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성묘 전 벌초를 다녀와서

사랑하는 홍종민 씨! 당신이 가신 후 24년이란 세월이 나에겐 너무나 긴데 사람들은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느냐고 말합니다. 흐르는 시간은 말이 없지만 뜻하지 않게 이승과 저승으로 갈라진 부부 간에 천 길 낭떠러지보다 더 깊은 아쉬움을 남기나 봅니다. 때로는 당신이 옆에 계신다고 착각할 정도로 나는 당신을 그리워하지만 한 번 떠난 당신은 정녕 다시 오실 수 없단 말입니까?

어느 새 아열대성 기후로 변한 우리나라의 여름은 찌는 듯이 덥습니다. 간간이 폭우가 쏟아지면 제 가슴은 콩닥콩닥 뜁니다. 1989년 집중폭우로 대홍수가 났을 때 당신이 잠들어 있는 용인천주교묘지에도 산사태가 났지요. 그 때 제백사하고 달려가 보니 봉분이 파괴되고 유골이 떠내려간 묘도 있었지만 당신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요. 그 날 이후 폭우가 쏟아질 무렵이면 당신 생각이 떠올라 나는 당신 계신 곳을 찾습니다.

금년 8월에도 간간이 장대비가 쏟아졌습니다. 추석을 앞두고 벌초도 해야 하고 묘는 안전한가 궁금해서 토요일에 슬그머니 당신을 만나러 갔지요. 묘지 입구의 꽃집에서 꽃을 사니 낫을 빌려주었습니다. 허위허위 당신 묘소에 도착하니 하루 이틀 전 쯤 관리사무소 측이 당신 묘소와 부근의 잔디를 곱게 깎아놓고 검불을 쌓아두어서 그것만 치웠네요. 당신의 동료들이 1주기가 다가올 무렵 세운 추모비에 새겨진 글을 한 자 한 자 다시 한 번 읽었습니다.

“자유언론에 젊음을 바친 언론인으로, 온화하고도 엄한 가장으로, 신실한 신앙인으로 험한 세상, 올곧게 산 홍종민(바오로).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삼 남매, 고난을 함께 하던 동지들에게 그 환한 웃음 남긴 채 마흔 넷 한창 나이에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진달래꽃 여울지는 이 4월 그를 아끼는 모든 이의 가슴에 부활하다.

1989년 4월 16일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갑자기 눈시울이 시큰해졌습니다. 저의 뇌리에 박힌 채 쉬고 있던 그 격동의 세월, 슬픔이 아로새겨진 자취들이 갑자기 활동사진이 되어 흘러간 세월을 되돌이킵니다.

1988년 4월 20일 당신이 44세를 일기로 갑자기 별세하고 사흘 째 되던 날 이곳 용인천주교묘지에 영원히 묻혔습니다. 하얀 소복 차림의 나는 하관하던 순간 당신을 보내지 않으려했지만 당신은 땅속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당신이 좋아했던 진달래, 개나리꽃이 묘지에 이르는 길가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습니다. 지금은 묘들이 꽉 차서 안정감을 주지만 그 때는 황량했습니다. 만물이 생동하던 그 해 봄 접동새와 뻐꾸기들도 당신과의 헤어짐이 슬퍼서인지 한없이 울어댔습니다.

무척 보고 싶은 홍종민 씨! 당신의 육신은 땅속에 묻혔지만 당신의 영혼은 천주님의 곁으로 가셨으리라 믿습니다. 당신은 고통을 받고 자유로운 몸이 된 어느 날 갑자기 “사람 앞일을 모르니 신(神)을 믿어야 해요”라고 말했었지요. 그리고 당신과 저는 청담동성당에서 영세했지요.

죄 많은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상에 못 박혀 돌아가신 후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흠숭하는 저는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삶을 믿기에 언젠가는 저 세상에서 당신을 만나리라고 확신하지만 너무 빨리 헤어진 당신과 내가 가련하다고 느낄 때가 있음은 생각이 옅거나 감상적이기 때문만 일까요.

당신이 운명하던 순간

1988년 4월 20일 새벽 2시경에 당신에게 일어난 일을 저는 죽어도 잊을 수 없습니다. 1985년 이후 심장박동기를 차고 생활하던 당신은 밤늦게 들어와 저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요. 당신은 목이 마르다면서 물을 청해서 제가 물을 건네자 한 모금 마시더니 갑자기 왼쪽 가슴을 만지며 쓰러졌습니다. 저는 소스라치게 놀라 당신을 흔들었지만 몸이 축 늘어졌어요. 허겁지겁 부근에 사는 당신의 의사 친구에게 전화했습니다. 그 친구는 잠시 후 다른 친구와 함께 황급히 들어왔습니다. 당신의 맥을 짚어본 의사 친구는 “아마, 안 되겠다”고 말하더니 119로 전화해 가까운 종합병원 응급실로 달렸습니다. 저와 친구들은 응급실에 도착해서 환자를 꼭 살려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당직 의사는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영안실로 가셔야겠네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쓰러져서 다시 일어나기가 불가능한 시간은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을 꼭 살려주세요라고 천주님께 빈 시간이 1시간도 더 된 듯 했습니다. 실낱 같은 희망이나마 수포로 돌리고 당신은 영원히 제 곁으로 올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다니…. 태어나서 그 순간보다 더 앞이 캄캄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지금도 돌아올 것만 같은 홍종민 씨, 당신은 무엇이 급해서 그렇게도 빨리 저 세상 길을 서두르셨나요? 저는 그 때 나이 39살, 결혼한 지 17년 되던 때였습니다. 당신 곁에 올망졸망한 1남 2녀를 남기고 그렇게 가셨습니다. 당신이 숨을 거둔 뒤에 겁도 났고 나만 두고 먼저 가신 데 대해 한없이 원망도 했지만 어떤 궂은 일이 일어나도 웃으며 의협심에서 한 마디 내뱉고, 정의와 양심에 따라 행동하다가 짧은 생애를 마감한 당신의 한없이 평화롭고 온화한 얼굴을 보면서 왜 그렇게 줄줄 눈물이 쏟아졌던지요.

1970년대 그 험악했던 시기에 꿋꿋한 동아일보사 기자로 활동하다 권력의 횡포로 동료들과 함께 거리로 쫓겨난 후 인고의 세월을 보내다가 갑자기 심장병이 도져 숨이 끊길 때까지 심장박동기를 차야만 했던 홍종민 씨!

올해가 2012년. 당신이 가신 후 24년이 흘렀습니다. 이 세상 궂은일을 훌훌 털고 당신이 가신 후 저와 자식들은 외롭지만 꿋꿋하게 잘 지내고 있으니 가실 때 그 얼굴처럼 집안 걱정은 하지 말아요.

당신은 동아투위 선배, 동료, 후배들, 친척과 지인들의 하직 인사를 받으며 4월 22일 영결식을 거쳐 용인천주교묘지에 안장됐지요. 당신과 내가 떨어져 있는 거리는 까마득하지만 당신은 지금도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어요.

구치소에서 만난 당신의 모습

홍종민 씨, 당신은 동아일보사에 1969년 가을에 입사하여 1975년 동료들과 함께 강제로 해직될 때까지 참으로 건강했습니다. 저는 1971년 12월 8일 대학 4학년 때 당신과 결혼했습니다. 그만큼 당신의 소탈하고 신념에 찬 인품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기자 생활은 극심한 경쟁과 긴장과 스트레스의 연속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기자의 숙명이겠지요. 당신은 결혼한 이듬 해 ‘10월 유신’이 선포되고 언론의 자유가 억압당했을 때 편집부에 근무하면서 나가야 할 기사가 죽어버리는 경우를 접할 때마다 울분을 토로했으며, 밖에서 술을 많이 마시고 들어와서 집에서도 조금 더 마시곤 했지만 앓아 누운 적이 없었습니다.

당신은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사 편집국에서 ‘자유언론실천선언’ 행사가 있던 날 선언문을 낭독했고 그 사진이 신문에 실릴 때까지 저에게 비밀로 붙였습니다. 직장에서 할 일과 집에서 할 일을 엄격히 구분하고 아내인 저에게 직장 일로 근심을 주지 않으려는 당신의 심정을 제가 왜 몰랐겠습니까?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동아일보사를 위협하여 1975년 봄부터 여름까지 자유언론에 앞장섰던 기자, 아나운서, 프로듀서 등 1백13 명을 차례로 해고했습니다. 그리고 쫓겨난 동료들은 신문사 밖에서 동아투위를 결성했습니다. 당신은 동아투위의 총무를 맡아 위험하고 궂은 일을 도맡아 했죠.

바깥에서 일어난 일을 거의 얘기하지 않던 당신은 어느 날 저에게 “내가 어쩌면 잡혀갈 수도 있으니 각오하고 있어요”라고 넌지시 말했습니다. 저는 옳은 일을 하다가 잡혀가는 것은 결코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걱정 말아요”라고 당신을 격려하면서도 ‘드디어 고난이 다가오는구나’ 하고 실감했습니다.

동아투위 위원 7명은 독재정권 아래서 보도되지 않은 민권일지를 동아투위 유인물에 실은 죄로 1978년 11월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됐습니다. 당신도 그 때 영어의 몸이 됐습니다. 저는 물론 슬펐지만 그보다는 저 혼자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치며 살아가야 할 는지 막막했습니다.

그 해 겨울 살을 에는 추위가 몰아쳤습니다. 저는 어린 두 딸에게 “아빠는 미국에 공부하러 가셨다”고 말했지요. 당시 초등학교에 다니던 첫째 딸을 학교에 보내고, 4살이던 둘째 딸은 동네 아주머니에게 맡기고 서대문구치소로 당신을 면회하러 가던 나의 발은 얼마나 무거웠던지요. 당신은 그 때마다 환하게 웃으며 “나는 괜찮아. 건강해”라고 말을 꺼냈지요. “처음엔 일반수들 방으로 들어갔는데 신고하라고 해서 이름과 들어오게 된 동기를 이야기했지. 그랬더니 그 방 두목이 ‘이 분은 나라를 위해서 일하다 들어오셨다. 그만큼 대접해드려야 한다. 우리 모두 이 분을 선생님이라고 부르자’라고 말하지 않겠어? 그래서 난 졸지에 수감자들의 선생님이 되고 말았지. 그러나 곧 독방으로 옮겨졌으니 선생님 경력이 너무나 짧아.” 그 말에 당신과 나는 동시에 웃었습니다.

또한 당신은 “함께 수감된 장윤환·안성열 선배 등 나이 드신 분들의 건강이 걱정된다”고 말한 데 이어 “내 걱정은 전혀 하지 말고 당신이 아이들 잘 키우면서 잘 있어요”라고 연신 당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 채 “잘 있다 하니 다행이어요. 또 올 때까지 건강하세요”라는 말만 남기고 돌아서야 했습니다.

세월은 흘러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운명하고 유신체제가 막을 내렸습니다. 박 대통령이 내렸던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수감됐던 당신도 11월 14일 석방되었습니다. 저와 아이들은 검정 가죽점퍼에 초췌한 얼굴을 한 당신을 얼마나 기쁘게 맞았던가요.

가슴 속에 묻어둔 고통이 얼마나 심했나요?

그러나 기쁨도 잠시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에 이어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권력을 장악하고 1980년 5월 17일 자정을 기해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 실시하고 민주인사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그날 아침 집을 나서면서 “오늘부터 우이동 ‘명상의 집’에서 1박 2일로 동아투위 세미나를 여니 집에 못 와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날 밤 일찍 잠들었던 저는 계엄이 확대 실시된 줄도 몰랐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TV를 보니 무장한 군인들이 곳곳을 경비하고 김대중 씨를 비롯한 민주 인사들이 줄줄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나왔습니다.

5월 18일 오후 사복형사인 듯한 사람 3명이 구두를 신은 채 집안으로 들이닥쳤습니다. 그들은 권총을 찼는지 옆구리에 경찰봉을 맸는지 하여튼 무서운 차림으로 방을 뒤지며 “홍종민이 연락 왔어요?”라고 다그치며 책 몇 권을 뽑아갔습니다. 그 때 전화 벨이 울렸습니다. 나는 당신 전화라면 “들어오지 마세요”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그 사람들이 팔을 나꿔채는 바람에 옷 단추가 떨어져 나가고 통화도 못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날 밤 집으로 들어오려다가 골목에 잠복하고 있던 수사기관원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어요. 어떤 사람이 “남영동으로 갔다”고만 말해주었습니다. 저는 남영동이라면 용산구에 있는 동네라고만 알았지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몰랐어요. 23일째 되던 날 어떤 사람이 당신은 석방될 것이라고 귀띔해주었지요.

아, 집으로 돌아온 당신은 정말 유령 같았어요! 넋이 나간 듯 말을 못하고, 옷은 구겨져 있었으며, 기운이 탈진돼 쓰러지듯 풀썩 주저앉는 당신을 저는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울면서 껴안았습니다. 앙상한 갈비뼈가 드러나 있었고요. 체중이 13kg이나 빠진 당신….

하지만 당신은 눈물만 흘릴 뿐 말이 없었습니다. 며칠이 지나서 물었습니다.

“여보,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어요?”

“응, 거긴 무서운 곳이야.” 그리고는 말을 끊었습니다.

“좀 더 설명해주세요.”

“눈을 가린 채 어디론가 끌려갔는데 가보니 때리는 도구들도 있고, 물고문하는 욕조도 있고…. 소름이 쫙 끼쳤어. 하지만 난 별로 심한 고문은 안 당했어.”

“그렇다면 20여 일만에 몸무게가 13kg이나 빠지고 뼈만 앙상하게 불거져 있을 리가 없잖아요?”

당신은 한참 동안 말이 없더니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계속 잠을 안 재워 미칠 것만 같았어. 태어나서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을 전부 쓰라 해서 쓰면 핵심이 빠졌다고 더 쓰라하고 쓴 내용을 가지고 심문하고 이렇게 하다보니 비몽사몽이 되어 수시로 졸면서 쓰러졌나봐. 수사관들은 그 때마다 마구 때리거나 물을 끼얹어 깨어나곤 했지. 그들의 관심은 동아투위와 김대중 씨의 관계였어. 어떤 각본을 만들어놓고 캐묻고 캐묻고는 했지. 그렇지만 없는 사실을 말할 수 없으니 나를 족친 것 같아. 석방돼서 알고 보니 그건 ‘김대중 내란 음모’란 어마어마한 각본이었어. 옆방에 송건호 선생이 잡혀왔는데 수시로 소름 끼치는 비명이 들려왔어. 수사관들은 나에게 ‘송건호 저 새끼 머리에 총을 대고 쏴 죽여버릴까 말까 한다’고 겁을 주었어. 그 땐 죽을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

당신은 석방된 후 한 달쯤 지나서 집에서 갑자기 발작 비슷한 동작을 하면서 쓰러졌지요. 저는 당신을 흔들면서 “여보 왜 이래, 응 왜 이래”라고 놀라서 물었지요. 당신은 “아무 것도 아니야”라고 대답했지만 안색이 창백했습니다. 동네 병원에 이틀 동안 입원했지만 이상이 없다 해서 퇴원했습니다.

얼마 후 당신은 광화문 교육보험에 취직해서 착실하게 근무하다가 다시 같은 증세로 쓰러져 청량리 바오로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저는 그 때 당신이 돌아가실 줄 알았어요. 그 병원도 원인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1985년 가을에 같은 증세로 세 번째 쓰려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심장이 안 좋다는 것이 의사의 소견이었습니다. 그리고 의사는 당신에게 안경알 만한 심장박동기를 달아주었습니다.

1987년 1월 서울대학생 박종철 군이 남영동에 연행돼 물고문을 받던 중 숨진 사건이 발생했죠. 경찰이 초기에 사건을 축소하여 발표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 기사는 치안본부장이 박 군이 조사를 받던 중 갑자기 “억”소리를 지르며 사망했다고 설명하자 대공담당 간부는 “수사관이 책상을 ‘탁’치니 박종철이 ‘억’하고 쓰러졌다”고 보충 설명했다고 보도했지요.

당신은 집에서 그 신문을 읽고선 “뭐? 책상을 ‘탁’하고 치니 박종철이 ‘억’하고 쓰러져? 에이, 여기는 들어갔다 하면 이렇게는 안 죽지”라며 분노를 삭이지 못하면서도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아, 가슴에 묻어둔 고통이 얼마나 심했나요? 기자 시절 밤을 새워 일하고 술을 많이 마시고 피곤했어도 한 번도 병원에 간 일이 없었던 당신은 심장박동기에 의존해서 조심조심 생활했습니다. 그러다가 1988년 4월 20일 새벽 당신의 심장은 박동기와 함께 영원히 멎고 말았습니다.

정신없이 생활전선으로 뛰어들어

홍종민 씨, 당신은 어느 날 남영동에서 “내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하고 생각하며 잠깐 잠이 들었다가 눈을 뜨는 순간 "살아서 나갈 것이니 걱정마라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고 말하면서 “가톨릭을 믿어야겠다”는 결심을 털어놓았지요. 그래서 당신과 저는 강남구 청담동성당에서 교리공부를 시작해 6개월 후에 영세하고 당신은 바오로, 저는 바울라란 본명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남영동 대공분실이 우리에게 유일한 도움을 주었다면 그것은 신앙을 갖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그 후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우리는 하느님께 의지하여 기도하고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했지요. 당신은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퇴근 후에 가능한 한 시간을 내서 본당 활동에 참여하여 청담동성당 청년회장을 역임하기도 했지요. 하느님은 저희들을 보살펴주셔서 참으로 마음 편하게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제난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당신은 신문사에서 해고된 직후엔 생활비도 마련하지 못해 미안해 하면서 날마다 동아투위 사무실이 있던 여관에서 자장면 시켜 먹고 거기서 자면서 120명이 넘는 해고자들로 북적대던 동아투위의 대책을 세우느라 여념이 없었지요. 그 사이에 이문동 뚝방 아래에 있는 허름한 단독주택을 팔고 변두리인 월계동으로 이사해 방 3개 중 2개를 월세로 내주고 그것으로 생활비를 하다가 잠실에 있는 17평 짜리 낡은 주공아파트로 이사한 후 역시 방 1칸을 월세로 내주었지요.

저는 우리가 결혼할 때 부모님이 선물로 사주신 피아노로 당신이 신문사에 근무할 때부터 아이들을 가르쳤지요. 가난한 집 아이들에게 싼 값으로 피아노를 지도해 근근이 생활은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이 옳은 일을 위해서 노력하다가 해고되자 조금 불안했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당신이 제 곁에 있는 한 저는 행복했습니다. 당신이 하늘나라로 가시기 5년 전 그러니까 제가 34살에 늦둥이 아들을 낳아서 당신과 제가 얼마나 기뻤는지요. 위로 딸 둘은 초등학교에 다니고, 외동아들이 태어났으니 어찌 경사가 아니었던가요.

그러나 당신이 갑자기 하늘나라로 오르자 본래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성격이었던 저는 당시 고등학교 1학년생 딸 정연이, 중학교 2학년생 딸 서연이, 6살짜리 외동아들 장원이를 가르치면서 먹고 살기가 너무나 막막하여 “나와 아이들은 어떡하라고?”란 말을 수없이 되뇌었습니다. 당신이 곁에 계실 때는 경제적으로 어려웠어도 아무런 걱정이 없었지만 당신이 멀리 떠나버린 후에는 속이 터져서 죽을 것 같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있을 때와 영영 볼 수 없을 때는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이나 느낌이 달랐습니다. 몇 달 후 피아노 가르치는 것도 그만두고 쉬었습니다.

그러자 성당의 대녀가 “언니, 그러지 말고 김밥 장사 하는 거 어때요? 집에서 가정식으로 만들어서 손님을 넓혀 가면 괜찮을 것 같아요”라고 제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김밥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김밥 원료를 사고 배달하는 데 필요하다고 해서 친정아버지께서 처음으로 작은 승용차 1대를 사주셨습니다. 그 후 저는 아이들이 커가니 집에서 김밥을 만들기가 불편해서 그만두고 강남구청 모니터요원으로 10년가량 아르바이트 수준의 월급을 받으며 모자란 부분은 동생의 도움으로 생활하다가 1997년 낡은 해청아파트를 팔아 전세로 살면서 첫째, 둘째 딸 대학 학비를 댔습니다.

저는 때때로 당신 사진을 보면서 아이들에게 이렇게 일렀습니다. “아버지는 옳은 일을 위해 온몸을 바치신 참으로 자랑스러운 분이셨다. 이런 아버지를 아무나 만나는 것이 아니다. 너무 일찍 돌아가셨지만 아버지를 본받아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사랑하는 홍종민 씨, 저도 어느덧 6순의 할머니가 되었네요. 당신이 너무 젊어서 가신 것은 생각하지 않고 제가 할머니가 되었다고 말하니 듣기 싫지요? 그리고 아이들이 어떻게 지내나 궁금하지요? 어느 덧 정연이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해서 외국인회사에 근무하고 있으며, 서연이도 대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해서 미국으로 건너가 잘 살고 있고, 막내아들 장원이는 수원가톨릭대학교 재학 중 호주 멜버른신학교로 유학 가서 공부를 하고 돌아와 12월에 수도회 사제 서품을 받을 예정입니다. 신부가 된 아들 장원이의 모습을 당신이 보신다면 얼마나 기쁘고 마음이 흐뭇할까요?

인정 많은 동아투위 식구들을 생각하며

사람은 혼자 살 수가 없기 때문에 가족, 친척, 친지, 이웃들과 더불어 살기 마련인가 봅니다. 저는 당신이 가신 다음에 여러 사람들로부터 위로와 격려를 받으며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사람이란 숨진 다음에 그 인격이 숨김없이 드러난다는 말이 있듯이 당신이 쌓아온 인정이 세상을 떠나신 다음에도 고스란히 되돌아오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특별히 동아투위 위원 여러분에게, 아니 식구라고 표현해야 더 적합할 것 같습니다만, 감사의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당신이 가신 후에도 변함없이, 아니 더욱 열성적으로 저에게 힘을 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30대, 40대 한창 활동할 나이에 직장에서 해고됐다면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고, 새로 적응하기 위해 옛 직장의 동료들과 그렇게 친밀하고 끈끈한 유대를 갖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동아투위는 전혀 다릅니다.

당신과 고려대학교에 함께 다니고 동아일보사 입사 동기생인 임부섭 위원은 영결식장에서 두루마리를 펼치면서 당신의 약력을 소개할 때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이제 홍 형은 비록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사람이 되었지만 하늘나라에서도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생각하며 따뜻하게 보살피리라 믿습니다”라고 추도사를 맺었을 때 저와 아이들은 북받치는 설움을 참지 못하고 오열했습니다.

사람이 별세하면 친척과 친구들은 물론 배우자와 자녀들도 성묘하기가 쉽지만은 않다고 합니다. 살아서도 오랫동안 보지 않으면 사이가 멀어지는 것이 인정이라고 하는데 하물며 생사가 달라진 경우에는 더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1969년에 동아일보사에 입사한 당신의 12기 동기생들은 해고된 후에도 우애를 돈독히 하다가 당신이 너무나 아쉽고 또한 잊을 수 없었기에 당신의 기일인 4월 20일이 다가오면 그 무렵 주말에 어김없이 저와 함께 당신의 묘소를 참배했습니다. 김양래, 임부섭, 이영록, 김동현, 이종욱, 김진홍 씨 등 동아투위 동기생들과 몇몇 부인들은 각자 음식을 장만하고 술도 사와서 간략하게 제를 지내고 당신의 무덤 앞에 앉아 당신을 회상합니다. 그러기를 한 해도 아니고 두 해도 아닌 20년 가까이 계속했습니다. 저는 7년 전 쯤 “너무나 고맙고 죄송합니다. 이제 그만 오십시오”라고 사정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유족을 걱정한다는 말만 했을 뿐 그 후로 찾아와서 격려의 말이라도 해준 적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동아투위 동료들을 감히 식구들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동아일보 입사와 해고 동기인 국흥주 씨는 1990년에 쌍용증권 이사로 도쿄에 근무하면서 12기 동기생 부인들을 일본으로 초대했습니다. 김동현, 이영록, 이종욱, 임부섭 씨의 부인과 당신을 저 세상으로 보내고 홀로 남은 저 등 5명은 일본으로 가서 1주일가량 머물면서 최고 음식을 대접받고 최고 온천지 등을 여행할 수 있었습니다. 외국 여행이라곤 처음이었던 저는 정말 잊을 수 없는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런 국흥주 씨가 그 후 문화일보사 편집부국장으로로 근무하면서 과중한 업무에 시달려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탓인지 뇌출혈로 쓰러져 그 후유증으로 언어기능이 마비되고 신체 기능이 저하된 상태로 십 수 년 동안 병원에 누워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일본으로 저희들을 초대했을 때 헌신적으로 저희들을 안내하고 격려했던 그 부인이 남편을 간병하느라 무척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군요.

사랑하는 당신의 딸이 울었어요

무척이나 감성적이었던 당신은 산에 오르면 이 꽃 저 꽃을 쓰다듬었지요. 아름답지만 산에서는 흔한 그래서 그냥 지나쳐도 될 꽃들에게서 발을 떼지 못하고 응시하던 당신. 그래서 당신은 집에서도 화분에 화초를 심고 물을 주며 무럭무럭 자라기를 바랐지요.

저는 오늘 너그럽고 자상한 성품을 지녔던 당신을 생각하면서 몇 줄의 글이라도 남기고 싶어서 이런 저런 구상을 하며 당신이 남긴 글들을 뒤적였습니다. 당신 가시고 24년이 지난 지금 글을 읽으니 새삼스럽게 당신이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이 정권은 나를 죄인으로 취급하지만, 진리의 편에서는 결코 죄인이 아니오. 역사와 민족과 양심이 증명해 줄 거요. 당신에게 부탁이 있다면 떳떳하게 살아달라는 것이오. 조금도, 누구한테도 위축되지 말고 떳떳해주시오. 의연하게 살아주시오. 그리고 내 사랑하는 두 딸들을 조금도 구김살 없이 키워주시오.”(1978년 10월 24일 종로경찰서에 연행된 후 내보낸 편지)

그래요. 저는 당신의 당부대로 떳떳하게 살았어요. 아이들도 구김살 없이 키웠어요. 당신은 이 편지를 쓴 후 1년가량 구치소생활을 했지만 건강한 몸으로 나왔어요. 그리고 우리는 만나서 행복했지요.

제가 당신이 서울구치소에서 큰 딸 정연이에게 보낸 편지를 아이에게 비밀로 해두었다가 이제야 또 읽으니 감회가 새로워 부근에 사는 딸을 불렀습니다. 딸이 31년이 지난 후 처음으로 그 편지를 읽어 내려갔습니다.

“정연아, 아빠가 집을 떠나온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여섯 달이나 지나갔구나. 너희들이 아빠를 보고 싶어 하는 것 이상으로 아빠도 너희들이 보고 싶단다. 요즘처럼 날씨가 따뜻하면 함께 어린이공원이나 산에도 같이 가고, 일요일이면 함께 자전거도 타고 할 텐데 말이다. 아빠가 없어서 너희들이 어떻게 지낼까 생각하니 아빠도 매우 가슴이 아프단다. 정연아! 우리 서로 보고 싶지만 조금만 더 참자. 응? 오래 떨어져 있다가 만나면 더욱 반갑고 즐겁게 지낼 수 있지 않겠니?

아빠가 있는 방의 창밖엔 항상 비둘기와 참새들이 날아와서 평화롭게 놀고 있는데, 아빠가 밥을 남겨 던져주기 때문에 비둘기들이 아주 좋아들 한단다. 비둘기와 참새들이 노는 걸 가만히 보고 있으면 꼭 너희들 정연이와 서연이를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하는구나. 착하고 순하기만 한 비둘기는 꼭 정연이 같고, 쪼르륵 쪼르륵 걸어다니고 뾰롱뾰롱 날아다니는 조그만 참새는 꼭 서연이를 닮았더구나. 이렇게 아빠는 매일매일 너희들을 생각하면서 지낸단다.”(서울구치소에서 1979년 5월 16일 보낸 편지)

여기까지 읽던 정연이는 “엄마, 왜 아빠의 편지를 이제야 보여주세요?”라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답니다. 이제는 40살의 주부가 된 사랑하는 딸 정연이가 사랑하는 아빠의 오래 된 편지를 읽으면서 돌아올 수 없는 아빠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얼마나 절실했겠습니까?

보고 싶은 홍종민 씨! 저와 아이들은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당신도 영원히 살아 있는 영혼으로 우리의 이런 모습을 보고 계시겠지요? 육신으로는 건널 수 없는 이승과 저승의 골이 아무리 깊어도 우리는 마음과 마음으로 만나고 있지요?

너무나 짧았던 당신의 생애

지금은 제 곁에 계시지 않지만 자랑스러운 당신! 당신도 제가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하시는지요? 오늘따라 패티 김의 ‘이별’이 부르고 싶네요. 그 노래는 주인공을 ‘냉정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자상한 사람’인 당신은 저와 자녀들을 남겨두고 훌훌 떠나버렸으니 ‘냉정한 사람’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을 거야

때로는 보고파지겠지 둥근 달을 쳐다보며는

그날 밤 그 언약을 생각하면서 지난날을 후회할 거야

산을 넘고 멀리멀리 헤어졌건만

바다 건너 두 마음은 떨어졌건만

하지만 이 가사와 달리 저는 후회가 없어요. 당신도 후회 않을 것으로 믿어요. 왜냐하면 흘러가버린 시간은 돌이킬 수 없고 지난날의 자취는 100%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당신의 생애 44년은 너무나 짧았어요. 그러다보니 우리가 결혼하고 17년밖에 함께 살지 못했지 않아요? 아이들도 잘 자라서 성인이 되어 자신들의 몫을 충분히 하고 있습니다. 저도 건강하고요. 그러니 집안일일랑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이 그토록 사랑했지만 폭력에 의해 쫓겨난 직장 동아일보사가 잘못을 뉘우치고, 해고한 동아투위 위원들을 단 하루라도 근무하고 자진퇴사하게 하는 그 날은 정녕 오지 않으려는지요? 당신은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렇게 빨리 가신 것입니까?

최근 대한민국 국민의 평균 수명이 80살 안팎이니 여기에 비추면 당신은 반을 조금 더 살았을 뿐입니다. 절반을 살았어도 정의롭게, 그리고 팽팽하게 살다 가셨으니 평범하게 두 배 더 살면 무엇 하겠느냐고 생각해볼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보람 있는 일을 하면서 더 살았더라면 제가 외롭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

저는 지극히 개인적인 바람과 아쉬움을 토로하면서도 당신을 존경하며 당신의 삶을 자랑했습니다. 저는 당신이 가신 후로 친척과 친구들을 만나면 위로의 말을 들었지만 당신을 자랑함으로써 말문을 막았습니다.

당신이 돌아가신 후 용인천주교묘지에 안장됐을 때 시숙께서 당신 자리 옆에 제 자리까지 미리 잡아 가족묘를 만들어주시고 비석에는 “부림 홍공 바오로 종민, 함안 조 씨 바울라 연수의 묘”라고 새겨놓으셨습니다. 친구들이 묘를 보더니 “재혼 길도 막아놓았구나”라며 웃더이다. 저는 “미리 묘비를 만들어 놓으면 오래 산대” 하면서 덩달아 웃었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홍종민 씨! 당신의 동아투위 선배와 후배들 중에 당신 말고도 열일곱 분이나 유명을 달리 하셨답니다. 세월이 험하고 무상한지 이렇게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네요.
이 척박한 땅에서 정의가 승리하는 그날 하늘 높이 펄럭이는 깃발을 보고 싶습니다.
홍종민 씨! 언젠가 저 세상에서 만날 때까지 영혼이 평안하시기를 빌어요. 사랑합니다.


** 이 글은 2013년 5월 10일 초판 1쇄로 발행한 〈1975 - 유신 독재에 도전한 언론인들 이야기〉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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