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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를 써놓고 이라크로 떠나다[내 인생의 취재기] 죽음의 전쟁터보다 더 힘들었던 고독감
〈강기석 전 경향신문 편집국장〉
  • 관리자
  • 승인 2017.03.08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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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전야

인간이란 살면서 시도 때도 없이, 때로는 아무 이유도 없이 외로움을 느끼게 마련이지만 그런 고독은 정신적 사치일 경우가 많다. 2004년 1월 15일부터 2월 5일까지 이라크에서 종군기자로 내가 겪은 절대 고독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생명의 위험은 처음부터 각오하고 갔으니 그렇다 치자. 주변에 나와 친밀하게 말을 주고받을 사람이 하나도 없는 상황. 생긴 것, 먹는 것, 입는 것, 생각하는 것이 180도 다른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 20여일을 살면서 그것을 느낀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살아오면서 쌓아 온 연륜과 그에 따르는 편의가 이곳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동양에서 온 이름 모르는 한 작은 신문사의 늙은 무명기자일 뿐이었다. 내가 존귀하거나 천하다는 것은 내 존재 자체가 그러하기보다는 나와 관계 맺은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 때 통렬하게 깨달았다. 언론인으로서 건방을 떨며 살아 온 내 인생 전체에 대한 깊은 반성의 기회였다.

나이 50이 결코 많은 것은 아니지만 전쟁터 같은 험한 곳을 뛰어 다니는 종군기자 역할을 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게 당연하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니까 정 싫으면 가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내 무의식이 무엇을 원했는가 와는 별도로 “가고 싶다” 혹은 “가야만 한다”는 의식이 당시 너무 또렷했다. 편집국장을 마친 후 대기자랍시고 앉아서 칼럼이나 끄적거리고 있는 것이 후배들 보기에 민망했던 점이 있었다. 영웅심리가 작동했는지도 모른다. 아주 조금은 세계사의 현장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외신이 아닌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내가 해석한 이라크 전쟁을 독자들에게 전해 주고 싶었다. 하기야 그건 전쟁도 아닌, 약소국에 대한 강대국의 일방적인 침략이었을 뿐이지만….

보험도 들지 못했다. 전례가 없다며 받아 주는 보험회사가 없다는 것이 서무의 전갈이었다. 그렇다고 회사가 특별히 뭘 보장해 줄 처지도 아니라는 것은 내가 더 잘 알았다. 그저 방탄복이나 하나 든든한 것으로 마련해 오라 했더니 방산업체에 특별 주문한 것이라며 방탄모 포함 총중량 8kg에 이르는 것을 한 세트 가져왔다. 유서를 쓰는데 눈물이 주루룩 흘러 글자가 번졌다. 개인통장, 비상금 등과 함께 봉투에 넣어 밀봉한 후 가장 신뢰하는 후배에게 맡긴 후 회사를 나왔다. 살아 돌아 오면 그대로 돌려받기로 하고…



전쟁 속으로

요르단 수도 암만에서 하루 자고 그 다음날 한밤중에 대절 지프차로 출발했다. 국경까지 5~6 시간, 국경에서 바그다드까지 다시 5~6시간 걸리는데, 더 위험한 국경~바그다드 길을 해가 있을 때 운행하기 위해 암만에서는 야밤에 출발한 것이다. 새벽녘 국경에 거의 이르렀을 즈음 차를 세우고 도로 옆 노상음식점에 들렀다. 케밥과 콜라를 시켜 먹으면서 둘러보니 음식점의 한 벽면에 명함과 각 나라 지폐들이 빽빽하게 붙어 있었다. 나 보다 먼저 이곳을 거쳐 간 여러 나라 기자들의 것이었다. 내 것도 하나 붙여 놓고 다시 국경으로 출발했다.

아직도 짙은 어둠속에 도착한 국경의 정경은 스산하기 짝이 없었다. 사막을 가로 질러 설치된 겹겹의 철조망과, 초소와 주유소 가게 등에서 번져 나오는 몇 개의 불빛만이 사람의 존재를 느끼게 해 줄 뿐이었다. 이런 곳에서는 일부러 보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 허공에 걸린 조각달이었다. 아주 멀리까지, 군데군데 돌무더기가 쌓여 있는 사막의 윤곽을 희끄무레 드러내 주는 이 조각달이야말로 갸날프면서도 기괴했지만 동시에 이 시각 이 땅에서 가장 분명하고 뚜렷한 존재였다. 많은 이슬람 국가들의 국기에 왜 이 조각달이 들어 있는지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해 뜨기 직전 바그다드로 출발했다. 나 같은 손님을 태우고 이곳을 자주 다닌다는 팔레스타인 출신의 운전사가 지금은 이 도로가 그다지 위험하지 않다고 거듭 말했지만 나는 방탄복과 방탄모를 챙겨 입었다. 수 개월 전 이곳에서 일하던 한국인 노무자 몇 명이 차를 타고 이동하다가 총에 맞아 사망한 사건을 생생히 기억했기 때문이다.
사담 후세인 시절 한국 기업이 참여해 만들었다는 도로는 넓고 튼튼했다. 다만 전쟁통에 군데군데 폭격을 받아 무너진 곳이 있어 우리는 가끔씩 우회로를 찾아야 했다. 해가 뜨면서 도로에 통행차량이 부쩍 늘었다. 가끔씩 장갑차를 앞세운 미군 순찰대가 도로를 오가며 경계하는 모습이 목격됐다. 긴장이 풀렸는지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



전쟁터에서 만난 사람들

바그다드에 도착해서 교민 박상화씨(당시 47세)를 만났다. 이라크에서 자원봉사활동을 했던 한 시민단체 활동가를 통해 소개받은 인물로, 내 취재활동을 도와주기로 인터넷 이메일을 통해 사전 약속한 터였다. 그는 현지 안내인과 차량, 운전기사도 알선해 놓고 있었는데, 나와 몇 마디 나눈 후 아주 고마운 뜻밖의 제안을 했다. 위험한 호텔에 있을 것 없이 아주 자기 집에 기거하자는 것이었다. 가능하면 취재 때도 동행해 주겠다고 했다. 유능한 기자가 되기 위해서는 다양하고 깊이 있는 취재원들을 확보해 놓는 것이 절대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외국의 위험지역을 취재할 경우 현지 사정에 정통한 유능한 가이드가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나는 그 점에서 운이 좋았던 셈이다.

박 선생은 청년 때 대기업 현지 직원으로 파견 나갔다가 이라크 여성과 결혼하여 21년째 이라크에서 살고 있는 교민이다. 부인은 소수민족의 하나인 투르크만 출신으로 한국대사관에서 일하고 있었다. 나는 그 집에 기거하면서, 구태여 별도 취재를 할 필요도 없이, 전쟁이 몰고 온 일반인들의 생활의 피폐함을 몸소 경험했다. 가장 절실한 것이 전기와 상하수도, 통신문제였다. 하루에 10여 차례씩 전기 공급이 끊어졌는데 그나마 박 선생네처럼 살만한 가정에서는 개인 자가 발전기를 설치해 견뎠다. 수돗물은 마실 수가 없어 끓여 먹거나 비싼 생수를 사 먹을 수밖에 없었다. 기자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통신수단인데 미국이 전쟁 중에 특히 통신시설을 집중 공격했기 때문에 이라크의 통신망은 대단히 열악했다. 가정에서 국제전화를 걸려면 전화카드를 사서 카드에 있는 비밀번호를 입력한 후 지불한 돈만큼 통화를 할 수 있는 데 이것이 자주 끊겼다. 할 수 없이 시내 몇 군데에 설치되어 있는 통신센터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마다 박 선생은 자신이 직접 차를 몰아 데려다 주었다.

그가 소개한 수아드 압둘 알 카림(당시 50세)이라는 여성 가이드는 80kg이 넘을 것 같은 거구인데 사담 후세인과 같은 수니파 출신으로 이라크 지배층에 나름대로의 인맥이 있었고 조기 영어교육을 받아 뛰어난 영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 억척스럽다고 할 만큼 성격도 아주 적극적이어서 내가 부탁한 일은 반드시 해낼 각오가 되어 있었다. 일찍 남편을 여의고 혼자 친정 부모와 5명의 자녀를 부양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라고 박 선생이 귀띔했다. 어딜 가도 이 여자와 함께 가면 최소한 저항 세력에게 납치당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믿음이 들었다. 실제로 수아드는 내가 바그다드 시내는 물론 이라크 남부의 나시리야에서부터 북부의 키르쿠크, 아르빌에 이르기까지, 20여 일간 겁도 없이 이라크 전역을 휘젓고 다닐 때 박 선생, 운전기사 알리와 동행하면서 완벽하게 가이드 역할을 해냈다. 그녀는 또 이라크의 유력 정치인들과 무사 알 무사위 바그다드대학 총장 등 학자들과의 인터뷰는 물론 경찰서, 현지 언론사 방문 등을 최선을 다 해 알선했다.



아브라함의 유적지에 주둔한 외국 군대

아무리 전기, 수돗물, 통신 사정이 좋지 않다고 하지만 그래도 수도 바그다드에서의 생활은 지방에 비하면 천국이라 할만 했다. 한반도처럼 남북축으로 발달한 이라크는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티크리트~모술, 키르쿠크~모술, 남쪽으로는 디와니야~나시리야~바스라, 쿠트~아마라~바스라를 연결하는 X자 형태의 굵은 고속도로를 끼고 띄엄띄엄 군소도시와 촌락들이 형성됐는데 마치 60년대 우리 농촌을 연상케 했다. 내 이라크 취재의 하이라이트는 서희 제마부대가 주둔해 있는 남쪽의 나시리야로 내려갔다가 다시 자이툰 부대가 추가 파병될 키르쿠크를 취재하기 위해 북쪽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나시리야 출장은 2박3일, 키르쿠크 취재는 내친 김에 아르빌까지 치고 올라가는 바람에 3박4일이 걸렸다. 이라크에서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 자체가 모험이다. 어디에서 총알이 날아들지 모르는 총격의 우려도 있었지만 당장은 열악한 도로 사정과 과속 운전이 더 문제였다. 말이 고속도로지 바그다드 인근을 제외하고는 거의 왕복 2차선인데다 군데군데 땅이 패인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이런 길을 주로 시속 150km를 놓고 반대 차선으로 오는 차들을 피해 추월을 해 가며 곡예운전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오금이 저리고 속이 메슥거리지 않을 수가 없다.

간신히 나시리야에 도착해 보니 한국군은 도심에서도 한참 떨어진 허허벌판에 미군, 이탈리아 군과 함께 주둔하고 있었다. 말이 함께 주둔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미군과 이탈리아 군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부대 출입도 미군의 통제를 받아야 했다. 내가 도착하기 며칠 전, 이라크 게릴라의 폭탄 공격으로 부대 초소에서 근무하던 이탈리아 군인 10여 명이 죽거나 다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라크 공군기지였다는 이곳에는 부대 내에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의 탄생지가 있었고 폐허가 된 지구라트의 밑동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옛날 수메르 시대 때 종교의식을 치르던 제단이라는 것이 정설인데 일설에는 바벨탑의 잔해라고도 했다. 전전(戰前)에는 한국 등의 성지순례단이 빼놓지 않고 들르던 곳이었다고 한다. 성경의 무대는 지금의 이스라엘 땅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요르단, 레바논, 이라크 등 중동 전역에 이른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됐다. 수천 년이 흐르면서 민족이 갈리고 종교가 갈린 데다, 2차 대전 후 유럽에 의해 이스라엘이 만들어지면서 전 중동이 구획정리하듯 직선형 국경선으로 나누어 진 것이 현재의 모습이고 거기에서 중동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분쟁 지역에서의 한국 언론

나보다 몇 시간 뒤에 MBC의 이진숙 기자가 부대에 왔다. 당시만 해도 그녀를 한국의 대표적인 중동 전문기자이며 종군기자로 꼽는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CNN의 크리스티안 아만푸어 기자를 연상시켰다. 후배이면서 여자이기까지 한데도 그녀를 만나자 갑자기 이라크라는 곳이 덜 위험한 곳으로 느껴지니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이나 성별을 불문코 베테랑의 저력이란 것이 그런 것인 모양이다. 좀 늦은 결혼을 했는데도 여전히 처녀 때처럼 중동을 휘젓고 다니는 모습이 더욱 존경스러웠다. 나와는 정식으로 인사를 나눈 적이 없는데도 금방 나를 알아보고 반가워하는 것이 고마웠다. 이진숙 기자는 나와 헤어진 후에도 계속 이라크에 남아 저항세력들과 은밀히 접촉해 그들의 작전 모습을 찍은 동영상을 보도해 세계 언론을 깜짝 놀라게 했다. 오랫동안 이라크를 취재하면서 사담 후세인 대통령을 직접 인터뷰하는 등 수니파 지도자들과 깊은 친분을 쌓았기에 가능한 취재였다.

그 전 해에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할 당시 어떤 신문사들은 미군의 꽁무니를 졸졸 따라 다니면서 취재 보도한 것(embedding)이 무슨 대단한 종군 취재나 되는 것처럼 대서특필하며 요란하게 떠벌렸는데, 그것이 위험지역에 직접 뛰어 들어가 취재하는 이진숙 기자의 경우와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바그다드에 직접 들어가 취재했다고 다 똑같은 것이 아니다. 박 선생이 전하기로는 1차 걸프전 때 이진숙 기자의 활약에 당황한 라이벌 방송사에서 기자를 급파했는데 이 기자는 현장에는 한 번도 나가지 않고 오로지 호텔에 죽치고 앉아 현지 고용인들이 번역해서 가져다주는 현지 언론들의 기사를 인용해 보도하더라는 것이다. 그때의 좋은 인상이 남아 있기 때문인지 그 후 나이 들어가면서 섬찟하게 변한 이진숙 기자의 모습이 나는 엄청 슬프다.

한참이 지난 후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한국인 선교단 납치 사건으로 인해 분쟁지역에서의 취재를 둘러싸고 언론계에 많은 논란이 있었다. 우리 군대가 파견되어 있는 나라에서 우리 국민이 20명씩이나 납치된 사건인데도 우리 기자는 한 사람도 현지에 가지 못하고 전적으로 외신에만 의존해 보도해야 하는 상황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나는 우리 언론계가 그러한 자성의 결과로, 분쟁지역 전문기자를 양성하거나 지금보다 훨씬 많은 기자들을 훨씬 적극적으로 파견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선 기사에 대한 수요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군은 미국처럼 ‘점령’하거나 ‘평정’하기 위한 국가적 목적으로 파병되는 것이 아니다. 지극히 제한된 목적으로 파병되는 군에 대해 국민적 관심이 모아질 리 없고 따라서 언론이 특별히 취재해서 보도해야 할 유인이 없는 것이다. 만일 기자가 파견된다 해도 군부대 내에 머물지 않는 한 일반 여행객 이상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 서방의 유수 언론의 종군기자들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는 한다. 종종 죽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의 뉴스는 전 세계를 시장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취재할 가치가 있으며, 반대로 그런 이용 가치 때문에 양측으로부터 오는 위험의 정도가 약한 것이다.



이라크 종군에서 얻은 것

내가 이라크를 다녀 온지 두 달여 후에 한국인 목사 7명이 납치됐다 풀려나더니 그 두 달 후에 결국 김선일씨가 납치돼 참수당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보면 내가 사지를 헤매다 나온 것만은 분명한데 사실 현지에 있을 때는 처음 하루 이틀을 빼고는 그렇게 위험을 느끼지 못했다. 6?25 전쟁을 겪었고 월남전에 참전까지 했던 집안 어른이 “전쟁이란 원래 그런 것”이라고 했다. 한국전쟁처럼 치열한 전쟁에서도 후방에서는 비록 삶이 피폐했어도 일상적인 죽음의 공포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전선이 불분명한 월남에서도 시장거리의 술집에서 폭탄이 터져 여러 사람이 죽고 상했는데도 몇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시장거리가 다시 흥청댔다는 것이다.

나는 죽음의 공포보다는, 익숙한 사회와의 단절로 인한 고독감으로 더 심하게 고통을 겪으면서 기자라는 나의 직업에 대해 더 겸손해져야 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아무도 몰라주는 이라크의 바닥을 박박 기며 모든 것을 나 혼자 판단하고 결정하고 해결하면서 한국에서의 기자라는 것이 얼마나 좋은 환경에서 대우를 받으며 일하는 직업인가를 새삼 알았다. 우리 사회가 더 양질의 기사를 기자에게서 기대하기 때문에 그러한 대우를 해 주는 것인데 그것을 제 잘났기 때문인 것으로 알고 교만을 떤다면 얼마나 낯 뜨거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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