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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5월 언론투쟁기록[9] 처절한 주검, 아버지 조사 “장하다! 네 뜻이 빛나라!”- 동아일보ㆍ동아방송(2) 〈최유찬 동아일보 기자 5.18 광주 취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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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12.03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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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광주취재기자로 파견된 것은 1980년 5월 21일 무렵이었다. 5월 18일 남녘에서 들려오는 불길한 소식에 따라 1차로 광주에 연고가 있는 기자 2명이 먼저 내려갔고 그들과 교대하기 위해 2차로 나와 다른 한 기자가 파견된 것이다.

광주에서 전해지는 소식이 계엄사 검열단에 의해 잘려 나가고 윤전기를 세우고 기사를 깎아낸 찌라시신문, 백지신문 등이 기자들을 통해 신문사에서 빠져나가 시중에 나돌아 다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진실보도는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건 현장의 목격자가 되고 언젠가는 역사의 증인이 되기 위해 그곳에 가야했다.

우리는 광주로 가는 길이 계엄군에 의해 차단되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에 호남고속도로를 놓아두고 먼저 남원을 거쳐 담양으로, 그리고 담양에서부터는 걸어서 광주로 잠입하는 길을 선택했다. 길가의 숲에 매복해 있는 계엄군의 총구를 마주칠 때마다 등골이 서늘하고 오싹했지만 어떻든 우리는 광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시민들이라고 해서 우리를 따뜻하게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틈입자들의 정체를 심문하는 따가운 시선이 온몸에 느껴졌지만 우리는 물어물어 도청을 향해 걸어갔다. 불에 그을려 셔터를 굳게 내리고 있는 전일방송은 우리에게 진실보도만이 살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도청 앞 광장과 인근 거리는 축제마당인 것처럼 사람들로 넘쳐났다.

우리는 먼저 5.18 희생자들이 안치되어 있는 전남도청 앞 상무관으로 향했다. 흰 천으로 덮여 줄지어 누워 있는 시신들, 그 시신들과 유족들로 인해 상무관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가슴, 머리, 복부 등에 총상을 입어 피에 젖은 시신들과 유족들의 통곡. 신음. 나이 어린 소년의 죽음, 그 죽음 앞에 바쳐진 아버지의 “장하다! 네 뜻이 빛나라!”라는 조사.

우리는 피와 죽음, 통곡과 눈물이 한 데 뒤엉켜 있는 그 자리에서 기자이기 전에 조문객이 되어 한 바탕 눈물을 흩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사태, 이 진실을 어떻게 취재ㆍ보도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시민학생군 지휘부가 있는 도청 상황실뿐만 아니라 이른바 독침사건도 취재했고 일가족 살해사건도 취재했다. 5월 18일 병원 응급실에서 부상자들을 치료했던 병원 의사의 증언도 취재했으며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던 망월동 묘지에서 가족을 찾아 돌아다니는 시민을 만나 눈물로 소주 한 잔을 나누어 마시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다른 기자들이나 관심 있는 이들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고 했던 일이므로 나는 여기서 내가 겪었던 딱 한 가지 사례만 증언하고자 한다. 그것은 5월 27일 계엄군이 광주 시내에 진입했을 때 내가 겪고, 보고, 들은 사건이다.

5월 26일 오후 시내에는 계엄군이 곧 진주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시민군은 찦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확성기로 그 소식을 전하면서 시민들이 모두 시내로 나와 광주를 지키는 데 참여해 달라고 호소했다. 동아일보기자단은 그 동안 숙소로 써왔던 여관에 있으면 신변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도청 인근에 있는 광주주재 신광연 기자의 집으로 숙소를 옮겼다.

27일 새벽 1시 쯤부터 총소리가 나기 시작했고 시민의 참여를 호소하는 여성의 애절한 목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들려왔다. 총소리가 점차 크게 연속으로 들려왔기 때문에. 기자단은 한 방에 모여 밤을 새웠다.

새벽 5시쯤 아직 먼 곳에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오고 있었지만 날이 밝았기 때문에 기자단은 활동을 시작했다. 대문을 열고 길을 내다보니 철모에 흰 띠를 두른 군인들이 전봇대 같은 곳에 몸을 숨긴 채 사격 자세로 경계를 하고 있었다. 기자단은 팔에 노란색 보도 완장을 차고 손을 머리에 얹고 길에 나섰다. 군인들은 자기 자리에서 경계만 하고 우리를 제지하지는 않았다.

길을 가는 도중 곳곳에 사람이 쓰러져 있었지만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눈으로만 확인하고 지나쳐서 도청 앞 광장에 이르렀다. 도청 앞에는 많은 군인들과 함께 민간인 복장을 한 사람들도 몇 사람 눈에 띄었다. 경찰이거나 특수직 공무원이라고 생각되었고 일반 시민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우리는 도청을 중심으로 충장로 쪽과 금남로 쪽을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몇 구의 시신을 더 확인하고 다시 도청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에 민간인들이 많이 늘어난 것을 보고 우리는 팔에서 보도 완장을 뗐다.

민간인들은 도청 쪽으로 긴 줄을 서고 있었는데 무슨 줄인가 물어봤더니 도청과 경찰청을 청소할 인원이라고 했다. 나는 그 줄에 끼어들었고 동행을 했던 서기자는 도청 밖을 취재하기 로 했다. 주민등록증을 확인하는 절차를 거쳐서 도청에 들어섰다. 도청에 들어온 사람들은 각자 뿔뿔이 흩어져 갔다.

나는 우선 시민ㆍ학생군의 상황실이 있던 곳부터 가보기로 했다. 길을 가는데 교련복을 입은 학생이 화단 향나무 위에 엎어져 있었다. 젖혀 보았더니 가슴 부분에 흥건하게 피가 젖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달아나다가 등 뒤에서 총을 맞은 것으로 보였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 상황실 쪽으로 가는데 복도는 피로 물걸레질을 한 것처럼 시뻘겋게 피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을 끌고 간 흔적이었다. 그렇게 끌려간 사람은 한둘이 아닌 듯 핏자국은 여러 차례 덧칠이 되어 있었다.

이 피그림은 2층 복도에도 똑같이 그려져 있었지만 지하실 쪽이 더 심했다. 상황실은 오히려 깨끗한 데 비해서 지하실 쪽에서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간 것은 계엄군이 진입하기 이전에 도청을 폭파하기 위한 폭약이 장치되어 있다고 알려진 지하실을 장악하기 위해 특수군이 사전에 투입되어 작전을 펼친 때문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그러면 이렇게 끌려간 사람은 어디로 갔는가? 도청 동쪽에는 5월 18일 무렵에 죽은 사람을 위해 마련한 관이 10여 개 쌓여 있었다. 관 뚜껑을 여러 개 열어보았으나 그곳에는 시신이 없었다. 어디론가 실려 간 듯했다.

경찰청으로 가기 전에 도청 동쪽에 있는 강당으로 갔다. 별채 건물인 2층 강당 한 가운데 한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가까이 가서 봤더니 총을 맞은 흔적은 없고 불에 타 죽은 것으로 보였다. 그 사람의 주위에는 물기가 흥건했는데 분신에 쓴 휘발유 통 같은 것은 주위에 없었다.

머리가 타고 화염에 끄을려 분명하게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얼굴 전체 윤곽으로 보아 시민군 대변인 역할을 맡았던 윤상원 씨로 보였다. 강당을 나와 도청 뒤에 있는 경찰청으로 갔다. 경찰청의 상황 역시 도청과 같았다. 피를 흘리는 사람을 끌어간 흔적은 여기저기 있는데 시신은 어디에도 없었다. 시신들은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진 듯했다.

경찰청을 확인하고 다른 취재거리를 찾기 위해 도청 앞쪽으로 나오는데 시민ㆍ학생군이 군인들에게 잡혀 오고 있었다. 모두 상의가 벗겨지고 흰 메리야스 위에 ‘극렬분자’, ‘차량탑승자’, ‘무기소지자’ 등으로 죄목을 구분한 빨간 글씨가 씌어 있었다. 잡혀온 사람들은 조기 두름 엮듯 끈으로 묶여 모두 원산폭격을 당하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누군가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거나 하면 중위 계급장을 단 장교가 군화발로 그 사람의 머리를 축구공 차듯 차버리고 쓰러진 사람을 짓밟았다. 모래땅에 맨머리를 박고 두 손은 뒤로 묶여 있는 상태였으므로 그 사람의 얼굴은 이내 피범벅이 되었다.

잡혀온 사람들은 도청에 들어서기 이전에 이미 심한 구타를 당한 듯 온 몸이 피와 멍과 땀으로 얼룩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음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한결같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도청을 나와 광주서경찰서로 갔다. 일반전화가 되지 않는 상황이라 경찰서 경비전화를 통해 치안본부 출입 기자와 통화를 했는데 대학생본부가 있던 YWCA의 상황이 아직 파악되지 않는다는 전갈이었다. 내무부 출입기자가 치안본부에서 취재를 총괄하고 있었으므로 그 전갈은 취재지시나 다름없었다.

YWCA 에는 약 1개 소대나 됨직한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병력의 지휘자로 보이는 중사 옆에 한 민간인이 붙어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천천히 그 옆으로 다가가서 민간인이 중사에게 말하는 이야기를 들으니 시민 학생군이 광주를 점령하고 있을 때 총기를 든 사람들이 한 약국에 가서 사람을 죽이고 금품을 약탈했다는 내용이었다. 민간인은 나를 힐끗힐끗 쳐다보면서도 그 이야기를 모두 중사에게 전하고 있었다.

이야기가 다 끝난 것 같아서 나는 기자 신분을 밝히고 그 사건이 어디서 언제 일어난 것인지 알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그 민간인은 “나 보안사에서 나왔어요.”라고 말했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곧바로 이해했으므로 나는 알겠다고 말하고, 중사를 향해 YWCA 를 취재하고 싶은데 허락해달라고 요구했다.

중사는 민간인의 존재를 의식하는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러라고 허가해주었다. 나는 두 손을 들어 머리에 얹고 천천히 YWCA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YWCA 건물 외벽에는 총격전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건물 입구는 곧바로 위 아래층 층계로 이어졌는데 지하실 쪽 층계로 내려가니 핏덩이가 엉킨 세 구의 시체가 뒤엉켜 누워 있었다.

지하실 쪽 상황을 대강 파악하고 2층으로 올라가는데 내 뒤를 군인 서너 명이 총을 들고 뒤따라 올라왔다. 나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시민군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살아 있다면 나는 그야말로 양쪽의 총알받이가 될 터였다. 2층으로 가니 창문 옆에 두 구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

2층은 대학생본부로 쓰던 곳이라서 당시 상황이 어떤 것이었는지 잘 보여주었다. 황급히 도망치느라 미처 자기 물건도 수습하지 못하고 건물을 빠져나간 듯, 노동자수첩, 여성생리대 같은 것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두 구의 시신은 창 쪽에서 날아온 총탄을 맞은 듯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다시 도청 앞으로 가서 다른 기자들과 만나 취재한 내용들을 주고받고 앞으로 할 일들을 점검했다. 가장 중요한 일은 5월 27일 당일의 전체 상황의 전개를 재구성하고 사상자, 체포된 사람들, 광주지역 유지들의 활동계획 등을 파악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손쉬운 일이 없었다.

오전 11시 가까이 되었을 때 기자단에게 도청출입을 허용한다는 연락이 왔다. 외국기자들이 일차적으로 취재한 다음 국내기자들에게도 취재가 허용된 것이다. 각 신문사별로 한 사람씩 도청에 들어가고 우리는 그 동안 취재한 내용을 정리해서 본사에 송고하기로 했다.

그런데 송고를 하러 갔던 기자가 돌아와서 나는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CBS 방송 6시 30분 보도를 통해 광주취재 기자들의 생사가 확인되지 않는다는 뉴스를 들은 아내가 충격을 받아 조산을 하게 되었는데, 난산이라서 생명이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송정리를 통해 서울로 가는 길이 아직 열리지 않고 있었으므로 나는 영암으로 내려가서 함평으로, 그리고 고창으로 가는 길을 택해야 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서울로 귀환하니 28일 오후 4시경이었다. 회사에 취재결과를 보고하고 병원으로 전화를 거니 둘째가 태어나 있었다.

사흘 후 나는 다시 광주로 향했다. 광주항쟁에 대한 심층취재가 결정되었고 나는 그 일에 자원했다. 진실보도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항의해 사표를 쓰는 기자가 나오고 언론자유운동을 위한 모임이 꿈틀대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취재가 먼저라는 생각이었다.

5월 18일 시위대의 앞에 섰다가 총탄에 목숨을 잃은 전남대 법대생 집을 찾아가 가족들의 협조로 일기를 읽어볼 수 있었다. 그가 시위대의 맨 앞에 선 것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일기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또 망월동 묘지를 찾아 그곳을 헤매는 유가족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렇게 심층취재를 해나갔지만 3일 만에 나는 서울로 소환되었다. 광주에서 취재활동을 하는 기자들을 모두 복귀시키라는 명령이 내려졌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두 달 뒤, 이제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나는 많은 동료들과 함께 동아일보에서 해직되었다. 나의 메리야스에도 부조리기자라는 붉은 글씨가 씌어졌고, 그것이 해직의 이유였다는 것을 많은 시간이 흐른 다음 알게 되었다.

동아일보 참고자료
참고한 책은
〈80년 5월의 민주언론〉한국기자협회, 80년 해직언론인 협의회 공편. 나남 1997
〈문민시대의 군부와 권력〉 김재홍 저. 나남 1992년
그밖에 두 사람을 만나 오찬을 하며 취재하였고, 다섯명의 관련자들에게 전화로 취재하였음.
그러나 대부분 34년 전의 일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어, 부분적 확인에 그쳤음.
원고에 위의 책에 쓰인 부분을 일부 인용하였으나 논문도 아닌 글에 주를 달기도 뭣해 생략했음.
따라서 특별히 취재 관련 제출할 자료는 것은 없다고 사료됨.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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