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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 파동과 광주대단지 사건조선일보 대해부 3권 -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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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3.06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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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7월 28일 오후 서울형사지방법원 판사 41명 가운데 37명이 집단사표를 제출했다. 한국 사법사상 처음 벌어진 일이었다. 사건의 경위는 다음과 같다.


사법사상 최초의 판사 37명 집단사표

서울지검은 서울형사지법 부장판사 이범렬, 판사 최공웅, 참여서기 이남영이 7월 초 제주도에 출장을 갔던 때 사건 담당 변호사 하경철한테서 뇌물과 향응을 받은 혐의로 그들을 입건하고 7월 28일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이 부장판사 등에 대한 구속영장 신청 사건으로 술렁이던 서울형사지법 판사들이 서울형사지법 726호 8부 판사실에 모인 것은 영장이 기각된 지 30분이 지난 28일 오후 3시 30분. 유태흥 수석부장판사, 양헌·백종무 부장 판사, 이번 사건의 이 부장판사, 최 판사를 제외한 34명의 판사들이 모인 이날 회의는 사건에 대한 회의를 나누고 대책을 논의했다. 몇몇 소장 판사는 “이 이상 사법부에 남아 공정한 재판을 할 수 없으니 모두 물러나자”고 얘기를 끄집어냈다. 1시간 30분이 지나 굳게 닫혔던 726호실 문이 열린 5시, 회의는 이미 총사퇴라는 사법사상 초유의 결의를 한 뒤였다(조선일보 7월 29일자 7면).

이 기사의 제목은 「출장대접 9만여 원…판사에 영장 / 우울한 사법, 누른 빛 봉투 속에 사표를 담던 날」이다. 같은 날자 조선일보 1면 머리에는 「서울형사지법 판사 37명 집단사표 / 검찰, 동일 영장 다시 신청 / 기각되자 내용 보완 / 민사지법도 동조 결의 / 두 법관 수뢰 혐의 수사에 반발」이라는 기사가 올라 있다.

당시 법조계의 ‘관행’처럼 되어 있던 변호사의 법관 ‘접대’, 그것도 현금을 받은 것이 아니라 3명이 10만원 미만(항공비, 식사와 술, 수영복 등)의 대접을 받은 것을 빌미로 삼아 검찰이 구속영장까지 신청한 것은 지나친 강공책임이 분명했다. ‘도주와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는 판사들을 구속하려고 한 검찰의 처사를 보고 서울형사지법 판사들은 박정희 정권의 압력 때문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1971년 여름 박 정권은 사법부가 내린 몇 가지 판결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냈다.


조선일보 사설, ‘대법원장 책임’을 강조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 36명은 7월 30일 오후 2시간 남짓 회의를 한 끝에 “이런 사태 하에서는 더 이상 공정한 재판을 할 수 없으며 사태가 하나도 시정되지 않았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전원 사표를 냈다. 그들은 “‘우리들의 사표는 이범렬 부장판사에 대한 동정사표가 아니며 지금까지 누적된 검찰의 사법권 침해를 배제, 사법권의 독립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검찰 관계자와 책임자에 대한 인책을 요구했다. 사표를 낸 판사들은 서울민사지법 판사 60명 중 연락이 안 되거나 휴가 간 사람을 제외한 전원이다”(조선일보 7월 31일자 1면).

조선일보는 7월 31일자 2면에 「대법원장의 무거운 책임 / 사법부의 상징으로서의 거동을 주시한다」라는 사설을 내보냈다.

(…) 휴가 중 이 사태를 맞이한 민 대법원장은 휴가를 취소하고 급거 상경하여, 우선 제1성으로 법관들의 집단사표 반려를 언명하면서 “모든 것은 법조인의 양식과 대화를 통해서 해결해야 한다”는 소신을 밝혔다. ‘사법권의 침해’로 단정하여 집단사표를 제출했던 일선 법관들이, 사태 해결을 위한 민 대법원장의 노력에 모든 것을 맡기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든, 혹은 그러지 아니하고 독자적인 행동을 취하게 되든, 결국 사법부의 장으로서 민 대법원장은 이 파동을 법관들이 숙연히 납득하고 또한 국민들이 수긍할 만한 방법으로 수습해야 하는 책임이 있게 마련이다. 이 점 우리는 민 대법원장을 격려해 마지않는 바이며 이미 벌어진 사태의 파문 이상으로, 이 사태해결을 위한 민 대법원장의 일거수일투족에 우리 사법부의 권위가 걸려 있음을 특히 지적해두고 싶다. 그와 함께 모든 법관들도 되도록이면 냉철한 이성으로 대법원장의 위신을 뒷받침해주는 동시에 그로 하여금 자신 있게 사법부의 입장을 온 천하에 천명할 수 있게 하는 기회를 만들어주어야 할 것으로 우리는 생각한다. (…)
(…) 검찰의 지나친 태도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정치문제화 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적어도 법관 스스로는 ‘이 정도의 향응’이라 하여 자기합리화의 방패로 삼아서는 안 될 일이다. 따라서 동기가 어떠했건 이미 표면화된 대상은 자체정화의 대상으로 삼는 데 인색해서는 안된다. 그럼으로써 검찰의 정화를 채찍질할 수 있고, 검찰의 정화로부터 정계 재계 기타 모든 공무원과 일반 사회의 썩은 요소를 과감히 숙청하는 기초를 다듬을 수 있다고 우리는 확신한다. 이와 같은 법관들의 신념을 토대로 하여 대법원장은 그야말로 의연한 자세로 행정부수반과 담판하여 검찰로 하여금 반성케 만들며 사법부에 도전하는 버릇을 고쳐주어야 한다. ‘상호간의 조그만 오해’라 하여 민 대법원장이 ‘행정부와의 대화’를 모색하는 것은 좋다. 다만 그러한 선의의 노력이 삼권분립 하의 ‘사법부의 상징’인 대법원장이 정부 측과 정치적 수습을 시도하는 듯한 인상을 조금이라도 남긴다면 그것은 사법부의 권위를 위해서 더욱 불행한 일이다. 검찰은 행정부에 속하므로, 행정부를 견제하는 헌법상의 기구인 국회가 있고, 그 국회는 이미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고 있다. 민 대법원장은 초연한 위치에서 먼저 사법부의 동요를 가라앉히며 스스로 사법부의 독립과 사법부의 권위를 위한 결연한 거동과 조처를 취해주기 바란다.

한마디로 이 사설은 사법 파동의 원인과 본질을 완전히 벗어난 ‘뜬 구름 잡는’ 소리로 들린다. 왜 그럴까?

2014년 현재도 그렇듯이 1971년 7월 당시의 검찰은 완전히 정권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본연의 직무에 충실한 양심적인 소수의 검찰관들이 있었겠지만, 그들은 자리를 걸고 싸우지 않는 한 ‘검사 동일체의 원칙’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검사들의 직속상관인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을 대통령이 임명하는 체제에서 일선 검사들이 ‘상명하복’을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사법 파동을 일으킨 장본인은 대통령 박정희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대법원장 민복기는 공화당이 절대 다수 의석을 차지한 국회의 동의를 받아 박정희가 임명한 사람이었다. 그런 인물이 어떻게 “이 파동을 법관들이 숙연히 납득하고 국민들이 수긍할 만한 방법으로 수습해야 하는 책임”을 다할 수 있었겠는가? 조선일보 사설은 명목상 사법부의 수장일 뿐 실질적으로는 대통령의 의지를 거역할 수 없는 민복기에게 “그야말로 의연한 자세로 행정부 수반과 담판하여 검찰로 하여금 반성케 만들며 사법부에 도전하는 버릇을 고쳐주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대법원장의 무거운 책임을 거듭 환기’

사법 파동은 서울민사지법 판사들이 집단사표를 낸 뒤 더욱 거센 풍랑에 휩싸였다. 서울형사지법 수석부장판사 유태흥은 그렇게 된 이유를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사법부도 썩었지요. 그러나 그 썩은 정도를 사법부가 1이라면 행정부는 1백쯤 될 것입니다.” (…)
“온 몸이 흙투성이인 자가 한 점의 흙이 묻은 사람보고 왜 흙이 묻었느냐며 때린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유 부장판사는 비유했다. (…)
사법부가 외부의 압력을 받아온 것은 건국 이후 최근 2,3년이 가장 우심(尤甚)했다고 털어 놓았다.
“사상범 사건 판결이 자기네들 비위에 안 맞으면 대뜸 ‘용공판사’로 몰아세우고 무죄라도 나면 예금통장을 뒤지고 사생활을 까뒤집는 등 공포분위기를 조성, 판사를 협박하는 일도 간혹 있습니다.”
“그렇다고 판사가 잘못한 것을 문제 삼지 말자는 것은 아닙니다. 판사라고 면책특권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소위 관례라는 것을 들추어 큰 부정이나 한 것처럼 몰이치는 것은 온당치 못하지요. 이 관례를 들춘다면 안 걸리는 판사가 없습니다.”
출장 갈 때 차표를 변호사 측에서 먼저 사는 이러한 관례는 해방 후부터 생긴 악습이라고 시인하고 이러한 관례가 검찰 측에는 전혀 없다고 장담할 검사가 있겠느냐고 반문하면서 이번 기회에 이 좋지 못한 ‘관례’를 없애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조선일보 7월 31일자 7면 인터뷰 기사).

7월 31일 대한변호사협회는 검찰의 사법권 가여와 피의사실 공표를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대법원은 8월 3일 전체 판사회의를 열고 대법원장과 판사 전원이 책임을 지고 사법권 독립을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박 대통령 면담이 대통령의 지방 순시로 불가능해지자 긴급히 소집된 이날 회의는 ‘사법권 독립은 법조인 스스로가 수호 의지를 확립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의견을 모으고 법관 본연의 직무를 수행해달라는 대법원장 이름으로 된 지시 공문을 각급 법원장에게 보냈다.”(조선일보 8월 3일자 1면).

조선일보는 이 기사와 같은 날짜 2면에 대법원장이 사법 파동을 해결할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설(「사법 파동 해결의 핵심 / 대법원장의 무거운 책임을 거듭 환기시킨다」)을 올렸다.

(…) 사태의 핵심은 이미 두 판사에 대한 구속영장 문제를 멀리 떠나 지난 30일 서울민사지법 판사들이 집단사표를 제출하면서 폭로한 ‘사법권 침해 7개항’에 겨누어졌다. 계속 집단사표를 내고 있는 각 지방 판사들의 성명 요지를 보아도 의문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민 대법원장이 행정수반인 박 대통령과 면담하여 해결하든, 국회에서 해결하든 또는 3일의 회의 결론대로 사법부 독자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지든, 요는 행정부에 의한 ‘사법권 침해 소지’를 여하히 봉쇄하여 사법권의 독립을 수호하느냐에 걸려 있다. 이 점 거듭 말하거니와 민 대법원장은 그야말로 사법사(司法史)를 가름할 아주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다. 역사에 부끄럽지 않을 소신과 행동으로 그 소임을 다해 줄 것을 우리는 계속 편달해 마지않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법관들과 변협, 그리고 야당에 권고하고 싶은 것이 있다. 첫째로 법관들은 ‘사법권의 독립’을 수호하는 견고한 결의를 끝까지 관철시키기 위해서도 우선 사법부의 장인민 대법원장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아껴서는 안 된다. 만일 이 파동의 와중에서 민 대법원장마저 믿을 수 없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사법부의 붕괴를 의미하게 되기 때문이다. (…) 지금 신민당이 대법원장에 대한 탄핵 운운하는 것도 사법권의 독립 수호를 위한 전 법관들의 투쟁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만약 민 대법원장이 끝내 사법부의 권위를 지켜내지 못하고 손상을 가져오는 결과로 매듭짓게 된다면 그때 가서 논할 문제지 지금 사법부의 상징으로서 사태 해결에 부심하고 있는 과정에서 그와 같은 극단론을 펴는 것은 삼가야 할 일이다. 어쨌든 민주주의의 기본이 흔들리고 있는 이 중대한 관두에서 민 대법원장의 일거일동과, 그리고 국회의 동향에 심각한 관심을 쏟지 않을 수 없는 국민들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는 방향으로 사태가 해결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조선일보 8월 4일자 기사는 ‘공화당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서 “사법부 파동 수습을 위해 민복기 대법원장이 요청한 박 대통령과 민 대법원장의 면담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사법부 파동에 대한 박 대통령의 뜻은 이미 지난 1일 신직수 법무부장관을 통해 민 대법원장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면담의 가능성은 없는 것으로 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기사와 같은 날짜에 실린 위의 사설은 “민 대법원장이 행정수반인 박 대통령과 면담하여” 파동을 해결하는 것을 중요한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조선일보가 7월 31일자 사설에서 사법 파동 해결에 대해 ‘대법원장의 무거운 책임’을 강조한 것이 박정희 독재체제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알고도 모르는 척 하면서 내세운 주장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조선일보는 8월 4일자 사설에서도 무기력한 대법원장을 향해 “사법사를 가름할 아주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다”고 강조함으로써 사법권의 독립을 되찾으려고 유례없는 투쟁을 벌이던 법관들과 양식 있는 독자들의 실소(失笑)를 샀을 것이다.

사법권 수호를 위해 집단사표를 냈던 서울 민·형사지법, 가정법원 판사들이 27일 오후 사표를 되돌려 받음으로써 사법 파동은 만 한 달 만에 자체 수습 형식으로 끝났다. 극적 해결은 민복기 대법원장이 “행정부를 대표한 사람들이 국회 발언에서 사법권은 독립되어야 하고 그 권위는 존중되어야 하며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확언했고 이번 사태에 반성한다고 하였으며 국내외적으로 일치단결하여야 할 때이므로 사표를 철회해 달라”는 호소에 이어 취해졌다.
민 대법원장은 이날 오전 10시 30분 대법원 회의실에서 재경(在京) 법관 전체회의를 소집, 약 15분 동안 이 같이 말하고 “파동에 관련하여 관계자의 징계, 인책 등을 요구하는 것은 법관 특유의 자세인 초연함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설득,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는 의미에서 사표를 철회토록 종용했다.
이어 서울민·형사지법, 가정법원 판사들은 각각 원장실에 모여 사표 철회 여부를 둘러싸고 2시간 동안 논의 끝에 “우리의 주장이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아 실망은 크지만 더 이상 혼란을 지속시키는 것은 피해야 하며 계속 행정부의 반성과 성의 있는 조처를 촉구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모두 사표를 되돌려 받았다(조선일보 8월 28일자 7면).

이 기사는 사법 파동이 자체 수습 형식으로 끝났다고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사법부의 일방적 패배로 결말이 난 것이었다. 대법원장 민복기는 국회에서 행정부를 대표한 사람들이 한 발언을 이유로 법관들에게 사표를 철회해 달라고 말했는데, 대통령인 박정희 말고 당시에 사법권을 보장할 사람은 따로 없었다.


‘광주대단지 사건’을 ‘난동’으로 보도

사법 파동이 한창이던 1971년 8월 10일 오전 11시경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에서 ‘철거 이주민들’의 대대적 투쟁이 시작되었다. 조선일보는 8월 11일자 7면 머리에 「광주대단지 2만여 주민 난동」이라는 기사를 올렸다.

10일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광주대단지 주민 약 2만명이 분양지 무상불하를 요구하며 출장소 건물과 관용차, 경찰 백차 등을 불 지르는 등 약 6시간동안 무법천지를 방불케 하는 난동을 벌였다. 이 난동으로 서울 관 1-356호 서울시 부시장 전용지프차 등 성남출장소(건평 80평) 등이 불타고 서울시광주대단지사업소(60평)와 성남지서(20평) 내부의 기물이 파괴되었다. 또 경찰 약 20명과 주민 7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서울 영 2-271호 좌석버스 등 버스와 트럭, 택시 등 약 20대의 유리창이 깨졌고 대왕주유소 앞에서 광주대단지까지의 차량 통행이 7시간가량 막혔다.
이날 오전 10시 반 광주대단지 주민들은 “1백원 땅 1만원에 파는 것을 결사 반대한다”는 등 대지 무상불하를 요구하는 플래카드 1천개와 피켓 약 2천개를 들고 대단지 불하가격대책위원회 주최로 궐기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에 참석키로 했던 양택식 시장이 11시 10분이 넘도록 오지 않고 관용지프를 타고 온 시청 직원 4명이 “양 시장은 천호동에서 교통이 막혀오지 못하니 좀 더 기다려 달라”고 주최자 측을 통해 스피커로 알렸다.
빗속에서 1시간 이상 기다린 주민들 중 청년 약 1백명은 “양 시장이 온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냐”며 흥분, 시청 직원들을 차에서 끌어내리고 서울관 1-356호 지프를 대회장에서 약 5백미터 떨어진 개울가로 끌고 가 처넣어 버렸다. (…)
성남경찰서에 몰려간 군중은 문 앞에 세워둔 용인경찰서 소속 경찰백차를 뒤집어엎고 불을 지른 후 지서 안도 부쉈다.
이때 양 시장이 도착, 대표를 만나 요구조건을 들어주겠다고 설득했으나 군중은 걷잡을 수 없게 흥분되어 있었다.

광주대단지 주민들은 왜 ‘난동’이라고 매도당해야 하는 ‘봉’에 나섰을까?

광주로 이주하면 살 곳을 마련해주겠다는 서울시의 말만 믿고 실려 온 철거민들은 24인 용 천막 하나에서 네댓 가구가 장롱, 찬장 등으로 칸막이를 한 채 생활해야 했다. 또 상하수도나 전기시설이 없어 냇물을 길어다 쌀을 씻고 뒷산의 생나무를 베어 밥을 짓고 호롱불로 불을 밝혀야 했다. 또한 수천 가구에 공동화장실이 12개에 불과해서 인근 야산은 순식간에 온통 인분으로 뒤덮였다. 그래서 이질, 설사, 콜레라 등 전염병이 창궐했고, 특히 수인성전염병이 심했던 1970년 초여름에는 하루에 3~4구의 시신이 실려 나오기도 했다.

굶어 죽는 주민이 잇달아 나오던 그 무렵, 서울시는 개발 붐을 일으키려고 광주대단지가 ‘신천지’가 될 것처럼 대대적으로 홍보를 했다. 그러자 투기자본이 몰려들어 이주민들이 팔고 떠나는 택지분양증을 사들이려고 경쟁을 벌였다. 애초에 서울시가 평당 400원에 사들인 땅의 값이 서울 도심지 일부보다 높은 2만~6만 원에 거래되었다.

분양증을 팔고 서울로 돌아간 이주민들은 그래도 나았으나 대단지에 남은 나머지 3분의 2쯤 되는 사람들은 언저리의 싼 땅을 사서 판잣집을 지어야 했다. 서울의 판자촌이 광주대단지로 옮겨진 셈이었다.

투기자본이 잽싸게 빠져나가자 땅값은 폭락했다. 개발비용 환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서울시는 1971년 7월 택지를 높은 분양가격으로 강제 매각하려고 했다. ‘광주대단지 사건’은 바로 그 무렵에 터졌다.

사태가 그렇게 심각해질 때까지, 거의 모든 신문은 그런 비극이 박정희 정권의 무모하고도 비인간적인 개발정책의 결과라는 것을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리지 못했다. 동아일보와 일부 신문이 광주대단지의 참상을 전하는 기사를 더러 실었을 뿐이다.


광주대단지 사건은 ‘이질감’이 원인?

광주대단지는 애초부터 철거민을 중심으로 한 신도시로 계획되었다. 그래서 그 지역은 경제적 자립을 이룰 수가 없었고, 일거리를 구하지 못한 주민들은 기아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대단지 안에 있는 단순조립공장이나 섬유업체들에는 여성만 취업할 수 있어서 청·장년 남자들은 외지로 나가지 않으면 만성 실업에 시달려야 했다. 대단지 안에서 버티려고 남은 철거이주민들 가운데는 노점상이나 행상, 날품팔이로 생계를 꾸리는 이들이 다수였다. 분양증(속칭 ‘딱지’)을 사서 들어온 전매(轉買)입주자들은 주로 농촌에서 서울로 온 빈민들이거나 셋방살이를 하던 사람들 아니면 기지촌 출신이어서 고정적인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1971년 5월부터는 굶어 죽는 사람들까지 생겼다.

광주대단지 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무리하게 주먹구구식으로 추진한 ‘개발정책’의 산물이었다. 개발의 주체는 서울시였지만 그것을 지시한 장본인은 박정희 자신이었다. 도시빈민들이 박 정권의 사후 대책 없는 ‘불도저 식 개발’에 희생되어 생사의 갈림길에서 일으킨 저항이 폭력에 기댄 것은 비판받을 소지가 컸지만, 적어도 그들의 참상을 따뜻하게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참된 언론이 할 일이었다. 그런데 조선일보가 8월 12일자 2면에 내보낸 사설(「광주단지 사태의 교훈 / 이질감의 불식에 위정의 눈을 돌려라」)는 그런 노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 다행히 급한 사태는 일단 수습이 되었으나 관계 행정당국은 계속적인 잠재요인을 제거하는 데 안이해서는 안 될 것이며 그러한 다짐으로 임하고 있는 것으로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면서 이번 사태의 더 깊은 요인이 비단 광주단지란 한 특정지역에만 깔려 있는 것인가를 우리는 골똘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항간에서 가위(可謂) 일종의 소요사태를 방불케 한다고까지 비유된 이번 사태의 주동자들에 대해선 그 동기에 여하한 정상(情狀)이 개재되었다 하더라도, 사회의 안녕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법치의 능력이 미치는 한에 있어서 우선 매운 다스림이 있어 마땅하다. 6·25 이후 이번과 같은 큰 사태를 우리가 경험한 일이 거의 없다. 매운 다스림을 다시 말하는 소이이지만, 이와는 별도로 국정에 임하고 있는 요로(要路)들은 가슴에 새겨 깊은 교훈을 이번 사태에서 얻어야 할 것임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관공서와 치안차량들을 탈취, 방화를 한다는 행위가 어찌 그렇게도 치안능력을 과시하는 이 사회에서 벌어지고 만 것인가. 평소 이 사회의 밑바닥 계층의 심리에 무엇인가가 잠재해 있었던 것이 분명한 일이다. 그것을 소외감, 또는 좌절감, 아니면 이질감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한 계층으로 하여금 더욱 ‘등외(等外)지대’에 ‘등외국민’으로 버림받고 있다는 느낌을 안게 한 사회현상은 없었던가. 실로 이번 광주단지 사태가 보여준 교훈은 지금 안으로 밖으로 벌어져가고 있는 어려운 과제를 극복해야 할 우리의 기본명제의 바탕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중요한 체험임을 깊이 가슴에 새겨 간직하자고 강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사설은 광주대단지 사건의 가장 큰 원인이 ‘밑바닥 계층’의 소외감, 좌절감 또는 이질감이라고 보고 있다. 당장 내일 먹을거리도, 마땅한 거처도 없는 사람들이 단순히 그런 심리적 동인 때문에 행정당국을 상대로 극한적인 항의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고 보는 것은 책상 맡에 앉은 지식인들의 단순한 사고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내무부는 8월 11일 광주대단지를 광주군에서 분리해서 성남시로 승격시키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첫 단계로 성남출장소를 도(道) 관장으로 하여 소장직을 현 서기관에서 부이사관으로 직급을 올려 이석봉 양주군수를 승진 발령하고 우선 지서 인원을 1백명 선으로 증원, 절차를 밟아 경찰서를 두기로 했다. 손수익 내무부 지방국장은 이 지역은 인구가 16만명으로 급증하고 이동률이 높아 작년 말 서울시와 협의, 독립된 자치단체로 만들기로 합의했으며 도시행정 조직작업을 이미 마쳤다고 밝혔다(조선일보 8월 12일자 7면).

광주대단지에서 살 길이 막막해진 이주철거민들에게, 대단지가 성남시로 승격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었겠는가? 그 이후에도 그곳은 생존의 벼랑 끝에 선 사람들이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한국사회의 ‘생지옥’으로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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