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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조선일보는 ‘자유언론 배신’을 사죄하라[이부영 이사장 연속기고(1)] 1975년 자유언론실천운동을 돌아본다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 관리자
  • 승인 2019.05.14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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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2019년 3월17일은 동아자유언론실천운동으로 대량해직이 일어난지 44주년이 되는 날이었고 2019년 10월24일은 자유언론실천선언이 발표된 지 45주년이 되는 날이다. 최종적으로 113명으로 확정되었던 동아 해직언론인들 가운데 유명을 달리한 사람은 27명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 징역 구류 연행수배 조사를 포함해 독재정권의 탄압을 당한 인사들은 연인원 200여 명이 넘는다.

이보다 앞서 1975년 3월6일에는 조선일보에서도 32명의 기자들이 자유언론을 주장했다고 무단해직 당했다. 동아-조선일보는 그후 44년이 지났지만 사과도 하지 않았고 복직도 시키지 않았다. 소규모 기업도 아닌 한국을 대표하는 거대 언론사들이 독재정권과 야합하여 벌인 언론인 대량해직에 침묵으로 일관해왔다.

2015년에는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가 국가상대로 제기한 행정소송에서 패소했다. 동아일보 사주가 동아 언론인들을 대량해직한 것이 박정희 유신독재 중앙정보부의 압력 때문이 아니라 경영악화 때문이었다는 것이 박근혜 정권의 양승태 대법원이 내린 판단이었다. 1974~75년 유신체제 아래서 동아일보-방송 언론인들이 어떻게 공권력에게 탄압당했으며 폭력배에게 매맞으면서 쫒겨났는지 한국 시민들 뿐 아니라 세계 시민들이 모두 알고 있었다. 40년 망각의 세월을 앞세워 박근혜 정권의 대법원은 경영악화 때문이었다고 판결했다. 2006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조사위원회의 자세한 조사보고가 있었는데도 그랬다.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가 지난 3월18일 결성 44주년을 맞아 서울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에서 김재호 동아일보 사장의 사과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정민경 기자.

내년 2020년은 동아-조선일보가 창간 100주년을 맞는 해다. 이른바 민족지를 자처하는 이 신문들이 1975년의 동아-조선 언론인 대량해직 사태를 자신들의 100년을 되돌아보는 역사에서 어떻게 정리할지 지켜볼 일이다. 그들은 사죄해야 한다. 그 죄업에 대해 반성하지 않으면서 무슨 명분으로 계속 신문을 발행하겠는가. 동아-조선의 많은 해직언론인 당사자들이 살아있다.


2. 자유언론실천선언 이전의 정치상황과 동아노조 결성

4월 민주혁명으로 등장한 민주당 정권을 뒤엎고 박정희의 군사쿠데타정권이 등장했다. 이승만 독재정권을 퇴진시키는데 앞장섰던 한국 언론과는 우호적 관계를 가질 수 없었다. 국민 다수의 반대를 억누르면서 체결된 1965년 한일협정도 국민적 한(恨)을 쌓는 처사였으며 1969년의 날치기 삼선개헌도 국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없었다. 삼선개헌의 결과로 실시된 1971년 대통령 선거는 온갖 부정을 저질렀어도 공화당의 박정희는 야당의 김대중 후보에게 근소한 차이로 이겼다. 부정선거와 부정부패에 대한 비판과 저항에 부닥친 박정희는 1972년 유신헌법 체제를 선포했다.

유신체제는 대통령 직선제를 폐지하고 1만명 내외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간선제로 대통령을 뽑도록 했다. 몇 번 대통령에 나온다는 제한도 없었다. 박정희 영구집권을 위한 개인 헌법을 만든 것이었다. 4월 민주혁명으로 이승만 독재정권을 몰아낸 경험을 가진 국민들이 유신헌법을 묵과할 리 없었다. 월간 사상계 발행인 출신 장준하 선생이 앞장서서 유신헌법 개정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1974년 초의 일이었다. 박정희는 긴급조치 1, 4호로 탄압했다. 유신헌법에 대해 반대 비판 개정청원을 할 수 없도록 했고 이에 동조하여 함께 서명한 사람도 처벌받도록 했다. 그러나 개헌 청원 서명운동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박정희의 용공 조작극이 발동했다. 1974년 4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과 함께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원회 사건이 발표되었다. 수백 명의 학생 교수 종교인 문화예술인 심지어 일본인까지 중앙정보부에 검거되었다. 인혁당이라는 공산주의자들에게 조종당한 전국의 대학생들이 정권을 전복하기 위한 좌익봉기를 획책했다는 것이었다. 비상계엄이 선포되었고 군법회의가 설치되었다. 언론에는 당국이 발표하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보도할 수 없었다. 군사법정에서는 사형 무기 20년 15년 징역 등 상상도 할 수 없는 가혹한 형벌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이 같은 사태을 맞아 언론에 대한 압박 강도는 최고조에 달했다.

동아투위 위원들이 지난해 3월19일 오후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 사옥 앞에서 동아일보의 사과를 촉구하는 1인 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이보다 앞서 이미 1971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중앙정보부를 앞세운 박정권의 언론에 대한 억압은 숨쉬기 어려울 지경으로 조여왔다. 서울대생들이 동아일보 앞에 몰려와서 언론인들의 무기력과 권력에의 타협을 규탄했다. 여기서 동아일보 기자들이 시작한 제1차 언론자유선언운동이 전국언론으로 번져갔으며 1972년 유신선포 뒤에 제2차 운동이, 1973년에 제3차 운동이 벌어졌지만 감시와 탄압이 강화되면서 무너지곤 했다. 유신이 선포되면서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정보기관들은 신문사 편집국과 방송사 보도국에 기관원들을 상주시키면서 빼라 넣어라 키워라 줄여라 등등 노골적으로 언론 제작을 전면 통제했다.

동아일보 기자들은 지난 세 차례의 언론자유 선언운동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언론자유선언 만으로는 유신정권의 언론통제에 맞서 지속적인 언론자유를 확보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다. 기자들은 자신들이 가혹한 운명 앞에 놓여있다는 현실을 직시했다. 이미 많은 언론인들이 독재정권이 오래 지속될 것으로 보고 정부 대변인이나 관직으로 옮겨가고 있었고 새로 등장하고 있는 외자도입 재벌기업들로 옮겨갔다. 또는 언론에 미래가 없다고 보고 미국과 유럽으로 유학 떠나는 동료들도 적지 않았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언론계에 남아서 언론자유를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유신독재와 맞서는 것이 불가피해 보였다.

당시의 언론 환경은 민주주의, 인권, 노동자의 권익, 한반도 평화와 통일 같은 문제들에 기자들의 헌신적인 취재, 창의적 논평 등을 시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기자들의 개인적인 능력을 발휘할 것이 요구되지 않았고 오직 독재정권의 요구에 부응하는 언론인들이 환영받는 시대였다. 기자 개인이 저항할 수 없는 시대이기도 했다. 조직적 간섭과 탄압에 대해서 집단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당시 언론계의 임금처우는 기업, 은행과 공무원 등 다른 직종에 비해 낮았다. 그래서 동아일보 언론인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하기로 결정했다.

’자유언론실천선언’ 족자. 사진=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1974년 3월6일 동아일보 기자 33명은 전국출판노동조합 동아일보사지부발기위원회를 발족하고 조학래 지부장을 비롯한 11명을 임원으로 선출했다.

근대적인 노사관계에 대해 무지하여 사장과 사원을 지주와 소작인 정도로 인식하고 있던 동아일보 사주는 신문사 안에 노조가 결성되었다는 소식에 신경질적인 대응을 보였다. 노조 임원을 비롯한 13명을 즉각 해임했다. 1차 대책위, 2차 대책위에 줄서서 자원하는 기자들을 계속 해임하거나 무기정직-감봉조치 했다. 노동조합 가입자는 사흘 만에 200명에 육박했다. 노조는 해고효력정지가처분신청을 법원에 냈고 부당노동행위구제신청도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냈다. 동아일보 사주는 자신들의 위법행위가 패배할 것이 분명해지자 무더기 해고 징계 한 달여만인 4월13일자로 “향후 사면한다”고 발표하면서 노조활동을 일체 허용하지 않겠다고 했다. 사주가 뭐라고 하든 노동조합은 징계조치가 풀린 이후 노조활동을 이어갔다. 이렇게 쟁취한 동아노조가 이후 자유언론운동의 기초가 되었다. 필자 자신은 동아노조의 섭회부장 겸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3. 1974년 자유언론실천선언과 광고탄압

동아노조가 자리를 잡아가는 동안 언론사 외부의 환경은 험악해지고 있었다.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 군사법정에서는 사형 무기 20년 15년 징역형이 무더기로 쏟아지고 있었다. 일부 피고인들은 고문에 의한 강제자백에 따라 조작된 혐의라고 호소했고 방청한 가족들은 이 사실을 천주교 명동성당이나 기독교회관 기도회에서 폭로했다. 취재기자들은 기사화하려 했지만 기관원들 이 편집간부들에게 압력을 가해 번번이 좌절당했다. 대학가에서는 계속 학생들의 데모가 벌어졌지만 역시 보도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현장에서는 구속자 가족들이 취재기자들의 멱살을 잡고 욕설을 퍼붓기 일쑤였다. 언론을 지키기 위해 노조까지 만든 동아일보 기자들은 결단의 순간이 왔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노조를 바로 언론자유 투쟁의 전면에 내세울 수는 없었다. 한국기자협회 동아일보 분회를 전면에 세웠다. 분회장에 문화부의 선임 장윤환 기자(연극영화 담당)가 나섰다. 이에 앞서 문화부의 김병익 기자(문학담당)가 이미 한국기자협회 회장에 취임해 있었다. 기협 분회를 정비한 동아 기자들은 10월24일 유엔창립기념일이 휴일이어서 대다수 기자들이 출입처에 나가지 않고 편집국에 모이는 기회에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을 선포하기로 했다. 기협분회는 동아 경영진에게 이 선언을 보도하도록 제작거부에 들어갔다. 25일자 동아일보에 3단으로 보도되었다. 전국의 신문 방송들은 이 자유언론선언을 기조로 해서 언론운동을 벌였다. 이 선언은 이전의 언론자유선언과는 전혀 달랐다. 자유언론을 ‘실천하기로’ 국민에게 약속했다. “1)언론에 대한 외부의 간섭을 배제한다 2)기관원의 출입을 거부한다 3)언론인의 불법연행을 거부하고 귀사할 때까지 퇴근하지 않는다”고 결의했다.

기자들은 신문의 편집국, 방송의 보도국의 각 부서에 자유언론실천 특별위원회를 두고 무슨 기사들이 빠지는지, 줄어드는지, 커지는지, 왜곡되는지를 감시하고 매일 저녁 회의를 열어 시정책을 논의했다. 그동안 기관원들의 간섭과 조정에 익숙해졌던 편집간부들은 하극상이라고 반발하면서 정보기관의 지침을 관철하려고 저항했다. 기협 집행부는 부드러운 태도로 설득했다.

동아일보 지면과 방송의 뉴스가 점차 달라지기 시작했다. 대학가의 데모 소식, 명동성당과 기독교회관 등 종교단체의 인권기도회 소식, 군사법정의 정치범 재판이 보도되면서 동아일보에 대한 국민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러자 1974년 12월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동아일보와 방송에 대한 대기업, 은행, 제약회사, 부동산 등의 광고가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12월25일 크리스마스 무렵에는 광고가 완전히 사라지고 백지(白紙)광고가 나갔다. 26일부터는 익명의 조그만 격려 광고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동아! 너마저 무릎 꿇는다면 진짜로 이민 갈거야.-이대 S생 ▲새로 태어날 아기의 자유를 위하여-아빠 조영준 엄마 김명렬 ▲직필은 사람이 죽이고 곡필은 하늘이 죽인다.-부산 어느 기자 ▲작은 광고들이 모두 민주 탄환임을 알라.-ㅇㅇ출판사 편집부 ▲나는 조용히 미치고 있다.-어느 경북대 교수 ▲행복하여라! 정의를 위해 싸우다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여.-모여고 2학년 M반 일동 ▲당당하게 버티는 거야. 도깨비는 날이 새면 허깨비가 되나니.-동화작가 ▲국민 여러분 우리 손자에게 아빠를 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박경리(2월17일 사위 김지하씨 석방 후) ▲잔디는 밟을수록 잘 자란다.-불광 시민

격려광고에는 중고대학생 주부 지식인 작가 노동자 종교인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했다. 해외 언론의 반향도 뜨거웠다. 미국 일본 유럽 등 세계의 언론들이 서울 주재기자들과 특파원들을 보내 취재경쟁을 벌였다. 동아노조 대변인을 맡고 있었던 필자에게 기자협회 분회는 다시 자유언론운동의 대변인도 겸직하도록 했다. 당시 워싱턴포스트의 돈 오버도퍼 도쿄지국장은 동아백지광고 사태를 보도하면서 “박정희 정권에게 비판적인 동아일보는 비밀경찰이라는 유령과 싸우느라고 목이 졸리고 있다”고 표현했다. 필자는 이들 외신기자들을 만나면서 점차 유신정권의 표적이 되어갔다.

동아일보 사주 측은 1975년 2월에 들어서면서 자유언론을 실천하려 애쓰는 기자들을 적대하기 시작했다. 기구축소를 내세워 해임했다. 기자들은 항의농성을 시작했고 동아 사주 측은 폭력배들을 동원하여 기자 피디 아나운서 엔지니어 등 신문 방송 언론인들을 회사 밖으로 축출했다. 처음에는 160여명을 몰아냈다.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필자 이부영 약력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원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
장준하선생기념사업회 전 회장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전 상임의장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전 사무처장
14, 15, 16대 국회의원

* 이 글은  2019년 05월 13일(월)자 미디어오늘에 게재된 글입니다. 원문 보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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