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45년여 전 1971년, 칠레에서 벌어진 이야기다.
아옌데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패닉상태에 빠졌던 우익들이 ‘냄비행진’이라는 시위를 조직하면서 반격을 시작한다.
중상류층 여성들이 나서서 나무숫가락으로 빈 소스그릇을 드럼처럼 두들기면서 시내를 행진했다.
평소 카드놀이나 야회복차림으로 연회를 즐기던 살찐 여성들이 “배고파 못 살겠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반정부 시위를 벌인 것이다.
이들의 시위가 있는 날이면 시내로 통하는 길거리가 온통 이들이 타고 온 최고급 차로 꽉 찼다고 한다.
이들은 하녀들도 시위에 참여하도록 종용했고, 몽둥이로 무장한 ‘조국과 자유’라는 이름의 극우 파시스트 민병대의 호위를 받았다.
부유층이 나서서 배고프다고 소리지르는 이런 우스꽝스러운 시위는 64년 브라질에서 고울라르트 대통령의 사회주의 정부를 뒤집어엎을 때 이미 등장한 바 있다.
똑같은 경우는 아니겠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때도 여의도에서 전국의 식당주인 3만여 명이 모여 솥단지를 집어 던지며 시위를 벌인 적이 있다.
원래 거리 시위라는 것은 더 이상 갈 데 없고 호소할 방법도 없는, 돈 없고 권력 없는 이들이 마지막으로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모이는 것이다.
도대체 돈 있고 권력 있는 이들이 길거리에 나설 일이 있겠나.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른바 좌파정권도 아닌 우파 정권, 그것도 역사교과서까지 바꾸겠다는 극우정권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어버이연합이나 엄마부대 같은 불쌍한 우익들이 아니라, 진짜 돈 많고 권력 있는 이들이 거리에 나서는 것이다.
대한상의 등 재계가 주도하는 쟁점법안 통과촉구 1천만 서명운동 말이다.
대통령까지 길거리 서명대에 가서 “오죽하면 이 엄동설한에 경제인들과 국민들이 거리로 나섰겠나” 한 말씀하며 서명을 했다.
얼마 전 기자회견에서 국민이 나서야 한다고 선동하더니 이제 대통령 자신이 청와대를 박차고 나와 길거리로 진출한 것이다.
최고 권력자와 최고 부자들이, 돈없고 권력없는 불쌍한 국민 코스프레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가두시위, 광장집회를 희화화하고 있는 것이다.
차제에 하나 더 알고 싶은 것이 있다.
예전 여의도에 나와 호기롭게 솥단지를 던지던 식당 주인들이 왜 지금은 아무 소리 안 하고 있나.
지금이 그 때보다 장사하기가 훨씬 좋아진 건 아닐텐데...

* 이 글은 ''국민라디오 - 강기석의 생각 하나'' 코너를 통해 라디오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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