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신문을 만들자

기자들은 중역실로부터 사직서가 비록 반려됐지만 이대로 신문사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며 행동통일을 보인다. 낮 12시 10분, 신문사 앞 보리식당 2층에서 마지막 점심을 함께 나눴다. “이젠 무얼 할 것인가?” 자조 섞인 얘기들이 오고가는 가운데 분위기는 무거웠다.

그러던 중 누군가의 입에서 “이대로 그만둘 수 없다.”며 지하신문 제작 얘기가 나오자 돌연 얼굴들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여러 얘기들이 나눠진 끝에 구체적으로 인쇄소 등 신문제작을 위한 필요한 기자재를 확보할 수 있는지 알아보자며 조를 나눠 찾기로 했다. 오전 상황으로 보아 전남매일에서는 인쇄가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오후 2시 30분께 식당을 나서면서 오후 5시 신문사에서 도청 앞쪽으로 나가는 충장로 입구에서 다시 만나 확인하기로 했다.

인쇄 가능성을 확인하러 나서는 일에는 “우리들의 일”이라며 이정식, 공동진, 윤유석 등 편집기자들이 적극 나섰다. 장형래, 김영재, 이 준, 김진영, 김여송 기자들도 합세했다. 고행원, 김귤근, 김승철, 양부량 선배 기자들에겐 연락을 하겠다며 식당 문을 나섰다.

박화강, 유제철, 윤유석, 손정연 기자들은 한 조가 되어 지난번 ‘5·13언론자유 실천 선언’문을 인쇄해준 구승치 사장을 찾았다. 도청 건너편에 있던 인쇄소 겸 사무실은 문을 열 수 없는 상황이라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집으로 찾아가 “신문을 제작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으나 돌아온 대답은 “어렵다.”였다. 매우 난처한 표정이었다. 계림동 쪽으로 가보기로 하고 걸었으나 가톨릭센터 앞 쪽으로 시민, 학생들이 계속 모이고 있었다. 1만 여명이나 되는 시위대는 계엄군과 대치한 가운데 애국가를 부르며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오후 들어선 시내 중심가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곳의 상점, 가게들이 문을 닫은 상태였다.

인쇄할만한 몇 곳을 더 찾았지만 모두 문을 닫아 계림동 쪽으로 가보아도 헛수고만 할 것 같아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그동안 시간은 자꾸 흘러 한 가닥 희망을 갖고 약속 장소에 갔었으나 사정은 모두 같았다. 할 수 없이 지하신문 제작 계획은 일단 중단하고 상황을 보기로 했다. 각자 돌아가서 더 찾아보되 인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면 곧바로 전화로 연락하기로 했다.

도청 앞 군경 대치선은 금남로 2가 쪽에서 1가 쪽으로까지 밀려와 있었다. 시민, 학생들이 계속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유제철, 박화강, 윤유석, 손정연 등은 논의 끝에 사직서라도 인쇄해 시민들에게 알리자며 화순으로 넘어 가기로 했다. 마침 전남매일 화순지사장(서상욱)이 인쇄소를 운영하고 있어 부탁해보기로 했다. 유 기자는 집안 사정으로 남고 3사람만 택시를 잡아타고 화순으로 출발했다.

이들이 떠난 지 한 시간 남짓 후인 오후 6시 40분, 금남로 일대는 차량 경적시위로 상황이 급변한다. 전날 데모 대원들을 태워줬다고 해서 동료 4명이 군인들로부터 무자비하게 구타당한 데 대해 분노한 광주 택시 기사들이 일어 선 것이었다. 무등경기장에서 도청 앞까지 진출한 분노의 차량 경적시위에는 버스, 화물차까지 포함 무려 200여대가 참여했다. 이날 밤 시위는 갈수록 거세져갔다. 광주항쟁 기간 시민, 학생 시위대와 계엄군 사이 가장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진, 가장 긴 밤이었다. 21일 새벽까지 밤샘시위가 광주시내 곳곳에서 전개됐다. 시민들을 폭도로 보도한 광주MBC와 광주KBS가 불탔으며, 희생자도 많이 났다.

그러나 기자들의 사직에도 불구하고 5월 20일자 전남매일신문은 제작이 됐었다. 당시 주필 겸 부사장이었던 한상운 부사장의 후일 증언(‘내가 겪은 광주항쟁’, 1997년)을 들어보자.

집단 사표를 쓰고 신문사를 떠난 직후 전날의 격전지를 돌아보고) 금남로로 해서 신문사에 돌아왔을 때 새로운 난제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편집국기자들이 신문 제작을 거부하고 나선 것이다. 이유는 사실대로 보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 했다. 이와 같은 사태는 어제부터 예견되었던 일이었다. 기자들이 사실대로 보도하자고 들고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금남로에서 현장을 목격한 나도 울분을 참을 수 없어 그걸 (오늘)사설로 다뤘으니 말이다.…

나는 편집국 책임자와 상무로부터 대충 경위를 들은 다음 … 이날의 신문 사회면은 주로 통신에서 제공하는 기사로 채웠다. 몇 명의 내근 기자와 부장급만으로 신문을 제작했다. 평소에는 5단을 넘지 않았던 사회면 광고가 이날은 기사가 모자라 7단까지 올라갔다.

사설은 예상대로 검열에서 절반 이상이 깎여서 보내져 왔다. 오늘부터는 깎인 자리를 돌출광고로도 메꾸어서는 안 된다는 검열관의 명령이 따랐다. 꼭 기사로만 메꾸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돌출광고의 효과(?)를 아마 검열관들도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그러나 사설의 절반 이상을 새로 써서 채울 수는 없었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그럴 의욕이 나질 않았다. 그래서 사설을 아주 빼버리고는 그 자리를 아무거나 일반기사로 채우도록 했다. 계엄당국에 대한 저항의 의지도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였다.

이래서 1980년 5월 20일자 신문은 사설이 없는 신문이 되고 말았다. 내가 아는 한 전남매일신문사 창간(1960년 9월26일)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신문사로서는 고육책이었다. 당시 언론법은 3일간 언론사의 발행, 방송 업무가 중단되면 회사 문을 닫게 되어 있는 악법이었다. 이 악법 때문에 제작이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신문사를 지키자며 부장단을 거듭 설득, 급조된 제작에 나선 것이다. 통신기사로 채운 형식적인 제작이었다. 21일에는 아예 서울지사를 통해 문화공보부에 신문제작 중단을 신고하게 된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

21일 아침, “일이 잘못되면 어떻게 되나?” 손을 떨면서 직원이 밤새워 만들었다며 서상욱 화순지사장이 인쇄된 공동 사직서 2만장을 세 사람에게 전했다. 간 밤 지사장 집에서 묵은 3인은 아침밥까지 대접받고 광주로 다시 출발했다. 어제는 화순까지 택시로 왔으나 이날은 화순 쪽 너릿재까지만 택시를 이용할 수 있었다. 더 이상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너릿재를 넘어 지원동, 소태동을 거쳐 금남로까지 걸어 나오는데는 2시간 이상 걸렸다. 지원동 쪽으로 들어서니 어제와는 상황이 사뭇 달랐다. 계엄군 차량을 저지하려는 듯 전화박스와 대형 화분대 등이 길거리로 넘어진 채 거리 모습은 어지러웠다.

정오 무렵 금남로에 도착했을 땐 수많은 시민들이 집결해 있었다. 15만명(‘특전사 전투상보’ 집계)이 넘는 시민들이 도청 앞 분수대가 눈앞에 보이는 관광호텔(현 무등빌딩) 앞까지 계엄군을 몰아붙인 연좌데모 중이었다. 세 사람은 금남로에 들어서면서 인쇄된 사직서를 배포했다. 사죄의 사직서 배포였다.

시위대 앞쪽에는 전날 밤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던 광주역 광장서 계엄군 발포로 숨진 시체 2구가 천으로 가린 채 리어카에 실려 놓여 있었다. 그 앞 연단에서는 시민들의 발언이 계속중이었다. 오전 연사 중에는 전남매일신문 기자 2명이 나와 “우리도 18, 19일의 모든 상황을 보도하는 신문제작을 했으나 인쇄를 못하게 방해해 사표를 쓰고 시위대에 합세했다.”는 내용의 연설이 있었다는 얘기도 들렸다.

낮 12시가 넘어서면서 시민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공수부대 병력을 철수시킬테니 질서를 지켜 달라.”고 호소한 장형태 전남지사 말을 믿고 기다렸으나 정작 공수부대원들이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위대와 공수부대 저지선과의 사이는 불과 10여m. 이날 현장을 지키겠다며 시위대와 공수부대 중간에서 취재하던 사진부 나경택 기자는 12시 50분쯤 귀를 의심케 하는 소리를 공수부대 쪽으로부터 듣는다. 시위대에 밀린 공수부대 지휘자가 통신병에게 “발포명령 어떻게 됐느냐?”며 다그치는 소리였다. 그로부터 10분 후 “발포명령 떨어졌습니다.” 통신병의 외침과 동시에 도청 스피커로부터 애국가가 울려퍼지면서 집단발포가 시작됐다. 이날 금남로에는 1천발이 넘는 총알이 난사됐다. 그러나 5공 청문회, 5공 재판이 열렸지만 발포 명령자는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오후 4시가 되면서 화순, 나주지역에서 가져온 총이 시민들 손에 쥐어졌다. 스스로 지킬 수밖에 없는 집단 자위권 수단이었다. 오후 5시 30분, 공수부대는 도청에서 철수를 시작한다.

21일을 시점으로 전남매일 기자들의 활동 행태는 바뀐다. 5월 13일부터 5월 20일까지 언론자유 실천 선언, 비상계엄 해제 촉구, 검열·제작거부 등 공동의 활동상이었다면 21일부터는 개인, 그룹별 행태로 바뀐다. 도청 최후 항쟁인 27일까지 개인, 또는 그룹형태로 신군부에 저항하는 활동을 보인다. 항쟁 홍보, 수습활동, 외신기자 안내, 언론인으로서 의미 있는 활동 등을 통해서다. 외신기자와의 활동은 사진부 기자들이 중심이 됐다.

5월 22일 전남도청엔 항쟁지도부 학생수습위원회가 들어선다. 학생수습위원회는 처음 김창길 위원장(전남대 농대 3년) 체제가 꾸려졌지만 25일엔 강경파 김종배 위원장(조선대 무역학과 3년) 체제로 바뀐다. 22일 오전 10시,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도청에 들어간 김귤근 차장은 학생수습위와 지도부가 당장 해야 할 조치들과 관련해 몇 가지 도움 되는 얘기를 나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마침 시민수습위원회가 구성 중인데 조금 걱정된다.”며 “가서 상황을 살펴보고 조언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부지사실에서 열리고 있는 시민수습위는 구성이 허술해 보였다. 참석자들을 보았을 때 신뢰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어 보여 발언권을 얻어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광주시민수습위원회라면 시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원로와 성직자들이 참여해야 신뢰도 있고, 계엄사와도 대화가 된다. 신망이 두터운 윤공희 대주교, 조비오, 김성용 신부, 독립운동가 최한영씨 등이 참여했으면 좋겠다.” 추천하자 참석자 모두 박수로 동의했다. 다음날 시민수습위원회가 확대 개편되면서 위원장에는 윤공희 대주교가 추대됐다.

김 차장은 23일 오전 9시에도 도청에 나가 평소 친분이 있는 전남대 송기숙, 명노근 교수와 만나 “시위대가 총기를 소지해 안전사고 발생 우려가 크다. 시민들이 불안해 하니 총기를 회수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얘기를 듣던 송기숙 교수가 즉시 “좋은 제안이다. 학생수습위에 건의하겠다.”고 나섰다. 무기회수가 빠르게 진행된 계기가 되었다.

같은 시각 서재일 논설위원과 최병연 부장, 손정연 기자는 김창길 위원장을 만나고 있었다. 소준열 광주전남 계엄분소장을 만나러 가기 전, 항쟁지도부에 이러한 사실을 알리고 협의를 하기 위해서였다. 세 사람과 소준열 계엄분소장과의 상무대 면담 약속은 어제 이뤄졌었다. 22일 오전 10시 광주전남 계엄분소장이 윤흥정 장군에서 소준열 장군으로 바뀐 소식을 듣고, 도청 앞에서 만난 세 사람은 최병연 부장이 마침 고향 선배인 구례 출신 소준열 장군을 잘 알고 있어 직접 만나 광주상황을 설명하는 게 좋겠다는데 생각이 서로 일치돼 추진했던 일이다.

마침 전화가 연결된 소준열 장군이 “광주 상황을 듣겠다.”며 “내일(22일) 오전 10시 광주외곽 봉쇄 지역인 화정동 국군통합병원 입구 쪽으로 차를 보낼테니 상무대로 들어오라”고 약속했었다. 얘기를 모두 들은 김창길 위원장은 “좋은 일이다”며 다녀오길 적극 권했다. 이어 21일 밤 도청 지하실로 들어온 화순 탄광에서 가져온 8톤 트럭 1대분의 다이너마이트 처리 문제가 걱정이라고 한 뒤 광주시민 입장을 잘 설명해주고, 수습책 문제도 함께 고민해달라고 부탁했다. 타고 갈 시민군 지프 차량도 한 대 내어 주었다.

국군통합병원 입구 쪽 바리케이드 쳐진 곳에 이르렀을 때, 소령 한 사람이 이미 대기중이었다. 소준열 장군을 만나러 가는 길엔 상무대 인근에서 살고 있는 원로 목사로서 존경받는 백영흠 목사도 함께 모시고 들어갔다. 성직자가 있으면 전하는 얘기에 더 신뢰할 수 있다는 서재일 논설위원 판단에 평소 잘 알고 있던 백영흠 목사에게 미리 연락해 동행 했다.

오전 10시 20분, 회의실로 안내돼 잠시 기다리니 박준병 20사단장과 함께 소준열 계엄분소장이 들어왔다. 잠시 최병연 부장과 안부 얘기가 끝나자 곧 바로 서재일 논설위원이 “광주시민은 폭도가 아니다. 작금의 사태는 계엄군의 과잉진압이 초래한 상황”임을 여러 사례를 들며 강조해서 설명했다. 서재일 논설위원과 최병연 부장, 손정연 기자는 주로 과잉진압 등 발생원인과 총을 들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해 얘기하고, 사태를 수습하려면 발생 원인에 대한 사과와 그에 따른 적절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백영흠 목사는 성직자로서 본 사태의 심각성을 전했다.

얘기를 경청하던 소준열 계엄분소장은 무기 회수 문제를 걱정하며 “직접 도청으로 들어가서 사태를 수습하겠다. 도청 항쟁지도부와 시민수습위 쪽에도 이런 나의 얘기를 전해 달라.”며 적극적이었다. 박준병 사단장은 말 한마디 없이 옆에서 경청만 했다. 소준열 계엄분소장 도청 방문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신변보호였다. 논의 끝에 목사와 신부, 성직자들의 도움을 받아 신변안전 문제를 해결하는 게 좋겠다고 의견이 정리됐다. 다른 긴급한 회의들이 기다리고 있어 대화는 40분 정도에서 끝났다.

도청으로 돌아 온 세 사람으로부터 소준열 계엄분소장의 도청방문 얘기를 관심 있게 들은 김창길 위원장 역시 신변안전의 중요성을 공감했다.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니어서 회의를 가진 후 결과를 알려주겠다는 얘기를 듣고, 세 사람은 다시 남동성당으로 떠났다. 시민수습위 대책회의가 남동성당에서 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습 대책위 회의 도중 나온 김성용 신부는 상무대와 학생수습위 얘기를 모두 듣고, 성직자들로 구성되는 신변보호 문제가 모든 걸 해결해줄 수 있을지 고민스런 부분이 되겠다고 공감했다. 들어가 얘기를 나눈 후,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오후 3, 4시 무렵 모두 “신변안전 보장이 어렵다”는 얘기를 전해왔다. 소준열 계엄분소장이 도청에 직접 들어와 사태를 수습하겠다는 ‘수습 계획’은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신문제작은 5월 24일에도 다시 시도된다. 이날 오전 10시 무렵 매일 도청을 한차례 이상 들르는 김귤근 차장에게 학생수습위는 광주시민들에게 현재 돌아가는 상황을 알릴 수 있는 “시민일보를 만들어 달라.”고 건의한다. 곧바로 박화강 기자 등 몇 사람들에게 연락, 충장로 2가 수미다방에서 만나 신문제작과 관련 얘기를 나눴다. 논의 끝에 전남매일에서 제작이 가능한지 타진해보기로 하고 문진일 총무국장에게 연락, 중역진의 답을 듣도록 했다. 되돌아온 답은 “어렵다”였다. 화순에서 제작해 들여오자는 얘기도 있었지만 광주 외곽이 봉쇄된 현실에서 역시 이뤄질 수 없는 일이었다.

또 다시 신문제작이 좌절되자 박화강 기자는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무얼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계엄군이 물러간 이후 당시 광주는 23일부터 매일 오후 3시 도청 앞 분수대 광장에서 ‘민주주의 수호 범 시민궐기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중앙의 언론에서는 여전히 광주를 폭도의 도시로 매도하고 있었다. 광주 시민들이 국내 언론을 극도로 불신한 것은, 광주 참상을 있는 그대로 보도하는 외신들과는 달리 시민들을 계속 폭도로 보도한 데 있었다.

박화강 기자 주도로 이기홍(당시 경향신문 광주주재 기자), 나의갑(당시 전남일보 기자) 등이 25일, 26일 만나 폭도로 계속 매도되고 있는 광주 시민들이 폭도가 아님을 전국에 널리 알리기로 했다. 그 방법으로 광주의 기자들이 모여 27일 오전 10시 유동삼거리에서 전남도청 앞 분수대까지 가두 행진키로 계획을 세웠다. 기자들의 가두 행진은 이슈가 되기 때문에 전국 언론에 한 줄이라도 보도되리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광주시민을 ‘폭도’라고 하기에 ‘우리는 폭도가 아닙니다’라고 신문에 싣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못 실었습니다. 어떻게든 이 누명을 벗겨야 되겠다고 생각해 ‘광주시민은 폭도가 아닙니다’라는 현수막을 만들어 행진하려 했습니다.” (박화강 증언, 기자협회보, 2006년 5·18)

26일 오후, 지역 기자들은 물론 중앙지 주재기자들에게까지 연락이 됐다. ‘광주시민은 폭도가 아니다’라는 대형 플래카드도 준비됐다. 그러나 이 거사는 27일 새벽 도청 유혈진압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정권 찬탈을 목적으로 광주를 희생양 삼아 5월을 피로 물들인 전두환 내란, 반란집단에 대항한 시민군의 도청 최후 항쟁은 오전 5시 10분 막을 내린다. 5월 18일 피바람을 일으키며 시작된 반란집단의 ‘화려한 휴가’는 5월 27일 숱한 광주 시민의 피를 제단 삼은 채 그들의 내란 ‘휴가’를 끝냈다. 캐터필러를 멈췄다.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이날 오전 6시, 문순태 부국장 집으로 계엄사 쪽에서 전화가 왔다.

“사장, 편집국장 모두 전화를 받지 않아 연락을 했다. 당장 오늘부터 신문을 제작하라.”

기분 나쁜 명령조 전화를 받은 문 부국장은 곧바로 여행 가방 하나 싸들고 송정리로 나갔다. 정읍으로 어렵사리 올라간 뒤 서울로 피신했다. 제작 거부를 위해서였다. 서울에선 소설가 한승원씨 집에 머물면서 종로 5가 쪽에 있는 서울지사로 매일 출근했다. 5일째 되던 31일, 외국 출장에서 며칠전 귀국한 심상우 사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기자들 설득해 신문을 제작하자. 광주로 내려오라”는 간부들 소집 내용이었다. 6월 1일(일요일)엔 회사 비상 전화 연락망을 통해 편집국 기자를 비롯 전 직원들에게 월요일부터 출근하라는 통지가 전해졌다.

6월 2일 오전 8시 30분, 광주항쟁 후 처음 갖는 편집국 부장단 회의가 열렸다. 광주에서 벌어진 엄청난 비극의 참상을 보도할 첫 신문제작을 위한 회의였다. 따라서 분위기는 무거웠고, 어떻게 광주 시민들을 위한 신문을 제작할 것인가? 고민들이 나눠지는 가운데 문순태 부국장이 제안한 ‘분수대 사진’과 ‘상징적 시(詩)’ ‘스케치 기사’ 등으로 처리키로 했다.

편집국 부장단 회의가 끝난 즉후인 9시, 사장실에서 임원진 회의가 열렸다. 한상운 부사장의 증언이다.

“2일 아침 9시, 사장실에서 사장과 나, 그리고 편집국장과 상무가 모였다. 신문의 제작방향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외유 중이던 사장은 사태 중에 입국하여 그동안 송정리에서 머물러 있다가 며칠 전에야 귀가했었다.

제작 방향을 결정하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20일부터 외근 기자들이 사실보도를 주장하면서 신문 제작을 거부했던 일, 그리고 사태 중에 우리 신문사는 괜찮았지만 모든 언론기관이 어용이라 해서 시위대원들로부터 심한 핍박을 받은 일들을 얘기한 끝에 계엄사의 검열도 있고 하니 이 날 만큼은 기자들이 쓰는 대로 맡겨 두자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사설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겪은 광주항쟁’, 97쪽)

6월 2일자 전남매일 속간호는 4면만 제작됐다.

문순태 부국장이 ‘상징적 시’를 다루기로 한 생각은 항쟁기간 도청 앞에서 만난 시인 송수권씨가 “분노와 격정을 못 이겨 밤새워 시를 썼다.”는 얘기가 불현듯 떠올라 제안했었다. 시 청탁을 맡기로 한 문 부국장은 회의에서 나오자마자 송수권씨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받지를 않았다. 순간 난감했다. 생각을 했다. 이런 시를 짧은 시간에 쓸 수 있는 시인은? 김준태 한 사람이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당시 전남고 교사였던 김준태 시인은 집에서 전화를 받았었다. 거두절미하고 “5·18 시 쓸 수 있느냐? 마감시간까지 50분 남았다.” 묻자 “예, 쓸 수 있습니다.” 다소 흥분한 어조로 받았다.

‘5·18 상징시’가 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가 탄생하게 된 이야기를 김준태 시인으로부터 직접 들어보자. (2014년 6.16 증언)

“6월 2일 오전 9시께 문순태 선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광주항쟁 관련 시를 쓸 수 있느냐며 ‘마감시간이 촉박하니 시를 빨리 써 오라’고 했다. 아니 1시간도 안 남았는데…. 분명 무리한 청탁이었다. 그러나 몸과 마음은 이미 시를 쓰기 시작했다.

집중해서 시를 쓰는데 방해가 될 것 같아 곧바로 아내와 아이들에게 집밖으로 나가 있어달라고 했다. 가족들이 밖으로 나가자마자 배를 깔고 시를 써내려 갔다.

1시간이 안 걸려 108행에 달하는 시가 완성됐다. 나 자신도 놀랄 일이었다. 어떻게 써 내려갔는지 모르게 시를 완성했다. 울부짖는 나의 마음가는대로 시를 써 내려 간 것이다.

나의 당시 심정상태는 정신이 여전히 반쯤 나간 상태였다. 항쟁기간의 두 가지 사건이 나를 정신적으로 큰 충격 속에 빠뜨렸다.

하나는 5월 21일 오후 1시 도청 앞 집단발포 당시 가톨릭센터 앞, 시위대와 함께 있던 내 눈앞에서 15명 정도가 총에 맞아 거꾸러지는 것을 보았다. 월남전에 참전했던 나였지만 가슴에 정통으로 총을 맞아 피가 솟구치는 시민을 붙안고 다급한 나머지 인근 송산부인과로 뛰던 당시 상황은 나에겐 엄청난 충격이었다.

몇 시간 후 전남고등학교 동료 교사로부터 역시 동료 교사인 김OO 선생 부인이 계엄군 총에 맞아 사망했다는 끔직한 소식을 들었다. 전남대 정문 앞 인근에 살면서 임신 8개월째 몸으로 남편이 오는 것을 기다리던 중, 이날 정오 무렵 머리 관통상으로 비명에 간 최미애씨. 저녁에 집으로 찾아갔을 때 남편 김 교사는 “내 처, 머리가 없다.”며 실신상태로 울고 있었다. 장모로부터 숨진 딸을 집으로 데려올 때까지 뱃속 태아가 깊은 숨을 쉬듯 불쑥불쑥 뛰어 태아라도 살리고자 여러 군데 병원으로 연락했으나 가망이 없었다는 얘기를 듣고서는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두 가지 충격이 내재된, 상처 받은 나의 마음 속 또 다른 내가 시를 써내려 간 것이었다. 평소라면 도저히 그런 짧은 시간, 쓸 수 없는 장시였다.

시 원고는 직접 들고 신문사로 찾아갔다. 문순태 부국장에게 넘긴 후, 한 시간 반 가까이 편집국 앞 계단 층계에서 기다렸다. 이날 신문사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마침 도청 검열관실을 다녀오던 어느 간부가 기다리고 있던 나를 보고는 검열관이 시를 읽고는 ‘가만 두지 않겠다.’고 한다며 ‘빨리 도망치라.’고 했다.

예봉은 피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그동안 경험으로 배운 나는 그 길로 집에 가지 않고 연고가 없는 곳으로 23일간 잠행했다. 그러다 아이들이 보고 싶어 6월 25일, 먼저 학교에 들러 그동안 사정을 얘기한 후 집으로 간지 5분만에 붙잡혔다. 서부경찰서로 간다고 했으나 화정동 505보안대로 끌려가 기본적인 매를 맞았다. 다행히 심한 고문은 당하지 않은 채 20일간 조사를 받고 교사직 사표를 쓰고 나왔다.”

문순태 부국장이 김준태 시인에게 시를 써달라고 전화를 걸고 있는 시각, 충장로 1가 무등극장 옆 수련다방에서는 박화강, 손정연, 이 준 등 5~6명 기자들이 모여 신문사 복귀문제를 놓고 격론을 벌이고 있었다. 5월 20일 사표를 썼을 뿐 아니라 또 다시 진실보도를 하지 못할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논란이 계속됐다.

오전 10시쯤 문순태 부국장과 전화 연결이 됐다. 문 부국장은 “빨리 신문사로 들어와 일하라. 일하면서 상황을 다시 판단하자. 오늘 제작도 편집국 의견대로 제작되고 있다.”며 신문사를 그만두는 일이 없도록 강력히 만류했다. 최병연 부장은 다방 까지 직접 와서 기자들의 신문사 복귀를 설득했다. 기자들은 편집국 의견대로 신문이 제작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일단 복귀해 상황을 보기로 했다.

오전 11시, 신문 검열을 위해 검열관실로 떠날 때, 다른 날과는 달리 양부량, 김귤근, 김승철 차장을 비롯 유제철 기자 등 차장급과 중견기자들이 나섰다. 문순태 부국장의 생각이었다. 검열 분위기를 바람 잡아 신문제작에 유리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김준태 108행짜리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 십자가여!’ 시는 3분의 2가 잘려나간 채 나머지 절반도 빨간 연필로 ‘보류’로 표시돼 왔었다. 그러나 ‘보류’ 부분은 지적에도 불구하고 무시하고 모두 게재키로 했다. 제목은 ‘우리나라 십자가여!’를 쓰지 못하게 해 ‘아아, 광주여!’로 바뀌었다.

무등산 자락 광주시 전경 사진 아래 편집된 ‘아아, 광주여!’는 비록 3분의 2가 잘려나갔음에도 발행되자마자 시민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이날 신문이 발행되자 “고맙다”는 시민들의 전화가 계속됐다. 직접 신문사를 찾아 와 김준태 시인의 원본시가 있으면 복사해 달라는 부탁도 잇따랐다. 공무국에는 검열 전 전체 시가 문선된 상태로 남아 있어 오후 늦도록 까지 복사가 진행됐다. 기자들도 복사해 뿌렸다. 또, 서울 등 외지에 있는 친지와 지인들에게 보내겠다며 많은 시민들이 신문을 구입해 갔다.

이 날짜 사회면 톱기사는 ‘광주는 영원하다…’는 제목으로 광주항쟁이 왜 일어났으며, 치유를 위해 정부가 앞으로 해야 할 일, 그리고 항쟁기간 시민들이 보인 공동체 정신 등이 다뤄졌다. 허광욱 부장이 정리한 기사 내용은 이렇다.

▷제목 : ‘광주는 영원하다…’ (메인 컷)
            물질적 지원보다는 마음의 상처 씻게 / 비극의 ‘광주시위 사태’ 10일
            민주시민 긍지 끝까지 지켜(사이드 컷)
            눈물과 피로 얼룩졌던 ‘광주의 5월’ /80만 시민의 가슴마다에 쓰라림이…
            시민의 진의 정확하게 파악 / 정부·국민 간 신뢰회복 절실

“광주의 5월은 피로 얼룩졌다. 이제 그 눈물과 피로 얼룩졌던 5월이 갔다. 고립됐던 광주에 전국을 잇는 교통망이 뚫리고 국민학교 아동들이 학교를 찾았으며 밤 9시면 통행이 금지됐던 밤거리에 다시 시민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도시가 천천히 숨을 쉬기 시작했다. 일순간 죽음의 도시에서 점차 깨어가고 있다. 차디찬 아스팔트 위에서 싸늘하게 식어간 내 자식과 형제들의 영혼을 붙잡고 통곡하던 유족들의 오열이 80만 광주시민의 가슴마다에 얽혀진 채 … 비록 외형적으로는 광주의 옛 모습을 찾고 있다. 상가는 문을 열고 거리는 ‘광주사태’ 상채기를 하나, 둘씩 정돈해 가는 슬기로운 시민들의 복구 작업이 한창이다.

… 10일 동안에 걸친 동족(同族)간의 유혈사태는 멎었지만 정부는 사건발생 동기를 보다 냉정하게 분석해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해야 될 것이다. … 그동안 ‘엄청난 비극’의 발단과 동기가 잘못 전달됐다면 그러한 그릇된 인식부터 고쳐지기를 시민들은 바라고 있다. 대학생 데모에 왜 시민들까지 합세했었던가, 그 진상이 바르게 알려져야 한다 …

아직도 병상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부상자들이 값진 약으로 제대로 치료를 받고, 연행된 관련자들도 하루속히 조사를 끝내고 가족의 품으로 안기기를 기원하고 있다. 행방이 밝혀지지 않은 학생, 시민들의 소재도 드러나야 된다. 이같은 바람이 이뤄져야 진정되지 않은 시민의 마음이 안정을 찾을 수 있게 된다. … 건국 이래 처음 겪는 광주사건이었지만 광주시민들은 민주시민으로서의 시민정신, 문화시민으로서의 긍지를 끝까지 잃지 않았었다. 총탄 속에서도 선혈을 뿌리는 낯모르는 학생들, 부상당한 계엄군을 병원에까지 옮겨준 시민, … 서로 사재기를 삼가고 쌀이 떨어진 이웃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었던 우리의 시민들 그 정신은 바로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삼고 있는 광주시민의 인정이었다.

… 광주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광주의 하늘에 태극기가 펄럭이는 것처럼 광주시민이 흘린 피는 역사의 꽃으로 다시 피어날 것이다.”

‘죽음의 거리에도 태극기 펄럭’ ‘주인 없는 구멍가게에 돈 놓고 물건 가져가’ ‘헌혈 길 비명에 간 어느 여고생’ 등 기사들도 다뤄졌다.

이날 신문을 받아본 시민들이 전한 메시지는 “우리의 마음을 위로해줬다”였다.

80년 5월 광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언론은 어디에 있느냐?” “기자들은 어디에 있느냐?” 여전히 물음이 계속되고 있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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