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치료학자인 머레이 보웬은 “가족생활에서 벌어지는 지나친 정서적 밀착이나 융합으로부터 벗어나라”고 권유한다. 가족이라는 관계의 망에서 벗어나 개인적 자율성을 확보하라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가족주의가 강한 문화에서는 보웬의 권유를 받아 들이기가 결코 쉽지 않다. 특히 여성들에게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아버지-남편-아들을 순서대로 따르라는 삼종지도가 오랜 미덕이었기 때문이다. 노후대비, 노인복지도 가족의 지원과 자식의 부양으로 이뤄졌다. 이런 문화에서는 자식이 결혼과 함께 새 가족을 꾸리려 해도 벽과 만나기 일쑤다. 원가족과의 ‘지나친 정서적 밀착이나 융합’으로부터 벗어나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서울신문 2004.11.21.

보웬은 “가족 내 정서적 세력은 대를 이어 작용하기 때문에 그 파급효과가 심각하다”고 경고한다. TV 아침드라마의 한 장면을 떠올리면서 보웬의 말을 풀어보자. 남편은 아내보다 자신의 어머니와 심리적으로 더 밀착해 있다. 모자는 심리적 한 몸뚱아리라 할 만하다. 아내는 늘 뒷전으로 밀려 산다. 최소한 밀려있는 느낌을 갖고 산다. 이 경우 아내는 심리적 불안상태에 빠진다. 불안해지면 자녀에게 지나친 집착을 하게 된다. 엄마의 집착 대상이 된 자녀는 다시 정서적 불안상태에 빠지게 된다. 반대의 상황 그러니까 아내가 친정어머니와 과도하게 밀착해 있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확률은 낮지만 남편의 어머니 대신 누나, 아내의 친정어머니 대신 친정아버지 등으로 역할이 바뀔 수도 있다.

이런 갈등은 고부갈등이니 장서갈등이니 하는 편협한 네 글자 안에 우겨넣기가 매우 난감하다. 그 갈등의 폭이 강물의 이쪽저쪽과 같고, 깊이가 우물같기 때문이다. ‘3대의 저주’를 피하려면 어찌해야 할까. 가족이라도 심리적 경계를 잘 지켜야 한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주문 외기를 멈춰야 한다. 김장철이다. 또 어느집에서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동서와 시누이들이 한판 김장대전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김장하는 날, 우희는 고무장갑을 준비했다가 시어머니에게 꾸중을 듣는다.
(경향신문 1982.12.02.)

감기 앓자 ‘김장철 꾀병’ 핀잔.... 김 회장네 여자들은 김장을 담그려고 수선스럽게 움직이고 때마침 순영은 감기가 들어 몸져 눕는다. 큰며느리는 꼭 무슨 때만 되면 꾀병을 피우는 동서가 얄밉고, 시어머니는 큰며느리 눈치를 보면서....
(한겨레 1992.11.17.)

옛날 TV 드라마 소개기사다. 앞기사는 KBS의 <보통사람들>, 뒷기사는 MBC의 <전원일기>의 에피소드를 요약하고 있다. 저 짧은 기사 안에서도 각자의 심리적 역동이 눈에 선하다. 두 기사의 시간적 거리가 10년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두 기사를 보니 우리네 김장 풍경은 매한가지다. 며느리 순영이 꾀병을 피우고 나서 4반세기가 흐른 지금의 김장 풍경은 과연 어떤지. 다음은 얼마 전 후배한테 들은 얘기다.

지난 주 시아버지 생신이라 시댁에 다녀왔다. 그날 시아버지가 폭탄선언을 하셔서 나를 포함, 세 며느리들이 요즘 스트레스 받아 죽을 지경이다. 시아버지는 술 한잔 걸치시곤 기분이 좋아졌는지 추억에 젖어 며느리와 아들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 “옛날엔 대가족이라 그랬겠지만 김장하는 날이 잔칫날이었다. 돼지고기도 삶고 술도 한잔 하고. 아아, 아련한 그 옛날의 추억, 아름다운 기억. 아아, 아름다운 돼지비계. 그러므로 앞으로 김장하는 날은 무조건 며느리, 아들 전원 헤쳐모여!” 시어머니도, 두 시누이도 화답했다. 하지만 며느리들은 요즘 서로 전화를 돌려가며 “이 사태를 어찌 헤쳐 나갈까” 대책회의 중이다.

4반세기가 흐른 오늘날의 어느집 풍경이다. 김장은 육체노동이다. 잔치, 추억 운운은 대체적으로 방관자나 구경꾼, 수혜자의 발언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그 구경꾼과 수혜자는 대체적으로 남성일 가능성이 높다. 김장은, 한번이라도 담가본 여자들은 다 알지만, 그야말로 육체노동이다. 옛날엔 그야말로 중노동이었다. 동아일보는 1921년 <新女子와 結婚生活>라는 기획연재를 했는데, “조선여자들이 김장과 장 담그기로부터 해방되려면 일본처럼 김치 회사, 장 회사가 생겨야 한다”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 글에는 ‘조선 가뎡에서 뎨일 큰일로 아는 김장’이라는 구절까지 나온다. 그러니까 예나 지금이나 김장은 중노동이 맞다.

한데 김장은 감정노동이기도 하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시누와 올케 등등이 한자리에 모여 담그는 김장은 십중팔구 감정노동이다. 그 감정의 역동 속에서 아차하는 순간 정서적 밀착이나 융합이 드러날 수도 있고, 가족이라는 관계의 망에 걸려 개인적 자율성을 잃을 수도 있다. 김장하는 날, 김 회장의 며느리가 꾀병을 앓는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가족이라도 심리적 경계를 잘 지키자. “우리가 남이가?”라는 주문도 멈추자. 김장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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