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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항쟁과 ‘6·29 선언’(2)조선일보 대해부 4권 - 25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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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11.27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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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9 선언’의 허와 실

조선일보는 6월 29일자로 「노 대표, 직선제 개헌 선언」이라는 제목의 호외를 발간하고 이렇게 보도했다. “민정당의 노태우 대표위원은 29일 시국 수습에 대한 구상을 발표, 여야 합의 하에 조속히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 새 헌법에 의한 선거로 88년 2월에 평화적인 정부 이양을 할 것을 제의했다. 노 대표는 이날 오전 중집위를 열어, 이 같은 자신의 구상을 밝히면서 김대중씨의 사면복권도 대통령에게 건의할 것임을 천명했다.”

전두환에게 건의 형식으로 제안된 이 선언에서 노태우는 직선제 개헌과 김대중 사면·복권 외에 시국 관련 사범의 석방, 대통령 선거법 개정, 국민기본권 신장, 언론자유 창달, 지방자치제 실시 등 8개항을 제시했다. 조선일보는 6월 30일자 1면에 그 소식을 대서특필 하고 2면에 「위대한 나라로의 전진을 위해 / 대전환의 계기가 된 노 대표의 극적 선언」이라는 통단사설을 내보냈다. 그것은 그야말로 조선일보가 보인 ‘변신의 극치’였다.

7년 가뭄에 소나기가 퍼부은 듯한 시원하고 후련함이 29일 아침 온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예고 없이 발표된 민정당의 노태우 대표위원의 시국 수습을 위한 특별선언은 마치 핵폭탄과 같은 위력이었고 상상을 넘어선 놀라움이었으며, 이 난국을 수습하는 명쾌한 해답을 담은 바르고 옳은 단안이었음이 분명한 것 같다.
(…) 노 대표는 비장한 각오로 역사와 국민 앞에서 주저 없이 자기의 구상을 밝힌다고 전제하고, 지금까지는 야권에서 주장하였고 정부와 여당이 반대하여온 대통령 직선제, 김대중 씨의 사면 복권, 시국사범의 전면 석방 등 굵직한 현안의 정치문제를 일거에 수용·해결하겠다는 획기적 조치를 대통령에 건의 형식으로 내놓았다.
(…) 어떻든 유신 이후 나라의 최고 통치자를 내 손으로 뽑는다는 권리를 빼앗겼던 국민들의 줄기찬 민주화 투쟁이 이제야 승리를 거둔 셈이며, 노 대표의 선언으로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고 국민의 뜻은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것이 비로소 확인된 셈이다. (…) 한국의 정치가 이대로 가서는 안 되겠다는 국민 의사가 지난 6월 한 달 동안 집약되어 나타났었고 이를 수렴한 것이 6·29 노(盧) 구상의 전부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노태우는 6·29 선언을 발표하면서 그것이 청와대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대통령후보는 물론 당 대표직을 포함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밝혔다. 민정당은 긴급 의원총회를 열고 노태우 구상을 당의 공식 입장으로 추인했고, 전두환은 7월 1일 특별담화를 통해 6·29 선언을 대폭 수용하겠다고 발표했다. 조선일보는 6월 30일자부터 「6·29 선언 이후」라는제목으로  5회에 걸쳐 시리즈를 내보냈다. 첫 회에는 노태우의 결단에 대한 칭송 등 헌사로 가득한 내용을 담았다. 그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그가 자신의 구상 발표 직후 동작동 국립묘지를 거쳐 아산 현충사를 찾은 것도 이 같은 마음의 흐름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는 늘 나라의 위기에 몸을 던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가장 존경한다는 말을 되뇌어왔고, 특히 장군의 ‘필사즉생(必死卽生) 필생즉사(必生卽死)’라는 신조를 좌우명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 그의 구상이 대통령과는 몰라도 최소한 여권 전체와 충분한 합의 과정 없이 결정되고 발표되었다는 점에서 그는 이 도전장에 자신의 정치생명뿐 아니라, 앞으로 나타날 수도 있는 여권 안팎의 질시, 모함, 위험 등을 몽땅 각오한 일전불사의 다짐이라 하겠다. 그렇더라도 궁금한 것은 그가 시국 수습책으로 어떻게 이 같은 ‘폭탄선언’을 구상하게 되었을까하는 그 배경이다.
그는 발표문에서 “학계·언론계·경제계·종교계·근로자·청년·학생 등 각계로부터 지혜를 구하고 국민의 뜻을 확인했다”고 했다. 일련의 확인 과정에서 그는 국민 대다수가 직선제를 선망하고 있고 조속한 민주화 실현을 갈망하고 있다는 민심의 방향을 감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6월 30일자 5면 「6·29  선언 이후 1)).

6·29 선언은 과연 조선일보의 보도처럼 노태우의 ‘고뇌에 찬 결단’이었을까. 여기 관해서는 수많은 주장과 증언들이 나왔다. 이것들을 종합해보면 어느 정도 윤곽이 나온다. 6·10 항쟁에 대한 대응책으로 전두환은 비상계엄 선포 계획을 세웠으나 그에 따른 부담과 미국의 반대 등으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만든 전두환의 또 다른 각본이 6·29 선언인 셈이었다. 그 사실은 전두환의 후일담으로 전해지기도 했다. 야권의 분열을 이용하고, 정부 여당의 막강한 조직과 자금 동원력을 활용한다면 직선제에서도 정권 유지가 가능하다는 계산을 전제로 한 조치였다. 김대중과 김영삼이 “인간에 대한 신뢰를 느낀다” “내 소원이 이루어진 것 같다”며 지키지 못할 두 사람의 단결을 다짐했을 때 전두환은 각본에 따라 노태우의 6·29 선언을 수용하는 특별담화를 발표했고, 조선일보는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노태우 띄우기’에 나선 것이었다.


민주화와 언론기본법 폐지

1987년 7월 14일 문공부장관 이웅희는 언론기본법(언기법)을 폐지하겠다고 발표했다. 노태우는 6·29 선언에서 다섯 번째로 언론의 자유를 거론했다. 그 내용은 언론을 시녀로 만들었던 전두환 정권의 언론 공작과는 사뭇 달랐다.

언론자유의 창달을 위해 언기법을 폐지하겠다는 것이 그 골자였다. 또 지방주재기자제 부활, 프레스카드제도 폐지, 신문의 증면을 약속하기도 했다. 노태우는 “정부가 언론을 장악할 수도 없고, 장악하려고 시도해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 그의 선언은 15일 만에 문공장관의 언론기본법 폐지 발표로 이어진 것이다.

조선일보는 7월 15일자 1면 머리에 정부의 언론기본법 폐지와 대체입법 추진 발표 내용을 싣고, 16일자에서는 사설을 통해 그 조치를 환영했다. 전두환 정권과 밀월을 즐겼던 조선일보가 언론자유를 강조한 것이다. 「새 언론질서의 창출에 / 언기법 폐지 후의 상황」이라는 사설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언기법 폐지 후의 언론질서에 관한 논의가 활발히 일고 있다. 언기법 같은 타율적 규제는 마땅히 폐지돼야 하고, 언론은 당연히 언론 자체의 손에 맡겨야 한다는 주장은 너무나 자명한 원칙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언론에 잘못이 있으면 그것은 형법 등에 의거해 대법원 판결에 일임하면 될 일이고, 이렇게까지 가기 이전에 중재기구가 맡아서 조정을 하도록 하면 더 좋을 것이다.
(…) 재벌들의 매스컴 장악 가능성에 대해서는 국민 다수가 저항감을 가질 것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기술적인 방지책이 강구돼야 할 것이다. 언론의 자유시장이 자칫 대자본의 침투로 장악되는 일만은 피해야 한다. 신문의 면수나 가격 등은 본격적인 시장경제 원칙에 따라 언론계의 자율에 맡기는 것이 정도다.
(…) 방송의 경우는 별도의 입법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이 기회에 철저하게 확립해야 할 것이 공영방송의 완벽한 공정성이다. 이를 위해 방송의 고위급 인사와 프로그램 편성 및 보도 자세와 관련해 엄정한 중립성을 발휘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언론의 정보청구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보공개법 같은 것은 대단히 바람직하다.

언론의 자유를 강조한 조선일보는 7월 17일자 2면에 기독교방송(CBS)의 뉴스와 광고방송을 허용하는 것이 언론활성화에 기여할 것이라는 사설을 실었다. CBS가 언기법 폐기 발표와 더불어 예고에 없던 뉴스방송과 함께 서명운동을 전개하던 시점이었다.

조선일보의 그 놀라운 ‘변신’에 혀를 차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일보는 7월16일자 11면에 「기독교방송 정상화 백만 서명운동 / 어제 3만4천명 참가」라는 제목으로 CBS의 서명운동을 보도하는가 하면, 7월 17일자 10면에는 「CBS의 뉴스방송 파문」이라는 상자기사를 실었다. 2면에는 「CBS의 뉴스 보도를 허용하라」>는 사설이 나왔다. 세상이 바뀐 것을 실감하게 한 조선일보의 변모였다.

CBS는 7월 15일 오후 6시 30분부터 예고 없이 6분 30초 동안 뉴스방송을 했다. 같은 날 ‘기독교방송 기능정상화를 위한 서명운동’의 서명자가 50만 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CBS의 기능 정상화는 ‘뉴스와 광고방송이 부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방송은 1954년 12월 ‘전도와 음악’을 방송허가 내용으로 출발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창립과 동시에 뉴스방송을 했고, 63년부터는 광고방송까지 해왔다. 그 뉴스와 광고방송은 80년 11월 25일 언론기본법 발동을 계기로 중단되었다.
(…) ‘6·29 선언’ 이후 많은 문제들이 풀리는 방향으로 가며 정부와 여야 각계에서 그런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구속자 석방이 그렇고, 사면·복권이 그렇다. 언론 활성화 또한 중요한 현안으로서 언기법 폐지는 이미 방향이 확정되었다. (…) CBS의 ‘방송 기능 정상화’ 문제는 ‘언론 활성화’에서 가장 가깝고도 구체적인 한 테스트 케이스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문제가 첨예화한 대립에서보다는 대화의 차원에서 정상화의 길로 빨리 귀착되기를 바란다(7월 17일일자 사설).

언기법 폐지 발표 후인 8월 1일 ‘각 시도 단위 1명씩 주재’를 원칙으로 하는 지방주재 기자의 부활이 이루어지는가 하면 10월부터 기독교방송의 뉴스방송을 재개시키는 ‘CBS 기능 정상화’ 조치도 시행됐다. 그리고 11월 11일 국회는 언론기본법을 폐지했다. 또한 언론기본법 대신 ‘정기간행물 등록 등에 관한 법률’과 ‘방송법’이 제정됐고, 보도지침 파문의 진원지가 됐던 문공부 홍보조정실이 문을 닫고 프레스카드 제도는 폐지됐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언론사 내부에서도 혁신 움직임이 크게 일었다. 노동조합의 결성이 그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민주화 이후 거세게 불어 닥친 노동계의 민주화운동에 힘입은 바 컸다. 언론사의 노조 결성은 1987년 10월 29일 한국일보사를 시작으로 11월 18일 동아일보사, 12월 1일 중앙일보사로 이어졌으며 12월 9일에는 MBC에서최초의 방송노조가 탄생했다. 언론사의 노조 결성은 자연스럽게 편집권 독립을 지향하기 시작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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