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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직 후, 장인의 한약방에서 건재를 썰던 시절[동아투위, 유신시절을 말하다(22)] 이명순 전 동아방송 PD, 전 동아투위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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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3.20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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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 광고탄압 시기에 겪은 감동적 경험

1974년 12월 하순 동아일보사에 대해 박정희 정권이 광고탄압을 가하기 시작하자 국민들 이 자유언론실천운동을 격려하고 사원들을 돕기 위한 광고를 다투어 냈다. 1975년 초 어느 날, 현관 경비실에서 내게 전화가 왔다. 당시 나는 동아방송에서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었다.

어느 분이 격려광고를 내려고 왔는데 나를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어떤 친구가 온 것일까? 달려 내려가 보니 낯선 모녀가 반색을 하며 내게 다가왔다. 영문을 모른 채 어리둥절해서 쳐다보니 어머니 되는 분이 내 손을 잡으며 자기를 기억하지 못하겠느냐고 물은 뒤 “안암아파트···”라고 하며 계면쩍은 듯 웃었다. 아! 그제서야 아픈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몇 달 전, 어찌어찌해서 살던 집을 내놓게 되어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적은 돈 가지고 새로 이사 갈 집을 찾는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회사일도 해야 하고, 당시 언론상황에 대한 불만으로 사내에서 직원들이 웅성거리던 때여서 집문제를 찬찬히 뜯어보고 곰곰이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다.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사는 집이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지에 대한 안목과 지식도 없이, 집을 옳게 볼 줄도 모르면서, 그야말로 우리나라 아파트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안암동의 아주 오래된 아파트를 덜컥 계약을 하고 말았다. 그런데 내가 의기양양하게 계약하고 돌아온 그 아파트를 답사, 확인한 어머니께서 “나는 그런 집에 못 간다!”며 돌아서시는 것이었다.

물론 사정을 해도 계약을 물릴 수는 없었고 이미 지불한 계약금(집값의 10%)이 당시 나에겐 엄청 큰 금액이었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와 아내는 물론 주변 사람들의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세월이 약이라고 그럭저럭 잊어버리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게 또 어디 덧나서 잘못된 것인가 해서 겁먹은 몰골로 있으려니 딸이 나서서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었다. 동아일보 광고사태가 나자, 자기네 아파트를 계약했다가 계약금을 포기한 사람이 동아방송에 근무한다는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들은 기억이 언뜻 나더란다. 그래서 지금 동아일보사에서 고생하는 분에게 너무 야박하고 매몰차게 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며칠 동안 어머니를 설득해서 내게 모시고 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딸은 계약금이 든 봉투를 내밀었다. 그리고 그에 더해, 온 김에 격려광고 하나 낼 테니 안내를 해달라고 했다. 그 어머니도 미안하다며 사람을 몰라보고 실례를 했다고 내 손을 잡아주셨다.

나는 그때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이 이 땅에서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새삼 절감하게 되었고 내가 그 일원으로 일하고 있다는 보람이 가슴 속에 차올랐다. 그리고 이런 분들이 있어서 이 세상이 살만한 곳이구나 생각하며 순간 감격의 눈물을 삼켰다. 거의 40년 전 이야기라서 지금은 그 분들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고 그 딸의 이름을 적어놓은 수첩도 없어졌으니 다시 만나 고맙다는 인사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손가락 잘린 이야기

1975년 3월 17일 동아일보사에서 폭력에 밀려 쫓겨난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 엔지니어들은 이튿날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를 결성하고 매일 아침 동아일보사 앞에 도열해서 침묵시위를 벌였다. 나는 투위의 주장과 활동을 담은 전단지를 내가 맡은 구역에 돌리고 우리의 아지트인 세종여관을 드나드는, 벌이 없는 생활로 소일하고 있었다. 당시 내 나이 만 30세, 동아방송 근무 5년차로, 결혼 2년만에 얻은 아이의 첫 돌이 바로 3월 17일이었다.

어느 날 아내 내게 말했다. 친정아버지께서 우리 아이가 주전부리를 외상으로 트고 드나드는 골목 앞 구멍가게의 외상값을 갚아주고 가셨다는 것이었다. 어린아이가 과자 사먹을 돈 달라고 엄마나 할머니의 치맛자락을 잡고 조르며 늘어지는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겨서, 우리 아이가 먹은 것은 치부해두었다가 월말에 계산하기로 하고 그 가게에 외상을 터주셨다고 한다. 처음에는 ‘집안의 첫 손자이니 외할아버지가 그러실 수도 있겠지’ 하고 무심히 들어 넘겼다. 그러나 손자 외상값 갚아주시는 일이 두세 번 계속되자 그러시지 말라고 말리는 것도 도리가 아니어서, 대신 내가 아이녀석 과자 값이라도 벌 겸 남는 시간에 장인영감이 하시는 일에 자원봉사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 의사를 아내에게 이야기하니 한약건재상을 경영하시던 장인께서 쾌히 받아주시어 한약방 근무가 시작되었다.

나는 처음에는 하릴없이 앉아 있기만 하다가 이왕이면 이 일 저 일 배워보자고 마음먹고 한약 이름도 외우고 약재를 써는 일도 해보았다. 그 한약건재상 앞을 지나가다 들린 동아투위의 동료, 선배들이 그 모습을 보고 전했는지 한약재 써는 일이 내 전담인 것처럼 사람들 입에 회자되기 시작했고, 드디어는 내가 작두질을 하다가 손가락을 잘렸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한약건재상 일을 하다보면 솜씨가 서툴러서 손이고 팔이고 조금씩 긁히기도 하고 다치기도 하는 법이다. 내깐에는 별것 아니었는데 옆에서 보는 입장에서는 그렇게 과장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본 NHK 방송에도 그런 소식이 나갔고 다른 외신을 좀 타기도 했다. 그때부터 2~3년 후, 고등학교 동창회에 나갔더니 한 친구가 반갑게 내게 다가왔다.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일본에 근무하면서 NHK TV에서 나를 보았다고 말하며 내 근황을 물었다.

동아투위 싸움을 일단 접고

장인 곁에서 어깨 너머로 보고 배우면서 이 일 저 일 거들다보니 한약건재상 일에 제법 익숙해져갔다. 사실 건재상 일도 마음 다잡고 달려들면 해볼 만한 일이었고 내 나름대로 전망도 있어 보였다. 그러나 내가 서툴지만 옆에서 도와주는 것을 마음 든든해하며 좋아하던 장인을 비롯한 집안 식구들은, 그래도 멀쩡한 젊은이가 한약방에서 썩을 수는 없지 않느냐는 의견들이었다. 나를 아는 많은 분들도 만날 때마다 같은 걱정을 해주며 다른 취직자리를 추천해주기도 했다.

나는 결국 새 일자리를 찾아 밥벌이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기자나 PD가 어느 날 아침 사회에 덜렁 내팽겨쳐지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 뿐더러 받아주려는 곳도 없었다. 신문과 방송 등 언론사는 우리를 절대로 안 받아주었고 언론사 경력으로 겨우 갈 수 있는 곳은 큰 회사의 홍보실 정도였다. 그러나 매사에 박정희 정권 눈치 보는 데 익숙해진 회사들은 우리를 받아주려 하지 않았다.

그러면 무슨 일을 해서 가족을 부양할 것인가? 이런저런 궁리 끝에 내가 착안한 분야가 ‘무역’이었다. 당시 가발을 비롯한 각종 봉재공장 등이 번성하기 시작해서 이런 제품들을 해외시장에 수출하는 사업이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그래서 수출입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인력에 대한 수요가 계속 늘어났다. 학교 선배가 경영하는 무역오퍼상에 오라는 제의도 있었고 친지들이 몇몇 회사에 나를 추천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무경험이 전무한 내 실력으로 회사의 기대나 추천하는 분들의 호의에 부응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신문 광고난에서 손바닥 반 만한 사원모집 광고를 보고 찾아간 곳이 ‘레본물산(주)’이라는 공구수출회사였다. 나는 그 회사에 취직이 되어 무역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공장을 제외하면 열 평도 안 되는 사무실에서 나는 사환보다 한 급 위인 말단 직원으로 일을 차근차근 배우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무역상사나 대기업에 들어간 친구들은 이미 나보다 까마득히 높은 직위를 차지하고 열심히 뛰고 있었다.

나는 코엑스 무역연수원이 주관하는 무역업무 실무과정 3개월 코스를 다니면서 수출입업무를 배웠다. 연수과정을 끝내자 수출입업무가 약간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 회사에서 약 1년 동안 근무하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무역업무에 대한 기초지식도 없는 내가 앞으로 써먹을 만한 직원이라고 여겼던지, 사장은 내가 각 부서를 돌아가며 수출입업무의 A부터 Z까지를 골고루 배우고 경험할 수 있게 해주었다.

파랑새가 어미 품에서 하늘을 날 수 있는 기력을 충분히 키우면 둥지를 떠나 날아가듯이, 그 작은 회사에서 무역업무에 대한 기본적 능력을 어느 정도 갖춘 나에게도 둥지를 떠날 기회가 왔다. 나를 날 수 있도록 키워준 회사를 배신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지만.

해외를 떠돌기 시작하다

어느 날 나를 아끼던 선배 한 분이 느닷없이 건설회사에 지원해보라고 적극 권유해왔다.
당시 해외 건설, 특히 중동지역에서 오일달러로 추진되는 각종 산업시설 건설에 한국 건설회사들이 뛰어들어 활발히 공사를 수주하면서 해외건설 붐이 급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국내 공사에 비해 규모가 큰 해외공사를 수행하려면 국내 건설사들의 몸집 불리기가 필수적이어서 해외공사에 투입할 근로자 수요가 급증하고 있었다. 특히 해외영업과 건설자재 수급 등을 위해서 어느 정도 영어 능력을 갖추고 무역업무에 경험이 있는 인력이 필요했다. 따라서 건설회사들의 봉급 수준도 높아졌고 해외 파견근무 경우에는 국내 봉급의 두세 배를 받을 수 있는 파격적인 대우가 큰 매력이었다. 나는 건설에 대해 전혀 문외한이었으나, 선배의 적극 권장으로 당시 가장 잘 나가던 건설사 중 하나인 D산업에 무역, 외자부문 경력사원으로 지원했다.

동아투위 사람들이라면 신문·방송사는 물론이고 일반 기업체에도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집요하게 방해하고 사찰하던 정보·수사기관이 마음을 돌렸는지, 아니면 나 정도는 요시찰 인물이 아니었던지, 나는 선배의 권유로 당시 대형 해외건설공사를 수주하여 경력직 사원을 많이 뽑던 D산업에 1977년 1월 4일자로 채용되었다.

그리고 1년 후, 이란 테헤란지점에 파견근무를 명령받고 여권 발급신청을 했다. 어느 날 외근하고 사무실에 돌아오니 그 회사 담당 중앙정보부원이 나를 찾았다면서 직원들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나를 에워쌌다. 이력서에 적은대로 그냥 언론사 출신으로만 알고 있던 동료들이 ‘무슨 일을 저질렀기에 기관원이 찾아왔을까’ 의아해하는 눈빛들이었다.

그래서 ‘나에게도 올 것이 왔구나’ 싶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근처 다방에서 그를 만났다. 다행히도 회사가 나를 채용한 건에 대한 시비가 아니고 여권 발급신청에 따른 신원조회를 하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었다. 그러나 면담의 결과에 따라서 사정이 변할 수도 있었다.

그 기관원은 아직도 자유언론에 대한 소신에 변함이 없느냐고 내게 물어왔다. 우리나라가 후진국을 벗어나 중진국에 들어선다고 하는데 그런 질문을 왜 하느냐고 내가 되물었다. 그는 어정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중진국 반열에 들어서면 이제 언론의 자유 정도는 기본이 아니냐고 내가 다시 물었다. 그는 약간 당황한 듯 오래 생각에 잠기더니 크게 결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이 선생님, 생각이 아주 건전하십니다. 해외에 나가서 우리 노동자들 위해 주시고 또 국위 선양을 해주십시오!”

그 후 여권발급 조건인 ‘서기관급 공무원의 신원보증’을 두 친구에게 받아서 제출하여 여권을 발급받고 1978년 4월부터 건설회사 해외근무가 시작되었다. 그러면서 일단 그 회사에서 ‘밥 벌어 먹으면서’ 세월을 보내다가 2~3년 후에는 다시 방송국으로 복귀할 수 있는 기회를 기다려보자는 아주 가느다란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시작한 건설회사 근무가 2, 3년이 아니라 20년으로 늘어났다. 아비가 동아일보사에서 쫓겨난 이튿날 첫 돌을 맞이했던 아들과 그 뒤에 태어난 딸아이는 성장해서 파랑새처럼 둥지를 떠나 장가와 시집을 가서 아들, 딸 낳아서 잘 키우고 있다.


** 이 글은 2013년 5월 10일 초판 1쇄로 발행한 〈1975 - 유신 독재에 도전한 언론인들 이야기〉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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