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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투위’ 간판을 내릴 날은 올 것인가[동아투위, 유신시절을 말하다(12)] 문영희 전 동아투위 위원장, 전 동아일보사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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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1.09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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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있다. 역사에서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단기적으로는 틀린 경우가 많다. 1975년 발생했던 동아사태는 바로 이런 경우의 하나일 것이다. 탐욕덩어리인 언론자본과 단군 이래 최고 폭군격인 박정희의 칼이 야합하니 민중의 사랑을 받던 한 언론사가 힘없이 쓰러졌다. 동아일보 사주 김상만은 한때 박정희 군사독재 권력과 싸우는 척했다. 독자들은 열광했다. 그러나 광고탄압이 들어오자 그는 신문사 간판을 지키기 위해 동아일보를 버렸다. 그 신문은 젊은 기자들이 피땀 흘려 가꾸어 놓은 덕으로 한동안 한국 언론의 표상이었다. 이후 자유언론 정신은 동아일보에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로 넘어왔다.

동아에서 두 번이나 해고당하다

나는 19671월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기자로서는 글다운 글 한 편 못 써보고 두 차례 해고나 당해야 했던 무능하고 불운한 해직기자이다. 19743월에는 전국출판노조 동아일보사 지부 부지부장을 맡았다가 노조 결성 당일 해고되었다. 그러나 한 달 만에 복직되었다.두 번째는 1년 후인 19753월 해고당한 이후 37년째 복직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무기정직을 당했던 기록도 있다. 19712월 현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인 박근혜 양이 서강대 입시를 치르던 날, 자동차를 타고 대학교 정문을 들어갔느냐 아니냐의 진실게임에 말려들어 무기정직을 당했다가 역시 한 달 만에 풀렸던 사건이다. 나의 동아일보사 근무 8년 남짓은 박정희 군사독재의 발악이 최고조로 치닫던 시기에 해당한다. 이런 시기에 기자를 하고도 감옥엔 못 갔으니 감옥 운은 없었던 것 같다.

신문사를 떠난 지 너무 오래라서 지금은 기억이 희미하지만 내가 겪어야 했던 첫 시련은 19712월에 닥쳐왔다. 나는 당시 동아방송(DBS) 사회부에서 경찰서를 출입하고 있었다. 박정희의 딸 근혜 양이 마포경찰서 관내인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응시했다. 대통령의 자제가 대학 입시를 치르면 그의 동정은 당연히 뉴스가 된다. 나는 회사가 보내준 취재차량을 타고 동료 기자 4명과 함께 서강대로 향했다. 대학 정문 앞에서 한 일간지의 수습기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우리에게 박 양이 고사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하고 간단한 취재를 마쳤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박 양은 관용차를 탄 채 수위실을 통과하려다 수위의 제지를 받아 차에서 내려 걸어갔고, 총장실로 들어가 차 대접도 받았다는 말을 했다. 얼마 당시 박 대통령이 고위직 공무원들의 관용차 이용을 단속하겠다는 발표를 했던 무렵이라 우리는 근혜 양이 차를 타고 고사장에 나타난 것은 문제라고 인식했다. 이를 기사화하여 데스크로 송고했다. 오전 11시 뉴스에 보도되었다. 얼마 후 청와대 출입기자가 육영수 여사의 말이라며 근혜는 차를 타고 들어가지 않았다며 정정 보도를 요청했다고 내게 알렸다. 빨리 회사로 돌아와 해명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신문사로 돌아와 김영상 심의실장을 면담했다. 그는 왜 시끄럽게 했느냐. 지금이 어떤 시대냐? 설사 차량을 타고 고사장 가는 것을 목격했다 하더라도 청와대가 아니라면 아닌 것이다.” 한 시간 가량 지나 오보라는 이유로 무기정직 처분이 내려졌다. 이어 방송뉴스담당 이동수 부국장이 나를 불러 자네 징계에 대해 입사동기들이 소란을 피울 우려가 있으니 정직 기간에도 광화문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고 멀리 떠나 조용히 쉬고 있으라고 충고했다.

나는 다음 날로 서울을 떠나 강화도 행 버스를 탔다. 무작정 떠나는 길이지만 늘 철종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라 한 번 가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한 달 가까이 전등사 입구 전등각 여관에서 책이나 보며 쓸쓸하게 소일하고 있는데 입사 동기인 서권석 기자가 편지를 보내왔다. 한 번 찾아오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며칠 지나 갑자기 나타났다. 뜻밖에 이동수 부국장과 함께 왔다. 이 부국장은 양주도 한 병 가져왔다. 그는 여기 오는 길에 김 사장을 뵈었다. 사장에게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는 편지 한 장 보내게. 그러면 좋은 소식 있을 거야.” 이 편지의 효과인지 몰라도 나는 한 달 만에 무기정직이 풀려 다시 출근하게 되었다. 나는 이 사건을 겪으면서 박정희 정권의 잔혹성을 실감했다. 요즘 박근혜 후보가 노인과의 악수를 거절하는 오마이뉴스 사진을 보고 딱 그 사진을 찍어 악랄하게 유포했다라는 표현을 썼는데 정말 악랄한 것은 언론이 아니라 박정희 DNA를 가진 박근혜라는 점에서 나는 강화도 유배시절을 떠올렸다.

19743월에는 노조 결성과 관련하여 해고처분을 받았다. 그 사연은 이렇다. 어느 날 재무부를 출입하는 장성원 선배가 5시 반께 한국은행 기자실에 있는 나에게 전화를 주었다. “오늘 저녁 무슨 약속 있느냐였다. 없다고 했더니 회사로 들어가지 말고 근처 한밭식당 앞에서 만나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택시를 잡아타고 장충동 김두식 기자의 집으로 갔다. 바로 그 집에서 심야에 전국출판노조 동아일보사 지부 창립총회가 열린 것이다. 나는 부지부장으로 선임되었다. 이때 이것이 나의 운명인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순순히 수락했다. 노조 간부이니 해고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한 달 후 무조건 사면되었다. 동아노조는 박 정권의 방해와 회사 측의 반노동성으로 인해 인정을 받지 못하고 법외노조 역할을 했었다.

서생원같은 선배 언론인

그래서 태어난 것이 ‘10·24 자유언론 실천운동이다. 나는 ‘10·24 선언발표 이후 좀 조용히 지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선언이 실천되려면 데스크와 또 싸워야 하는데 나만 뒤로 빠지는 것은 비겁한 처사라고 생각했다. 데스크들이 우리 젊은 기자들을 너무 실망시킨 것이다. 그들은 기자들의 자유언론 실천정신을 제대로 이해하려 들지 않은 데다, 기관원들은 여전히 밖에서 전화로 지시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앙정보부는 일찍부터 신문사 데스크들에게 정기적으로 촌지를 주면서 통제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래서 당시 언론사 데스크 치고 나는 깨끗했고, 소신껏 일했다라고 말할 사람은 아마 드물 것이다. 더구나 이동수 후임으로 온 뉴스담당 부국장 김진현은 김상만 사장을 박정희보다 더 끔찍하게 모시는 서생원적 언론인이었다.

자유언론실천선언 이후 이 같은 내부의 저항과 비협조를 돌파할 방법은 자유언론 실천정신을 실행할 대책 마련이었다. 기자협회 장윤환 분회장은 이런 목적으로 분회 산하에 30여 명의 자유언론실천 특별위원회(실천특위)’를 구성했다. 나도 방송뉴스 기사를 다루는 실천특위 위원의 한 기자로 위촉을 받았다. 우리는 매일 오후 6시 조사부에서 모여 그날의 신문·방송 보도 내용을 분석, 평가했다. 그리고 논의된 내용을 알림이라는 이름의 분회 소식지에 실어 편집국 모든 부서에 회람시켰다. 데스크들은 이 알림을 읽으면서 때로는 불쾌하기도 했겠지만 드러내놓고 불평할 분위기는 못 되었다. 오히려 일부 데스크들은 자유언론 실천정신을 차츰 이해하여 가는 것 같았다.

신문과 방송이 날로 젊은 기자들의 뜻대로 자유롭게 제작되니 타사 기자들이 부러워했다. 나는 당시 방송국 정경부 소속으로 건설부를 출입하고 있었는데, 동료 기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다. 점심식사를 하자는 요청이 줄을 이었다. 그때마다 우리만 싸우면 반드시 진다. 너희들 회사도 투쟁대열에 동참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부처에서 받는 촌지 없이는 살기 어려워 해고를 두려워했고, 이미 엄혹한 세상에서 적당히 살자는 타협주의에 젖어 있던 터라 더 이상 고민하는 것 같지 않았다.

물론 다른 신문사 기자들이라고 조용하지는 않았다. 당시엔 종이신문으로 동아일보 외에도 두 개의 조간인 조선일보와 한국일보, 석간인 중앙일보가 있었는데, 동아일보 기자들의 10·24선언 발표 이후 이들도 이 투쟁을 지지하는 결의문 형식의 지지선언을 자사 지면에 발표한 바가 있었다. 또 중앙일보와 동양방송(TBC) 기자들은 합동으로 돈을 모아 동아 지면에 격려성의 성명서를 싣기도 했다. 다만 그들에게는 회사 안팎의 압력을 이겨내며 그 의지를 지면이나 뉴스보도를 통해 실천할 만한 집합적 용기는 부족했던 것이다.

자유언론실천운동이 타사로 확산되지 않은 채 동아 기자들만의 외로운 투쟁이 전개되는 것을 본 집권당인 공화당이나 언론주무부서인 문화공보부는 정보부와는 달리 공개적으로 동아일보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공화당 의장 박준규는 동아일보가 편집인이 아닌 기자들의 손에서 만들어진다라고 주장했고, 문공부 장관 이원경은 동아가 과열상태라는 말로 노골적인 비난과 공격을 퍼부었다. 이는 동아에 대한 경고 신호였다. 우리의 투쟁을 중단시킬 목적이었다. 그 같은 협박에 위축당할 우리가 아니었다.

기사보다 화끈하고 감동적인 격려광고

나는 11월 말 어느 날 오후 출판국 쪽으로 가기 위해 2층 사장실 앞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중정의 언론담당 최고위 책임자인 이동복이 사장실에서 나오는 것을 목격했다. 아마 동아일보 담당 하수인을 통해 신문사 측에 무슨 지시(?)를 내렸는데 편집국 쪽이 말을 듣지 않아 직접 찾아온 것으로 이해했다. 그 무렵은 기자들의 저항으로 정보부원이 편집국에 상주하지 못할 때였다. 그런 고위 인사가 직접 신문사를 방문한 것은 협박하러 온 것이지, 무슨 감사위로의 뜻을 전하러 온 것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한국일보 출신인 그는 신문사에는 저승사자 같은 존재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1면 하단 광고가 없는 채 신문이 발행되었다. 나처럼 외근하는 기자들은 회사 내부 사정에 어둡기 마련이었다. 오후 6시 전후하여 회사에 들러 정보보고라는 내부 문서를 작성하여 데스크에게 보고하는 일이 일상화되어 있던 때라 회사를 거쳐서 퇴근을 하는데 내근기자를 따로 만나지 않으면 회사 사정을 잘 알 수 없었다. 그러니 낮에 출입처에서 본 동아일보 1면 하단의 백지 지면 이유에 대해 자세한 내막을 몰랐다가 다음날 알았다. 그때서야 우리의 자유언론운동이 점점 위기 국면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특별히 기억하는 광고는 1230일자였다. 신문의 1면에 통상적인 상업광고 대신에 존경받는 언론인 홍종인 씨가 개인 성명을 낸 것이다. 그 내용은 언론자유와 기업의 자유라는 제목으로 광고탄압을 중단하라는 주장이었다. 나는 이 성명성 격려광고를 보면서 동아일보에 대한 광고탄압이 점차 독자들의 분노를 촉발시킬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렇지만 그런 탄압이 그렇게 오래 걸릴 거라든지가 또는 내가 이 사건으로 해고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1974년은 광고탄압에 대한 분노와 낙양의 지가를 올리는 동아일보 보는 재미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가운데 저물어 갔다. 기사를 읽는 일보다 신문 하단의 격려광고를 읽는 일이 더 재미있었다. 그것은 민중의 소리 없는 반유신 저항이었기 때문이다. 날이 갈수록 상업광고는 줄어들었다. 이 빈 광고 지면을 시민들이 호주머리를 털어 메워주었다. 동아일보를 아끼고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애국시민은 너무도 많았다. 19751월 중순 어느 날 오전, 출입처로 가기 위해 1층 광고국 앞을 지나가는데 웬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정문 경비 직원에게 물었더니 격려광고를 내려 온 사람들이라고 신이 난 듯 설명해 주었다.

그 때 이런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나도 우리 아이들 이름으로 격려광고를 하나 내야지.” 그래서 1만 원 짜리 광고 면을 샀다. 격려 광고 지면은 최소단위가 1만 원이었다. 그 날 저녁에는 마침 고교 동기들로 이루어진 수요회라는 친목 모임이 근처 동양다방에서 열렸다. 마침 11명이 참석했다. 그들에게 동아일보 사정을 설명하고 우리 계명(契名)으로 격려광고를 내자는 제안을 했다. 모두 흔쾌히 동의하고 즉석에서 1만 원씩을 거둬 나에게 넘겨주며 문안은 알아서 하라고 했다. 이렇게 하여 다음 날 신문 2면에 나의 모교 교훈을 따서 학행일치(學行一致) 못한 부끄러움 이 광고로 속죄합니다. 수요회 일동이라는 10만 원짜리 광고를 싣게 되었다.

이 같은 유신정권과의 투쟁 결과, 신문사 이미지는 날로 좋아져 가는데 2월 말부터 흉흉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자유언론투쟁의 주동자들이 다 목이 잘릴 거라는 말이었다. 회사 측이 지금 겉으로는 기자들을 고무, 격려하는 척 하지만 이미 정보부 측과 대량해고 밀약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믿고 싶지 않았다. 어려운 때이니 이런 소문이 나올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인촌정신을 믿고 있었다. 인촌 김성수는 일제 치하에서 동아일보를 경영할 때, 밤이면 자주 편집국에 들렀던가 보다. 숙직실 문을 열어보고 술에 취해 이불도 덥지 않고 잠자는 기자에게 손수 이불을 덮어주는 온후한 성품의 인격자였다는 말을 선배들로부터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니 이런 정신을 가진 인촌의 후예들이 권력에 굴복하여 ‘대량해고’를 하리라곤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1975년 3월 12일은 동아일보 기자들이 총회를 열고 농성을 시작한 날이다. 하루 종일 회사에만 처박혀 있어 지루하던 참에 오후 5시경 방송뉴스부 몇 사람과 함께 청진동으로 술을 한 잔 하러 갔다. 어차피 밤을 새우게 될 터니 미리 ‘석양주(夕陽酒)’라도 걸치고 오면 좋을 것 같았다. 그 때는 내가 선배들로부터 평 기자 이상의 대접을 받던 시절이다. 노조파동으로 해임되었다가 복직한 신분이니 끗발이 좀 있다고 그들은 믿는 모양이었다. 그 날 석양주 자리도 어느 선배가 마련해 주었다. 밤 9시쯤 되어 회사로 들어오다 2층 게시판에 무슨 인사발령이 난 것을 보았다. 해임발표였다. 17명이었다. 노조간부, 기협 분회 간부 그리고 강성파로 알려진 기자들의 이름이 죄다 나열되어 있었다. 아무리 비상시국이라지만 인사위원회도 열지 않고 초법적인 해고조치를 단행하다니! 정보부와의 어떤 합의 없이는 불가능한 조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이름도 분명히 있었다. 노조 이후 두 번째 해임이니 다시 살아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해직 이전부터 아내는 역촌동에서 집장사라는 걸 했다. 주택건축사업을 오래 해온 처형이 “네 남편은 돈 벌 능력이 없어 보인다. 자식들 가르치고 먹고 살자면 나와 함께 작은 집 한 채라도 지어 팔아라. 내가 도와주마” 하여 집을 몇 채 지었는데 이익이 나는 것 같았다. 그런 사업도 주택경기가 좋을 때는 할 만한 일이었지만 1973년 말 오일쇼크가 발생하면서부터는 주택경기가 나빠져 집을 지어도 쉽게 팔리지가 않았다. 해직 당시에도 집을 짓는 중이었다. 돈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그러니 아내는 틈만 나면 “언제 복직되느냐”고 묻곤 했다. 큰아이는 네 살, 둘째는 세 살이었다.

두어 달은 투위에서 생활비조의 지원이 있었다. 지금도 가끔 그 때를 회고한다. 당시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재야인사들은 종교인이건 비종교인이건 상부상조하며 박정희의 인권탄압과 맞서 싸웠다. 동아투위로부터 지원이 중단되니 당장 생활비 조달이 문제였다. 두 아이 돌잔치 때 들어온 금반지가 몇 개 있었다. 그 때는 돌잔치에 가려면 금반지를 선물하는 것이 관례였다. 쌀이 떨어지면 반지를 팔아 쌀을 샀다. 처형은 부자였지만 제랑이 ‘반정부 분자’라며 고작 쌀 한 가마 사주고는 모른 척했다. 나도 자존심이 강해 죽어도 처족 신세를 질 생각이 없었다.

어느 날 ‘종각번역실’이 중앙일보사 근처로 옮겼다. 영어보다는 독일어를 더 열심히 공부한 사람이라 영어번역을 맡기에는 자신이 없는데 독일어 번역거리는 전혀 없었다. 어느 날 아주 쉬운 것이라며 영어번역 거리를 하나 얻었다. 북태평양 심해에 사는 플랑크톤에 관한 논문이었다. 죽을 고생을 해서 번역을 마치고 다음 일거리를 걱정 중이었는데, 마침 동아일보에서 중앙일보로 옮겨간 유병무 월간중앙 부장이 입사시험 철을 앞두고 월간중앙이 부록으로 ‘시사문제집’을 낼 계획인데 이를 맡으라 하여 더위를 잊은 채 만들기도 했다.

복덕방을 차리다

1976년 봄 같은 투위 김두식 위원, 문리대 선배인 최혜성과 셋이서 서초동 트럭터미널 맞은편에 복덕방을 열었다. 서초동은 허허벌판이었다. 얼마 전 2층짜리 다리인 반포대교가 개통되어 서초동과 서울 시내가 아주 가까워졌다. 이 다리는 서울 시민을 위한 것이 아니고 유사시 용산 미군이 남쪽으로 퇴각하기 위한 퇴로용으로 지은 것이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2층 다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가 복덕방 문을 열기 얼마 전까지는 잠수교 개통에 대한 기대감에 서초동 부동산 경기가 반짝했으나 개통 이후로는 곧 강남 부동산의 거품이 빠지면서 거래가 뚝 끊겼다. 우리는 그런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시내에서 놀러온 손님들과 근처 간이식당에서 술이나 마시며 지냈다.

하루는 김두식이 시내를 다녀오더니 “얼마 전 우리 사무실에 들렀던 사람이 정보부원이라는 거야” 하며 허탈감을 감추지 못했다. 진짜, 파리만 날리던 어느 날 한 젊은이가 찾아와 “땅을 좀 사러왔다. 이 근처 시세가 어찌 돌아가느냐?”고 묻고는 곧 다시 오겠다며 떠난 일이 있었다. 바로 그 자가 정보부 요원이었다. 우리는 석 달 만에 사무실을 정리하고 서초동을 떠났다. 우리의 복덕방 사업 이야기는 그 무렵 일본 아사히신문에 ‘복덕방 하는 기자들’이란 제목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복덕방을 그만두고 을지로4가에서 인쇄소를 하는 친구에게 꽤 오래 의탁한 적이 있었다. 어느 사이 1976년 연말이 닥쳤다. 함께 저녁을 먹고 헤어져 귀가하던 길이었다. 그 때 집은 잠실 1단지였다. 8시 조금 지나 아파트 벨을 눌렀는데 어머니가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열고 나와 “동 사무소 직원이라며 두 사람이 너를 찾아왔는데 만나지 못했느냐”고 말씀하셨다.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어 한층 높은 4층으로 올라가 잠시 몸을 피했다. 4층 계단의 창을 통해 밖을 내려다보니 긴 사람의 그림자가 서서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급히 내려와 문을 열고 어머니에게 “아마 무슨 일이 있나 봅니다. 저는 당분간 집에 못 들어오니 걱정하지 마시고 처에게도 그렇게 전해주세요”라고 말하고 밖으로 나오니 마침 택시 한 대가 들어왔다. 급히 택시를 잡아타고 4단지에 사는 동아일보 선배 오애영 여사 댁으로 숨어들었다.

양력이라도 섣달 그믐날은 그믐날이다. 오 여사와 부군인 한양대 박현서 교수는 깜작 놀라면서도 반갑게 맞아주었다. 오 여사는 내가 지방부에 근무할 때 모시던 선배였는데 광고탄압 사태가 벌어지기 얼마 전 회사를 떠난 분이다. 박 교수는 퇴근길에 가끔 지방부에 들러 오상원 부장 등과 함께 술도 마실 만큼 신문사 사람들과 가깝게 지냈으며, 그밖에 많은 동아투위 사람들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그는 우리가 동아일보사에서 추방당하던 날도 밤늦도록 편집국에서 함께 농성하다가 밤중에 귀가했다. 오 여사 부부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내 걱정을 했는데, 무슨 일로 날씨도 엄청 추운 섣달 그믐날에 경찰이 나를 찾으러 왔는지를 모르니 참으로 답답할 따름이었다. 다음날 피신처를 일단 강북으로 옮겼다.

경찰은 내가 집에 왔다가 빠져나간 것을 뒤늦게 눈치 채고 밤을 새며 밖에서 기다렸다고 한다. 새벽녘에는 어머니가 고생한다며 커피를 끓여다 주니 다 마시고 나서는 아내에게 근처에 친구 집이 있을 거라며 그곳으로 안내하라고 겁박했다. 아내는 하는 수 없이 당시 내무부 사무관인 친구가 사는 4단지로 안내했다. 경찰은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친구 아파트로 기습하듯 들어가 옷장을 열어보는 둥 행패를 부렸다. 거기에서도 나를 검거하지 못하자 가까운 일가친척 집을 대라고 하여 아내는 여의도 오빠 집으로 안내했다. 이 처남은 반년 전까지도 중앙정보부에서 근무하다 퇴직한 사람이었다. 그가 경찰에게 매제를 수배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따지니 경찰은 "치안본부의 수배지시를 받았을 뿐 그 이상은 전혀 알지 못한다”고 답변하더란 것이다.

새해 초라 반갑지 못한 일로 아는 사람에게 연락을 넣기가 저어했다. 그래서 신년 휴무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이집 저집 전전하다 일주일을 보냈다. 7일 오전 신문사 1년 후배인 동아일보 서울시경 출입 기자 전만길에게 자존심을 접고 전화를 걸었다. “지난 연말부터 경찰이 우리 집으로 나를 찾으러 온다. 무슨 일인지 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더니 곧 전화가 왔다. “알아보니 동아투위가 발행한 유인물이 네 명의로 수개 처의 지방기자실로 발송되었는데 그 내용이 긴급조치 위반이라 경찰이 수배령을 내렸다고 한다.”며 전만길은 “시경 정보 2계장과 훈방조치하기로 합의했으니 기자실로 나오라”고 말했다.

시경 기자실에서 전만길을 비롯한 시경출입기자들은 시경 측에 ”이 유인물은 동아투위의 통상적 활동범위에 속하는 일“‘이라고 설득했고, 경찰은 이를 수긍, 내게 “앞으로는 이런 불온한 문서를 만들지 않겠다”는 각서를 요구했다. 결국 태산명동 서일필 격인 유인물 소동은 일주일 만에 훈방처분으로 끝났다. 당시의 ’조중동‘ 기자들은 우리를 이런 식으로라도 돕고 싶어 했었다. 내가 유인물을 여러 통 지니고 있다가 종로 어딘가에서 우체통에 집어넣은 것은 광화문 일대 우체통에 넣게 되면 당국이 무조건 수거하여 폐기처분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분산 처리한 것일 뿐이었다. 만일 생각 없이 집에 들어갔더라면 경찰에 잡혀서 그 추운 날을 유치장에서 며칠 보내야 했을 것이다.

‘불순분자’라고 채용 거부

내 고교 동창 가운데 대신증권 총무과장을 하던 친구가 있었다. 1977년 여름 그에게 취직을 한 번 부탁해 보았다. 이력서가 전달되고 곧 양재봉 전무를 면담했다. 양 전무는 이 회사의 오너 격이었다. 한 달 쯤 지나 친구가 나를 불렀다. “어, 미안해서 으짠당가. 우리 회사에는 중부경찰서 정보과 형사가 출입한단 말이네. 양 전무가 그 사람에게 자네 문제를 상의했더니 ‘그런 불순분자’를 채용하면 회사가 다친다”며 무조건 반대하더란 것이었다. 그래서 증권회사 취직 길은 막혔다.

나는 해직 이후 5년 동안 고향에 가지 못했다. 물론 편모를 서울에서 모시고 있는 입장이라 굳이 고향에 갈 일은 별로 없었다. 하루는 어머니가 고향에 다녀와서 하시는 말씀이 “너는 앞으로 고향에 가지 말거라. 경찰이 이장, 반장을 불러 ‘문영희는 빨갱이니 고향에 오면 반드시 신고하라’고 했다더라. 그런 위험한 데를 무얼 하러 가느냐”며 꾸짖었다. 사실, 나는 선친의 사상이 문제가 되어 신원조회만 하면 ‘신원 불량자’로 찍히던 시절이었다. 연좌제 해당 케이스였다. 선친은 6·25전쟁 중 경찰의 영암 수복작전 때 무차별 학살을 피하지 못하고 28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내 나이 9세. 마을에서는 선친이 해방공간에서 좌익운동을 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전혀 사실과 다르다. 그 분의 죽음에 관하여는 나중에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 결과 ‘양민학살 피해자’로 입증되었다.

나는 1978년 10월부터 마포구 연남동 고려식품공업(주)의 총무과장으로 출근하게 되었다. 해직 이후 처음 구한 직장이다. 경영진 선 씨 3형제는 전남 구례 출신이다. 그들의 선친은 일제 치하에서 동아일보 지국장을 했던 좌파성향의 애국지사였다. 여순사건에 연루되어 도피 중에 자진 월북했다. 그는 5년 후 남파되어 서민호 등과 접촉하며 평화통일 방안 등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다가 자수, 10년을 복역했다. 그 후 자식들의 사업이 잘 풀려가자 김대중 등 과거의 지인들을 만나며 조용히 지내던 중 암으로 사망했다.

선진규 사장은 선친의 월북 이후 집안 살림이 어려워지자 외삼촌이 거주하는 군산으로 간다. 외삼촌은 거기서 김대중 씨가 사장으로 있던 어떤 해운회사 군산지점장으로 일했다. 선 사장이 거기서 군산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그의 학교 친구가 신태영이었다. 신태영은 동아일보 담당 중정 요원이었다. 선 사장은 이 친구를 통해 나에 관해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운명의 장난인지 나는 그와 충돌한 적도 있지만 여기서 말하고 싶지는 않다. 아무튼 선 사장은 학생 시절, 군산에 온 김대중을 보았다며 언제 꼭 개인적으로 뵙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 기업인이라 선뜻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선 사장은 나를 무척 아꼈다. 또 고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해 한이 된다며 오후만 되면 나를 불러 한국현대사를 강의하도록 했고 두 동생들에게도 함께 공부하자고 권했다. 선 사장은 한때 회사가 탈세 혐의로 위기를 맞자 동생 친구의 매부인 중앙일보 조동오 논설위원을 회장으로 모셔다가 회사의 어려운 문제에 대한 자문을 받곤 했다. 내가 이 회사로 들어간 것도 조 회장의 ‘동아투위’에 대한 신뢰가 작용한 덕택이었다.

‘동아일보 인수할 준비하라’

1979년 8월은 어느 해보다 더웠다. 중순경 동아투위 누군가가 “내일 이돈명 변호사 집에 가자. 내일이 그 분 회갑인데 집에서 잔치를 한다”며 동아투위 몇 사람을 초대했다. 다음날 약속장소인 효창동에 갔더니 다섯 명인가 모였다. 우리는 함께 이 변호사 댁으로 들어갔다. 응접실에는 10여 명의 젊은 손님들이 보였다. 이 변호사는 우리에게 할 말이 있다며 우리만 따로 안방으로 불렀다. 그 분은 “자네들, 내 말 잘 듣게. 박정희가 아마 올해를 못 넘기는 모양이네. 무슨 큰 일이 준비되고 있는 것 같네. 자네들은 동아일보를 인수할 마음의 준비를 하게. 그리고 이런 말은 절대 발설하지 말게.” 우리는 더 이상 물어보기도 어려워서 식사도 하지 않고 그 집을 나왔다. 우리끼리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해 보아도 이 변호사의 말뜻을 정확하게 파악할 길이 없었다. 그로부터 두 달 남짓 뒤 김재규 열사는 박정희의 목숨을 거뒀다.

DJ와는 인연이 있다면 있다. 1974년 연말일 것이다. 하루는 퇴근 무렵 정경부 노재성 기자가 “문 선배, DJ 한번 만나보지 않을래요? 원하신다면 제가 약속을 받아 놓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렇게 해달라고 말했다. DJ는 1년 전인 1973년 8월 도쿄에서 납치당해 온 뒤 동교동 자택에 연금 중이었다. 그의 지지자들도 그의 자택 출입을 통제당하고 있었다. 몇몇 측근 비서들만이 출입이 허용되던 시절이었다.

다음 날 노 기자가 회사로 들어오더니 내 귀에 대고 “10시쯤 회사 사람들 몰래 둘이서 택시를 타고 갈 생각인데 좀 기다리라”고 했다. 신문사 안에도 정보부 끄나풀이 있다는 소문이 돌던 시절이라 이런 일은 정말 조심해야 할 일이었다. 우리가 동교동 DJ 자택에 도착했을 때는 집안이 정말 조용했다. 비서가 우리를 응접실로 안내한 뒤 곧 D J부부가 나타났다. 나는 그를 가까이서 본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이희호 여사는 동아투위 행사에 가끔 모습을 드러내던 분이라 서로 인사 정도는 나눌 처지였지만 DJ는 1971년 대통령 선거 때 먼 발치로만 보았을 뿐이었다.

그는 내 손을 덥석 잡더니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며 위로했다. 그 때 우리는 노동조합을 합법적으로 결성해놓고도 회사와 정부의 방해로 ‘법외노조’신세가 되어 회사 및 정부와 합법적인 투쟁 중이었다. DJ는 줄곧 노동조합의 장래에 관해 질문했다. 자신이 인편을 통해 김상만 사장에게 “노동조합 활동을 보장해주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전했다며 “여러분이 힘들더라도 참고 기다리면 노조활동을 인정받을 날이 올 것”이라고 장담하듯 말하기도 했다. 나는 그때 비로소 DJ가 우리를 만나준 까닭을 알 수 있었다. 이 여사는 옆에서 뜨개질을 하며 우리의 대화를 경청할 뿐이었고, DJ는 나에게 양주를 여러 잔 따라주었다. 우리는 통행금지를 염려하여 11시 20분경 자리를 떴다.

1980년 봄 나는 다시 DJ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5월 초쯤의 일이었다. 안성열 선배가 “내일 아침 7시 동교동 방문이 예정되어 있으니 함께 갑시다”라고 하기에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DJ가 동아일보에 자신의 납치사건을 연재하기로 박권상 씨와 합의가 되었다고 하는데 우리가 찾아가 이를 말려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듣는 순간 어려운 문제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우리는 동교동을 방문, 지하에서 D 부부와 간단한 양식으로 아침식사를 들면서 방문 사유를 말씀드렸다. 우리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동아일보에 납치사건 기고를 보류해 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했다. 그러자 DJ는 “여러분의 뜻은 알겠다. 그런데 정치인은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 마침 박 국장의 요청을 수락하고 원고를 집필 중이다. 아마 이 달 중 연재가 시작되지 않을까 생각한다”라며 우리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의 납치사건 기고는 5·18 비상계엄확대조치로 불발되었다. 그가 바로 신군부에 의해 감옥으로 보내졌기 때문이다.

나는 그 이전에도 DJ를 두 차례나 만난 일이 있었다. 그 해 4월 DJ는 연금이 풀려 전국 순회강연을 다니던 중이었다. 4월 중순께 K 비서가 전화를 걸어와 만났다. 그는 내가 다니던 고려식품공업(주)을 잘 알고 있었다. 한참 잘 나가던 회사였다. 그는 “선생님이 곧 정읍동학제에 참석하시는데 수행기자 접대 등 비용이 좀 필요하다. 선 사장께 잘 말씀드려 협조를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사장은 나의 보고를 받더니 “그래 도와드려야지” 했는데, 며칠 뒤 나를 불러 돈을 얼마 마련했으니 함께 동교동에 가자고 했다. 회사에서 DJ 자택까지는 불과 10분 안팎의 가까운 거리였다. 그는 집 근처에 도착하자 차에서 내려 현금이 든 쇼핑백을 내게 맡기고는 걸어갔다. 오후 3시쯤 되었다. 응접실은 손님들로 만원이었다. DJ는 우리를 보더니 지팡이도 집지 않고 절뚝거리며 자신의 서재로 안내했다. 그는 선 사장에게 “문 동지를 보살펴 줘서 고맙다“고 치하하고 쇼핑백을 받았다. 이후 또 한 차례의 정치자금 전달이 이루어졌다. 그때는 마포 가든호텔 자신의 룸에서였다.

그해 5월 17일 저녁 동아투위는 우이동 수녀원 ‘명상의 집’에서 ‘새 시대’를 준비하는 토론을 하는 중이었다. 서울 시내로부터 신군부가 비상계엄을 확대하고 민주인사를 연행해 간다는 소식을 접했다. 다음날 우리 일행은 아침을 예정보다 빨리 먹고 각자 알아서 36계를 놓기로 했다. 택시를 잡아타고 시내로 나오면서 잠간 차를 세우고 집에 전화를 걸었더니 어떤 사람이 와서 나를 찾는다고 아내가 알려주었다. 친구들을 만나 점심을 먹고 연남동 회사로 갔다. 사장 집은 회사 근처에 있었다. 사장을 만나 긴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설명하고 당분간 출근이 어렵겠다고 말씀드렸더니 30만 원을 주며 몸조심하라고 걱정해주었다.

며칠 간 친구 집을 전전하다가 좀 조용해진 것 같아 회사로 출근하는데 회사 앞이 소란스러웠다. “방금 사장님이 합동수사본부 요원들에게 출근길에 연행 당하셨다”는 것이다. 조 회장도 역시 출근길에 선 사장의 연행 소식을 접하고 대뜸 나를 불러 “너 김대중에게 얼마 갖다 주었나?”하고 물었다. 나는 그때야 비로소 자초지종을 설명드렸다. 두 차례에 걸쳐 전달했는데 얼마인지는 모른다. 그는 버럭 화를 내며 “그런 일이 있으면 나에게 먼저 알려 주어야지 아무리 실권 없는 회장이라지만 너무 했다”며 기분 나쁘다고 불평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모두 1000만원이 전달되었다고 한다. 선 사장은 이틀 밤을 지나고 석방되었다.

정치권에 들어가 맛본 쓰라린 경험

나는 정치인 조연하 선생을 가끔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1985년 2·12총선 때 서울 구로 갑구에서 신한민주당 후보로 출마,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어느 날, 외종형이 전화를 걸어왔다. 춘산(조연하 아호)이 “자네를 좀 보고 싶어 하니 내일 아침 6시 전후하여 대방동 그의 집으로 찾아뵙게.” 다음 날 약속대로 춘산의 집을 방문했다. 그는 “그 동안 자네 고생하는 것을 잘 알고 있네. 나 좀 도와주게. 보좌관이 자네 체면에 맞지는 않겠지만 자네를 당장 도와줄 방법은 이것밖엔 없네.” 그래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조연하 의원의 보좌관 생활을 2년 가까이 하게 되었다.

그때 국회 야당 몫 부의장에는 동교동계의 김록영 의원이 선임되었다. 김 부의장은 몇 달 후 신병치료차 일본으로 갔다가 암이란 사실을 확인하고 귀국했다. 김 부의장이 사망하면 누가 부의장이 되느냐가 정치권의 관심사였다. 국회법상으로 보면 야당에서는 국회 부의장과 원내 대표만이 넉넉한 판공비를 받는 좋은 자리였다. 어느 날 춘산에게 물었다. “창당할 때 동교, 상도 양 계파 간에 자리 안배를 했을 것 같은데 총재는 상도동쪽(이민우 총재)에서 맡고 있으니 부의장은 동교동 몫이 아니냐?” 하니 “그렇다”고 대답했다. 백우(김록영 아호)는 곧 사망했다.

후임 부의장을 놓고 언론에서는 말들이 많았다. 하루는 춘산이 동교동을 방문, 결판을 짓겠다고 말했다. 며칠 뒤 나는 여느 때처럼 일찍 그의 자택을 방문했는데, 단 둘이 대담할 기회가 있었다. 자신의 동교동 방문 결과를 알려주었다. “나더러 판공비의 절반을 내놓을 것, 비서관 중 2,3,4급을 자신의 비서진으로 채용할 것 등을 요구하더라. 그래서 그럼 후광(김대중 아호)이 부의장 하게” 하면서 헤어졌다는 것이다. 그 후 부의장 선거에 춘산은 동교동 지명을 받지 못한 채 출마했으나 민정당 의원들이 밀어주어 당선되었다. 동교동 측은 강력하게 사퇴압력을 넣었으나 요지부동이었다.

그때 내 집에는 많은 협박 전화가 걸려왔고, ‘문영희가 춘산을 조종한다’는 소문까지 퍼뜨렸다. 춘산은 내 말을 듣기는 하나 취하지는 않는 고집통이었다. 그걸 밖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나 또한 ’사꾸라 춘산의 하수인‘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런 소리를 듣는 것도 억울했고 뜻도 맞지 않아 그해 6월 그만두고 말았다. 내 눈에는 춘산은 사꾸라는 아니고 DJ에게 배신당했다는 생각이 강한 듯이 보였다. 춘산은 동교동의 방해로 의사봉을 잡아보지 못하고 2년 임기를 마친 유일한 국회 부의장으로 기록되었다.

동아투위는 지난 2008년 12월, 국가를 상대로 하는 손해배상청구소송을 걸었다. “재판해 봐야 이기겠느냐?”는 걱정 반 기대 반 속에 내린 우리의 결단이었다. 나는 법무팀장을 맡아 많은 자료를 발굴·수집했고, 특히 미국 거주 서권석 위원이 NARA에서 비밀해제된 ‘동아사태’ 관련 전문을 발굴했는데 의미가 큰 자료이다. 우리가 재판에 일말의 기대를 걸었던 것은 해고당하던 시절, ‘젊은 기자’로서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꿈이 있었듯이 요즘 ‘젊은 판사’에게도 그런 양심과 용기가 살아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재판부는 1·2심 모두 원고 패소 판결했다. 이 판결에서 우리가 얻은 성과라면 우리의 강제해직은 “국가 공권력의 작용에 의한 동아일보와의 공모”였음이 분명하다는 사법부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소멸시효에 의하여 배상은 불가하다고 보았다. 대법원 판결이 아직 남아 있다.

유신독재시대의 2인자였던 박근혜가 대통령 후보자격으로 과거사에 대하여 일부 사과도 했다. 그 사과가 진정인지는 아직 믿을 수 없다. 유신시대의 과오에 대하여 그는 구체적 조치의 하나로 ‘긴급조치로 인한 피해자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안’을 국회에 발의했다. 이 법이 국회를 통과하여 시행된다 한들 국민의 세금으로 보상금을 준다는 것이다. 동아일보사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동아일보사는 동아투위와는 대법원 판결로 다 끝난 관계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진실화해위’가 공표했듯이 동아일보사는 언론인 대량해직 사태에 관한 한 국가와 공범이다. 공범인 동아일보가 민간기업이라는 이유로 보호받는다면 이는 언어도단이다. 동아일보가 동아사태에 대하여 반성하고 피해자에게 사과하도록 입법조치가 취해지지 않는 한 동아투위와 동아일보 간 문제는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동아투위는 자유언론 사수를 위하여 투쟁해온 단체이다.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진 못했지만 37년이란 긴 세월 동안 ‘투쟁’이라면 할 만큼은 했다고 자부한다. 이제 동아투위는 위원의 80% 이상이 고희(70세)를 넘긴 단체이다. 우리의 자유언론 실천정신을 후배들에게 물려줄 수는 있어도 함께 싸우기에는 체력이 쇠잔하고 있다. 그렇다고 간판을 내릴 수도 없다. 우리가 요구해온 어느 조건 하나도 해결된 것이 없다. 정치인들은 우리나라가 민주주의를 성취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과연 그런가. 한 세대가 지나도록 ‘해직언론인 문제’를 방치한 이 나라가 무슨 민주국가인가. 짓밟힌 동아투위원들의 인권보다 ‘동아일보’라는 매체에 더 관심이 많은 정치풍토가 가증스럽다. 정권이 바뀐다고 동아투위 문제가 빨리 해결될 것 같지도 않다. 우리는 동아사태의 해결을 ‘역사에 맡기자’는 정치인에게 기대를 걸기보다는 차라리 ‘동아투위 간판’을 내릴 수 있는 상황이 오기를 기다리며 서서히 죽어가는 편을 택할 것이다.

** 이 글은 2013년 5월 10일 초판 1쇄로 발행한 〈1975 - 유신 독재에 도전한 언론인들 이야기〉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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