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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5월 언론투쟁기록[14] KBS 최초 독재항거, 방송민주화운동의 씨앗- KBS (1) 집요한 강제해직, 공정보도에 적극적이던 기자 대상
〈최성민 당시 KBS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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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5.18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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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 이전

1980년 5월, 한국기자협회 및 각 언론사의 언론자유 수호투쟁과 함께 ‘유신독재의 나팔수’였던 KBS에서도 사상 전례가 없는 대규모 언론자유수호운동이 펼쳐졌다. 1980년 5월 12일, 13일, 16일 세 차례에 걸쳐 KBS 기자들은 KBS 본관 앞(지금의 민주광장)에 신군부 쿠데타 세력의 탱크가 진주해 있는 가운데 한국기자협회 KBS분회(분회장 이규창) 주최로 보도국 기자 전원을 참석 대상으로 하여 자유토론회를 갖고 “현 시국에 처한 언론인으로서의 본분과 사명을 다하자는 깊은 반성과 스스로의 각성을 촉구한다”는 데에 의견을 모은다.
“특히 공영방송으로서 KBS가 그동안 국민의 소리를 대변하는 과정에서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외부세력의 부당한 압력과 간섭으로 기자적 양심에서 벗어난 과거의 사례들을 돌이켜본 뒤, 앞으로 공영방송으로서의 긍지를 갖고 KBS 기자들이 한뜻으로 뭉쳐 부당한 편집권 침해로부터 KBS의 올바른 보도 자세를 지켜나가는 스스로의 저항권을 갖기”로 결의했다.

이에 따라 KBS 기자들은 이제까지 당면했던 현 실태를 직시하고, 이제부터 시정되어야 할 제반 문제들을 보도, 경영, 복지 등 세 부분으로 나누어 집약해 ‘KBS의 나아가야 할 길’을 사측에 제안한다. 이 제안은 보도국 간부들의 전횡 및 독재정권 홍보도구로서의 구조적 병폐 제거 등 그동안 쌓인 KBS 보도시스템의 온갖 부조리를 걷어내고자 하는 매우 구체적이고 개혁적인 내용들로 차 있다.


5.17 이후

타 언론사 기자들이 5·17 비상계엄확대와 광주민중항쟁 보도금지에 항의해 한국기자협회를 중심으로 보도검열 거부와 제작거부에 돌입하고 있을 때 KBS에서는 12일, 13일, 16일의 기자총회를 주도했던 기자협회 KBS분회 간부들과 일부 기자들로부터 광주항쟁 보도금지를 포함한 신군부의 보도검열을 거부하자는 요구가 나온다. 당시 언론사 안팎의 분위기는 보도국이나 편집국 등에서 기자들의 모임이나 동태가 중앙정보부, 보안사, 경찰에 수시로 파악되어 신군부에 보고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KBS와 같은 언론사 안에도 동료를 신군부에 밀고하는 동조세력도 있었다. 따라서 신군부에 맞선 기자들은 언론사 안의 적들과도 싸워야 하는 샌드위치 투쟁을 벌여야 했다. 이때 KBS 보도국에 ‘언론학살 살생부’가 나돌 때 자신은 빠지고 동료를 모함해 살생부 명단에 넣고자 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KBS 보도국에서는 보도국장 이하 간부들이 광주항쟁 보도금지에 대해 쥐죽은 듯 따라가고 있었다. 이때는 K공작에 의해 KBS 사장과 보도국장이 다른 언론사 사장 및 보도(편집)국장들과 함께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불려가 ‘충성맹세’를 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12일, 13일, 16일의 기자총회를 주도한 기자들과 다른 일부 기자들을 중심으로 광주항쟁 보도금지를 포함한 보도검열에 순응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일어났다. 이들은 기자협회 및 타 언론사들의 보도검열 거부와 제작 거부 실행에 동조하여 KBS 보도국에서 동료들을 대상으로 보도검열 거부와 제작 거부의 필요성을 설득하고 나섰다. 그러나 동조자의 수가 많지 않아 KBS의 보도검열 거부와 제작 거부는 별다른 효과를 내지 못했다. 이들은 나중에 모두 ‘언론학살’의 희생자가 되었다.

한편 이희찬, 전종옥 최성민 등 부산방송국에 파견돼 내려간 공채 5기와 6기 기자들이 5월 2일 부산진경찰서 출입기자단 ‘자유언론 실천선언’(10·26 이후 최초의 출입기자단 자유언론 실천선언으로서 이후 전국 언론사 언론자유수호 투쟁의 촉발제가 되었다)에 참여했고, KBS 부산방송국 심상대, 최성민, 김용관 등 세 기자는 광주항쟁이 강제진압 돼 가던 무렵에 개인적으로 광주에 가서 현장취재를 했다.

당시 KBS 광주방송국총국은 시위대의 화염병 투척으로 방송시설이 거의 전소돼 방송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막 수습을 마치고 광주총국으로 배치됐던 조달훈 기자는 시위대 취재 도중 행방불명됐는데, 시위대원들과 함께 계엄군에 끌려가 한 달 동안 고문을 받고 풀려났다. 그는 그 후 KBS 노조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본사에서 근무하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추정되는 병을 얻어 재직 중 세상을 떴다. 광주방송총국 김필건 카메라기자는 일체의 취재나 촬영이 봉쇄되고 총알이 날아다니는 극단적인 공포의 상황에서 전남도청 등을 활발히 드나들며 필름카메라로 항쟁의 많은 부분을 취재했다.

KBS는 광주총국이 화재로 방송 기능을 상실하자 보도국 일부 직원들이 5·18 기간 동안 계엄사가 있는 상무대에 불려가 군모와 군복을 입고 ‘선무방송’하는 일에 강제 동원되었다. 이와 관련한 사진이 광주총국 60년사 화보집인 <빛고을 횃불>에 나온다. KBS는 또 광주항쟁 도중 서울에서 특별방송반을 파견하여 광주 인근 송·중계소에서 계엄사 지역분소장 담화를 내보내는 등 ‘계엄방송’을 했다. 이어 광주항쟁이 진압되고 방송기능이 회복됐을 때 광주총국 보도국 기자들은 광주항쟁 수배자 명단 방송을 거부했다.(당시 공채 6기 기자로 광주총국에 근무했던 고광남 YTN 감사 증언).

1980년 KBS 방송민주화운동의 성과와 문제점

80년 KBS해직언론인협의회는 1979년 10·26 사건으로 촉발되어 1980년 광주민중항쟁 뒤 ‘80년 언론대학살’까지 이어진 KBS 기자들의 군부쿠데타 항거 언론자유 수호 운동을 ‘1980년 KBS 방송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른다.

‘1980년 KBS 방송민주화 운동’은 당시 다른 언론사 기자들의 언론자유수호운동과 함께 ‘80년 언론대학살’의 탄압을 받아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유신독재의 나팔수’라는 말을 들어오던 KBS에서 사상 최초로 독재항거 언론운동을 일으켰다는 기념비적 기록과 함께 오늘날로 이어진 후배들의 방송민주화운동을 위한 소중한 씨앗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1980년 KBS 방송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2일, 13일, 16일 등 세 차례에 걸쳐 보도국 기자총회를 열어 공정보도와 경영 합리화를 위한 결의문을 내는 등 각오를 보이며 기자들의 단합을 유도했다. 그러나 ‘행동강령’의 결의까지 동시에 추동해 내지는 못하는 한계를 보였다. 이는 당시 KBS 보도국이 오랫동안 보수적 타성에 젖어 있었고, 인력 충원에 있어서 공사체제 출범 이전 공채 제도 외에 불투명한 채용방식을 통한 공무원 출신, 공공기관 및 각종 정당의 낙하산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많아 동질성과 응집력이 떨어졌고, 공채기들은 상대적으로 숫자가 적어(당시엔 공채 6기까지 들어와 있었다) 비공채기들의 타성을 걷어낼 만한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자총회 결의에 행동강령을 함께 넣지 않은 것이나, ‘보도 개혁’ 이외에 경영과 복지 부분까지 추가한 것은 당시 이처럼 이질적인 다수의 인원으로 구성된 KBS 보도국 상황에서 되도록 많은 수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다만 행동강령은 결의사항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추후에 정하기로 하였다가 5·17과 ‘언론대학살’의 급습을 당하고 만 것이다.

1980년 언론대학살과 KBS

광주민중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한 군부쿠데타 세력은 1980년 7월부터 이른바 ‘80년 언론대학살’에 나선다. 기자협회 및 KBS 등 각 언론사들의 언론자유 수호 투쟁 제압을 통해 쿠데타를 성공시키기 위한 전략의 하나였다.

국방부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가 2007년 10월 25일 발표한 <신군부의 언론통제사건 조사결과보고서>에 따르면, 10·26 직후인 1979년 10월 27일 비상계엄이 선포되면서 실권을 쥐게 된 계엄사는 국가 비상상황에서 국가와 국민을 위한 계엄업무 수행보다는 계엄상황을 이용해 정권찬탈을 목표로 한 일단의 정치군인들에게 장악되어 그들의 목표달성에 매진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언론은 가장 큰 걸림돌이자 중요한 활용대상이었다. 쿠데타 세력이 언론의 한 부분을 제압하고 나머지를 순치시키기 위해 당시 보도검열에서 언론학살에 이르기까지 벌인 일의 진상은 다음과 같다.

1) 사건 개요

1979년 10월 27일 이후의 비상에서 보안사령부는 1980년 2월 1일경부터 정보처를 설치하고 그 안에 언론계를 두는 한편, 이와는 별도로 이상재를 책임자로 하는 이른바 ‘언론반’을 가동하였다. 언론반은 계엄사령부 보도처의 신문, 방송, 잡지 등 모든 매체에 대한 보도검열을 조종 감독하였다.

언론반장 이상재는 보도검열단을 실질적으로 조종 감독하고 ‘K공작’을 실시하여 언론사 간부들의 성향을 파악하고 이들을 회유하였다. 신군부는 K공작의 일환으로 보안사령관의 언론사 및 언론사 간부 면담을 추진하고 이에 대한 언론인의 반응을 수집 분석하였다.

언론반 외근요원들은 언론인과 언론기관의 동정을 파악하였고, 내근요원들은 파악된 사항을 정리하고 언론의 논조를 분석하는 등 각종 문서를 기안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언론반은 ‘언론계 정화대상자’ 336명의 명단을 해당 언론사에 통보하였으며, 1980년 8월 각 언론사는 자체적으로 뽑은 명단을 더해 ‘자체 정화’라는 명분으로 933명의 언론인을 강제해직 시켰다. 같은 해 11월 청와대, 문화공보부, 보안사는 공조하여 전국 63개 언론사를 신문 18개사, 방송 3개사, 통신 1개사로 강제 통폐합시켰다.

2) K공작(중견언론인 회유 공작)

K공작(K는 King의 머리글자이다)은 언론사 간부 성향 파악 및 회유공작으로서, 1980년 3월 중순, 보안사 언론반방 이상재가 ‘단결된 군부의 기반을 주축으로 지속적인 국력신장을 위한 안정세력 구축’을 표면상의 명분으로 언론인 회유공작 계획을 수립하여 전두환의 결재를 받은 것이다. K공작은 전두환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1980년 8월 하순까지 진행됐다.

신군부는 K공작의 일환으로 보안사령관의 언론사 사주 및 언론사 간부 간담회를 개최하여 이들의 반응을 살피는 동시에 신군부 측에 협조하도록 요구하였다. 간담회에서 사령관 전두환에 대한 언론인들의 반응 및 평가를 수집 보고하고 간담회 내용이 기사에 어떻게 반응되는지 역시 보고하였다. 5·18 등 주요사건 발생 시에도 간담회를 열어 언론 협조를 유도하였다. ‘광주소요사태의 조속한 진정과 질서회복 유지를 위해 중진 언론인들을 초청, 현지 실태를 취재토록 유도하고 국민계도를 촉구토록 한다’는 명분 아래 신문 방송 통신사의 사회부 기자 32명, 국방부 출입기자 17명 등 49명을 인솔하여 광주 일원을 취재하도록 했고, 신문 방송 통신사의 사장, 편집국장, 정치부장, 사회부장 각 16명 등 총 64명을 나흘에 걸쳐 호텔에 초청하여 간담회를 열었다.

K공작의 ‘사령관님 언론계 사장 면담 반응 보고’를 보면, 당시 이원홍 KBS 사장을 비롯한 중앙언론사 사장들이 전두환 보안사령관 앞에 불려가 그를 극찬하고 아부에 가까울 정도로 ‘협조’를 다짐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 ‘언론사 편집(보도)국장 만찬 반응 보고’에 따르면 KBS 강용식은 “오늘 만찬은 전혀 공식석상이라는 억압감이 없이 사령관님의 노래를 들을 정도로 좋은 분위기였으며, 앞으로 이러한 계기를 마련하여 정부 홍보방향을 제시한다면 더욱 효과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3) 언론인 강제해직(1980년 언론대학살)

언론의 완전 장악이나 도움 없이 쿠데타 정권 창출과 유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신군부는 사전 정지작업으로 대대적인 ‘언론 숙정 작업’에 들어간다. 이를 위해 신군부는 이상재가 주도하는 보안사 언론반에 ‘언론계 자체정화 계획서’를 마련케 한다. 이 계획서는 군부에 비협조적인 언론인들을 제거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짜여 졌으며, 이른바 반체제 인사, 용공 또는 불순한 자, 이들에 동조한 자, 검열 거부 주동 및 동조자, 부정축재자, 특정 정치인과 유착된 자 등을 강제해직 대상으로 선정하였다.

이 계획서에는 언론인 숙정을 3단계에 걸쳐 실행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첫 단계로 7월 25일부터 30일까지 문공부 주관으로 한국신문협회와 한국방송협회의 긴급총회를 소집시켜 ‘자율적 숙정’을 결의케 하며, 두 번째 단계로 8월 1일부터 10일까지 각사 발행인 책임 아래 언론 자체 정화위원회를 설치해 자체 숙정케 하고, 마지막 단계로는 소기의 성과가 없을 때 8월 11월부터 30일까지 경영주를 포함, 합동수사본부에서 처리토록 한다는 것이었다.

그 첫 수순으로 한국신문협회는 1980년 7월 29일 이사회 및 총회를 열어 결의문을 각 신문지상에 보도하였다. 다음날 한국방송협회(회장 이원홍 KBS 사장)도 이사회와 총회를 열고 총회 결의문을 TV와 라디오를 통해 보도했다. 이들 각 협회의 결의내용은 (1) 반체제, 비위, 부패 언론인의 제거 (2) 언론 부조리 풍토의 개선 (3) 언론인 교육을 통한 자질 향상 노력 (4) 국익 우선의 언론 실현 등이다.

1980년 언론인 강제해직(언론대학살)은 국보위 문공분과위원회가 기본 지침을 수립하고, 그에 따라 보안사(언론반)가 해직 대상자를 선정, 명단을 작성하여, 문공부가 언론사의 자율결의 형식을 빌려 집행한 것이다. 집행 과정 중 언론사에서 외부에서 내려온 해직 대상자 외에 자체적으로 많은 인원을 추가했다. 1980년 8월 16일 당시 이수정 문공부 공보국장이 작성한 공식 문건인 ‘언론정화 결과’에 따르면 ‘언론계 자체 정화 계획’에 따라 해직된 언론인은 모두 933명으로, 이 중 298명은 정부가 직접 정화 대상자로 선정했고, 635명은 외부 강요 없이 각 언론사가 자체 선정했다. 전체 해직자 중 편집 보도국 기자가 모두 705명으로 해직언론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4) KBS의 강제해직

1980년 7월 19일부터 8월 24일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모두 54명(서울 24명, 지방 30명)의 기자들이 강제해직되었다. 타 직종(피디, 아나운서, 행정, 기술직)까지 합하면 135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임원 및 논설진 4명, 편집보도 요원 86명, 업무사원 45명 등이다. KBS가 8월에 일어난 다른 언론사들의 기자 해직에 앞서 7월부터 강제해직 조치를 시작한 것은 정부 투자기관의 하나라는 이유로 7월의 이른바 ‘국영기업체 정화’에 동참했기 때문이다.

1차 때는 27명의 기자와 타 직종을 포함해 모두 63명이 강제해직 되었다. 해직자 명단은 당시 사장 최재경이 주관한 고급간부회의에서 작성했다. 해직기준은 밝히지 않았지만 당시 경영진이 외부의 주문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그동안 사내의 ‘껄끄러운 인물’을 ‘통보 명단’에 자의로 넣어 무차별 학살한 겻으로 알려졌다.

이때 강제해직된 보도국 임연책 차장의 경우, 평소 김도진 보도국장의 취재 편집 방침에 앞장서 직언해 온 행적이 해직의 주요 이유였다. 그러나 내세워진 해직 명분은 “시국관이 투철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시국관이 불확실하다는 ‘증거’로는 광주항쟁 비디오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광주항쟁 비디오는 국내 기자의 촬영이 어려웠던 당시 상황에서 NHK 화면을 일본 특파원을 통해 입수한 것이며, 그것은 보도 목적보다는 기관에서 시위자를 색출하기 위한 자료로 제공된 것이었다.

한편 당시 보안사의 ‘언론 정화자 명단’에 ‘정화 대상자 중 보류자 명단’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는 애초에 정화 대상자로 넣었다가 어떤 이유(로비 등)로 명단에서 빼 준 경우로 보인다. 보류자 이름 옆에는 생(生)자와 함게 ‘착오’라고 적혀있는 곳도 있다. ‘보류자’로 분류돼 강제해직을 면한 사람들은 KBS에서는 보도국장 김○진, 국제국장 이○원, 워싱턴특파원 이○석, 정치부 기자 김○규, 정치부 기자 류○효 등이다. 이와 관련하여 나중에 문공부가 낸 ‘언론정화 중간보고’(1980년 8월 11일)에는 “정부 선정 대상자 중 8월 11일 현재 41명은 각사 인사조치 과정에서 개전의 정이 있고, 새 시대에 유익하게 참여할 수 있는 자로 판단하여 이번 인사에서 일단 제외하였음”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어 7월 25일 2차 강제해직은 1차 강제해직의 칼잡이를 했던 최세경 사장과 전옥배 기획조정실장 등 고급간부진의 거의 포함되었다(갑작스런 최세경 사장 경질은 쿠데타 정권 입맛에 맞는 자를 보내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이다).

8월 2일의 3차 강제해직은 이원홍 신임 사장이 ‘언론인 숙정 지침과 방송협회 자율정화 결의’에 따라 자행했다. 보도국 기자총회를 주도해 온 이규창 기협 KBS 분회장과 박동영, 심의표, 이윤배, 이몽룡 기자 등 공정보도 실현에 적극적이었던 젊은 기자들이 모두 학살 대상이 되었다.

반공정신이 투철하지 못하고, ‘광주항쟁에 부화뇌동하거나’ 검열을 거부하자고 앞장선 기자들은 당시 상황에 비추어볼 때 부적절한 시국관을 가졌다는 것이었으며, 이밖에 특정 정치인과 밀착되었다거나 이권에 개입했다는 등의 근거 없는 이유를 편의적으로 내세워 해직을 강행했다. 또 새 시대를 맞아 비리 관계자들을 척결한다며, 사표를 쓰지 않은 사람은 비리 혐의자로 수사한다는 협박 아래 강제로 일괄 사표를 받아 ‘의원면직’ 형태로 회사에서 내몰았다. 사표용지는 미리 서울 본사에서 인쇄하여 본사 및 지방국에 내려 보낸 것이었는데, 사직 이유는 모두 똑같이 ‘일산상의 이유’로 박혀 있었다.

3차 해직 때는 당시 KBS를 출입하던 중앙정보부 요원이 돌린 ‘살생부’가 설왕설래했는데, “회사 간부나 기관원을 붙들고 살아남기 위한 발빼기와 발빼기를 위해 동료를 모함하는 추악한 모습이 벌어졌다”(한국기자협회와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공편 <80년 5월의 민주언론-80년 언론인해직백서> 150쪽).

8월 2일에 이어 하루만인 3일에 4차 해직이 자행됐다. 이때 기자협회 부회장으로 언론자유 수호 투쟁에 앞장섰다가 관계기관에 끌려가 한 달 동안 고문을 당한 이홍기 경제부 기자를 강제로 몰아냈다.

8월 8일 5차 해직은 부산진경찰서 출입기자단 ‘자유언론 실천 결의문’ 작성에 관여했던 전종옥 기자와 이희찬 기자, 광주민중항쟁 현장에 다녀온 심상대, 최성민, 김용관 기자 등 부산방송총국 기자들이 학살 대상이 되었다.

5) KBS 강제해직의 특징

KBS 강제해직은 5차에 걸쳐 이루어짐으로써 1~2차로 자행된 다른 언론사들의 강재 해직 만행보다 집요하게 자행됐다. 2차 해직 때는 사장 최세경 등 간부들도 대상이 됐는데, 이는 외부권력이 1차 해직조치에서 사장 이하 간부들에게 자체정화 임무를 부여하고 사장 이하 간부들은 평소 껄끄럽게 여기던 사원들을 희생양으로 삼는 기회로 이용하는 등 ‘지시-복종-포상’의 서로 주고받는 신종 ‘권언유착’ 및 ‘학살 공범’ 관계를 유지하다가 2차에서는 정권이 ‘지시 이행자’이자 ‘공로자’인 그들에게 ‘자체 정화사 선별’의 누명을 팽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는 또한 ‘언론계 숙정작업’의 원안에 있는 3단계(소기의 성과가 없을 때 경영주 포함, 합수부에서 처리)까지 실시된 것으로서 KBS가 ‘언론계 숙정’ 작업이 가장 철저하게 자행된 곳임을 보여준다.

또 이때 강제해직된 KBS 기자 가운데 반수 이상이 호남 출신이어서 군사독재 쿠데타 정권과 결탁한 지역패권주의 경영진에 의한 강제해직 조치 단행에 지역감정이 크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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