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회장이 바톤을 이어받으며 피디연합회가 만 28살의 청년이 되었다.

튼튼한 육체와 맑은 영혼을 가져야 할 젊은이는 몸은 망신창이고 그를 둘러싼 현실은 암울하기만 하다. 해서 생일 축하 자리는 30을 앞둔 청년이 지금 어떤 꿈을 꾸며, 어디서 어떻게 서 있는지 묻는 자리여야 한다. 아니 축하의 자리, 축사가 아니라 죽어버린 이 땅의 민주주의와 방송저널리즘에 조종을 울리는 자리, 조사가 되어야 한다.

〈피디연합회〉 20년사를 읽었다.

책속에서 지난 세월 프로듀서들이 가졌던 꿈과 열정, 눈물, 환희와 좌절, 싸움... 같은 존재들이 거꾸로 돌아간 오늘을 응시하듯 웅크린 자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다시 언론자유 60위라는 냉엄한 현실 앞에 서 있다. 방송통신심의라는 사실상의 검열, 권력과 그에 결탁한 이사회와 경영진의 내부통제, 검열과 통제 이슈를 희석시키며 한 쪽의 일방적 이념을 전파하며 여론조작에 앞장선 종편방송의 선전에 너무나 무기력해진 오늘을 본다. 이 검열, 통제, 선전이라는 쳇바퀴시스템이 서로 물고 물리며 작동되며 우리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심각한 것은 이 시스템이 구조화, 일상화되어가고 있고 내년 총선, 내후년 대선을 맞으며 그 강도가 점점 더 세질 것이라는 점이다.

옛 기록들을 읽으며 이 냉혹하고도 엄연한 현실 앞에서 우리가 ‘피디쓰레기, 피레기’가 되지 않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새삼 확인한 것은 너무나 상식적이고 누구나 알고 있는 믿음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 믿음 다섯 가지를 공유한다.

첫 번째는 ‘역사는 발전한다’는 믿음이다.

90년 4월 KBS 파업싸움에 지고 동료들마저 해고되어 좌절한 나에게 역사학자 안병욱 선생이 말했다. ‘역사가 단기적으로는 뒷걸음치지만 길게 보면 항상 진보되어 왔다’, 라고. 당시에는 믿을 수 없었지만 과연 그랬다. 싸움 자체에서는 졌지만, 4월 파업은 이 후 진행된 방송민주화의 초석이자 씨앗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우리의 헌신과 노력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두 번째는 ‘프로듀서’ 집단과 동료에 대한 믿음이다.

프로듀서는 피디란 이름으로 하나다. 옆에 ‘네가 옳아’라고 말하는 단 한 명의 동료가 있는 한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현업시절 ‘악화와 양화’를 피디집단에 빗대어 설파하신 선배가 계셨다. ‘악화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잘 아니 항상 모여 뭔가 꾸며 생존을 도모한다, 하지만 양화들은 자신이 당당하니 모일 이유가 없다. 그러다 양화가 악화에 구축당하는 거다, 양화들이 모여야 한다, 얼굴 자주 좀 보자.’ 그렇다, 우리는 모여야 한다. 모여서 함께 꿈꾸어야 한다.

세 번째는 ‘프로그램’에 대한 믿음이다.

프로듀서는 꿈꾸는 사람이다. 프로듀서는 프로그램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다. 프로그램은 프로듀서들이 절대 버릴 수 없는 목숨이다. 지금 우리가 현실을 외면하고 도망가거나 자기검열에 빠져있지 않은지 성찰하고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야 한다.

지금은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국가란 왜 존재하는가, 지금 권력은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가치는 무엇인가, 물어야 한다.

네 번째, ‘우리가 지향하는 가치와 삶의 방식’이 옳다는 믿음이다.

언론 없이는 민주주의와 사회발전이 불가능하다는 진실, 비판에는 금기와 성역이 없고 방송은 권력이 아니라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는 원칙이 우리의 가치다. 간부자리 하나 얻고 작은 이익 챙기기 위해 권력에 아부하고 프로듀서의 양심을 팔아먹는 비굴한 삶은 살지 않겠다는 것이 우리의 삶의 방식이다. 너무나 당연한 우리의 가치와 삶의 방식을 우리는 다시 확인하고 공유해야 한다.

마지막 다섯 번째 믿음은 ‘싸워서 이긴다’는 것이다.

오랜 경험으로 권력과 불의에 맞선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거기에는 엄청난 용기화 희생이 따른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동시에 그 싸움으로 세상이 바뀐다는 것도 우리는 안다. 냉전이 극대화되던 1954년 미국에서 상원의원 매카시가 국가 주요직책에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하고 있다고 주장한 뒤 미국사회에 매카시즘 광풍이 불었다. 정치인이, 시민이 심지어 언론인들조차 자신이 공산주의자로 몰릴 것이 두려워 매카시에 묵인, 동조할 때 CBS에서 〈See it Now〉를 진행하던 저널리스트 에드워드 머로우가 반기를 든다. 외로운 싸움 끝에 마침내 매카시즘은 잠재워졌다. 지금 이 땅에도 허상과 망령이 지배하고 있다. 앞에서 얘기한 검열과 통제, 선전이라는 구도이다. 우리는 싸워야 하고 싸워서 이겨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싸움의 기술은 연대라고 믿는다. 지금 다시 깃발을 세우고 모두가 언론민주화 운동에 함께 연대할 때다. 에드워드 머로우가 방송말미에 했던 인사말로 모든 분들께 안부를 전한다. Good Night, Good Luck!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저작권자 © 자유언론실천재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