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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평생의 소원을 풀고 가네….”[내 인생의 제작기] 52년만의 귀향 … 달러 밀반출한 PD된 사연②
〈오기현 SBS PD ㆍ 전 한국PD연합회 회장〉
  • 관리자
  • 승인 2018.04.03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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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1월에 아폴로 박사로 알려진 조경철 박사가 북한에 있는 동생을 만나러 가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형제 단 두 사람이 만났으나 최초의 민간 차원 이산가족 만남이었고 북한당국이 남한방송사의 방북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준 최초 사례이기도 하다. 꽉 막힌 남북관계가 언제 트일지 알 수 없지만, 18년 전 당시의 치열했던 방북 제작 과정을 되돌아보면서 '햇볕' 찬란한 새 봄을 기다려본다. - 필자 주

(1편에 이어서)

아폴로 박사 조경철

날은 점점 추워왔다. 조경철 박사의 방북을 서둘렀다. 애초에는 이문열, 백기완, 조경철 세 사람의 상봉을 모두 추진하려고 계획했지만, 이제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한 사람만 남게 되었다.

아폴로 박사로 알려진 조경철 박사는 평북출생으로 어릴 때 평양으로 이주하여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했다. 김일성 대학 물리학부 1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7년 월남했다. 평양에서 큰 제재소를 운영하던 부친이 이듬해 월남해 조 박사와 합류하고, 어머니와 남동생은 평양에 남게 되어 이산가족이 되었다. 아폴로 박사라는 별명은 1969년 아폴로 11호 발사 장면 TV해설을 맡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NASA 책임연구원 경력도 그의 별명이 붙여지는데 일조했다.

여의도 63빌딩 옆 라이프오피스텔 14층에 있는 조 박사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마침 조 박사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우주 공간에 떠 있는 우주선과 혹성 같은 것을 그리던 중이었다. 무한공간에서 가족상봉의 꿈을 이루려는 그의 열망을 보여주는 듯 했다.

“박사님, 이번에도 동생 만나는 일을 상의하러 왔습니다. 요즘 혹시 동생분하고 연락이 되십니까?”

“일본에서 조총련을 통해서 여러 번 찾았는데, 답이 없어. 6.25전쟁 때 5촌 당숙 말이, 우리 부자가 월남한 뒤에 어머니와 동생은 평양에서 친척들이 살던 평북용천군 남시읍 정차동 41번지로 강제이주 되었다고 하더군.”

조 박사는 번지까지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지만 가장 최근에 들은 고향 소식이 1950년 6.25전쟁 때 것이었다. 곧바로 조 박사의 인적사항과 가족사항을 받아 베이징 김 참사에게 팩스로 보냈다. 김 참사는 조 박사 동생이 만약 그 주소에 그대로 있다면 일이 수월하지만, 전쟁 중에 이주를 하였다면 찾기가 어려울 거라고 했다.

지금은 어떤 상황인지 모르겠지만, 1999년 당시에만 해도 북한은 주민등록이 전산화 되어 있지 않았다. 이산가족을 찾기 위해서는 중앙당 고급당료가 주소를 들고 직접 수소문해야 했다. 교통사정이 좀 나은 대도시 인근은 쉽지만 두메산골에 들어가 있으면 찾기가 만만치 않다. 월남가족이나 국군포로의 경우는 대게 오지로 격리되어 있어서 찾기가 더욱 힘들었다.

이 주일쯤 지나서 김참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조경철 박사의 동생을 찾았다는 것이었다. 현재 거주지나 가족사항 등에 대해서는 일체 정보를 주지 않았다. 게다가 조 박사 외에 담당PD와 카메라 등 맨 단 세 사람만 방북할 수 있다는 조건이 붙었다. 이렇게 남북 당국의 공식승인을 받은 최초의 방북제작 프로그램이자 이산가족 상봉 프로그램은 힘겹게 성사되었다. 그래도 베이징을 향하는 우리의 몸은 가벼웠다.

드디어 평양으로

늦은 오후 베이징 조양구의 북한영사관에서 방북비자를 받았다. 다음 날인 11월 20일 아침, 서둘러서 평양행 비행기에 올랐다.

“승객여러분, 우리는 지금 압록강 위를 지나고 있습니다.”

고려항공 승무원의 안내 멘트를 듣고 창 밖을 내다보니 구름 아래로 압록강이 가늘게 흐르고 있었다. 드디어 북한 영내로 들어간다. 이제야 실감이 났다. 조 박사도 눈시울을 붉혔다. 베이징을 이륙한지 1시간30분 만에 평양 순안비행장에 착륙했다.

순안비행장에는 민화협 백문길 실장, 내나라비데오 리연호 촬영가, 조선아태 안00 지도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간단한 환영식을 마친 뒤 곧바로 고려호텔로 향했다. 늦가을이어서 야외에서 일하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고 들판 풍경도 약간 썰렁했다. 그러나 52년 만에 고향을 찾은 조 박사는 한 순간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창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고려호텔에 짐을 푼 뒤 3층 식당에 마련된 환영만찬에 참석했다. 오늘의 호스트는 조선아태 강덕순 대남실장이었고, 민화협 백문길 실장과 <내나라비데오> 김영사장이 배석했다. 조선아태는 우리의 초청을 결정한 조직이고, 민화협은 북한 체류 동안 안내를 맞는 조직이었다. 모두 통일전선부 소속기관이지만, 실제 업무에서는 양측이 눈에 띌 정도로 경쟁적이었다.

의례적인 절차를 모두 끝나자 우리는 당장 내일 일정협의를 요구했다. 제대로 된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서는 7박 8일의 길지 않은 시간을 촘촘하게 안배할 필요가 있었다. 강 실장은 조 박사 동생과 이름과 나이가 같은 사람이 두 사람이어서 지금 사람을 보내 확인 중이라는 말을 했다. 확인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를 오라고 한 것이 이해되지 않았으나, 첫날부터 서로 긴장하는 것은 좋지 않을 것 같아 일단 그들의 얘기에 동의를 했다.

둘째 날 아침식사 전에 조선아태 안지도원에게 세부 일정을 알려달라고 했다. 그는 자신들이 전체 일정을 조율하고 있으니 우선 시내관광부터 하자고 제안했다. 사실 조 박사는 동생 만날 생각에 관광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 뻔했다. 그러나 혹시 북 측을 자극해서 동생에게 불이익이 돌아갈까 봐 기꺼이 그들의 요구에 응했다.

우리는 평양 방문 외국인들의 첫날 정규 관광 코스인 만경대고향집, 주체사상탑, 개선문 등의 혁명사적지와 평양성, 연광정, 대동문 등 역사유적을 구경했다. 조 박사는 김일성경기장 옆 개선문 앞에서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1947년 월남하기 직전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열두 살 된 동생과 이별한 집터가 자신이 서 있는 도로 아래 어디엔가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조 박사는 개선문 옆 돌난간에 걸터앉아 눈물을 닦았다.

이렇게 평양주변을 사흘이나 돌아다녔다. 정작 조박사 동생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그날 저녁 식사 후 나는 그들의 호텔 방문을 두드렸다. 속옷 차림의 안 지도원이 문을 열어주며 짜증을 내었다. 나는 남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안배하자고 요구했다. 그는 자신들의 배려를 모르는 SBS의 태도가 불쾌하다고 했다. 심지어는 시청률 올리려고 무리한 요구하지 말라고 까지 했다. 울컥 화가 치밀었다.

“이봐 안 선생, 당신은 우리 일을 도와주러 온 거야? 방해하러 온 거야? 사사건건 시비를 걸면서 약속은 안 지키고…. 그리고 우리가 언제 당신한테 시청률 걱정하라고 했어?”

“뭐야? 말 다했어?”

“그래, 말 다했다. 임마.”

내가 달려들자 그도 주먹을 휘둘렀다.

백문길 실장이 말렸다.

“그만들 해. 그리고 오 선생, 당신은 무슨 애들처럼 싸우고 그래?”

사실 안 지도원은 나보다 대여섯 살 아래였다.

그러는 사이 금 쪽 같은 이틀이 또 지나갔다.

52년만의 상봉

6일 째 되는 날은 교예단 공연을 보러 갔다. 돌아오는 길에 백문길 실장이 조박사의 형제 상봉시간이 저녁 7시로 정해졌다고 알려줬다. 그들은 이미 조박사 동생을 호텔에 데려다 놓고 ‘상봉교육’을 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가능한 출국일을 바로 코앞에 두고 만나게 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 박사는 3층 호텔 접견실에서 기다리고, 나와 서득원 카메라맨은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기다렸다. 촬영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한 순간도 놓쳐서는 안 된다. 긴장된 순간이었다.

그 순간 반대편 에스컬레이터로 낯익은 노인 한 사람이 황급히 3층으로 올라갔다. 우리는 재빨리뛰어 가 노인에게 물었다.

“혹 조경두 선생님이십니까?”

“….”

그 노인은 이미 정신이 반쯤은 나가 있었다. 우리 질문이 들리기 만무했다. 살이 빠지긴 했지만 얼굴 전체 골격은 조 박사와 비슷했다. 그 노인은 달려가듯이 접견실 문 안으로 들어갔다. 조 박사와 노인이 서로 마주 보고 서 있었다. 그리고 짧은 순간 상대방의 인상을 확인했다. 그리고 와락 끌어안았다.

“형님!”

“이놈 머리 한 번 보자. 까꾸머리(짱꾸머리) 맞나? 그래 이놈 경두 맞구나!”

동생은 어리광부리듯 조 박사의 등을 주먹으로 계속 쳤다. 이들은 52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옛날로 돌아갔다. 형제는 오열했다. 방안의 모든 사람이 숨을 죽였고 고개를 돌렸다. 잠시 뒤 정신을 차린 조 박사는 자신이 가지고 온 아버지 사진과 동생이 가지고 온 어머니 사진을 탁자 위에 모신 뒤 큰 절을 올렸다.

저녁식사 뒤 두 사람은 조 박사의 방으로 자리를 옮겨 그 동안 묻어둔 이야기를 나눴다. 조 박사와 아버지가 월남한 뒤 어머니와 단 둘이 남은 동생은 평양에서 친척들이 살고 있는 평안북도 용천군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 인민군으로 입대했던 동생은 월남가족이라는 멍에 때문에 붙박이로 전사(우리로 치면 이등병)계급이었으나, 뛰어난 복무성적 덕분에 군의 추천으로 전문학교에 진학했다. 그 뒤 승승장구하여 지금은 북한에서 두 번째로 큰 중장비기계공장인 함경남도 함흥 소재 ‘룡성기계연합총국’의 기획실장으로 근무 중이었다.

조 박사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수성가한 동생을 보고 무척 대견스러워했다. 그날 밤 조 박사는 동생과 같이 잠자리에 들 채비를 했다. 그런데 동생이 갑자기 가야 된다며 일어섰다. 회의가 있다는 것이다. 밤 10시가 넘어 회의에 간다는 말을 납득할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의 비밀스러운 만남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그들의 방침임이 확실했다. 하지만 조 박사는 내일 아침에 일찍 오겠다는 동생을 보고 평양에 온 뒤 처음으로 편안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조 박사 형제와 평양 시내를 관광했다. 52년 만에 만난 형제가 단 하루지만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장면을 가까이서 보는 것은 감격적이었다.

그날 밤 민화협 백문길 실장에게 조 박사 형제가 같이 잠을 잘 수 있도록 배려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역시 ‘절대불가’였다. 그래서 두 사람이 같이 지낼 수 있도록 한 시간만 배려하자는 수정안을 제시했다. 한참 고민하던 백문길 실장이 결국 수락했다. 내일이면 이들 형제는 다시 헤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양측은 두 사람을 호텔방에 남겨 둔 채 모두 철수했다. 그 한 시간 동안 형제는 처음으로 52년간 감추어둔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젯밤 조 박사가 전해준 달러의 30%만 북한의 공식 환율로 계산돼 동생에게 전달되었다는 사실도 그때 알았다.

다시 이별

11월 27일 아침 일찍 평양 순안비행장으로 향했다. 조 박사는 계속 눈물을 흘렸다. 공항에 도착한 지 10여 분 뒤 동생 조경두씨도 도착했다. 웬일인지 조경두씨는 바짝 기합이 들어있었다. 이제 곧 이별을 하는 시간이지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조 박사의 흐느낌에 그의 눈 주위도 젖어 들었다. 그때 내나라비데오 김영 사장이 조경두씨에게 한마디 던졌다.

“어허, 이거 형님을 울면서 보내면 쓰나? 웃으면서 보내드려야지.”

갑자기 조경두씨가 정색을 하며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조 박사에게 조용히 이야기했다.

“형님, 울지 맙시다.”

출국수속을 밟고 출국 심사대를 나서던 조 박사의 눈물보가 다시 한 번 터졌다.

“나 평생의 소원을 풀고 가네. 잘 있어! 제수씨에게도 안부 전하고….”

동생 경두씨가 갑자기 외쳤다.

“형님, 조국통일을 위해 좋은 일 많이 하시오!”

그리고 나서 그는 옆에 있는 안내원을 힐끔 쳐다보았다.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형님과의 이별에 대한 슬픔보다도, ‘조국통일’을 염원하는 그의 마지막 인사가 오히려 가슴 아프게 들렸다.

지워진 테이프

베이징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어느 누구도 입을 때지 않을 만큼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북한 당국은 취재한 테이프를 검열한다고 가져갔지만 항공기 탑승시간 전까지 돌려주지 않았다. 결국 빈손으로 비행기를 타야했다. 테이프를 지금 당장 가져오지 않으면 베이징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버텼지만 별 수가 없었다. 2~3일 안으로 책임지고 돌려보내겠다는 백 선생의 약속을 믿기로 했다.

베이징 서우두공항에 도착하여 조 박사와 서득원 카메라맨은 한국으로 바로 돌아가고 나는 베이징에 남기로 했다. 그들이 돌려 줄 테이프를 받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3일 뒤인 11월 30일 베이징 베이징 수도공항을 통해 테이프가 돌아왔다. 다행히 테이프 수량은 차이가 없었다.

테이프를 가져 온 사나이가 거만하게 말했다.

“오 선생, 내용이 지워졌다고 남조선 가서 함부로 떠들어 대지 말라.”

적반하장이었다. 속에서 ‘욱’ 하고 치밀어 올랐지만 정말 ‘남북화해’를 위해서 참았다. 곧바로 서울로 가져와서 검색을 했다. 조 박사의 상봉 장면 중 딱 30분만 남기고 모두 지워져 있었다. 30분짜리 테이프 36개 중 20개 정도가 남아 있었고, 6mm 테이프 10개는 모두 지워져 있었다. 다른 건 다 지워져도 괜찮은데, 조 박사 상봉장면의 극적인 요소가 상당 부분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러나 한탄만 하고 있을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남아있는 영상으로 베테랑 작가인 이영숙씨와 60분짜리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한 장면 한 장면이 모두 놓치기 아까운 자료들이라 촬영 량에 비해서 알찬 작품이 나왔다. 방송은 1999년 12월 7일 밤 11시10분부터 100분간 ‘조경철 박사의 52년만의 귀향’이라는 제목으로 시청자들을 찾아갔다. 1부는 다큐멘터리, 2부는 이창섭 아나운서의 사회로 조 박사 부부, 서득원 카메라맨, 나 등 네 사람이 대담하는 시간으로 꾸며졌다.

심야시간인 밤 12시50분까지 계속된 프로그램이었는데, 1부 다큐멘터리 시청률은 25%가 나왔다. 늦은 시간인데도 전체 시청률이 20%에 육박했다. 프로그램의 완성도보다는 남북문제에 대한 당시의 관심과 열의를 반영하는 지표였다고 생각된다. 국가안보회의(NSC)에서는 다음날 아침 정례회의를 시작하기 전에 방송을 시청하겠다며 긴급히 복사본을 요구했다. 이산가족을 중심으로 재방송 요구도 많았다. 결국 설날인 이듬해 2월 5일 새로 편집한 프로그램이 나갔는데, 이날 시청률도 아침 재방송 프로그램으로는 이례적으로 13%가 넘었다.

그러나 회사 안의 반응은 다양했다. 고위간부는 이런 프로그램 만들려고 돈을 그렇게 들였느냐고 핀잔을 주었다. ‘북한 선전물’을 잘 보았다고 혹평을 하거나, 자신은 돈 한 푼 안 들이고 방북할 수 있는데 생돈 버렸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

방북비용의 투명성

다른 비난은 몰라도 ‘방북비용’에 대한 지적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전편에서 이야기 했듯이 당시만 해도 방북비용 지급과정이 불투명했고 액수 자체도 무척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문제는 북한측이 방송교류를 단지 돈벌이 사업으로만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보니 이렇게 받아간 돈에 대해서 별로 고마워하지도 않았다. 거래의 기본원칙도 지키지 않았다. 그때 나는 돈을 건네주고 영수증을 받지 못했다.

원래 그들은 이산가족 상봉 외에도 여러 가지 사업을 한데 묶어서 비용을 요구했다. 그것도 선불이었다. 그런데 베이징에서 돈을 받을 때는 평양 가서 영수증을 서 주겠다고 하더니, 정작 평양에 가니 돈 받아 간 당사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정리하면 복수의 사업을 할 것처럼 해서 고액의 돈을 받아 내고는, 한 가지 사업만 하고 땡 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영수증을 써 줄 수가 없었다. 명백히 사기였다. 이렇게 당해도 어디다가 소송을 걸 수도, 하소연 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영수증도 없으니 내가 배달사고 냈다고 의심을 받더라도 해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던 중 2000년 2월 초 제주도에서 열렸던 남북고위급회담에 북한의 김완수 조선아태 부위원장이 참석했다. 중국의 북한전문가들은 그를 남북고위급회담의 막후 조종자로 알고 있었다. 그가 마침 평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베이징에 며칠간 체류하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SBS 송도균 사장에게 향후 방송교류를 위해 그와 안면을 트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송도균 사장은 흔쾌히 승낙했다.

나는 송도균 사장을 모시고 베이징 쿤룬호텔을 찾아갔다. 1층 커피숍에서 김완수 부위원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했다.

“김 부위원장님, 김참사한테 사업비를 전달하고 아직 영수증을 못 받았습니다.”

“뭐야?”

나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김 부위원장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있다가 다시 자리에 앉으며 몹시 불쾌한 빛을 드러냈다.

“작년 11월에 돈을 받아간 뒤로는 한 번도 만나질 못했습니다. 후속 사업에 대한 확인도 못 받았습니다. 지난번 사업이 도대체 얼마짜리 사업인지, 우선 영수증이 라도 써줘야 할 것 아닙니까?”

자존심이 무척 상한지 김완수의 얼굴빛이 검붉게 변했다.

“김OO이 당장 내려오라고 해!”

공교롭게도 김참사는 김완수 부위원장의 수행단에 포함되어 베이징에 와 있었다. 잠시 후 얼굴이 파랗게 질린 김참사가 고개를 숙인 채 로비로 내려왔다.

“똑바로 얘기해. 오기현이 이야기가 사실이야?”

김 부위원장이 소리를 너무 크게 질러서 우리도 움찔할 정도였다.

“네….”

김참사는 모기 소리 만한 목소리로 시인했다.

사장 앞에서 돈이 전달된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웠다. 누명은 벗은 셈이었다. 물론 돈을 돌려받지도 추가 사업도 할 수 없었다. ‘남북당국의 공식승인을 받은 최초의 방북취재’라는 타이틀로 만족해야 했다. 이후에 시비 거는 사람은 없었다.

한반도의 분위기가 좋아지면서 다시 남북방송교류가 진행될 것으로 기대된다. 대북송금의 적정성과 송금과정의 투명성에 대해서는 같이 고민해야 한다. 과거 6.15 전후에야 실적주의 혹은 특종에 대한 욕심으로 무리한 비용을 지급하고 방북을 했다지만, 이제는 그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꼭 바람직하다고 볼 수는 없겠으나, 북한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이 많이 줄어들었다. 북에 대해서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합리적인 비용산정과 거래를 요구해야 한다. 2005년 이후 방북제작이 시들했던 것은 투자대비 효과가 적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흥미가 반감한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도 나타났다.

언론사, 언론단체가 함께 협의체를 구성하는 것도 방법이다. 방북접촉통로를 일원화하고 비용을 공개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북측이 계약을 이행하도록 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 구제방법을 만들어야 한다. 나의 경험으로는 남북교류는 이제 단일협의체를 통하는 것이 각자도생하는 것 보다 유리하다고 판단된다. 물론 간섭하고 통제를 해서는 안될 것이다.

휴전선 너머로 모처럼 훈풍이 불고 있다. 이 바람이 한반도 전체를 오래도록 에워싸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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