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언론역사 조선동아 대해부
신민당, 2·12 총선 정국 뒤흔들다조선일보 대해부 4권 -19장
  • 관리자
  • 승인 2019.10.10 12:57
  • 댓글 0

1985년 1월18일 신한민주당(신민당)이 서울 앰배서더 호텔에서 창당대회를 열었다. 신민당의 모체는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였다. 민추협은 김영삼의 상도동계와 김대중의 동교동계의 연합체로, 공화당 출신 등이 합류해 1984년 5월 18일 정식 출범했다. 그들이 1984년 12월 20일 신민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구성한 뒤 1985년 1월 18일 창당대회를 갖게 된 것이다. 신민당의 창당은 물론 2월 12일로 예정된 제12대 총선을 대비한 것이었다.

조선일보는 1월 19일자 1면 머리기사는 민정당의 전국구 후보자 발표에 관한 것이었다. 신민당 창당은 1면 사이드기사로 밀렸다. 신민당 총재에 이민우, 부총재에 김수한·이기택·김녹영·노승환·조연하가 선출됐다고 보도했으나 야당다운 야당의 출현에는 별로 무게를 두지 않는 듯했다.

조선일보는 신민당 창당 며칠 뒤인 1월 22일 사설(「신당과 구당 / 신한민주당의 창당을 계기로 한 감회」)에서 신민당의 출현을 또 하나의 야당 정도로 폄하하는가 하면 야당 간의 ‘선명성’ 경쟁을 경계하기도 했다.

신한민주당의 창당을 계기로 우리는 그간의 한국의 정당 현상과 정계에 대해 다신 한 번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고 싶다. 솔직히 말해 국민들은 근년 이른바 다당제도라는 것에 대해 심히 어리둥절한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 실제로, 최근 몇 년 동안 국민들은 야당이라 자처하는 국민당이 민정당과 무엇이 얼마나 다른지 잘 알지 못해 했고, 제1야당인 민한당이 과연 얼마나 야당적 의지를 발휘하려 하는지, 분명하게 가늠할 수가 없었다.
모두가 현행 선거법에 의한 동반 당선의 혜택으로 원내에 들어갈 길을 보장받은 야당들, 그리고 “국가 전체를 우리가 주도한다”고 주장하는 여당에 비해, 하다못해 노사문제 하나 제대로 전담해서 반영하지 못하는 야당들이었다는 점에서, 국민은 “그렇다면 왜 굳이 다당제냐” 하는 물음을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차에 이른바 선명성을 자처하는 신한민주당이 창당됨으로써, 기존의 정계에는 새로운 변수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또 하나의 문제는 있다. 아무리 선명성을 창당 이유로 내세운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여당과의 관계에서 또 하나의 야당이 생겨난 것만은 사실이 아니냐 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지금의 판도는 ‘하나의 막강한 여당에, 여러 개의 야당들’이란 모양으로 짜여 있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의 보수야당이 추가되었다. ‘민주’ 구호도 똑같고, 대통령직선제 주장도 똑같고, 그 뿌리도 똑같으며, 골육상쟁에서 오는 불이익의 감수도 마찬가지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네가 아닌 내가 금배지를 달아야겠다”는 개인적 집념의 경쟁일 뿐이다.
선명성을 기준으로 한다지만, 민한당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당(友黨)’에서 ‘야당’으로 진화할 수 있는 것이요, 신한민주당도 일단 제도권 안에 들어 오면 반체제만으로는 책임 있는 정당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 이런 이유에서 기존 야당들이 자전(自轉)정당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면, 신한민주당은 ‘선명성’을 자기만이 독점한다는 독선과 오만에 빠져서는 안될 것이다.

조선일보 사설의 논리는 아주 ‘절묘’하다. 현행 다당제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신민당도 그 중 하나일 뿐이니 선명성을 자기만이 독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신민당의 출범을 기존의 민한당이나 국민당 등 민정당이 패권 유지를 위해 만들고 지원해온 위성정당들과 동일시하는 시각부터가 문제이다.  민정당은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3인은 묶어두고, 나머지 규제 대상 정치인들을 단계적으로 풀어줌으로써 그들이 한 정당으로 뭉치는 것을 막으려 했다. 또 12대 총선 날짜자도 새로 출범한 신민당이 선거운동 준비조차 갖추지 못하도록 2월 12일로 앞당겼다. 더욱 선거일은 대학생들의 방학이자 가장 추운 때여서 투표율을 낮추는 효과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법정 선거운동 기간도 짧아졌다. 모든 것이 신민당에 불리했다.

이미 선거운동이 시작된 1월2 4일 문교부는 대학의 학도호국단을 폐지하고 10년 만에 새 학기부터 학생회를 부활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그것은 정부가 대학생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선거용 조치라는 의혹을 받을 만했다. 하필이면 총선을 앞두고 그런 발표를 하는 배경이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조선일보는 해설과 사설 등으로 그 조치를 환영했다. 1월 25일자 2면 사설(「맺힌 정치 푸는 정치 / 학생 자치기구의 부활을 앞두고」)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 연래의 쟁점이 되어오던 대학의 학도호국단이 새 학기부터 폐지되고 학생 자치기구로서의 총학생회가 부활한다. 명칭과 운영은 각 대학에서 ‘자율적으로’ 하게 된다. (…) 대학의 학도호국단 폐지와 학생 자치기구 설치 문제는 그동안 소란한 학원사태, 학생데모에서 수시로 부각된 뜨거운 쟁점 중의 하나였다.
(…) 단순히 어떤 제도의 당(当)·부당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타락된 직선제는 엄정한 임명제만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잡아가야 할 학생자치단체의 방향은 보다 더 자율에 합당한 직선제에 있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런 절차를 익혀 결코 ‘타락선거’가 안 되도록 거듭 쌓아가는 훈련은 민주시민을 교육하는 데도 꼭 필요한 일이다.

조선일보는 1월 24일자 1면부터 2·12 총선의 부정적 요소를 강조하는 기획기사(「2·12 현장의 눈」)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제목들은 선거의 어두운 면을 두드러지게 보여준다. 연재기사의 제목이 「범람하는 당원용」 「<단골망령 흑색선전」 「단합대회는 만원이다」 「치사한 싸움 인신공격」 「선거가 군대 항전인가」 「정치는 피보다 진한가」 등 연재기사의 제목들만 보아도 선거 혐오증을 자극할 만한 소재들을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내용은 이미 제도적으로 대세사 여당에 기울어진 선거판에서 야당을 겨냥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조선일보가  1월 25일자 1면에 올린 「단골 망령 흑색선전」은 일종의 ‘흑색선전 물 타기’라는 인상을 준다.

(…) 이런 전화도 있었다. “여당이 추진하는 공명선거 1천만명 서명운동이 가가호호로 이루어져 여당 지지 서명의 성격으로 변모되고 있다” “여당이 입당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들이다. 전화뿐 아니라 야당은 “통·반장들이 곳곳에서 여당후보 선전물을 돌리면서 노골적으로 선거운동에 나서고 있다”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1천만명 서명운동이 곳에 따라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몰라도 여당에 의해 추진이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통·반장이 법적으로 여당 당적을 가질 수 있을 뿐 아니라 현실로도 그런 통·반장이 상당수 있었음을 감안해 볼 때 야당의 지적이나 전화 내용의 개연성을 전혀 부인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럴 때마다 여당 측은 “그 왜 흑색선전이라는 것 있지 않습니까”라며 즉각 흑색선전으로 대응했다. 선거철의 개막과 함께 이 같은 유의 전화는 하루에도 몇 통씩 신문사로 걸려온다. 호소와 항의, 제보와 요청이 뒤섞이는 경우도 있지만, 침소봉대식의 과장과 편의적인 왜곡, 심지어는 자의에 의한 조작 인상마저 주는 예도 있다.

민정당이 총선을 앞두고 벌인 공명선거를 위한 ‘1천만명 서명운동’은 처음부터 일종의 선거운동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신민당이 관권선거라고 비난하며 중지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한 이유도 거기기에 있었다. 신민당은  성명에서 “민정당이 전개하고 있는 공명선거 1천만명 서명운동은 전 유권자를 민정당원화 하고 서명자들에게 중압감을 주는 부정선거운동”이라고 주장했다. 또 그 성명은 “TV의 공명선거 캠페인 프로는 선거와 정치에 대한 혐오감을 유발시키며 정치를 희극화 하려는 선거 장난”이라고 지적하고 시정도 요구했다.

2·12 총선 합동연설회가 본격화하면서 유권자들의 관심과 참여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특히 2월 8일 사실상 미국에 망명 중이던 김대중이 귀국하면서 열기는 더욱 뜨거워졌다. 김대중 귀국에 관한 1면에 2단으로 쓰라는 보도지침이 모든 신문사에 내려졌다. 조선일보 역시 2월 9일자 1면에 2단으로 그 기사를 내보냈다.

조선일보는 그 날짜 1면 머리에 선거 막판의 당락 예측 기사를 보도했다. 그 기사에 따르면 전국 92개 지구 중 민정당이 81명, 민한당이 27명, 신민당이 22명, 국민당은 11명이 각각 당선권에 들어간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2월 12일 총선 투표 결과는 딴판이었다. 신민당이 지역구에서 50석을 차지함으로써 제1야당으로 부상한 것이다. 상상도 하지 못한 결과였다. 그것은 민정당의 패권정당 구도가 완전히 붕괴되고 민정·신민 양당 구도가 됐음을 의미했다. 조선일보는 2월 14일자 2면 사설(「평화의 정국을 당부한다)에서 ‘파국’보다는 “안정된 정국을 원한다”고 밝혔다.

이제는 정국이라는 배의 순항을 모두가 함께 관리해야 할 책임의 시각이 다. 지난 4년간의 민정·민한·국민의 공동관리 양식은 일단 시효가 끝났다. 그 대신 민정·신민을 축으로 하고 거기에 민한·국민이 종속변수로 참여하는 새 판도가 짜여졌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아직 민정·신민 사이에 게임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공동인식이 없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이에 대해, 정국의 파국 아닌 안정을 바라는 우리의 입장에선 적잖은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민정이나 신민이 서로 정치적으로 대립된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은 다 아는 일이다. 걱정스러운 점은, 입장이 대립되기는 하되 그 대립을 어떻게 하면 모두가 무(無)로 돌아갈 뿐인 파국을 피하는 방식으로 잘 관리해 나가느냐 하는 지상명제이다.
우리는 두 번 다시 파국을 맞고 싶지 않다. 어떤 논자들은 파국을 마치 변혁의 한 불가피한 단계인양 생각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 우리는 진심으로 안정된 정국을 원한다. 이 점은 이번에 야권을 등장시킨 유권자를 포함한 전 국민의 한결같은 염원일 것이다. 그 유권자들이 보인 변화에의 지향이라는 것도, 변화는 바라되, 안정을 깨는 격변이 아닌, 평화로운 진화일 것임을 우리는 확신한다.

조선일보가 안정을 강조하는 이유는 전두환 정권에 대한 지지와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12대 2·12 총선에서 나타난 민의는 변혁을 의미했다. 일종의 선거혁명이라고 할 만 했다. 우선 높은 투표율이 그것을 대변한다. 투표율은 84.2%로 5·16 쿠데타 이후 최고를 기록했으며 11대 총선 투표율 78.2%를 훨씬 상회했다. 지역구는 민정당 87석, 신민당 50석, 민한당 26석, 국민당 15석이었으며 전국구는 민정당 61석, 신민당 17석, 민한당 9석, 국민당 5석이었다. 득표율은 민정당 35.25%, 신민당 29.26%, 민한당 19.68%, 국민당 9.16%였다. 특히 신민당은 서울·부산·광주·대전에서 후보 전원이 당선했고 서울에서 43.2%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1985년 3월 6일 정치활동 피규제자에 대한 전면적인 해금조치가 이루어졌다. 12대 총선 결과 정치활동 규제가 아무런 효과를 발휘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3월 15일 회담을 갖고 신민당을 중심으로 야권통합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자 민한당 간부들이 대거 탈당해 신민당에 입당했다. 이로써 신민당은 재적의원 3분의 1이 넘는 1백3석을 확보하고 단독으로 국회를 소집할 수 있는 거대 야당이 됐다. 그런 혁신적 변화는 대통령직선제 등 헌법 개정 운동과 함께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가는 발판이 됐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저작권자 © 자유언론실천재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