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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대선과 조선일보조선일보 대해부 4권 - 2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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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12.04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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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김영삼의 후보 단일화 실패

1987년 13대 대통령선거의 최대 관심사는 김대중과 김영삼의 후보 단일화였다. 불과 7년 전인 1980년 ‘서울의 봄’에 김대중과 김영삼이 힘을 합해야 신군부의 쿠데타세력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여론이 지배적이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길을 갔다. 또한 노태우의 ‘6·29 선언’이 나온 배경도 두 사람의 분열을 전제로 했다는 점에서 주목됐으나 정작 그들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드러났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6·29 선언’ 이후 단결을 외쳤지만 실제로는 자기 길을 가기에 여념이 없었다. 양측은 실무협상을 벌였지만 진전은 없었고, 후보 단일화 약속시한인 9월 30일을 하루 앞둔 29일 협상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조선일보는 9월 30일자에 양측의 단일화 실패를 1면 머리기사로 올렸다다. 제목은 「두 김 씨 후보 단일화 실패 / 전기 없는 한 결별 가능성 / 재회 합의도 못해」이다. 그 곁에는 김대중이 “당의 결정에 관계없이 출마를 시사했다”는 기사를 크게 실었다. 결별의 책임을 김대중에게 돌리려는 조선일보의 편집 의도를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일보는 단일화 실패 뉴스를 사설과 해설기사로 크게 다루는 등 두 사람의 대립을 부각시켰다. 같은 날짜 3면의 정치부 좌담에서는 「예정된 결렬, 뜻도 노력도 없었다 / 분당(分黨) 갈림길 명분 찾기 지구전 / 경선 위한 전당대회도 기대난」등의 제목을 곁들여 단일화협상이 물 건너갔음을 강조했다. 2면의 사설에서는 짐짓 단일화를 강조하고 나섰다. 「이제는 야(野) 전체가 일어설 때 / 두 김 씨를 위한 단일화가 아니다」라는 제목의 사설 주요 부분은 다음과 같다.

두 사람이 갑자기 작아보였다. 어제까지는 한 나라의 대통령 감처럼 커 보이더니 오늘은 초라하기 짝이 없어졌다. 언제는 마음을 비웠다더니, 언제는 출마를 하지 않겠다더니 견물(見物)하니까 변심하는 것이 사람의 속성인 모양이다.
민주당의 김영삼 총재와 김대중 고문은 국민에게 약속한 시일 내에 후보를 단일화하는 데 실패했다. 그렇다고 앞으로 단일화를 합의할 전망도 어둡다. 재회의 기약도 없는 상태다. 이런 상황이 연장된다면 현재로서 전망할 수 있는 것은 제각기 출마하는 것뿐이다.
(…) 이런 상황에 제동이 걸리지 않으면 결국 쪽박이 깨어지는 상황도 예견될 수 있다. (…) 그렇다면 이제는 두 김 씨의 차원이 아닌, 두 김 씨의 영달을 위한 것이 아닌, 야당세력의 생존을 위한 마지막 노력마저 외면할 수 없다. 지금으로서는 별다른 대안이 없는 한 어떻게 해서든지 단일화의 끈을 쥐고 죄어야 한다. 우리는 일단 야당이나 재야의 단결된 목소리가 필요할 것으로 본다.

조선일보는 이렇게 두 사람의 단일화를 강조했지만 관련 보도는 그들의 독자 출마와 갈등에 초점을 맞추기에 바빴다. 두 사람의 분열과 갈등을 돋보이게 하는 편집 효과가 두드러졌다. 조선일보는 그 다음 날인 10월 1일자 1면머리에 「김 총재 사실상 출마 선언 / 김 고문도 내주 천명할 듯」이라는 기사를 올렸다. 단일화 실패 하루 만에 “두 사람이 출마를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단정한 것이다. 문제는 ‘사실상’이었다. 실제로 기사에는 김영삼이 출마를 선언했다는 내용은 없다.  조선일보는 같은 맥락의 기사들을 2면과 3면에 집중적으로 편집해 두 사람의 출마를 기정사실화했다.

민주당의 김영삼 총재와 김대중 고문 측은 29일로 대통령후보 단일화 협상이 사실상 끝난 것으로 판단, 독자 출마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김 총재는 30일 오전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단일화 실패에 대한 유감의 뜻을 거듭 표시하는 한편, 자신이 후보로 나설 수밖에 없는 사유 등을 공개적으로 밝힘으로써 사실상의 후보 출마 선언을 했다. 김대중 고문도 29일 오후 자신을 지지하는 기독교인 모임을 통해 독자 출마의 뜻을 강력히 시사한 데 이어 30일 이를 재확인했다.
김 총재 진영은 김 고문과 앞으로 더 만나 단일화를 계속 촉구해나간다는  방침을 밝히고 있으나 김 고문의 양보는 더 이상 가능성이 없다는 자체 판  단 아래 후보 추대를 위한 임시 전당대회 소집 준비를 해나가고 있는 것으  로 알려졌다. 이에 맞서 김 고문 측도 내주 중 독자 출마를 선언하고 나설 것으로 알려졌다(10월 1일자).

조선일보는 10월 2일자 1면에 「두 김 씨 본격 경쟁 채비」라는 제목으로 두 사람의 향후 일정을 소개했다. 또 10월 3일자 1면에는 「양김, 서로 공개 비난」>이라는 주요 기사를 그들의 논전 내용을 상세히 전했다. 조선일보는 김대중과 김영삼이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음을 재삼재사 강조했다. 혹시 돌아올까봐 조바심이라도 난다는 인상을 줄 정도였다.

문제는 두 사람의 후보 단일화 실패가 초래한 대립이 거여기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각 후보들의 지역유세가 시작되자 유세 현장에서 폭력사태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두환 정권의 치밀한 사전 각본에 따라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의혹들이 제기됐다. 그런 와중에 부산에서 본격적인 폭력 사태가 터졌고 조선일보는 그것을 부채질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는 듯했다.

잇단 폭력사태와 그 배후

[부산=강창원 기자] 평민당 김대중 창당위원장의 부산 집회가 열린 1일 오후 7시 45분쯤 김 위원장 일행의 숙소인 부산시 동구 범일동 국제관광 호텔 앞에 술에 취한 청년 등 2백여 명이 몰려와 이중 30여 명이 “김대중 물러가라”등의 구호를 외치며 호텔을 향해 돌, 빈병, 계란을 던지는 등 1시간 30분 동안 소란을 벌였다.

(…) 이들은 이날 오후 7시쯤 서면로터리에 모여, “김영삼을 청와대로” “사기꾼 김대중” 등을 외치며 국제호텔 앞으로 몰려들었다. 호텔 앞에서 손가락으로 ‘03’ 사인을 하며 구호를 외치던 대부분 청년들인 30여 명이 호텔 출입구 회전문을 발로 차 유리를 깬 뒤 호텔 안으로 계란 50여개와 돌 음료수병 등을 던졌으며, 주변에 있던 김 위원장의 대형 포스터 10여장을 불태웠다(11월 3일자 1면 4단 기사).

대권 경쟁이 가열되고 있는 가운데 대통령후보들에 대한 유세 방해 등 폭력행위가 잇따르고 있어 앞으로의 대통령 선거전 양상과 관련한 우려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
특히 일요일인 1일 저녁 평민당 김대중 위원장의 부산 집회 후 김 위원장의 숙소인 부산 국제관광 호텔에서 벌어진 폭력 사태는 민주당의 분당 이후 처음 노출된 것이라는 점에서 복잡 미묘한 성격을 지니고 있어, 그 후유증과 여파가 적지 않을 것으로 관측통들은 보고 있다.
(…) 평민당 관계자들은 김대중 위원장의 1일 부산대회와 관련, 대회 전부터 이 집회를 알리는 포스터가 찢기고 현수막이 불태워졌으며, 가두방송차의 유리창이 깨지는 등 지역감정에 의한 방해 행위가 계속됐고, 2일 김 위원장의 김해 김수로왕릉 참배 때도 김 위원장을 향한 일련의 시위 행위 등이 잇따랐다는 점 등을 지적, 그 배후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에 대해 민주당의 김 총재는, 2일 오전의 확대간부회의에서 부산 사태에 언급, “전적으로 민정당 정부가 고의적으로 만들어낸 조작 행위라는 심증이 간다”고 밝히는 한편 진상조사단을 현지로 보내는 등, 민주당과는 전적으로 무관하다는 입장을 거듭 강조했다(11월 3일자 1면 머리기사).

의 두 기사는 11월 3일자 조선일보 1면에 함께 보도됐다. 그때는 이미 두 사람의 후보 단일화가 거의 불가능한 시점이었다.

이보다 며칠 앞선 10월 27일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여야 합의로 만들어진 신헌법안이 국민투표에서 93.1%의 압도적 찬성으로 확정됐다. 그러자 10월28일 김영삼은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했고, 이어 김대중도 10월 30일 출마 선언과 함께 평화민주당(평민당) 창당을 발표했다. 조선일보는 11월 3일자 2면에 올린 <정치폭력 용납 안 된다 / 민주주의에 대한 폭력이기 때문에>라는 사설을 통해 폭력사태를 경계하면서 ‘지역감정’을 자극했다.

이 중요한 시기에, 정치집회에 대한 어떤 종류의 폭력도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은 우리 국민 누구나가 절실히 느끼는 공통된 생각일 것이다. 부산을 방문한 평화민주당(가칭) 김대중 창당준비위원장이 묵는 호텔에서 1일 저녁 15명의 부상자까지 생기게 한 집단폭력 행위를 보며 우리는 특정인을 중심으로 한 도당성, 실속 없이 사나워지는 지역감정 폭발의 조짐을 보는 것 같아 걱정을 금치 못한다.
(…) 우리가 뽑아야 할 대통령은 내 파당의 대통령도, 어느 지역의 대통령도 아닌 이 나라의 대통령이다. (…) 어떤 개인이든지, 정치적 집단 구성원이든지 그런 기준, 그런 차원에서 1노 3김 중의 그 누구라도 지지할 수 있고, 그런 의사를 공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당한 ‘지지 의사’의 공표라도 때와 곳을 가려야 한다. 상대방의 정치적 견해나 인격을 모욕하고 더욱 지역감정을 자극하며 사나워지게 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 특정인을 ‘사기꾼’ ‘빨갱이’ ‘사쿠라’로 매도하는 것이 모자라, 돌을 던지고 병을 던지고 유리문을 부수는 따위의 폭력행위는 언어도단이다.

조선일보는 11월 4일자 2면 사설(「부산 난동 번지지 않게」)을 통해 지역감정의 문제점을 재차 거론했다. 이 사설은 먼저 부산 폭력 사태를 ‘부산 난동’으로 규정하고, 부산 사태에 관한 김영삼의 사과를 요구하는가 하면 “이제 김(영삼)총재가 광주에 가서 제대로 집회를 가질 수 있느냐 없느냐는 점이 모든 한국 사람의 관심사이며, 또 지역감정을 둘러싼 한국정치의 악재에 어떤 분기점을 이룰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고 강조했다. 부산 사태가 크게 확장될 수 있다는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조선일보의 부산 폭력 사태에 관한 사설은 지역감정의 극대화를 부르는 효과를 빚기에 충분했다. 폭력 사태를 막아야 할 공권력의 임무를 상기시키는 일은 아예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평민당의 김대중 창당준비위원장에 대한 부산 국제호텔 난동 사건이 우리가 그토록 우려했던 지역감정의 폭발 신호인 것 같아 불안한 마음 금할 수 없다. 게다가 난동 사건의 배후와 책임을 둘러싼 평민·민주·민정당 간의 날카로운 공방전이 치사하고 역겨워서 불안한 마음에 불쾌한 감정마저 겹치고 있다.
평민당 측은 처음 ‘민주당 김영삼 총재의 책임’이라고 단정했다가 ‘방관방조한 치안당국의 작태에 분노’로 방향을 바꾸었는가 하면, 민주당 측도 ‘민정당 정부가 고의적으로 만들어낸 조작 행위’로 몰았다. 민정당 측은 이에 대해 ‘책임을 여측에 뒤집어씌우려는 추태’라고 받았다. 여야의 지도자들은 치기어린 추태들일랑 제발 그만두고 자꾸 번져가는 지역감정의 고삐 풀린 준동을 직시하고 이를 방지할 여야의 연합기구라도 구성하는 쪽으로 머리를 돌려야 한다.
(…) 두 김 씨가 비록 단일화는 못했어도, 또 그로 인해 대권에의 유리한 고지를 활용하지 못했어도, 지역감정의 대립을 완화하고 이를 순화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다면, 어쩌면 그것은 대통령이 되는 것보다 가치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또 다시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이번에는 광주였다. 부산에서 폭력 사태가 발생한 지 10여일 만인 11월 14일 김영삼이 광주 유세에서군중으로부터 돌 세례를 받고 피신해야 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조선일보는 12월 15일자 1면 머리에 그 뉴스를 통단에 가까운 기사로 올렸다. 김영삼이 총재가 돌 세례를 피해 단상을 내려오는 사진을 곁들인 그 기사는 「김영삼 총재 광주 유세 좌절」을 주제목으로, 「수만명 김대중 외쳐 연설 못해」 「연단 앞 점거, 피켓 뺏어 불태워」 「일부 군중 투석 방화…대회 진행 방해」> 등을 부제목으로 뽑았다. 그야말로 폭력의 난무로 전쟁터 같은 느낌을 갖도록 하는 편집이다.

조선일보는 같은 날짜 11면 머리기사(「이러다간 큰일 난다 / 광주 유세장 폭력에 시민들 걱정 / 말할 기회조차 안 주다니」)에 군중이 김영삼의 홍보물을 태우는 사진을  싣는 등 광주의 폭력을 극대화했다.

그리고 2면에서는 4당 후보의 유세장 표정을 알리면서 온통 광주의 폭력사태에 관련된 제목들을 뽑았다. 주제목은 「김 총재 나타나자 물러가라 함성」이고, 부제목은 「‘김대중 김영삼 구호 대결…격렬한 몸싸움」 「수행의원들도 쇠붙이·각목 맞아 부상 입어」등이다. 조선일보는 같은 날짜 사설을 통해 “대통령후보가 유세장의 폭력 앞에 굴복, 연설조차 하지 못했다는 데에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느낌”이라고 개탄했다.

[광주=임동명·홍준호 기자] 김영삼 민주당 총재는 14일 광주역 광장에서 ‘군정 종식과 국민 화합을 위한 광주 국민대회’를 개최하려 했으나 “김대중”을 외치며 돌을 던지는 등 군중들이 소란을 벌이는 바람에 대회를 중단했다. 대회는 김 총재가 만세 삼창을 부르는 것으로 약 5분만에 끝났고 김 총재는 마산으로 떠났다.
김 총재는 이날 오후 2시 40분쯤 숙소인 신양파크호텔을 출발, 승용차로 3km쯤 떨어진 광주역에 2시 50분쯤 도착했으나 역광장에 운집해 있던 군중들의 저지를 받았다. 이 때문에 김 총재는 불과 연단에 접근하지 못한 채 옆골목을 통해 5백여m쯤 승용차를 타고 길을 뚫어 단상에 올라갔다. 이 사이 전남대 총학생회 홍보부장 윤준서 군이 단상에 올라가 지역감정 타파 등을 외치며, 군중들에게 자제를 호소했으나 군중들은 “김대중”을 연호하며 야유를 보냈고, 일부 군중들은 김 총재 피킷을 빼앗아 불태우는 한편, 달걀 널빤지 등을 단상으로 던졌다.
(…) 이날 대회장에는 5만여 군중이 모였으나 이중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는 3만여 명이 “세계사 속의 김대중”등 피켓을 앞세우고 김 총재 지지자들을 연단 앞에서 몰아내, 대회 시작 무렵에는 광장중앙을 거의 점거했다 (11월 14일자 1면 머리기사).

지역감정 부추긴 조선일보

11월 15일에는 평민당 총재 김대중의 대구 유세에서 유사한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그날 대구 두류공원 야구장에서 열린 ‘군부독재 종식과 지역감정 해소를 위한 영호남 시민 결의대회’ 역시 돌과 계란, 빈병 등이 날아들며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끝났다. 부산이나 광주와 그 유형이 똑같았다. 더구나 대구의 폭력 사태는 외부세력의 사전 계획에 따라 조직적으로 저질러졌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관련 기사를 11월 17일자 1면에 4단으로 작게 다루었다.

같은 날짜 1면 머리기사(「대통령후보 경호 대책 시급」)는 주먹 만한 컷 제목으로 대통령 후보 유세장에서 잇달아 일어난 폭력 사태와 관련해 대통령 후보들에 대한 경호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특히 ‘북한공산집단 및 그들의 사주를 받은 불순세력의 살상기도’에도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조선일보다운 색깔을 보였다. 조선일보는 3면의 정치부 좌담에서 「폭력화한 지역감정…선거·나라 망친다」라는 제목 아래 다시 지역감정의 심각성을 부각시켰다. 특히 2면 통단사설(「삼국시대의 재판인가 / 지역감정 아닌 망국적 지역 적대의식」)에서는 지역감정의 책임을 결국 김대중과 김영삼에게 돌리고 있다. 민정당 후보 노태우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유세장에서의 잇따른 폭력 사태 발생 속에, 대통령후보들에 대한 경호 강화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다. 후보들은 유세장을 비롯, 어느 곳에서 나 대중과의 접촉을 시도해야만 하는 입장이어서 엄격한 경호 자체를 기피하고 있기 때문에, 외부로부터의 치명적 위해에 대해 사실상 무방비 상태로 노출돼 있다고 관계자들은 지적하고 있다.
(…) 관계자들은, 후보자에 대한 경호가 단순히 돌이나 화염병 투척 차원에 그치는 게 아니라, 북한공산집단 및 그들의 사주를 받은 불순세력의 살상기도에까지 대비해야 한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관계자들은 “무엇보다 이번 대통령선거는 평화적 정권교체와 함께 88올림픽의 원활한 개최로까지 연결되는 결정적 정치행사”임을 지적하고 “북측이 이를 좌시하지 않을 의도라면, 그것은 어느 특정 후보자에 대한 살상 하나 만으로 충분하므로, 그 같은 치명적 위해 기도에 항시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11월 17일자 1면 머리기사).

웃지 말고, 곡해도 말고 들어주기를 바란다. 지금 시정에는 뼈아픈 말이 나돌고 있다. 이미 그 말을 들었거나, 들었노라고 남에게 전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남북을 합쳐야 겨우 22만 평방킬로미터, 남한만은 약 10만 평방킬로미터), 일본의 거의 절반쯤의 좁은 한반도 땅덩어리가, 1천3백여 년 전의 ‘삼국시대’로 되돌아가버렸다는 탄식의 소리가 돌고 있음이 그것이다.
(…) 휴전선 남쪽은 대한민국의 국권이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작금의 사태를 보면 하나의 국권이 다스리는 남쪽이 사실은 둘로 갈라져, 호남 쪽은 ‘백제’가 돼있고, 영남쪽은 ‘신라’가 되고 있으니, 1987년 현재가 1천3백여 년 전으로 되돌아가, 삼국 쟁패의 시대를 재현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얼마나 통탄스러운 비유이고, 말인가.
(…) 지역감정이란 낱말은 어느 때부터 불거졌던가. 자유당 시대는 물론이고, 민정당 정권 때만 해도 그런 낱말이 횡행하지는 않았다. 하나의 나라 안에 두 개의 국민이 있으면 그 나라는 지탱하지 못한다고, 일찍이 영국의 정치가 디즈렐리는 말한 바 있다. 오늘 어찌하여 남북으로 분단된 이 땅이 다시 동과 서로 갈라져 국권은 하나인데 두 개의 국민이 존재하는 꼴이 되고 있는가.
(…) 물론 원인(遠因)이 없지 않겠지만 우선 근인 중의 근인을 따져보는 것이, 지금 이 시각 우리에겐 가장 시급한 과제다. 잘라 말해서 시정의 ‘삼국시대’론의 탄식은 양 김 씨에게로 그 책임이 돌아감이 감출 수 없는 사실이고, 진실이다. 두 사람은 민주화 성취 후에도, 달리 말해서 죽을 때까지라도 결속과 협력을 어기지 않을 것임을 국민 앞에 얼마나 다짐해왔던가(11월 17일자 사설).

이 사설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자유당 시대는 물론이고, 민정당 정권 때만 해도 그런 낱말(지역감정)이 횡행하지 않았다”고 주장한 대목이다. 박정희 정권 때 특히 지역감정을 정략적으로 악용했으니 자유당 시절은 그렇다 치고, 박정희 시기는 아예 거론조차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더구나 민정당 정권 때 지역감정이 횡행하지 않았다는 대목에서는 분노마저 느끼게 한다. 신군부의 광주 학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김대중에게 내란음모 혐의를 뒤집어씌운 배경이 어떤 것인지 벌써 잊은 것일까. 전두환의 민정당 정권이야말로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의 잔당이며, 불법적 권력 장악의 수단으로 지역감정을 이용하고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한 장본인이 아니던가. 조선일보가 이와 같은 망발을 한 것은 지역감정을 호남 사람들의 피해의식으로 등치시켰기 때문이다. 지역감정은 호남과 동의어라는 궤변이었다.

논설위원 김대중의 호남 비틀기

조선일보는 선거운동이 고비를 이루던 12월 5일자부터 11일자까지 <표밭칼럼>이라는 기획물을 연재했다. 논설위원인 홍사중·김대중·류근일이 부산·김해(홍사중), 광주·전주(김대중), 대구(류근일), 인천·수원(홍사중), 대전·청주(김대중), 춘천(류근일) 등 지역도시들을 돌며 현지 민심을 칼럼으로 반영했다. 이른바 ‘지역감정’에 대한 현장 취재였다. 이중 조선일보의 대표적 논객인 김대중은 광주·전주에서 쓴 칼럼을 통해 호남을 지역감정과 동일시하는 주장을 폈다. 12월 6일자 3면에 보도된 그의 칼럼 「피해 극복의 논리」가그것을 잘 보여. 그는 지역감정이 “호남인의 가해와 피해의 논리에서 출발한다”고 말했다. 지역감정은 곧 호남인의 피해의식이며, 지역감정=호남인의 등식이 성립한다는 논리다.

선거에 임하는 광주 사람의 근본적 자세는 한마디로 가해와 피해의 논리에서 출발한다. 영남은 가해, 아니면 수혜자고 호남은 피해자이며, 이 관계를 청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피해자의 한 사람인 김대중 평민당 후보라는 것이다.
(…) 광주와 전주에서 만난 각계 지도자들의 거의 대부분은 마치 말을 맞춘 것으로 느껴질 정도로 피해자의 논리를 내세웠다. “우리는 그분이 전라도 사람이라고 해서 덮어놓고 지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그가 우리의 심정을 알아주고 그렇기에 피해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도대체 가해자 아니면 수혜자들이 자기들이 잡아야만 지역감정을 해소할 수 있다는 말이 어떻게 성립될 수 있습니까? 피가 거꾸로 흐를 소립니다.”
(…) 그것은 한두 사람의 느낌이나 주장이 아니다. 온 도시가, 온 전라도가 그것 외에는 다른 대안을 상상하는 것조차 거부한다. 그래서 반상회에서의 공공연한 모금이 가능하다. 그래서 다른 후보의 벽보를 붙이는 사람이 수난을 당한 끝에 이제는 새벽이나 한밤중에 일을 할 수밖에 없게끔 됐다. 그래서 광주에서는 평민당이 여당이고 나머지는 야당, 그것도 반(半)야당에 불과하다. (…) 그래도 이곳 사람들의 관심이랄까, 걱정의 한 구석이나마 차지하고 있는 것은 민정당 후보지 민주당 후보가 아니다. 노 후보가 얼마나 차지할는지(여당 의원의 말로는 얼마나 빼먹을는지)가 그나마 전라도 지역의 관심거리다.
(…) 광주와 전주의 분위기는 진할대로 진했다. 진한 그만큼 격앙돼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광주에서 한 걸음 벗어나면서 이 모든 것이 선거 한번 제대로 못해본 우리 정치의 병목 현상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이에 반해 12월 5일자에 「선거판은 장날이라예」>라는 칼럼(부산·김해)을 쓴 홍사중은 “부산 민심이 김영삼 후보를 일방적으로 지지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칼럼의 컷제목은 「집사람은 민정당원 나는 야(野 )지지…그런 게 민주주의 아닌기요>로 뽑았다. 12월 8일자 대구표밭 칼럼을 쓴 류근일의 경우, 「세대 전쟁의 현장」이라는 지역감정의 냄새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컷 제목 역시 「전통적 공동체 의식에 도전 / 젊은 층 주축 50년대 야성 되살아나」로 돼 있다. ‘지역감정’이라는 표현 대신 ‘전통적 공동체 의식’을 씀으로써 지역감정과는 거리를 두려고 한 것으로, 두 사람의 칼럼은 김대중과는 대척점의 입장에서 문제에 접근하고 있는 셈이다.

조선일보가 지역감정을 대통령선거에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정교한 예라고 할 수 있다. 홍사중과 류근일의 <표밭칼럼>을 김대중의 글과 비교해보면 조선일보의 기획의도 자체가 ‘지역감정이란 호남 사람들의 문제’라는 결론을 교묘하게 유도하려는 것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비 오면 우짜누 하고 디게 걱정했지요.”
수영만을 지날 때 택시운전사가 불쑥 말한다. 영문을 몰라 잠자코 있으니까, 그는 “전번 김영삼 씨 선거 연설 날 말입니다”고 설명해준다. “저 벌판이 꽉 찼지요.” 그날의 흥분을 되삼키듯 그의 말은 자못 들뜬다.
“부산에 다른 후보를 지지한다면 혼나겠지?” 슬쩍 떠본다. “아니라예.” 그에 의하면 그의 부인은 언제부터 민정당원이 됐는지 노 후보를 지지하고 다닌다고 한다. 자기 부인 하나 단속하지 못해서 쓰느냐고 핀잔주니까 “그런 게 민주주의 아닌기요”하는 대답이 나온다.
부산시내로 들어오는 길가 벽면에 즐비하게 부착된 김대중 후보의 멀쩡한 포스터들이 눈에 번쩍 띈다. 지극히도 당연한 게 신기하게만 느껴진다는 데 이번 선거전의 비정상이 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지금 어느 후보의 인기가 더 높은가를 살피러 경남 일대를 둘러보려는 게 아니다. 과열된 선거전이 불러 일으킨 이상 기류가 앞으로 얼마나 큰 상처를 남길 것인가를 가늠하러 온 것이다. 이것부터가 정상이랄 수 없다, <부산-김해서 홍사중 논설위원>(12월 5일자 3면 <표밭칼럼>).

대구의 지식인들은 즐겨 ‘대구문화권’이란 말을 쓴다. 아닌 게 아니라 대구는 지난 20년 간의 근대화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해체되지 않은 ‘대구공동체’의 단단한 알맹이가 남아 있었다. 그것은 보수성·배타성·우월감·긍지·선비의식, 그리고 장로와 선배의 권위가 지배하는 위계사회였다.
(…) 이러한 ‘벽’에 대해서는 재야 쪽 인사도 수긍하는 눈치였다. 우선 광주 사태 자체의 실상을 잘 모르고, 어느 정도 인식을 할 경우에도 그것이 대구의 아집을 능가하지는 못한다는 설명이었다.
(…) 그러나 이 두꺼운 벽에도 불구하고 김영삼 후보는 노태우 후보의 뒤를 바짝 따라붙고 있었다. (…) 필자가 느끼기에도 대구는 바야흐로 세대 간의 싸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전통적인 대구공동체의 장로세대에 대한 신흥의 20대 30대, 그리고 40대 초의 도전. 이 도전이 이번 선거에서의 대구의 야성으로서 맹렬한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젊은 세대를 주축으로 해서 이제 대구의 50년 야성은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침묵의 문화라고도 말할 수 있는 대구문화권의 밑바닥에는 이런 굉장한 변화의 물결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영남대학 교수의 감개무량한 듯한 설명이었다.<대구에서 류근일 논설위원>(12월 8일자 3면 <표밭칼럼>).

결국 1987년 12월 16일의 13대 대통령선거는 지역감정, 양 김의 갈등과 그에 따른 크고 작은 폭력 사태, 그리고 KAL 여객와 김현희의 ‘북풍’까지 겹치며 노태우에게 유리한 상황이 계속됐다. 노태우는 당초 대통령후보들 사이에서 경합하리라는 예상을 깨고 일방적 승리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노태우는 36.6%(8백28만 표)의 득표율을 보였으며, 김영삼은 28.0%(6백33만 표), 김대중은 27.1%(6백11만 표) 그쳤다. 그러나 김영삼과 김대중의 득표 수를 합치면 50%를 훨씬 넘으니 후보 단일화 실패와 대선 패배의 책임은 양 김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선거 결과와는 별개로 선거운동 과정에서 드러난 관권과 정보기관 등의 개입은 13대 대통령 선거도 예외가 아니었다. 전두환은 청와대에서 수시로 선거대책회의를 열어 관권 동원을 지시하는가 하면 재벌들로부터 걷은 막대한 자금을 노태우에게 전했다.

특히 부산·대구·광주 등의 주요한 유세장에서 발생한 폭력 사태는 보안사령부 등 정보기관이 주도한 것이라는 증언들이 설득력 있게 나왔다. 게다가 선거 전 날 KAL기 폭파범으로 지목된 김현희를 서울로 오도록 한 것도 전두환 정권의 선거용 작품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에서 ‘노태우 당선’에 포괄적 역할을 한 것은 언론이었다. 텔레비전의 편파적 방송은 극치를 이루었다. 특히 호남지역의  유세 방해 시위나 폭력 사태를 수없이 반복해 방영하는가 하면 투표가 임박한 시기에 이데올로기 비판과 함께 캄보디아·베트남·필리핀 등의 사회 혼란을 다룬 프로그램을 집중 방영했다.

TV방송은 노태우의 이미지 조작을 넘어, 국민의식을 왜곡하고, 지역감정  자극을 일삼는가 하면, 유세 현장의 폭력 사태를 반복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여론 조작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다. 그 와중에서 텔레비전보다 더욱 정교한 방법으로 이른바 ‘여론 주도층’을 장악한 매체가 조선일보였다.


‘KAL 여객기 폭파’와 김현희

제13대 대통령 선거일을 2주 앞둔 1987년 11월 29일 대한항공(KAL) 여객기 공중폭발 사건이 일어났다. 시기적으로는 대통령 선거운동이 한창이고 각 당 후보들이 대도시 지역 유세에 열을 올릴 때였다.

KAL 소속 858편 보잉 707기는 비행기는 전날 밤 이라크의 바그다드를 이륙해 아랍에미리트의 수도 아부다비를 지나 방콕으로 향하던 중 버마의 뱅골만 상공에서 공중 폭발했다. 그 비행기 승객은 중동에서 귀국하던 노동자가 대부분이었는데, 한국인 93명과 외국인 2명, 승무원 20명 등 모두 1백15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조선일보는 KAL기 공중폭발 소식을 11월 30일자 호외로 알린 뒤, 12월 1일자 1면 머리에 통단기사로 보도했다. 모두 6개면에 관련 기사와 사설을 실었다. 그 사건이 더욱 확대일로를 걸은 것은 일본 언론들이 공중폭발을  북한의 테러로 보면서부터였다. 조선일보는 그런 사실을 12월 2일자 1면 머리 등 5개 면에 걸쳐 보도하고 범행은 북한의 대남 테러라고 추정했다. 신문 12월 3, 4일자 기사와 사설을 통해 북한이 KAL기 폭파의 배후에 있는 것으로 단정했다. 12월 4일자 사설의 제목은 「KAL기 사건의 배후 / 자살까지 한 집단의 정체는 뻔하다」이다.

사고 발생 5일째다. (…) 이 순간 현재 각 관련국으로부터의 정보를 종합 분석한 관점에서 결론부터 말하면, 이 만행은 북한집단의 직접 조종, 또는 그 대리점이라 해야 할 재일 조총련계에 의한 악랄한 만행임이 거의 결정적인 진상일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 세세한 정보는 보도에 소상하여 이의 인용을 피하거니와, 위조 여권을 지닌 두 하수자가 바레인당국의 수사 착수에 서둘러 음독 자해를 감행한 이유는 무엇이며, 그 배경은 무엇에서 연유한 것일까. 한마디로 “죽어도 영광 살아도 영광, 목숨으로써 수령님의 교시를 높이 받들어” 실천하도록 소위 교양되고 훈련된 자들만이 감행할 수 있는 ‘용맹성’임을 우리는 6·25 말고도 여러 차례 목격해왔고 일본 매스컴 보도들이 그런 성분의 하수자들임을 상당히 신빙성 있는 자료로 뒷받침해주고 있다.
(…) 시기와 관련하여 이번 만행 사건의 동기를 살펴볼 수도 있다. (…) 진영호 격침 사건에서 아직 두 달이 채 못 된 시점에서 이번 KAL기 참사의 만행을 감행했음이 확실할 때, 이는 우리 측 대통령선거의 혼란상에 편승하여 여덟 달 앞으로 박두해온 88올림픽에까지 찬물을 끼얹으려는, 흉측하고도 음흉한 대남 교란전술의 하나임이 틀림없다 하겠고, 우연이라면 기묘한 우연으로, KAL기의 낙하지점이 바로 버마 영내라는 데서, 83년의 랑군 아웅산 사건까지 상기시켜줌으로써 전율을 금치 못하게 하고 있다.

이 사건의 하이라이트는 범인으로 지목된 하치야 마유미(김현희)의 서울 압송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김현희를 대통령 선거 하루 전인 12월 15일 바레인에서 서울로 오게 함으로써 선거에 큰 영향을 미치게 했다. 물론 노태우 에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이른바 ‘북풍’이었다.
조선일보는 대통령선거 당일인 12월 16일자 1면에 「마유미 어제 서울 도착」을 주요 기사로 내보내면서 마유미의 호송되는 마유미의 사진과 얼굴 사진을 크게 실었다. 조선일보는 관련 기사와 사진을 10, 11면에도 올렸다. 김현희는 한국에 신병이 인도된 지 8일 만인 12월 23일 그 사건이 북한 김정일의 지시에 따른 범행이라고 ‘자백’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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