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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면집인데요, 아버님이 돌아가셨습니다”[내 인생의 취재기] 마포 유명 평양 냉면집 ‘을밀대’와 나
〈조병래 전 동아일보 기자〉
  • 관리자
  • 승인 2017.02.08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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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전(2005년) 여름이었다. 전화가 왔다.
“을밀대인데요,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전화 드렸습니다. 아버님이 병원에 계시면서 ‘조 기자를 꼭 봐야 하는데’라고 여러 번 말씀하셔서”
김인주 씨 아들의 전화였다.

일본의 식민지 강점기인 1930년대 말이었다. 평안도에 사는 비결파(秘訣派) 김 씨는 정감록을 신봉했다. 비결파는 난세에 굶어죽지 않고 전란도 피할 수 있는 곳, 십승지를 찾아가는 것만이 살 수 있는 길이라고 믿고 있었다. 김 씨는 식솔을 이끌고 경상북도 소백산 아래로 이주했다. 어린 아들 김인주도 아버지에 이끌려 평안도에서 경상도로 왔다. 을밀대 냉면집을 소개하는 기사의 일부다.

을밀대 창업자 고 김인주 씨는 1936년 평안도 안주에서 태어났고, 해방 이전에 가족들과 함께 대구로 이주했다. 김 씨는 열여덟 살이 되자 대구의 ‘원산면옥’에 취직했고, 1971년엔 자신의 첫 냉면집을 서울 은평구 응암동에 열었다. 식당 이름은 평양에 있는 누각인 ‘을밀대’에서 가져왔다. 현재 위치인 서울 마포구 염리동으로 옮긴 시기는 1976년이었다.


1990년대 초 필자가 〈동아일보〉 생활부에 근무할 때였다. 선배 되는 지인이 좋은 냉면집 있는데 가보자고 해서 서울 염리동사무소 옆에 있는 그야말로 ‘동네 냉면집’에 불과한 그 집을 갔다. 요리 담당 기자라고 해서 요리 전문가는 아니다. 냉면 맛을 먹어봐도 잘 모른다. 단지 그 냉면집을 소개한 분을 신뢰해서이다. 그 선배는 황해도 출신이고 선친이 냉면을 좋아해서 월남해서도 안산에 살면서 집에 목제 냉면 틀을 두고 냉면사리를 뽑아 먹었다고 한다. 어쨌든 내가 맡은 지면에 음식점 소개하는 기사를 짤막하게 썼다.

당시에는 음식점을 소개해도 전화번호나 주소를 적지 않는 것이 관행이어서 ‘염리동사무소 옆 을밀대’라고만 썼다. 신문이 배달된 날은 휴일이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그날 동사무소 당직자는 을밀대 장소를 묻는 전화에 하루 종일 시달렸다고 한다. 동사무소 직원은 ‘도대체 이 동네에 그런 집도 있었나?’ 하는 생각에 한 번도 가지 않은 을밀대를 찾아가서 전화 받느라 고생한 일을 말했다. 주인이 미안하다며 냉면 한 그릇을 대접했다고 한다. 기사 나간 후 며칠 뒤 김인주 사장이 초청했다. 부장과 함께 갔는데 수육도 나왔다. 김 사장이 말했다.
“오늘은 대접하는 날이나 음식 값을 안 받겠다.”
“오늘만 그냥 먹겠다, 다음에도 안 받으면 안 올 것이다.”
한참 실랑이를 끝에 나온 타협안이었다.
그런데 김 사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동아일보라고 전화가 와서 월간지를 구독하라고 하는데.”
무슨 사정인지 금방 알았다. 신문에 업체 기사가 나가면 월간지 총판 직원이 찾아와 구독을 요구하는 일이 당시에는 흔했다. 그들은 〈동아일보〉 직원이 아닌데도 직원 명함을 임의로 만들어 갖고 다녔다.

그 기사가 나간 뒤 을밀대는 장사가 아주 잘 됐다. 돈을 많이 벌어 식당을 확장했다. 옆집도 사고 뒷집도 사들였다. 나중에는 분점도 냈다. 김 사장은 〈동아일보〉 기사를 액자에 오려 넣어 홀에 걸어두었다. 언젠가 이 액자에는 〈동아일보〉 기사 대신에 일본 언론의 기사로 바뀌었다. 일본 언론까지 소개된 것이다.

을밀대 주인 김인주 씨는 당초 냉면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지금도 걸려 있을 냉면집의 ‘을밀대’ 사진은 선친이 일제시대에 평양 유람 갔을 때 찍은 사진이라고 한다. 김인주 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했는지도 모르겠다(그 집안이 가난했던 듯하다). 여기저기서 막노동도 했고 냉면집에서 일을 하다가 냉면 만드는 법을 익혔던 듯하다(김인주 씨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냉면을 익히게 된 과정이 어떠하든 김인주 씨는 냉면으로 성공한 것이다. 대기업에 다니던 아들을 강압적으로 직장을 그만두게 해 냉면집을 이어가게 만들었다.

을밀대 냉면은 메밀이 많이 들어가서 거칠고 굵다. 툭툭 끓어지기도 한다. 그것이 원래 평양의 냉면이라고 한다. 요즘 전분이 많이 들어가 가늘고 부드러우며 쫄깃한 냉면은 서울사람 입맛에 맞춰 개량된 것이다. 오래된 냉면집들도 손님을 끌려면 서울사람 입맛에 맞출 수밖에 없다. 육수도 고급으로 만들어야 한다. 값 싼 닭다리가 아니라 비싼 소뼈와 고기로 육수를 끓여내야 한다. 을밀대를 찾은 손님들은 대부분 옛날에 먹던 냉면 맛이라서 다시 찾는다고 한다. 젊은 층은 을밀대 냉면이 맛없다고 한다. 맛은 취향이라서 어느 것이 좋다 나쁘다고 할 수 없다. 을밀대 냉면 맛을 김인주 씨가 선택한 것이고 이를 찾는 손님이 있으면 되는 것이다. 김인주 씨 노력의 결과이다. 내가 쓴 기사는 이를 좀 더 알린 것일 뿐이다.

사족이지만 북부지방에서 냉면은 구황식품이다. 농작물에 여름 냉해가 들면 9월에 메밀을 파종해 그것으로 겨울을 났다. 냉면을 뽑아먹든 조랭이로 먹든 영양가는 별로 없다. 더구나 메밀에 독성도 약간 있다. 독성 없애려고 무를 넣고 영양을 보충하려고 마을 지주가 나눠주는 편육을 넣어 먹었다(겨우내 그냥 메밀만 먹고 봄에 밭에서 일하면 하늘이 노래져 픽픽 쓰러진다고 한다).

김인주 씨가 작고했을 무렵 필자도 실직 상태여서 개인적으로 어려웠을 때였다. 김 씨 아들의 전화를 받고 문상 가기 전에 을밀대를 좋아하던 신문사 선배와 통화했다. 내 처지를 하소연 하다가 김인주 씨 얘기가 나온 듯하다. 그런데 다음날 신문에 김인주 씨의 오비츄어리(부음기사)가 게재됐다. 뜻밖이었다. 그래서 다시 전화했더니 선배가 그런다. “음식점 주인의 오비츄어리가 동아일보에 나온 것은 처음 아닌가.”

“빨리 가서 육수를 만들어야 되는데…….”
해마다 여름이면 각 언론이 선정하는 ‘맛있는 냉면집’에 빠지지 않는 평양냉면집 을밀대(서울 마포구 염리동). 을밀대를 43년간 운영해 온 김인주(金仁周·69·사진) 씨가 지병인 폐암으로 10일 새벽 별세했다.
그는 병원으로 실려 가기 전날인 7일까지 손수 육수를 만들었다. 그는 병원에서도 “이제 육수가 모자랄 텐데 어서 빨리 퇴원시켜 달라고 해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가족이 전했다.
평양이 고향인 고인은 광복 전 월남한 실향민. 어릴 적부터 유독 냉면을 좋아했던 그는 10대 후반 무렵부터 부산의 냉면집을 돌아다니며 냉면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고인의 부친은 평양식 냉면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1962년 상경해 꿈에 그리던 냉면집 주인이 됐다.
장남 김영길 사장은 “냉면 맛이 강하지 않아 처음에는 장사가 잘 되지 않았다. 열 분이 오시면 두 분 정도가 만족해 하셨는데 그 두 분은 평생 단골이 됐다”고 말했다. 을밀대의 냉면 맛은 평양냉면의 원조인 ‘평양 옥류관’의 냉면 맛과 가장 유사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김 씨의 사망으로 10일 휴업에 들어간 을밀대는 15일부터 영업을 재개한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석남 씨와 2남(영길, 영일 씨) 2녀(춘강, 순강 씨)가 있다. 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 발인은 12일 오전 5시」(2005. 8. 11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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