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거실 벽에는 가로 60cm, 세로 80cm 쯤 되는 커다란 사진이 걸려 있다. 정장 차림의 사랑하는 남편 심재택 씨와 나, 그리고 아들 우현, 두 딸 현주와 현수가 하나같이 해맑은 표정으로 앞을 응시하고 있다. 그 앞의 소파에 앉거나 일어서서 나는 매일 아침 이 사진을 다정하게 바라본다. 하지만 남편은 이미 이 세상에 계시지 않고, 아들딸은 출가하여 따로 살고 있으니 나 홀로 집을 지키며 살아온 세월을 새삼 되돌아보곤 한다.

남편이 동료들과 함께 동아일보사에서 집단으로 해고되어 밖에서 결성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에 소속된 한 분으로부터 얼마 전에 전화가 왔다. 그 분은 돌아가신 남편을 회고하는 글을 써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글을 읽을 줄은 알지만 쓰는 데는 문외한이라서 그 요청에 무척 당황하면서 확답을 하지 않았다.

58세에 세상 떠난 그리운 남편

그러나 1975년 3월에 34살의 나이로 해고된 후 고생을 하다가 1999년 5월에 58세를 일기로 별세한 남편의 생애를 깊이 생각하니 그리움이 사무친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나는 적막강산에서 살아온 느낌이다. 자녀들이 있다지만 장성해서 독립해가고 옆에 계셔야 할 남편은 보이지 않아 시간이 고여 있는 것만 같은 아내의 심정을 아는 사람은 알리라.

나는 가정에서 남편을 잘 아는 아내이긴 하지만 남편의 사회활동의 세세한 면을 알진 못한다. 며칠 동안 생각 끝에 글을 쓰는 것이 의미가 있겠다 싶어 막상 필을 들려고 하니 사랑하는 남편 생각이 더욱 사무치고 그이와 고락을 함께 했던 날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 가닥을 잡아서 글로 표현해야 할지 몰라 답답해서 남편을 잘 아는 사회 친구와 동아투위의 동료 몇 분을 만나 남편의 지난날을 듣고 글에 대해 자문을 받으며 이 졸문을 쓴다.

남편 심재택 씨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생 때 4·19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5·16군사쿠데타 직후 구속되기도 했으며, 동아일보사에 입사해서는 정의로운 활동과 관련하여 이미 두 차례 해임됐다가 복직되었으며, 마지막으로 1975년 봄에는 동료들과 함께 무더기로 해임되었다. 남편은 공적으로는 항상 정의를 위해 살아서 강성 이미지를 풍기겠지만 가정적으로는 온유하고 다정한 분이었다.

나는 남편이 바깥에서 열심히 활동했던 부분은 자세히 모르기 때문에 가정 이야기만 늘어놓을 수밖에 없는데 그러다 보니 글이 자꾸만 중단되고 또 남편의 반쪽만 그리는 셈이 될 것 같아서 고민이었다. 글을 쓰는 것이 직업이 아닌 여성으로서 나는 남편의 이모저모를 생각하면서 그이의 생애의 발자취를 조금이라도 더 폭 넓게, 더 정확하게 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아서 남편의 사회활동을 잘 아는 몇 분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생각을 가다듬어 정리한다.

남편 심재택 씨는 동아일보사 기자들이 1974년 10월 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고 인권문제를 힘차게 보도하기 시작해서 이듬해 초까지 신바람이 났던 것 같다. 그 무렵 권력이 압력을 넣어 동아일보 지면에 실렸던 광고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광고란이 백지로 나오게 되었다. 그러자 애독자와 국민들이 나서서 격려광고를 싣기 시작했다. 남편은 신문사에서 일어나고 있던 일을 가끔 나에게 전해주면서 “이제야 기자로서 보람을 느낀다”고 힘주어 말하곤 했다. 그 무렵은 격려광고가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민의의 봇물’을 이루고 있어서 “동아일보 격려광고를 읽는 맛에 산다”는 말이 이웃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때였다.

동아일보사에서 세 번이나 해직당하다

하지만 결혼 후 가정에서 살림만 해온 나는 신문이 광고를 밑천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광고 줄을 끊어버리면 오래 가지 않아 문을 닫을 수밖에 없고 그 많은 신문사 직원들과 가족들의 생계는 어떻게 되겠는지가 은근히 걱정되었다. 더구나 남편이 1971년 동아일보사에서 제1차 ‘언론자유수호선언’을 주도했으며, 1974년 동아일보사 노조활동과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이미 두 차례나 해임되었다가 복직이 된 경력이 있는 만큼 나는 이번에는 무사하기만을 빌었다.

그러나 나는 이 무렵 남편이 아내의 고민을 짐작이야 했겠지만 대의(大義)를 위해 온힘을 쏟는 것을 표정으로 읽을 수 있었다.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이후 동아일보사 지면에는 독재를 비판하고 자유와 정의를 외치는 시민들에 관한 기사가 자주 실렸다. 외부에서 보면 동아일보가 인권의 기수였으며 신문다운 신문이었다. 그래도 남편은 심각한 표정으로 집에 들어오곤 했다. 내부 사정이 만만치 않은 모양이었다. 젊은 기자들이 이 기사는 꼭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면 사장이나 간부들이 난색을 표명하거나 막아서 의견 대립이 있다는 정도만 나에게 설명해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남편은 꼭 나가야 할 기사를 간부 선에서 빼거나, 크게 보도되어야 할 인권운동 관련 기사가 작게 취급될 때 기자들끼리 회의를 해서 실상을 파악하고 그것이 시정되도록 회사에 건의하는 ‘자유언론실천특위’의 상임위원으로 활동하느라 심야에 들어오기 일쑤였다. 회사 간부들과의 실랑이로 얼마나 피곤했겠는가? 어느 날 남편은 입술이 바짝 말라서 트기조차 했지만 “오늘 1단 벽을 깼다”고 너무나 기뻐했다. ‘1단 벽’이란 인권관련 기사가 빠지거나 1단으로만 나가던 관행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깨고 기사의 가치에 따라 보도해야 한다는 것이 ‘1단 벽 깨기’였다.

1974년 말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가 동아일보사 광고주들에게 압력을 넣어 광고를 끊으면서 동아일보 광고면은 하나 둘 백지로 나가게 됐다. 내 가슴도 그만큼 구멍이 뚫린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 공간을 국민들이 격려광고로 메워주지 않았던가! 이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니 당시 많은 사람들의 고백처럼 격려광고 읽는 기분으로 살았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하지만 동아일보사 안에서 기자들이 “이런 때일수록 언론의 정도를 걸어야 한다”고 주장하면 간부들은 “우리 신문이 과열돼 있다”고 우려하면서 기자들의 주장을 꺾고 있다는 것이었다. 자연히 기자들은 철야농성으로 자신들의 의사를 표시했다. 철야농성이 있는 날이면 남편은 “오늘 신문사 일로 집에 못 들어가니 미안해. 사필귀정(事必歸正)이란 말 그대로 될 거야”라고 나를 안심시켰다.

1975년 초가 되자 격려광고는 더욱 많아져서 신문의 광고 지면을 거의 다 채워갔다. 내부의 진통이야 어쨌건 간에 동아일보 지면은 단연 활기를 띠었다. 당시 사회부에서 일하던 남편은 이 신문의 인기 연재물이었던 <비화 제1공화국>의 제18화 ‘4·19혁명’ 편을 집필하기 위해 열심히 사람들을 만나고 자료를 수집했다. 드디어 3월 6일 대학생 데모 사진과 함께 ‘심재택 기자’의 이름으로 첫 번째 기사가 커다란 박스 안에 실렸다.

4월 혁명의 선두에 선 서울법대생 심재택

대학생 시절 4·19혁명 주동자의 한 사람으로서 동아일보사 기자가 된 남편은 국민의 격려광고가 폭주하던 때 자신이 잘 아는 그 혁명에 관한 글을 온 정신을 집중하여 구상하고 쓰느라 밤을 샐 때도 있었다. 이를 지켜본 기자의 아내로서 남편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 없었다. 기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화요일 아침 집을 나서는 학생들의 발걸음은 거칠었다.

‘이젠 깡패까지 시켜서 데모대를 습격하다니….’ 간밤에 고려대 데모학생들이 깡패들로부터 몽둥이와 쇠갈고리로 습격 받아 그 중 한 사람은 피살된 것 같다는 조간신문을 보고 그들은 치를 떨었다.”

첫 날 기사는 1960년 4월 19일 아침 각 대학교 학생들과 일부 고등학교 학생들이 학교에서 교문을 박차고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모습을 짧고 긴장감이 도는 필치로 묘사했다. 이튿날 두 번째 기사는 국회의사당 앞으로 집결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더욱 빠른 필치로 기록했다. 남편은 이 격동의 순간을 상춘객들의 분위기와 극명하게 대비시킴으로써 비극을 두드러지게 떠올렸다. 두 번째 기사의 머리는 이렇다.

“2백 명 가까운 꽃다운 목숨을 앗아가고 6천여 명의 부상자를 낸 비극의 날 1960년 4월 19일은 만약 그날 한 사람의 독재자와 그를 둘러싼 몇 사람의 영구집권욕만 없었던들 여느 해와 다름없이 상쾌한 봄날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벌써 여러 날 전에 핀 창경원 벚꽃 소식, 시민들의 가벼운 옷차림, 쾌청한 날씨, 낮 최고기온 18도.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날 아침만은 그렇게 느긋한 기분으로 맞이할 수가 없었다.”

남편은 이 무렵 자유언론실천특위 위원으로서 동아일보가 후퇴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랴, 연재 기사를 쓰랴 어느 때보다 분주했겠지만 유난히 크고 검은 눈동자를 형형하게 빛내며 뛰어다녔다. 두 가지를 다 잘 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으랴.

그러나 남편의 연재 기사는 3월 11일 제5회를 끝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기사를 더 쓸 수 없는 엄청난 상황이 신문사 안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동아일보 경영진은 3월 8일 기구 축소라는 명분으로 자유언론에 앞장섰던 기자 등 18명을 해임하고, 10일에는 이를 항의한 기자 2명을 더 해고하고 말았다. 동아일보사 기자들은 낮에 근무를 하고 밤에 신문사에서 농성하면서 회사의 조치에 항의했다. 남편은 이 대열에 참여하면서도 3월 11일까지 기사를 썼다.

3월 12일 아침 기자총회에서는 부당 해임을 철회하라고 요구하고 이 주장이 관철될 때까지 제작을 거부하기로 결의했다. 남편은 이에 따라 동료 22명과 함께 2층 공무국으로 내려가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회사는 3월 12일 밤에 남편을 포함한 17명을 무더기로 해임했다. 공무국에서 동료들과 함께 농성하던 남편은 3월 17일 새벽에 회사 측이 동원한 깡패들과 보급소 직원들에게 폭행을 당하며 동아일보사 건물 밖으로 쫓겨났다.

나는 국민들이 그토록 열성적으로 지원했던 동아일보사로부터 남편을 비롯한 정의로운 기자, 아나운서, 프로듀서들이 폭력으로 쫓겨난 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고생을 길게 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더구나 남편은 복직이라는 희소식을 듣지 못한 채 해고된지 24년만에 고통의 연속선상에서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다. 살아서는 돌아갈 수 없는 아득한 길의 저편에 동아일보사는 서 있단 말인가!

키는 작지만 빛나는 눈에 반하다

일찍이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오로지 정의의 길을 달려온 심재택 씨는 ‘쓸 고(苦)’와 인연이 깊었다. 나는 심재택 씨가 1966년 중앙일보사 수습기자 시험에 합격하여 지방으로 순환 근무할 때 전라북도 군산에서 친지의 소개로 그를 만났다. 키는 작지만 빛나는 눈에 사리가 분명하게 의사를 표시한 청년에게 나는 단번에 반했다. 천생연분이라서 보자마자 서로 뜻이 통했다고나 할까?

심재택 씨는 이듬해 “재벌이 경영하는 신문이 체질에 맞지 않는다”고 말하며 사표를 내고 동아일보사 수습기자 시험에 합격했다. 본래 전북 전주 출신이지만 서울로 이사한 이 가문은 청량리의 판자 집 단칸방에서 시조부, 시부모, 장남 심재택 씨와 남동생 3명, 여동생 1명이 초라하게 살고 있었다. 우리는 심재택 씨가 동아일보사 수습기자로 근무하던 1968년 3월에 결혼하여 시댁이 가까운 이문동의 단칸 사글세방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했다.

시댁 식구들은 모두 쟁쟁한 학력의 소유자들이다. 남편 재택 씨는 경기고와 서울법대, 둘째 재헌 씨는 경기고와 서울공대, 셋째 재권 씨는 서울상대, 넷째 재식 씨는 경기고와 서울의대 출신이며, 막내 정화 씨는 화가다. 남편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운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경기고 2학년 때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가정교사를 했으니 고학(苦學)이나 마찬가지였다.

남편이 동아일보사 기자로 활동하던 때 동생들은 대부분 대학생이었다. 남편이 1975년 동아일보사에서 해고되었을 때 둘째 재헌 씨는 서울공대를 졸업하고 막 취직해 있었고, 재권 씨는 서울상대 4학년으로서 민청학련사건 주동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지명수배되어 있었으며, 넷째 재식 씨는 서울의대 학생이었다. 그래서 남편은 위로는 부모님을 봉양하고 동생들도 보살펴야 하는 남모르는 고통(苦痛)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남편과 나는 이문동에서 1년가량 살다가 종로구 내수동의 셋방으로 이사한 후 시어머님이 아프셔서 청량리 부근 셋방으로 옮겨가 간병을 했다. 시어머님의 건강이 회복되자 남편은 1970년 새로 개발딘 은평구 기자촌에 입주할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입주 예정일이 다가와도 돈이 모자라서 걱정이었다. 그러자 남편의 절친한 친구 한 명이 자신이 머무를 허름한 집을 사야겠으니 돈을 지원해달라고 시골에 사시는 아버님에게 사정하여 시가보다 비싼 값으로 청량리 시댁을 매입하여 결과적으로 우리의 입주비용을 채워주었다. 그래서 기자촌의 새 주택으로 이사해 방 3개에 나누어 입실할 수 있었던 우리 내외와 시댁 식구들은 처음으로 비약적으로 개선된 주거 환경에서 살 수 있었다.

남편은 모처럼 안정을 찾자마자 1971년 봄 제1차 ‘언론자유수호선언’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박정희 정권의 사서 중앙정보부의 압력에 의해 그 해 12월 의원해임 형식으로 쫓겨났다. 그러나 시부모를 모시는 남편은 한시도 쉴 수가 없어서 곧 아이템풀학원의 일반사회 과목 담당 강사로 취업했다. 기자와 학원 강사는 너무나 다른 직업이지만 남편은 이것저것 가릴 형편이 아니었을 것이다. 남편이 그 사실을 나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직종이 다르고 출퇴근 시간이 달라서 눈치를 챘다. 그러다가 남편은 1973년 3월에 동아일보사에 복직이 되었다.

1974년 동아노조 결성 때 두 번째로 해고된 남편은 그 사실을 나에게 얘기하지 않았고 나도 몰랐다. 하지만 곧 복직이 되어 다행이었다. 그러다가 광고탄압이 시작되고 회사 안팎이 뒤숭숭해지자 나는 또 해고되면 어쩌나 하고 고민했다. 그러나 거대한 해일처럼 고통은 우리 가정 위로 덮쳐오고 말았다. 시부모님은 물론 1971년에 태어난 아들 우현이, 첫째 딸 현주와 둘째 딸 현수를 길러야 할 남편이 1975년 3월에 또다시 해고되자 이번에는 만만치 않은 시련이 닥쳐온 것이라고 짐작한 듯 집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거리로 쫓겨난 기자들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억울한 사정을 담은 유인물을 각계 요로에 돌렸다. 남편과 나는 인권운동을 지원하는 각계 인사들이 거두어 보낸 성금을 동아투위에서 십시일반으로 나눠준 생활비에 의존하여 몇 달 동안은 살았다. 하지만 그것은 단 두 식구라면 절약하면서 임시로 살 수 있는 돈이었지 우리 가정처럼 돌봐야 할 식구가 많은 경우에는 턱없이 부족한 액수였다.

〈바둑〉지 광고담당 영업사원으로

남편은 어느 날 종로에 있는 한국기원이 펴내던 월간지 <바둑>지의 광고담당 영업사원으로 취직해 고등학교와 대학교 동창생들을 찾아다니며 광고를 얻어내느라 부심했다. 역사적 사건과 사회문제에 관해 기사를 쓰는 신문기자와 월간지의 광고를 따내는 영업사원은 전문적 소양이 다르기 때문에 남편은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며 실적도 시원치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남편은 적어도 가정에서는 그런 말을 일절 하지 않았다.

<바둑>지에서 1년가량 근무한 남편은 광고 일을 그만두고 조경회사 직원으로 들어가 일감을 따오는 일을 했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던 것 같다. 남편은 조경회사에서 몇 달만에 일손을 놓고 선배가 운영하는 오트론전자에 취직했다. 이렇게 기자가 적응하기 어려운 직업을 전전하면서 남편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것 같다.

우리는 1981년 6월 기자촌에서 개봉동으로 이사했다. 개봉동에 도착하여 이삿짐을 풀기도 전에 정보과 형사가 찾아와 “왜 여기로 이사 왔는가?” “우리들 일만 늘고 골치 아프게 생겼다”고 불평했다. 형사들은 그 후로도 번갈아가며 동네 가게를 통해로 남편의 동태를 파악해 가는가 하면 몇 차례 연행하여 조사하곤 했다. 그러나 남편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1980년 들어 남편은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지고 피로를 쉽게 느꼈다. 사람들이 간이 안 좋은 것 같다고 말해서 서울대병원에서 김정용 박사에게 진찰을 받았다. 김 박사는 “활동성 B형 간염이다. 즉시 입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남편은 외부 활동을 끊고 20일 동안 입원하여 수시로 간 체크를 받으며 치료받았다.

1980년 4월에 퇴원한 남편은 1982년 초까지 집에 머물며 단백질을 섭취하고 비교적 편히 쉬었다. 세상 일로 속이 상할 때면 친구들과 돼지고기 삼겹살을 안주로 소주 한두 잔씩 마시면서 담론하기를 좋아했던 남편은 이 기간에 술을 끊었지만 간에 좋지 않다는 담배는 끊지 못했다.

독서를 좋아한 남편은 투병기간에 책을 닥치는 대로 읽고, 가끔 텔레비전을 보며 군부독재세력이 민주주의를 짓밟고 있던 현실을 개탄했다. 5·18 광주민중항쟁을 계엄군이 진압하면서 수많은 시민이 희생된 사실을 알고 의협심이 강한 남편이 조용히 있을 수 있었겠는가? 그렇지만 남편이 병석에 있었기 때문에 보호받을 수 있었던 점은 나로서는 다행한 일이었다.

간이 어느 정도 좋아진데다 집안 형편상 오랫동안 쉬고 있을 수만은 없었기 때문에 남편은 1982년 3월부터 당시 서울역 뒤쪽 중림동에 있던 종로학원의 사회·문화과목 강사로 취직하여 입시생들을 열심히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 때 종로학원은 아주 우수한 젊은이들이 몰려든 대학입시의 명문으로 알려져 있었다. 남편은 기사를 취재하고 쓰는 일 다음으로 전공에 가까운 과목이어서 그런지 명강사로 소문이 났다고 한다.

학생들은 남편의 조리 있고 화끈한 강의에 매료됐는지 입시가 끝난 연초에 일류대학교에 합격해 선물을 들고 찾아오기도 했다. 남편은 “내가 처음부터 교직생활을 했으면 더 잘 했을지도 모르겠다. 너희들이 참 예쁘다”고 말하곤 했다.

남편은 8년 동안 종로학원의 강사로서 최선을 다해 일했다. 우리 가정은 이 무렵에 처음으로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았다고 말할 수 있다. 남편이 학원 강사 생활을 하면서 돈을 모으고 절약해서 우리는 송파구 문정동의 올림픽패밀리 아파트로 이사할 수 있었다. 새 아파트는 가난을 뼛속 깊이 체험한 우리로서는 궁궐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도 이렇게 살 수 있나보다….’

그러나 남편은 개봉동에서건 문정동에서건 학원까지 출퇴근을 하는 데 하루에 1시간이 넘게 버스에서 시달리고 날마다 4시간 내지 5시간을 강의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학원 강사는 강의 내용을 완전히 소화해서 숨을 길게 내쉴 사이도 없이 속사포식으로 학생들에게 전달하되 머릿속에 깊이 심어주고 입시에서 큰 도움을 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신경을 많이 쓰며 녹초가 되기 십상인 것 같다. 남편도 그랬을 것이다.

남편은 오로지 새로운 직업에 충실하느라 운동권의 모임에 참석할 기회가 드물어졌다. 내가 알기로는 남편은 진보적이었지만 극좌파로 분류되는 종북노선(從北路線)과는 선을 그었다. 이 때문에 남편은 운동권 후배들 사이에서는 “심재택 선배는 너무 좌고우면(左顧右眄)한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고 나에게 넌지시 알려주었다. 1987년 김대중, 김영삼 두 야당 지도자가 분열하여 대통령에 출마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노태우 민정당 후보의 당선을 도왔을 때 남편은 상당히 실망했다.

하지만 남편이 아무리 학원 강사로 열심히 일했다 해도 천직인 신문기자로서 사명감을 갖고 필봉을 휘두르는 것에 비할 수는 없었으리라고 나는 짐작한다. 그 무렵 민주언론운동협의회 활동을 하고 있던 동아투위의 정동익 씨와 자주 만나 진로를 상의해온 남편은 고민 끝에 1990년 3월에 종로학원을 떠나 당시 해직기자들이 창간했으며 진보적인 색채가 강했던 월간 <말> 편집국장이 되어 여론을 조성하는 임무에 종사하게 되었다. 얼마 후 남편은 이 잡지의 대표이사 사장이 되어 편집은 물론 경영까지 책임지게 되어 또다시 과도한 신경을 쓰게 되었다.

이러는 과정에서 남편은 북한 관련 기사가 커버스토리로 실린 <말>지가 수사기관에 압수당하며 잡지사가 어수선해진데다 경영의 어려움이 가중돼 1994년 3월 25일에 대표이사직을 사임하고 선물로 받은 점퍼와 바지를 들고 귀가했다.

그 이후 남편은 학생운동 때부터 막역한 친우 김승균 씨와 남북교역 업무를 추진하고 4·19혁명 동지들과 4월혁명연구소 일을 돕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김승균 씨는 “재택이가 고생을 많이 하다보니 굉장히 신중해졌다. 극좌서적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유럽식 사회주의 서적을 즐겨 읽었다. 거기에 민족주의적 색채를 가미한 입장이었다”고 그 무렵 남편의 근황을 전해주었다.

다시 실업자가 된 남편은 생애에서 처음으로 장만한 올림픽패밀리 아파트처럼 화려하고 그만큼 관리비가 비싼 집에서 살기가 부담스러웠다. 남편은 집에서는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친구들에게는 “먹고 살 길이 막막해서 큰일 났어…”란 말을 되풀이하고는 했다고 한다.

변변한 직업을 갖지 못한 분들이 술을 더 마시게 된다고 한다. 그 분들은 흔히 돼지고기를 안주로 삼아 소주 몇 잔 또는 몇 병을 비운다. 남편은 간염을 앓은 이후 술을 극도로 경계하면서도 친목을 도모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술자리에서는 소주 한두 잔 정도는 마셨던 것 같다.

경제적 안정을 찾자 병마가 들이닥치다

남편 친구들이나 동아투위 동료들 중에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분들은 친구들에게 술을 사는 빈도가 잦았을 것이다. 아무리 친구사이라지만 자주 얻어먹는 사람은 심리적으로 부담이 가는 법이다. 어떤 친구는 “나는 재택이만 옆에 있으면 안심했다. 여럿이 식사를 하고 반주 한두 잔을 마신 다음 돈을 내려고 일어서면 재택이가 갑자기 일어서서 ‘우리 만원 씩 냅시다’ 하고 더치페이를 제안하니 내심 고마웠다”고 회상한다.

각자 경제난을 해결하는 문제로 고민하던 친구와 동료들 중 한 명이 “문정동 아파트를 팔아 더 싼 수도권 신도시로 이사하고 남은 돈은 은행에 예금하여 이자를 받아먹고 살면 마음 편하고 좋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한다. 남편이 이 문제를 나와 상의해서 나는 좋겠다고 동의했다.

우리는 1994년 11월 산본 극동아파트로 이사하고 남은 돈은 예금하여 이자로 생활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 이후 은행 예금 금리가 뚝뚝 떨어져, 한 달 이자 1백50만 원으로 생활하려 했던 계획이 이자가 절반가량으로 줄어드는 바람에 문제가 생겼다. 어느덧 50대 중반으로 들어선 남편은 90세가 넘으신 시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들에도 신경을 쓰랴 고민이 깊어져 “이 나이에 취직도 어렵고 아파트 경비라도 해야 하나?”라는 말까지 했다.

그러나 남편은 끝내 아파트 경비는 못해본 채 흐르는 세월을 아쉬워하며 고민하다가 몸이 점점 쇠약해졌다. 그동안 간에만 신경을 쓰던 남편은 어느 새 치질이 악화돼 화장실에 들어가면 오랫동안 앉아 있어야만 했다. 산본의 경치 좋은 아파트 거실에서 쉬면서 독서하거나 부근 길을 걸으면서 사색하는 것이 남편의 일과였다. 서울에는 1주일에 3~4 번 가량 갔다가 이른 저녁에 귀가했다.

이 무렵 남편이 즐겨 읽은 책은 <중국사 (증선지 지음)>, <삼국지>, <열국지>, 미하일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 <제3제국의 흥망 (W. 샤일러 지음)> 등이었다. 남편은 글을 읽으면서 앞으로 글을 쓸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책갈피를 접어두거나 메모를 하는 습관은 여전했다.

1998년 12월 들어 남편은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불편하게 느꼈다. 화장실에서는 장시간 머물렀다. 전부터 치질 증세가 있었던 남편은 아픈 부위가 항문이기 때문에 식구들에게조차 말하기를 꺼려했다. 연말이면 송년회가 많아서 항상 참석해오던 남편은 그 해 만은 한 군데도 가지 못했다.

나는 남편이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기에 의사인 시동생과 상의한 뒤 항문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약수동 송도병원에서 진찰을 받게 했다. 조직검사 결과 직장암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눈앞이 캄캄했다. 우리는 부랴부랴 남편을 서울대병원으로 옮겨 입원시켰다. 어느 사이에 암세포가 직장에 많이 퍼져 있었던 모양이다. 서울대 의료진은 항암제를 쓰며 최선을 다해 치료하고 나중에는 방사선치료까지 곁들였다. 나는 5개 월 가량 남편 곁을 지키고 간병했다.

나는 변을 받아내고 때때로 통증을 호소하는 남편을 격려하면서 남편이 건강을 회복하여 언론인으로서 포부를 충분히 펼칠 기회가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바랐다. 이 믿음이 너무도 강했기에 나는 몸은 녹초가 되었어도 정신만은 힘찼다.

많은 친구들이 찾아와 남편을 격려하고 치료비에 보태라고 성금을 했다. 남편은 누워서 또는 비스듬히 일어나 그분들과 유쾌히 대화하면서 때로는 미소를 짓기도 했다. 그분들이 돌아가면 남편은 노트에 병상일지를 꼬박꼬박 적었다. 저렇게 기록을 좋아하고 글을 쓰고 싶어 하는 남편의 길을 누가 막았단 말인가? 병상에서 투병하던 남편은 1999년 5월 18일 빙그레 웃으며 나에게 종이와 필기도구를 달라고 했다. 침상에 반드시 앉은 남편은 유언장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눈물이 핑 돌아 정면으로 남편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남편은 이렇게 서두를 적기 시작했다.

아내가 세상 떠나면 합장해 달라

“나 심재택은 몹쓸 병마와 투병 중이어서 언제 생명이 다할 수 없겠기에 정신이 맑을 동안 몇 가지 유언을 남겨 나의 사후에 내 뜻이 관철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다음과 같이 유언장을 작성한다.”

이어서 남편은 ‘재산관계’에 유산의 소재를 밝히고 ‘장례관계’에서 “가족장으로 조촐하게 장례를 치르기 바란다. 혹시 주변에서 무슨 단체장을 권할지 모르나 나의 평소 뜻이 소박하고 조촐한 것을 선호하므로 가족장을 지내주기 바란다. 화장으로 장례를 치르기 바란다. 관곽은 가볍고 얇은 것이 좋다. 홋날 아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 합장해주면 고맙겠다”라는 뜻을 적었다.

나를 이처럼 사랑하던 남편은 ‘몇 가지 당부의 말’에서 나와 가족들에게 주는 가장으로서의 부탁에 이어 ‘내게 도움을 준 친구. 친지. 친인척들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염치없이 일방적으로 도움만 받고 갚을 길 없이 떠나야 하니 그저 미안하고 고마울 뿐이오. 뼛속 깊이 감사의 뜻만 새기고 있소. 아무쪼록 하느님의 가호가 있으시기를.”

그리고 남편은 ‘마지막 남기는 말’에서 이 세상과의 작별을 고했다.

“이 세상은 살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매사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대하면서 땀방울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땀 흘린 만큼의 보상이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일하고 기다리자.”

사랑하고 존경하는 나의 남편 심재택 씨는 유서를 쓴지 열흘만인 1999년 5월 28일 세상에서 이루지 못한 일들을 남긴 채 영원히 눈을 감았다. 당신의 유언 맨 끝 말씀처럼 좀 더 기다리지 못하고 가셨다. 그렇게 서둘러 떠날 당신이 아니었는데….

** 이 글은 2013년 5월 10일 초판 1쇄로 발행한 〈1975 - 유신 독재에 도전한 언론인들 이야기〉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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