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국장~”

한완상 선생님(전 통일교육부총리· 적십자사 총재)께서 나를 부르신다.

탁하게 갈라진 목소리다.

“내가 어제 큰 모욕을 당했소.”

놀란 내가 조심스럽게 “무슨 일이시냐”고 여쭸다.

“내가 그제 KBS에서 연락을 받았소. 내가 이번에 낸 회고록을 주제로 수원대 이주향 교수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대담을 하고 싶다는 제안이었소.”

(나 역시 지난 달 16일 세종문화회관서 열린 선생님 자서전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다」 출판기념회에 참석했고, 책을 얻어 하루 꼬박 통독했다. 해방 이후를 치열하게 살아 온 한 진보적 지식인의 삶에 새삼 큰 감명을 받은 터였다. KBS같은 공영방송 뿐 아니라 모든 언론들이 이 회고록을 널리 국민에게 알릴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제 막 여의도로 출발하려는데 프로그램을 맡은 PD로부터 연락이 왔소. 담당 국장이 ‘이 책은 인간 본질에 대한 탐구인 인문학이 아니다. 현 대통령을 옹호하는 회고록으로 정치적 오해를 살 수도 있다’며 대담을 취소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요.”

세상에!!

선생님의 회고록은 36년에 태어나 서울대와 에모리대학에서 공부하고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를 역임한 후 15년여 통일 부총리(김영삼 정부)-방통대 총장-교육 부총리(김대중 정부)-적십자사 총재(노무현 정부) 등 공직을 지낸 우리 사회 대표적 지식인의 삶의 기록이다.

박정희-전두환 정권에서 교수 신분으로 혹독하게 탄압받았던 것이나 이후 여러 공직을 거치면서 겪은 경험들을 이야기하면서 각 정권에 대한 평가와, 박-전 두 사람은 물론 김영삼-김대중-노무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역대 대통령들과의 관계와 그에 따른 소회를 빼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과 관련된 내용은 회고록 맨 마지막 부분 에필로그에서 아주 조금 언급한 것에 불과하다.

한 선생님은 여기에서 촛불혁명의 의의를 설명하고, 이 촛불혁명의 결과로 문재인 정부가 탄생한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한 선생님은 당선 확정 직전에 문 후보에게 전화를 걸어 “보다 겸손한 자신감으로 새 나라, 새 체제, 새 역사를 이끌어 달라”고 당부한 에피소드를 소개했을 뿐이다.

책의 제목을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다」로 정한 연유이다.

이것을 ‘현 대통령을 옹호하는 회고록’이라니!

KBS가 감히 ‘정치적 오해’를 걱정하다니!

나는 이것이 KBS 국장이 회고록을 열심히 읽고 내린 결론이 아니라고 믿는다.

그들(KBS 상층부)은 정권이 바뀐 지금도 책의 내용이 아니라 ‘한완상’이란 진보적 지식인의 이름을 ‘블랙리스트’에 올려놓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촛불혁명이 새 정부를 출범시켰다한들 이런 KBS(그리고 MBC)를 그대로 놓아두고는 우리 사회가 단 한 발짝도 앞으로 내딛지 못할 지경이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저작권자 © 자유언론실천재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