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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5월 언론투쟁기록[5] 기자들은 생명 걸고 전두환 세력과 싸웠다합동통신(2) 〈김태홍 전 기자협회장·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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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09.18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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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김태홍 전 국회의원이 서거하기 전인 2006년 기자의 날 제정에 즈음해 작성한 유고입니다.


한국기자협회(회장 정일용)가 기자의 날을 제정한 것은 여러 깊은 의미가 있다. 우선 기자의 날은 우리나라 민주화와 언론자유 투쟁사가 괘를 같이 한다. 기자의 날인 5월 20일은 80년 당시 기자협회를 중심으로 전국 언론사 기자들이 전두환 신군부의 독재체제가 강요한 언론 검열을 거부,전면 투쟁을 시작한 날이다. 그래서 기자의 날은 우리 언론사의 기념비적인 날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나 기자의 날이 과거만을 기릴 수는 없다. 이날은 기자들의 생일이 되어야 한다. 생일은 의미 있고 뜻깊게 보내라고 만든 날이기도 한다. 3ㆍ1절이 있고 6ㆍ25나 8ㆍ15가 있는데 그러한 기념일을 제정한 것은 놀러가라는 게 아니다. 그 뜻을 기리라는 것이다. 기자의 날에는 전국의 기자들이 언론자유 투쟁을 위해서 헌신했던 선배기자들과 그 정신을 같이 하는 하루였으면 좋겠다. 26년 전 진실보도와 공정보도를 위해 전국의 기자들이 계엄치하에서 목숨을 걸고 총파업을 감행했듯 오늘날의 기자들도 그들의 용기와 올바른 삶의 자세를 본받는 날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박정희 정권 말기와 80년의 암흑기는 소름 끼치는 공포가 지배하는 참담한 세월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5년부터 80년까지 일부 언론사에서는 언론자유를 위한 비공개 모임이 조직, 운영되고 있었다. 당시 본인이 근무하던 합동통신과 중앙매스컴, 경향신문, 한국일보 등 4개사 기자들이 비공개 언론 운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다가 79년 10ㆍ26 사태가 불거지면서 이들 4개 언론사 기자들이 모여 공개운동을 하기로 합의했다. 다음해인 80년 3월 말 집행부 선거가 있는 기자협회에 ‘양심 세력’이 진출해 진정한 기자협회로 탈바꿈시키자는 듯을 모았다.

본인은 80년 4월 1일 한국기자협회 제20대 회장에 취임해서 5ㆍ18사태가 발생하기까지 한 달 보름여 동안 기자협회를 운영했다. ‘서울의 봄’이라 불리는 그 기간은 신군부가 정치권력 탈취를 위한 음모를 진행하고 있었다. 반면 전국의 대학가와 시민사회 단체는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사력을 다해 싸우고 있었다. 기협도 최선을 다하고자 했다.

본인이 기자협회장으로 당선돼 협회에 출근하기 전까지 기자협회장 방에는 7명의 기관원이 매일 출근하다 시피 했다. 당시 기자협회는 지금의 프레스센터 자리에 있던 4층 목조건물의 한 층을 쓰고 있었다. 매일 오전 10시가 되면 중앙정보부와 보안사에서 각 2명, 치안본부 정보과에서 1명, 서울지방경찰청 정보과에서 1명, 남대문경찰서 정보과에서 1명 등 모두 7명이 기자협회에 자기 집 드나들 듯 출근을 했다. 기자협회장 방은 그들이 주인이고 회장은 손님이 되는 기이한 상황이 되풀이 되었다. 그러나 본인은 4월1일 출근하면서 기자협회 출입문 밖에다 ‘기관원 출입 금지’라는 표지를 써 붙였다. 당연한 일처럼 되풀이되던 관행에 종지부를 찍는 일에 기협직원들도 동참했다.

본인은 취임 첫 날 당시 돈으로 18만원을 주고 영국제 수동 인쇄기 중고품을 사들였다. 그리고 매일 서너 건의 중요한 사건들에 대해 성명서 형식으로 유인물을 만들어 AP를 비롯한 전 외신에 타전했다. 그 결과 중요한 사건들에 대한 진실이 외신을 타게 됐다. 당시 서울시청 2층에서 군인들이 매일 언론검열을 하고 있었다. 꼭 보도돼야 할 기사는 반드시 빠지고 하잘 것 없는 기사를 키우는 그런 일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신군부의 언론 검열은 민주화 운동에 대한 보도를 하지 못하게 하면서 신군부의 집권을 용이하게 하는 방향으로 악용되고 있었다. 기협은 그런 상황에 정면에서 반기를 든 것이다. 계엄당국과 기협의 정면충돌 순간이 다가오는 긴장된 날들이 이어졌다.

기협은 당시 5월 1일부터 10일까지 전국 기자협회 분회 친선 축구시합을 개최했다. 동아투위와 조선투위 선수들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를 대신해 출전했다. 지금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이 MBC선수로 출전 해 골문 앞에서 점프를 했다 땅에 떨어져서 혼절해 병원에 실려 가는 그런 일도 있었다. 전국의 기자들은 축구도 했지만 같이 모여앉아 민주주의와 언론자유에 대해 토론하고 언론의 공동투쟁을 논의했다. 선수들은 청팀과 백팀으로 나뉘어서 청팀은 푸른색 머리띠에 ‘검열철폐’를 써 붙이고 시합했다. 기자들은 스스로 결의도 다지면서 시민들에게 정치적 자유와 언론자유에 대해 알리고자 했다. 그래서 축구대회는 그 만큼 큰 의미를 지녔다.

기협은 기자들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 매주 월요일 밤 기협 건물 지하에서 ‘기자의 밤’을 가졌다. 지하층에 있는 레스토랑을 전세 내 송건호 선생, 이영희 선생, 천관 선생, 동아투위ㆍ조선투위 회원들, 현역 언론인 등 뜻을 같이 하는 분들이 함께 모여 맥주잔을 나누면서 언론의 정도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누며 선ㆍ후배의 정을 다졌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기협의 결속력은 강화되었다. 서울의 봄 또한 여름을 향해 달음질치고 있었다. 대학가와 시민사회의 민주화 총궐기 열기가 높아지면서 기협도 중대한 결정을 하게 된다. 즉 5월 16일 전국언론사의 대의원 등이 집회를 갖고 20일 0시를 검열철폐가 관철되지 않으면 총파업에 돌입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5월 17일 0시를 기해 계엄확대 조치가 내려졌다. 본인을 포함한 기협 집행부 전원에 대한 17일 0시 기해 계엄확대 조치가 내려졌다. 본인을 포함한 기협 집행부 전원에 대한 체포령이 발동되면서 기협 집행부가 와해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정권욕에 눈이 뒤집힌 신군부가 발악을 하면서 광주항쟁은 벌어진다. 그와 함께 전국 언론사 기자들은 기협 분회를 중심으로 검열 및 제작 거부에 돌입했다. 기협 집행부가 와해되었지만 약 1 개월 반 동안 다져온 결속력이 전국적인 기자들의 저항으로 연결된 것이다.

본인은 5월 17일 오후 확대계엄이 실시되는 정보를 입수한 뒤 추악한 세력에게 체포되는 것에 저항하는 뜻에서 ‘잠수’를 결행키로 했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는 정부에 저항하는 모든 세력에 대해 어떤 탄압이 진행될지 모르는 살얼음판과 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각오는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일이 터지니 갈 곳이 막연했다. 친구, 후배 집들을 전전했는데 특별히 오랫동안 숨겨준 그런 좋은 분도 있었다.

당시 수배령은 다른 때의 그것과 달라 사람 목숨을 ‘개 값’으로 취급하던 때여서 수배 자체도 그 모양새와 강도가 험악하기 짝이 없었다. 본인은 1백여 일 동안 피해 다니다가 친구네 목장에서 붙들려 남영동으로 압송됐다. 본인 취조 담당은 ‘이근안’씨였다. 보름간을 아침부터 이튿날 새벽 4시까지 취조를 받는데 그 취조라는 것이 때리고 물고문하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신군부는 기자협회 사건을 김대중 전 대통령과 연결 지으려는 각본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취조 받을 당시는 김대중 사건이 상당히 진행된 후였기 때문에 조사가 다른 사람에 비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본인은 그해 11월 1심 형사재판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고 이듬해 5월 서울고법에서 1년6월을 선고받았다.

이어 84년 12월19일 동아투위, 조선투위, 80년해직기자협의회, 출판사협의회 등 4개 단체가 연대해서 민주언론운동 협의회(민언협)를 결성했다. 그 다음해인 85년 5월 민언협 기관지인 월간 ‘말’이 창간됐다. 전국의 모든 언론 매체에서 재갈이 물려있는 상황이어서 격월로 발간됐던 ‘말’ 지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일부 서점에서는 사회심리학 서적 코너에서 숨겨 놓고 팔기도 했다. 본인은 ‘말’ 지 발행인을 맡았는데 당시 ‘말’ 지 직원들은 취재도 숨어서 하고 제작도, 판매도 숨어서 했다. 모든 원고를 두벌 이상 만들어서 한 벌은 딴 곳에 숨겨놓고 한 벌은 제작하는데 내놓는 등 항상 ‘일촉즉발’의 순간에 대비했다.

1986년 당시 한국일보 김주언(현 신문발전위원회 사무총장) 기자는 ‘말’ 지에 각 언론사에 독재정권으로부터 하달된 ‘보도지침’을 제보했다. 민언협은 ‘보도지침’원고를 편집, 제작해 86년 9월 9일 명동성당에서 송건호 선생과 함께 외신기자를 모두 불러 책자로 공개했다. 85년 10월부터 86년 8월까지 문화공고부가 각 언론사에 지시한 보도지침 584건을 폭로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발행인이었던 본인은 3개월을 도망 다니다 86년 12월 9일 체포돼 1개월여 간 남영동에 잡혀 들어갔다. 본인뿐만 아니라 신홍범 민언협 실행위원, 김주언 기자가 국가보안법 위반 및 국가모독죄로 구속됐다.

보도지침에서는 ‘가, 불가, 절대불가’ 등의 구분을 통해 각종 사건이나 상황, 사태 등의 보도 여부는 물론 보도 방향과 내용, 형식까지 구체적으로 결정해 있었다. 사실상의 언론 제작을 정부가 전담한 것이다. 보도지침에 충실하게 따랐던 언론사는 취재한 기사의 비중이나 보도가치와는 상관없이 신문 및 잡지를 발행했다. 대중 조작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상황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당시 명동성당으로 본인과 김주언 기자, 신홍범 실행위원 등 3명의 부인을 불러 ‘가톨릭 언론대상’을 제정해 수여했다. 그 후 이 상은 언론의 저명한 상으로 부상되기도 했다.

80년 5월 기자들의 신군부에 대한 투쟁이 전개된 후 26년이 지났으나 우리 언론은 여전히 반공, 보수, 기득권층을 옹호, 지원하는 담론을 일삼는 매체가 주조를 이루고 있다. 이는 광복과 더불어 심판받았어야 할 언론사와 언론인이 살아남아 그 뿌리와 영향력을 더욱 공고히 하게 된 데서 비롯된다.

일제의 강점시대가 끝나고 비참한 정치 및 경제적 유산을 물려받은 한국인들은 48년 이승만 정부 수립부터 92년 노태우 정권이 물러가기까지 40여 년 동안 독재체제에 항거했다. 그 결과 60년 4월 혁명, 80년 5월 혁명, 87년 6월 혁명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는 동남아는 물론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한국의 보수언론은 광복 직후의 친일 이승만 독재정부와 그 이후 33년간 집권한 군사정권들과의 야합을 통해 그 세력을 확대, 사회 변화의 고비마다 역사발전을 가로막는 악역을 거듭하고 있다. 71년 대통령 선거에서부터 97년 대통령 당선까지 김대중 참여정부의 시책 대부분을 폄훼하고 왜곡했다. 주류 언론의 범죄적 행각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무가지 살포와 경품 제공을 판촉의 기본전략으로 삼는 이들 언론사는 진실보도를 방기하고 광고수입을 통한 영업이익 극대화를 꾀하면서 언론시장을 혼탁하게 만들고 있다.

이들 보수언론은 또한 양심적인 기자들을 길거리로 내몰고 한 점 부끄러움도 없이 평화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흙탕물에서도 연꽃이 피어나듯이 해직언론인들이 발행한 ‘말’ 지나 그들이 설립한 언론사와 같이 이 땅의 소금과 같은 매체들이 있기는 하다. 이들은 치열한 신문시장의 경쟁체제에서 시달리면서 발행부수나 영향력에서 열세를 면치 못하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30년 기자들은 살인정권으로 불리는 전두환 집단과 생명을 건 싸움을 전개했다. 기자협회가 26년 만에 이날을 기려 기자의 날을 제정한 데 대해 집행부에 감사드린다. 이번 행사를 기점으로 언론자유를 사랑하는 세력이 단단히 뭉쳐 검은 언론 세력을 분해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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