼 시간도 없이 이를 수용함으로써 스스로 기존의 분위기를 뒤집은 것이다. (…) 거듭 주장하지만 우리는 북한이 단지 김일성의 언급이 아닌 실체적인 신뢰성을 보여올 때까지 모든 성급한 판단과 결론을 유보해줄 것을 당부한다. (…) 북의 한 두 마디 말에 너무 정색한 반응을 보이며 이끌려 다니는 행색을 보여서는 (…) 오히려 김일성과 북 지도자들을 더 나쁜 방향으로 오판하게 만드는 데 기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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