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치국가는 법에 의해 지배되는 국가다. 국정원 해킹 사건이 온통 나라를 시끄럽게 한다. 하지만 법치가 실종된 상태다. 국정원은 대통령 직속기관이라는 점에서 국정원이 원인이 된 사태에 대해서는 대통령에게 국민적 시선이 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대소 국사에 훈수를 두는데 정평이 나 있는 박근혜 대통령은 침묵한다.

이번 사태는 전 국민을 불안하게 한다는 특성으로 메르스 사태와 닮아 있다. 대통령은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 박 대통령은 여당 원내총무까지 국무회의 석상에서 찍어내기 발언을 한 후 관철시킬 정도로 매사에 관심이 많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직속 기관인 국정원 때문에 전 국민이 자신의 전화기가 해킹 당하지 않나 하고 불안해 하지만 나 몰라라 하는 태도다.

대통령의 침묵이 던지는 메시지는 그러나 간단치 않다. 그것은 세월호, 메르스에 이어 정부가 국민을 향해 ‘잔말 말고 기다리라’는 무언의 요구를 내놓고 있는 것과 흡사하다. 국정원은 이번 사태를 야기한 당사자이지만 전체 직원의 이름으로 정치권, 언론이 근거 없는 의혹만을 제기하며 국정원을 망가지게 하고 있다는 식의 강한 메시지를 담은 대국민 발표를 내놓았다. 국정원의 이런 발표는 공무원법, 국정원법 위반이라는 지적이 나오지만 대통령은 침묵한다.

또한 국정원이 스스로 밝힌 사실이나 현재까지 언론 등에 의해 제기된 바에 따르면 국정원이 이탈리아 IT기업 ‘해킹팀’으로부터 RCS(원격조정시스템)를 구매한 뒤 대북정보 수집에만 사용했더라도 통신비밀보호법을 위반했다.

통비법 10조의2 제2항을 보면 ‘국정원이 감청설비를 도입 할 때에는 국회 정보위원회에 통보해야 한다’고 되어 있지만 국정원은 2012년 해당 장비를 들여오면서 국회에 통보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규정을 위반한 것이다.

다음으로, 통비법 제7조 제1항 제2호는 국가안전보장에 대한 상당한 위험이 예상되는 경우에 한해 국정원은 법원의 영장 없이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 감청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대통령이 승인한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법이 이렇게 되어 있으니 대통령은 국정원의 감청을 승인했는지 여부는 신속히 밝히는 것이 마땅하다.

대통령은 국가의 법치를 책임진 정부의 최고 책임자다. 대통령 직속 기관인 국정원이 심각한 사회 불안을 야기한 사태의 진원지라면 당연히 대통령이 법치 차원에서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러면 대통령이 침묵하는 것이 당연할 만큼 국정원이 받고 있는 의혹 등은 합법이었나. 전혀 그렇지 않다. 대통령은 자신의 대통령 당선과 직결된 2012년 국정원의 대선 댓글 사건에 대해 ‘법대로’라면서 최고 법원의 판결을 기다린다는 식의 발언을 한 뒤 침묵하고 있다. 대통령의 법치 철학이 국민의 법 감정과 같이 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대목이다.

박 대통령은 21일 국무회의를 주재했지만 정국을 강타하고 있는 국정원 해킹 의혹에 대해서 침묵을 지켰다. 국정원의 민간 사찰 의혹이 제기된 지 13일째이지만 아무런 반응을 내놓지 않은 것이다. 박 대통령은 회의석상에서 공공, 노동, 금융 등 4개 개혁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히면서, 정치권은 정파를 떠나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런 주요 사안들이 공허하게 들린다. 그것은 대통령의 국정원에 대한 침묵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최근 수개월동안 기회만 있으면 ‘국회가 똑 바로 일해야 한다. 민생관련 입법을 신속히 통과시켜야 한다’고 국회를 압박해왔다. 메르스 사태이후 침체된 국내 경기를 추스르기 위해 추가경정예산의 조기 집행이 절실하다고 강조해 왔지만 돌발한 국정원 해킹 의혹으로 여의도의 의사일정이 뒤엉킨 상태다.

청와대가 침묵하는 상황에서 국정원의 해킹 의혹을 둘러싼 정치권의 공방이 첨예하게 전개되고 있다. 여당은 즉각적인 현장조사를 요구했지만 야당은 청문회를 열어 의혹 검증부터 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야당은 국정원을 상대로 한 검찰 수사와 청문회 개최 등을 요구하고 있지만 여당은 국정원 현장방문을 해야 한다면서 야당 등이 제기하는 의혹에 대해 국정원을 대신해서 해명하는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 새누리당이 마치 국정원의 대변인과 같이 보일 정도다.

새정치민주연합은 국정원에 대해 검찰 수사와 국회 조사가 먼저라면서 이번 사태는 국정원의 조직 특성상 국정원장 지시나 승인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몰아세우고 있다. 반면 새누리당은 진상 규명을 강조하면서도 국회 정보위 차원의 비공개 현안보고를 받은 뒤 국정원 현장조사에 나서야 한다면서 무책임한 정쟁으로 공개적인 여론전을 펼쳐서는 안 되며 청문회 등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침묵이 금이 때가 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이 이번 국정원 사태를 통해 증명되고 있다. 책임정치, 국민에게 무한 봉사하는 정치는 국민의 궁금증과 불안을 해소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나를 대통령으로 뽑아주었으니 임기 동안은 내 맘대로 하겠다는 시대착오적 공직 수행논리는 사라져야 한다.

국정원 사태는 담당 국정원 직원이 자살하는 비극이 더해지면서 국민적 관심은 더욱 커지고 있다. 정치도 결국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이 궁극적 목표다. 대통령은 국정원 사태에 대해 대통령과 관련된 부분은 물론 진상 규명을 통한 국민적 의혹과 불안감 해소를 위해 적극 나서야 한다.

* 이 글은 미디어라이솔,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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