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당선의 일등공신은 김대중·김영삼 단일화 실패임이 분명하지만 전임 대통령 전두환의 적극적 지지와 지원이 없었다면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전두환은 노태우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을 뿐 아니라 막대한 선거자금을 지원했고 안기부 등 국가기관을 동원한 관권 부정선거로 노태우를 도왔다. 심지어는 노태우 선거캠프가 5공과의 단절을 공약으로 내거는 것까지 용인했다.

전두환으로서는 그렇게 노태우를 당선시켜 놓기만 하면 자신의 안위가 보장됨은 물론 상왕(上王)에게  일정한 권력이 주어질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음직하다. 대통령선거가 끝난 지 열흘만인 12월 26일 단행된 군 인사에서 전두환의 그런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그는 군 요직에 모조리 자신의 측근들을 앉혔다.

전두환은 또 이듬해 1월 16일 국가원로자문회의법안을 국회에 제출해 자신이 퇴임하기 이틀 전인 2월 23일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통과되도록 했고 다음 날 5공의 마지막 국무회의에서 그 법을 공포했다. 상왕 행세를 하기 위한 준비를 마친 것이다.

전두환이 퇴임하기 엿새 전인 2월 19일 노태우는 새 내각 명단을 발표했다. 총리 이현재, 부총리 이웅배, 외무 최광수, 내무 이상희, 재무 사공일, 법무 정해창, 국방 오자복, 문교 김영식, 체육 조상호….

24명의 장관자리 중 외무, 내무, 재무, 법무, 체육, 건설(최동섭), 체신(오명) 등 7자리가 재임이었다. 조선일보는 2면 해설기사에서 6공 첫 내각의 성격을 「‘모양’보다 ‘안전’-전환기 실무내각 / 기계적 안배 탈피-전문인 기용 / 올림픽 겨냥-총선 후 보완 예상」이라고 분석하면서 「새 출발에 ‘그 얼굴’」이란 제목의 사설에서는 “거기에는 ‘노 정권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 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하는 국정의 새 방향이 선명하게 제시되어 있지 않다”면서 “구 정권의 방향과 노선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그것을 긍정하기 싫어 몇 사람의 새 얼굴로 위장하려 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고 혹평했다. 그리고는 “이 기회에 노 차기 대통령에게 보다 소신 있고 과감한 정치를 당부하고 싶다. 너무 좌우를 살피고 전례를 모방하는 ‘남의 등에 업힌 듯한’ 행보에 집착하지 말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제 전두환과는 선을 그으라는 주문이었다.

2월 25일 드디어 전두환이 청와대를 떠나 연희동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이날까지는 전두환이 더 대접을 받는 듯 했다. 26일자 조선일보는 15면(사회면)에 「 “대통령이 시민됐다” 환영 / 연희동 이웃들 ‘8년만의 귀가’ 따뜻이 맞아 / 막걸리 대접하며 “자랑스럽습니다” / 손녀 안은 채 “자주 뵙겠습니다” 답변」이란 시커먼 제목으로 전두환의 귀가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새 대통령 노태우의 고향에서 벌어진 축하 행사 소식은 「“‘신용동’ 이름대로 새 용 났네”」라는 3단 제목으로 나와 전두환 소식에 파묻혔다.

총선 공천 통한 결별

노태우의 홀로 서기는 예상보다 빨리 시작됐다. 3월 18일 발표된 ‘4·26 총선’ 공천이 그 시발점이었다. 전두환 정권의 핵심이라 할 권익현과 권정달을 탈락시킨 것이다. 권익현은 전두환·노태우와 함께 하나회를 만든 육사 11기로 노태우보다 먼저 민정당 대표위원을 지낸 인물이었다. 권정달 역시 12·12 쿠데타의 핵심 인물로 민정당 창당과 함께 사무총장을 맡았던 실력자였다. 육사 15기 하나회 멤버로 전두환의 동서인 김상구도 탈락했다. 전국구에서는 국회의장 이재형과 총리 노신영이 탈락하고 박철언·나창주·박승재·강재섭·이재황 등 박철언이 주도했던 월계수회 멤버들이 대거 포함됐다.

3월 19일자 조선일보 2면 기사(「신주류로 ‘친정체제’ 구축 / ‘구시대와 단절’ 의지 분명히 / 공천 절차 통해 장래 부담 걸러」)는 ‘난산의 민정 공천이 뜻하는 것’을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같은 면 사설(「전진이냐 복고냐 / 공천 발표 계기로 민정당에 충언함」을 통해 입장을 밝혔다.

노태우 총재의 민정당은 과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뒤로 복고하고 있는가. 이것은 이번 민정당의 공천 발표를 보고 난 우리의 착잡한 질문이다. 일부 대표적인 구시대의 주역들이 탈락하고 다수의 각계 신인들이 발탁된 것을 보면 앞을 향해 가는 것 같이도 보인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 반대, 또는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여전히 ‘그 때 그 사람들’의 얼굴이 끼어 있기 때문이다.
이미 사라졌다고 간주되던 70년대의 얼굴들도 보이고, 심지어는 50년대 이래 운신의 재주를 부리던 인물들도 보이며, 이른바 강성 이미지의 얼굴 또한 여전히 발견된다. 이런 신·구 양면의 중첩성을 돌아볼 때 노태우 대통령의 현 권력은 역시 과도적인 상태의 미묘함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번 공천에서 민정당의 현 진용이 그나마 ‘구(舊)’를 청산하려고 애쓴 그 의지와 노력만은 일응 감지될 수 있기에, 이 부분에 관한 한 우리는 굳이 인색하게 평가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구의 역관계가 압도적으로 ‘신(新)’ 쪽으로 옮겨졌다고는 말할 수 없으며 (…) 노 대통령과 민정당 현 진용이 보다 결단성 있게 그 행보를 국민과의 공약에 따라 분명하게 ‘구’와 ‘복고’가 아닌 ‘신’과 전진으로 향하게 하기를 강력히 권고한다.

흘러간 권력과의 단절에 관해서는 노태우보다도 조선일보가 훨씬 더 단호했던 셈이다. 하지만 5공 세력 전체가 아닌 전두환 개인의 몰락은 3월 31일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전경환의 구속으로 본격화됐다.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은 5공 정권에서 새마을본부 회장을 지내면서 숱한 부정부패 의혹을 받았던 인물이다.

동생 이용한 형 때리기

조선일보는 4월 1일자 1면 머리기사(「전경환 씨 재산 해외 도피 수사 / 검찰 출처 불명 비자금 20억도 계속 추적」)로 전경환 구속 사실을 보도했다. 기사는 검찰이 전경환의 비자금으로 확인된 1백37억 원 중 출처가 분명치 않은 20억 원의 자금 조성 경위 등을 계속 수사 중이라고 전했다. 이 기사 끝에는 “뉴욕타임스는 한국 경찰의 전경환 씨 구속이 노태우 정권의 이미지를 전두환 정권과는 달리 보이게 하여 오는 26일 총선에서 민정당을 유리하게 할 수 있다고 31일 서울발로 보도했다”는 1단 짜리 기사를 붙였다.

같은 날짜 사설(「절대권력의 합작품 / 전경환 씨 구속과 사건의 본질」)은 이 사건이 ‘횡령’이라는 법률 용어로는 도저히 그 전체상과 본질을 보기 어렵다면서 문제의 핵심은 “전 씨가 법보다 우위에 있었다는 사실이며, 이 점은 그가 특정한 혈연관계 속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사실이다”라고 해석했다.

(…) 국민적 분노의 표적은 자연인 전 씨의 횡령 행위 이전에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구조악의 그물이며, 이 그물을 전제로 하지 않는 한, 전 씨 사건의 추악한 본질은 작금의 본질적 법률적 소추 여하 간에 절대로 올바르게 해명된다고 할 수 없다.
한마디로 그것은 일체의 국민적 감시나 견제가 없는 절대권력이 절대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해서 만들어 낸 일종의 종합작품이란 사실이다. 국보위가 만들어 낸 ‘육성법’ 부터가 우선 무소불위의 법적 장치를 제공한 셈이고, 그것을 기화로 엄청난 성금을 바치게 해서 그 중 상당액을 착복했고, 그런 막강한 성역의 위광을 악용해서 각종 특혜와 청탁, 이권 개입과 압력을 행사했으며, 아울러 국가기관들은 그러한 탈법에 찍소리 한 마디 못하고 못 본 척하거나 비호만 했던 것이다.
  (…) 이 작업은 역시 권위주의와 절대권력에 반대하는 각성된 국민의 지속적인 민주화 노력에 의해서만 근본적으로 추구될 수 있을 것이다.

국민적 감시나 견제가 없어서 문제였다면 조선일보도 그 책임을 져야 하고 국가기관들이 그러한 탈법에 찍소리 한 마디 못한 게 문제라면 언론기관도 마찬가지일 텐데 그에 대한 자성의 소리는 한 마디도 없다.

전두환은 결국 4월 13일 동생의 새마을 비리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직과 민정당 총재직 등 일체의 공직에서 사퇴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그는 또 자신의 아호를 딴 법인 일해재단 연구소가 국민들로부터 많은 오해를 받고 있는 점을 감안해 명칭을 바꾸어 줄 것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그는 “못난 동생이 여러 가지 불미스런 일을 저질러 그간 국민들께 심려를 이만저만 끼치지 않아 진심으로 송구스럽다”며 “새 정부가 이제 자리를 잡고 일을 시작하려는 시점에 이런 일로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키다 보니 새로 나라를 맡은 노태우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공직자들에게 죄송함과 책임감을 절실하게 느낀다”고 말했다. 노태우는 ‘상왕’ 행세를 하려고 집요하게 들러붙던 전두환을 야당과 언론, 여론을 이용해 말끔히 정리하는 데 성공했다. 전두환을 직접 공격하지 않으면서도 그의 정치적 날개를 꺾어 버린 것이다. 조선일보는 다음 날짜 사설을 통해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결단은 시의적으로 적절했고 도의적으로 합당했으며, 정치적으로도 유익했다”고 환영했다.

(…) 시기적으로 볼 때 지금 전 대통령은 어떠한 중대한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될 시점에 처해 있었다. (…) 전 대통령으로서는 일정한 도의적 책임을 지는 것으로부터 벗어나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 대통령을 비롯해 현 정부의 어떤 인사라 할지라도 감히(?) 전 대통령에게 그러한 도의적 책임을 질 것을 권유할 입장에 있지는 못했으며 (…) 지난 2월의 단임 실천에 이어서 또 하나의 긍정적인 거취를 보여준 셈이다.
정치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 전 시대 담당자의 모든 공직 사퇴는 80년대 후반의 노 정부 시대에 그 어떤 영향력도 미치지 않을 것임을 시사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 중요한 것은 국민의 인내가 한계에 도달하기 전에 새 정부는 5.5 공화국이 아닌, 진실로 6공화국임을 분명하게 입증해 보여야 한다. (…) 인사와 정책과 제도와 관행과 법규의 모든 면에서 새로운 기풍을 일으키고, 민주와 정의를 요구하는 국민의 뜻에 전폭적인 순응이 있어야 할 것이다.

조선일보의 전두환 찬양은 그가 권좌에 있을 때까지만 유효한 것이었다. 권력의 주인공이 노태우로 바뀌자마자 전두환을 끌어 내리는 데 앞장섰던 조선일보는 이제 노태우를 향해 “국민의 뜻에 순응하라”고 호통을 치고 있다. 그 국민의 뜻은 조선일보가 대변할 것이었다.

제13대 총선과 여소야대

1988년 4월 26일의 제13대 총선은 17년 만에 부활된 소선거구제로 치러졌는데 한국 역사상 최초로 ‘여소야대’ 국회를 탄생시켰다. 그것도 득표율 34% 대 66%, 의석수 125 대 174라는 큰 차이였다. 정당 별 의석수는 민정당 125석, 평민당 70석, 민주당 59석, 공화당 35석이었다. 진보를 표방한 한겨레당과 민중의 당은 의회 진출에 실패했지만 평민당의 이해찬·이철용·양성우·문동환·박영숙 등과 민주당의 노무현·장석화·김광일 등 재야 신진 인사들이 대거 의회에 진출했다.

조선일보는 4월 27일자 2면에서 「지역감정·정당 선호 뚜렷 / 전국을 4대 당이 ‘분할 점유’ / 신생 정당들 1석도 못 내… 여성 전원 탈락 / 이철승·유치송 씨 등 구 정객 거물들 고배」라는 제목으로 13대 총선에서 드러난 표의 성향을 분석하고 있다. 평민당은 광주와 전남북의 37개 선거구에서 36명이 당선됐고 민주당은 부산의 15개 선거구 중 14개, 민정당은 대구 8개 선거구 모두와 경북 21개 중 17개 지역을 차지했다. 공화당도 충남의 18개 선거구에서 13명의 당선자를 냈다. 득표율에서는 민주당이 평민당을 23.8% 대19.3%로 앞섰지만 의석수에선 11석이나 뒤져 이후 정국 주도권은 김대중에게 넘어가게 됐다.

조선일보가 4월 28일자 2면에서 전한 각 당의 표정은 「썰렁한 당사…찾아 온 당선자들에게 축하 말도 잊어”: 민정 / “흥분한 당원들 만원…새벽 당사 ‘만세’ 소리 떠들썩”: 평민 / “‘제2야당’ 전락에 허탈…김 대행 ‘패장의 실수’ 고백”: 민주 / “온통 승전 분위기…예상 밖 ‘JP 바람’ 스스로 놀라”: 공화」였다.

조선일보는 같은 날짜 사설(「당의 안일 끝났다」)을 통해 총선 결과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야권 분열상에 집착한 사람들에게는 평민·민주 간 자리바꿈이 새롭게 보일지 모르지만 정치적으로는 집권당 참패가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민정당의 독주나 독단은 용납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조선은 “우리는 이제까지 강력한 여당에 의한 의정의 능률적 처리에 너무나 익숙해 있다. 국회를 중심으로 한 정치란 원래 여당의 책임이며 독점물이며, 또 효율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으로 그저 무비판적으로 믿어 왔다”면서 “이젠 4·26 총선을 계기로 민정당은 재빨리 어제까지의 정치 행태나 관습에서 벗어나는 변신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통령을 비롯한 여당 책임자들이 야당을 국정의 국정책임자로 끌어들이는 동반자로서의 자세를 수범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단히 시의적절한 의사 표현이긴 하나 지금까지 극단적으로 여권 편향적 자세를 보여 온 조선일보가 앞으로 그런 자세를 지켜 나갈 수 있을지 주목되는 대목이었다.

‘여소야대’ 국회의 위력은 대단했다. 청문회 등을 신설한 국회법 개정안이 통과되었고, 국민적 요구에 따라 전두환 정권의 비리를 파헤치는 청문회를 열기로 했다. 6월 27일에는 국회에 7개 특위를 구성했는데 그중 ‘5·18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위’ ‘제5공화국에 있어서의 정치권력형비리 조사특위’가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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