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가을 한국은 ‘올림픽을 위한, 올림픽에 의한, 올림픽의 나라’였다. 당시 유엔 회원국보다 1개국이 더 많은 160개국이 참여한 서울올림픽에서 한국은 금 12, 은 10, 동 11개 등 총 33개의 메달을 따내 소련, 동독, 미국에 이어 4위를 차지했다. ‘스포츠 공화국’으로 불리던 전두환 정권의 군사작전 식 스포츠정책이 맺은 결실이었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모든 신문들이 올림픽 관련 기사로 지면을 도배질하면서 올림픽 열기를 올리고 주최국 한국의 영광을 예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조선일보는 올림픽 시작 전인 9월 1일자부터 개막일인 17일자까지, 1992년 올림픽 개최지인 스페인 바르셀로나 왕복 항공표와 10일간 체재비라는 1등상을 걸고 매일 1문제씩 내는 ‘서울올림픽 카운트다운 퀴즈’를 실시하면서까지 올림픽 분위기를 띄웠다.
10월 2일 폐막을 닷새 앞둔 9월 27일자 조선일보의 총 20개 지면에서는 올림픽과 관련되지 않은 기사를 찾기 어려울 정도이다. 1면 머리기사는 「벤 존슨 약물 복용 / 도핑센터 금지약 성분 검출」이다. 벤 존슨은 남자 1백m에서 칼 루이스를 누르고 금메달을 획득한 선수인데 금지약물을 복용한 사실이 드러나 메달을 박탈당했다. 이 기사는 조선일보의 세계적 특종이었다.
이밖에 「이경근도 금 땄다 」/ 김재엽 이어 유도 금메달 2개」 「노태우 대통령 이경근·김재엽 선수에 축하 전화」「무명 케냐 폴 에렝 8백m 금」 등 1면에 올림픽 관련기사가 아닌 것은 단 한 건도 없었다.
· 3면: 「Seoul Olympiad: 한가위 연휴 영웅들」이란 제목의 사진 화보.
· 5면: 「여자하키 4강에, 오늘 영국과 결승 진출전」 「업어치기·가위치기로 금 낚았다 / 이경근 파 선수에 판정승 / 김재엽 유도 그랜드 슬램」 「김재엽 우승 조역 윤현 / 선발전 우승 양보 훈련 파트너로」 「테니스 에드베리 4강에」「“벤 존슨도?” 전 세계 경악, 도핑사상 최대 충격… 육상 100 m 세계신 어디로」
· 6면: 「88 스타들」
· 7면: 「‘관전평’ 육상 미국·소련 대결서 ‘흑백시대’로 탈바꿈」「조이너 올림픽 신기록 IAAF서 공인 취소」「〈사이클 82㎞ 여 사이클 막판 대역전극 0.01초 차 우승」「육상 스타 저조 신예 부상 육상 돌풍 /무명 필립스 허들 우승 파란」「남 핸드볼 4승 스페인만 꺾으면 은 확보 / 여자는 결선 진출」
조선일보는 2, 4, 14, 17, 19면과 전면광고 2개 면을 뺀 13개 면을 올림픽 기사로만 채웠다. 이중 3개면이 화보로만 만들어졌다.
이날 특기할만한 올림픽 관련 기사는 19면에 실린 「절도 미국 선수 등 3명 경찰 출두 통고」와 2면에 나온 사설(「성난 한국인」)이다. ‘서울올림픽’은 ‘반미 올림픽’이기도 했던 것이다.
한국인들은 지금 한국에 와 있는 미국인들로 인해 몹시 감정이 상해 있다. (…) 화가 나 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지도 모른다. (…) 한국인의 감정은 개회식 때 미국 선수들이 보여 준 무질서와 난장판에 가까운 입장식 방해 행동으로부터 비롯됐다. (…) 거기에 칼 루이스 선수의 공항에서의 무례한 태도가 겹쳐졌다. (…) NBC방송의 보도 태도에도 한국인들은 화가 났다. (…) 미국 수영선수들의 절도 사건은 미국인들의 안하무인적 태도가 가장 적절히 드러난 사건이다.
(…) 이번 일련의 사태는 본질적으로 한국인의 문화적 배경과 인식 수준을 아랑곳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이며, 한국인의 자존심을 의식하지 않은데서 시작된 것이다. (…) 솔직히 미국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의 여러 나라 특히 제3세계 국가들을 상대하는 데 있어 상대방의 방법보다는 자기들의 방법을 강요해 왔다. (…) 중요한 것은 미국인들이 한국과 50여 년 간의 관계를 가졌으면서도 한국인들이 비록 못 살더라도, 우리의 문화에 대한 자긍심과 우리의 전통에 대한 자존심만은 결코 버리지 않는 민족이라는 것을 얼마나 알아주었느냐는 점이다.
(…) 이제 한국인들은 그들이 지난 수십년 동안 어떤 절실한 경우에도 되도록 내색하지 않고, 참고 눌러왔던 자존심을 더 이상 감추고 살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지하는 것이다. (…)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미국인들은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오늘날 한국인들이 가진 감정과 분노가 이번 몇 가지 사건에 국한되기를 바란다. (…) 우리는 궁극적으로 이번 사태로 감정이 응어리로 남지 않았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사건을 국지화하는 지혜를 가져야 하는 동시에, 미국인들이 한국인들의 심경을 자기들 기분 내키는 대로 덧들이는 오만을 시정하고 한국인을 진정한 동반자로 대접해주는 인식의 전환을 해야 한다.
당당함 보다는 반미감정에 대한 걱정과 미국에 대한 비굴이 더 많이 느껴지는 사설이다. 올림픽 폐막 다음날인 10월 3일자 조선일보는 「‘달라진 우리’를 시험할 때」〉라는 통단사설을 통해, 올림픽은 우리가 세계를 알고 세계가 우리를 알게 된 기회였고 우리의 기가 승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게 해 주었다며 흥분을 금치 못했다. 또 “지난 십수년 간의 대내적 갈등 속에서 우리가 과연 서로를 용서하며, 서로를 포용하며, 서로를 긍정할 줄 아는 민족인가를 걱정했던 사람들에게, 이번 올림픽은 그런 갈등이 정·반·합의 과정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며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이제 올림픽을 겪으면서 한 차원 달라진 나라, 의식 수준에서 남다르게 성장한 민족으로 자부할 수 있어야 하며, 또 그렇게 돼야 한다. 사물을 보는 눈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하며, 갈등을 해소하는 노력이 성실하고 진실해야 하며, 사회적 삶의 방식이 민주적이고 시민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설 자체가 “스포츠에서의 금메달이 곧 나라의 기운을 말해 주는 척도일 수는 없고 속된 말로 운동 잘 한다고 나라가 흥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전제하면서도 실제로 올림픽 하나로부터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는 듯하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박성수의 투고를 받아 같은 날짜 3면에 전면 특집으로 꾸민 「개천」은 “이 땅에 한민족 새 시대가 열렸다”면서 “싸우지 말라는 홍익인간 정신을 구현한 올림픽을 통해 재발견한 단군문화와 우리 기상을 만방에 펼치자”고 호기를 부렸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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