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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를 통해 본 ‘여순사건’조선일보 대해부 2권-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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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8.01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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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된 지 두 달 남짓 만인 1948년 10월 19일 전남 여수에서 남녘을 피로 물들이게 될 사건이 터졌다. 이승만 정권과 보수언론은 ‘반란’이라고 불렀고 좌파와 진보적 언론은 ‘항쟁’ 또는 ‘민중봉기’라고 명명한 ‘여수·순천사건(약칭 여순사건)’이 시작된 것이었다.


‘제주 진압’을 거부한 14연대 좌익 군인들의 ‘봉기’

사건의 발단이 된 곳은 여수 신월리에 주둔하고 있던 제14연대였다. 10월 15일 육군사령부는 19일 오후 6시를 기해 ‘폭동’이 계속되고 있는 제주도로 1개 대대를 파견하라고 14연대에 명령했다. 당시 국방경비대(국군의 전신)는 모병제를 실시하고 있어서 신원조회가 허술했기 때문에 경찰의 탄압이나 감시를 받던 좌익 계열의 청장년들이 입대해서 신분 보호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 여순사건을 일으킨 주동자인 14연대의 중위 김지회와 상사 지창수 등은 남로당 전남도당 소속이었다. 제주도로 가서 ‘폭동’을 진압하라는 명령은 좌익세력이 주도했지만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무차별 살상에 몰려 한라산 중산간으로 피난했거나 자기 마을에서 죽은 목숨처럼 살고 있던 ‘인민들’까지 살상하라는 뜻으로 해석되었을 것이다.

김지회와 지창수를 중심으로 한 좌익 계열의 장병들은 결국 ‘제주 진압군’으로 가는 대신 ‘봉기’ 또는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14연대의 반란군은 여수에서 경찰서장과 사찰계 직원 10여명, 한민당 여수지부장, 대동청년당 여수지구 위원장, 경찰서 후원회장 등 우익계 사람들과 그 가족 70여명을 살해했다. 순천에서도 살상과 방화, 약탈이 벌어졌다. 10월 22일까지 전남의 7개 군 전체와 3개 군의 일부가 반란군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반란군은 “경찰을 타도하자” “우리는 동족 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한다” “우리는 조국의 염원인 남북통일을 이룩하자” “우리는 북상하는 인민해방군으로서 행동한다”라는 구호를 외쳤다.

10월 20일 정부는 주한미군 군사고문단장인 준장 로버츠,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이범석, 국방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 등이 참석한 가운데 긴급회의를 연 뒤, 이튿날 ‘여순반란사건’을 진압하기 위한 작전지도부를 광주에 세우기로 결정하고, 22일 여수와 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조선일보의 여순사건 첫 보도

조선일보는 10월 22일자 2면 머리에 여순사건에 관한 기사를 처음으로 올렸다. 제목은 「국군 일부 전남서 반란 / 좌익과 합세 2천여명 / 치안은 불원간 회복을 확신 / 반란사건 전모 이 총리가 발표」였다.

지난 20일 새벽 2시경을 기하여 전라남도 여수에서 돌발한 국군 일부 분자들의 반란행동사  건에 관해서는 정부에서 보도금지령을 내려 보류되었던 것인데 21일 이 국무총리로부터 이  사건에 대한 전모를 담화로 발표하여 이에 재작년 영남소요사건(1940년 10월의 대구항쟁-인  용자)을 연상케 하는 골육상잔의 비극을 다시 한 번 겨레 앞에 보도하게 되었다.

이 총리의 말에 의하면 이번 사건은 공산주의자와 또 하나 대한민국 정부에 반감을 가진 일  부 극우 정객분자가 결탁되어 이 세력이 다시 국군의 일부 장교들 및 병사들과 상통한 바 있  어 미리부터 계획했던 음모를 이번 기회에 구체화시킨 것이 그 성격상 특이한 점으로 골육이  서로 피를 흘린 참극상태란 저 영남소요사건을 연상케 한다고 한다.

조선일보가 이 기사를 통해 보도한 국무총리 이범석의 ‘발표’에는 여순사건의 동기가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이범석은 14연대의 좌익계 장병들이 ‘제주 진압’을 거부하고 봉기를 일으킨 사실을 밝히지 않았는데, 조선일보는 현장 취재를 못한 탓인지 ‘보도금지령’이 풀린 뒤 첫 기사라 그런지 국무총리의 발표 내용만을 ‘충실하게’ 전했다.

<간추린 조선일보 90년사-신문 그 이상의 미디어, 조선일보>(이하 (간추린 조선일보 90년사>, 조선일보 90년 사사 편찬실 지음, 2010)는 조선일보가 여순사건을 가장 적극적으로 보도했다고 주장한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2개월 남짓밖에 되지 않은 1948년 10월 20일에 일부 군 세력이 반란을 일으켜 여수와 순천 등지에서 수천 명의 살상을 가져온 유혈 참극이 발생했다. 이른바 ‘여수·순천 반란사건’이다. 당시 신문들은 이같이 엄청난 뉴스를 당국의 보도금지령에 따라 23일자에야 보도할 수 있었다. 조선일보는 일단 정부의 발표로 사건 발생을 알린 후 두 기자를 현지에 특파해 10월 26일부터 11월 4일까지 9일 동안 연일 제2면 머리기사로 반란지역의 참상을 전했다.
특히 사회부 기자 유건호가 현장에 파견돼 맹활약하며 필력과 취재력을 날렸다. 유건호는 10월 20일 현지 상황도 모른 채 사회부장으로부터 받은 1만 원과 철도 무임승차권을 갖고 기차에 올라 남원으로 간 뒤 현장으로 가서 취재, 1948년 10월 27일자 기사를 썼다. 유건호는 순천 곳곳을 돌아다니며 처참한 광경들을 모두 기록했다. 문자 그대로 시산혈하(屍山血河: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강을 이룸)였다. 참담함을 금할 수 없었지만 경력 2년의 사회부 초년 기자는 울분을 삼키며 정확하게 역사의 현장을 기록했다. 그가 취재를 마치고 상경하려던 오후 3시쯤 돼서야 다른 언론사 기자들이 내려왔다. 유건호의 기사는 31일자까지 연이어 실렸다(150~151쪽).

유건호는 <간추린 조선일보 90년사>에 기록된 대로 ‘정확하게 역사의 현장을 기록’했던가? 그가 1949년 10월 27일자 조선일보 2면에 실은 기사(「이곳저곳 시체가 산란 / 피난민은 점차로 귀착 / 국군의 군정 실시로 질서 회복」)를 보기로 하자.

동족의 피로 물들인 순천에 들어간 것은 24일 미명이다. 교통과 통신이 두절되어 애타는 가슴을 움켜잡고 부모처자를 만나러 가는 사람이 수없이 많건만 철로는 전주 이남이 불통이요 도보로도 남원부터는 교통이 차단되어 있지만 별 도리가 없다. 기자는 전주부대 자동차로 전주를 출발하여 일로 순천으로 항하였다. (…)
먼동이 트면서 사람소리가 많이 나는 곳을 쳐다보니 순천읍민이 거의 전부 국민학교 마당에 집결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모두 벌벌 떨고 있고 젊은 사나이들은 수색을 당하느라고 ‘빤쓰’만 입고 있다. 질서가 완전히 회복된 줄만 알고 들어갔던 기자는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3 주야(晝夜) 동안이나 반란군에게 점령당하였던 순천읍에는 읍민은 대개 피난하고 집집마다 다행히 비어 있는 것이다. 주민들은 일단 이 국민학교에 집결하여 경찰의 심사를 받는 것이다. 학살을 면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군중 속에서 반란에 참가하였던 그 지방민을 손가락으로 지적하여 뽑아내고 있었다.
날이 밝으며 순천거리에 제1보를 디뎠다. 살기가 등등한 거리에는 불과 몇 칸을 띠우지 않고 병사들이 경계를 하고 있으며, 혹간 자취를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공포를 발사하고 정지시킨다. 길거리에는 이곳저곳 시체가 산란(散亂)하고 있다. 어느 것은 썩고 어는 것은 불에 타고 어느 것은 개가 덤벼 뜯어먹고 있다. 경찰서 문안에 들어서니 피비린내가 코를 찌른다. 팔을 묶이어 총살을 당한 외에 다시 가해를 당한 70여개의 시체가 한데 쌓여 있다. 불탄 버스 속에는 백골이 우수수하다. 마치 ‘나치스’ 독일의 최악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어떤 영화의 장면 그대로의 자태이다. (…)
당지에 와 있는 경찰지휘관 제8관구 경찰청 부청장 최천 씨의 말에 의하면 사망자의 수는 아직 확실한 숫자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도 1천3백명을 넘을 것이라 하며 그 중 경관 사망은 3백명 이상이나 될 것이라 한다. 24일 현재까지 정리한 시체 수만도 2백11명이나 된다는 것이다. 24일 저녁에 이르러서 읍민은 대개 자기 집을 찾게 되었으나 아직도 폭도가 마루 밑에서 혹은 광 속에서 국군병사에게 체포되고 있다. 폭도들의 행동은 주로 살인과 약탈이었다. 당지의 은행은 금고가 파괴되고 현금 700만원을 약탈당하였다 하며 도로변의 가옥은 유리창마다 파괴되고 기구장들이 모두 산란되고 있다. 방화는 불과 23개 처에 지나지 못한 모양이나 국군의 순천 점령이 하루만 늦었더라도 인명피해는 물론 순천의 시가는 지상에서 말살되어버렸을 것이라는 것이 주민들이 이구동성으로 부르짖고 있는 점이다. 그리고 24일 밤중 읍민이 겨우 마음을 잡으려 할 즈음에도 다시 순천 어구에 폭도 습격이 있어 콩 볶듯 하는 기관총 소리와 난사되는 총성이 여전히 계속되었다. 그러나 국군의 군정 실시와 아울러 읍내는 회생되고 있으며 대부대로 남하하는 국군의 진격으로 순천지방만은 위험에서 구출되었다.

조선일보 기자 유건호가 ‘여순 반란사건’의 참상에 관해 당시 신문들 가운데서 가장 먼저 보도했다는 이 기사는 ‘정확하게 역사의 현장을 기록’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 사건의 진원지인 여수를 먼저 취재하지 못한 채 ‘반란’이 파급된 순천의 참상을 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건호는 순천에서 벌어진 ‘동족상잔’의 실상과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주민들이 국민학교에 집결하여 경찰의 심사를 받고 있는” 까닭이 무엇인지, “젊은 사나이들이 빤쓰만 입고 수색을 당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가 이 기사에는 전혀 드러나 있지 않다.

‘사회부 2년차 초년 기자’라는 그는 순천을 피비린내로 진동시킨 ‘진압군’의 피해와 희생된 주민들의 숫자를 명확하게 가려서 제시하지 못했다. 한 고위 경관의 말을 빌려 “사망자의 숫자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도 1천3백명을 넘을 것이라 하며 그 중 경관 사망은 3백명이나 될 것이라 한다”고 전했을 뿐이다. 경관이 추산한 사망자 1천3백여명 가운데 목숨을 잃은 경관 3백명을 뺀 나머지 1천여명이 모두 반란군에게 살해되었는지 진압군에게 죽음을 당한 사람들까지 거기 포함되어 있는지도 분명하지가 않다.

유건호는 위의 기사와 같은 지면에 「중학생도 합류 / 경찰관은 거의 다 피살」, 「15명 총살 집행 / 전 읍민이 모인 국민교정서」, 「전북에까지 소요 파급 / 국군에 포위 진압은 시간문제」라는 기사를 올렸는데, 대체로 이승만 정부와 미군정의 반란 진압에 초점을 맞춘 내용들이었다.


‘반란군의 학살’에 초점 맞춘 조선일보 사설

조선일보는 10월 28일자 1면 머리에 ‘여순사건’에 관한 사설(「반란의 속보[續報]를 듣고」)을 처음으로 올렸다.

지난 20일 여수에서 국군 반란이 일어났단 보도를 듣고 우리가 제일 먼저 염려한 것은 인명의 살상과 시설의 파괴에 대한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사건이 생긴 이상 전연 사상과 파괴가 없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나 작일 본사 기자의 순천 상황 보고와 국방부 발표를 종합하여 보매 사변 범위가 상당히 광범하고 그 잔학의 도가 지나치고 살상 수가 너무나 큰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속보를 보면 대부분이 대전(對戰)에서 살상된 것이 아니라 반군이 점령 직후 저항력이 약한 경관 또는 일반 우익단체 등 다수한 민중을 학살한 것으로 순천 1개소만으로도 천여 명에 달한다고 하며 그 참살 방법도 잔인을 극하여 그 처참한 현지 사정은 듣는 자로 하여금 모골이 송연케 한다. 적국과 교전 중에도 이런 일은 인도상 죄악이라고 금하거든 하물며 동족 간에 어찌 이렇게 상잔이 심하랴. 사이지차(事已至此)에 수원수구(誰怨誰咎)한대야 소용이 없다. 그렇지 않아도 아직 전도가 아득한 우리의 처지를 생각할 때 오직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두고두고 통탄할 밖에 없다.
국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동포와 강토와 그 위에 있는 시설을 사랑하는 종합적 의의를 가진 것이다. 동포가 없고 강토 위에 아무 시설도 없는 토지만 남는다면 국가라고 할 것이 없다. 이번 일이 만일 정치이념의 상이로 일어난 반란이라면 그 소행이 이렇게 잔악을 극할 수 있겠는가. 평화의 인의(仁義)를 애호하기 남 못지않다는 우리 민족에게 이런 일이 생겼다는 것은 우리 자신으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
정부 당국은 사태의 수습 처리에 만전을 기할 것을 믿거니와 우리로서 특히 주의를 환기코자 하는 바는 반란행위의 동기와 이에 부화(附和)된 전체전반의 원인 근인을 철저히 구명(究明)하되 국민으로 하여금 정확, 공정한 판단 밑에 각자가 평소에 민족과 국가사회를 위하여 대국적 견지에서 냉정하게 능히 자각적 행동을 취할 수 있도록 사태의 전모를 남김없이 알게 하여야 할 것이다. 돌아보건대 대구를 중심한 재작년 10월 폭동사건이며 방금도 종식치 못한 제주도사건 등 또 금반 사건에서도 보이는 바 남북의 내란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지 적할 수 있는 동시에 그 주동자가 무엇이냐 하는 것보다도 그때마다 부화되는 다수 민중으로 하여금 어떻게 하면 법치국 국민으로서의 떳떳한 행동을 취하게 할 것이냐 하는 것에 더 유의할 바 있으리라고 본다.
관과 민, 군과 경찰 그리고 각 단체 간의 협조 여부 등 이번 사건의 이면에 무엇이 복재(伏 在)해 있지 않은가, 이를 구명하여 발본적 조정을 할 것을 당국에 기대한다.

이 사설은 ‘여수에서 국군 반란이 일어났다는 보도를 듣고’ ‘인명의 살상과 시설의 파괴’를 가장 먼저 염려했다고 전제하면서도 순천에서 벌어진 동족상잔의 실상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다. ‘잔학의 도가 지나치고 살상 수가 너무나 큰’ 원인은 ‘반군이 점령 직후 저항력이 약한 경관 또는 일반 우익단체 등 다수한 민중을 학살한’ 데 있다고 단정한 것이다.
여순사건을 일으킨 14연대의 반란군들이 여수와 순천에서 민간인 동조자들과 함께 주요한 관청들을 습격해서 경찰관들을 비롯한 우익계 인사들과 그들의 가족을 살육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여순사건’ 이래 60년이 넘게 많은 전문가들이 조사하고 연구해서 발표한 자료들이나 외국인 기자의 보도를 보면 반란군과 동조자들의 살육이나 ‘인민재판’에 비해 진압군의 ‘학살’과 인권유린이 훨씬 더 가혹했음을 알 수 있다.

여순사건은 10월 27일 완전히 진압되었다. 군대와 경찰의 포위망을 벗어난 반란군의 일부는 나중에 지리산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빨치산’에 합류하게 된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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