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파업이 있던 1990년 겨울, 동지 15명이 해직되었다. 파업으로 얻어낸 것도 없는데 동료들까지 쫓겨난 현실을 견디기 힘들었다. 미래가 없는 방송에 더 이상 미련도 없었다. 강릉 안목의 허름한 여관에 홀로 은둔한 지 3일 째, 어찌 알았는지 폭설이 내리는 한밤중에 아내가 들이닥쳤다. 다음날 아내를 설악산 카페에 남겨두고 폭설로 입산이 통제된 흔들바위를 올랐다. 그 때 눈보라가 몰아치는 산 정상에 꿋꿋하게 서 있는 소나무 한 그루를 만났다. 눈 위에 누워 매서운 바람에 휘청이면서도 푸른색을 뽐내던, 나지막하지만 단단했던 그 놈을 한 시간 동안 올려다보았다. 돌아가야 했다, 내 자리로. 복귀할 명분과 확신이 필요했다.

이 땅의 분단이 싫었다. 왜소하고 천박한 예술수준도 미웠다. 미국으로 건너갔다. 노력 끝에 유명한 뉴욕의 현대미술관들이 모두 작품을 소장할 정도로 명성을 얻었다. 그때서야 보였다, 석굴암 부처의 미소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분단 상황은 피할 것이 아니라 마주서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20여년 만에 돌아왔다. 소양호 부근 38선이 지나가는 두메산골 분교에 화실을 꾸미고 분단을 안았다. 그곳에서 세계전도에 자신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 초상화의 심장은 항상 한국지도 부분에 놓였다. 학교를 가꾸고 잡초가 우거졌던 학교마당에 쓰러진 채 방치돼 있던 축구골대도 다시 일으켜 세웠다. 〈화가 김차섭의 자리〉, KBS 복귀작이다.

부끄러워 회사의 정년퇴임식장에 가지 않았다. 대신 후배들이 조촐하게 마련해준 퇴임기념연에 참석했다. ‘살아가는 일은 내 두 발로 이 땅을 딛고 서서 하늘을 우러러 보는 일’인데, 후배들에게 짐만 주고 떠나게 돼 미안하다고 내 차례 인사는 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때38선 분교에 둥지를 튼 화가 김차섭이 떠올랐다. 그는 지금도 뒷산 6.25참호를 돌아보며 치열하게 세상과 싸우는 중일까, 돌아온 것을 후회하고 세계전도에 초상화그리기를 포기하지는 않았을까. 피디로 살아오면서 프로그램으로 만났던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생각했다. 이 땅의 역사를, 현안들을 몸으로 깨우쳐 주고 금기와 성역에 맞서 누구보다도 시대를 앞서 살았던 이들이었다. 모두 보고 싶었다. 아니 확인하고 싶었다, 그들을 통해 다시 내 자리를.

자리는 자기정체성이다. 자리는 사회적 역할이자, 책임이다. 나아가 자리는 자기검증이며 세상과의 소통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스스로의 자리를 확인할 때 필요한 질문들이다. 주체를 바꾸어 다시 질문을 던진다. 대통령은 누구인가, 대통령은 어디 있는가, 대통령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총리는, 여야 대표는, 정치인은, 언론인은, 법조인은, 학자는, 기업인은, 공무원은, 노동자는? 세월호에 이어 메르스가 묻고 있다. 나라의 총체적 부실은 어디서 오는가. 비정상과 무능이 일상이 되었다. 권한은 있는데 책임은 없고 역할을 방임한 책임자가 오히려 큰소리치는 세상이다. 살아가는 일은 내 두 발(내 힘)로 이 땅(현실)을 딛고서서 하늘을 우러러 보는(세상에 부끄럽지 않는) 일이다. 4.19와 KBS파업이 있던 잔인한 4월도 지나고, 시민항쟁의 6월에 다시 자리를 돌아본다. 부끄럽다, 세상이, 내가. (2015.6.17.)

* 장해랑 교수는 KBS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출신으로 97년 한국피디연합회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피디교육원장,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언론위원회 언론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다큐멘터리 세상을 말하다>, <한국의 아름다운 소리 100> 등의 책을 냈고, 2013년에 3D영화 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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