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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욕적 한일회담’ 반대투쟁과 동아일보 (2)동아일보 대해부 3권 - 0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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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3.30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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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정권이 서울 사직공원 부근의 국유지를 부정하게 불하했다는 사실이 4월 초 언론에 보도되자 가뜩이나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 시위로 요동치던 정국에 새로운 논란이 터졌다. 야당은 군정 때부터의 국공유지 불하 경위와 배후에 정치적 흑막이 있는지를 밝히는 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하자고 국회에서 제안했고, 공화당은 거센 여론에 밀려 그것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야당은 서울 남산과 홍릉 용지의 부정불하 의혹도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정희의 인척과 김종필의 형까지 배후로 지목되는 상황에서 검찰은 5월 11일 전 재무부장관 황종률 등 15명을 구속 기소하고 8명을 불구속 기소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박정희와 김종필의 일본 자금 거액 수수 의혹’과 국유지 부정불하 사건이 터지자 박 정권의 부정부패를 질타하는 여론이 뜨겁게 일어났다.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과 무장군인 법원 난입

4월 혁명 4주년 기념일을 앞둔 4월 17일 서울대생 2백여 명은 ‘학원 사찰 중지’와 ‘구속학생 석방’을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19일 여러 대학에서 기념식과 함께 시위가 벌어져 21일까지 계속되자 정부는 “연발하는 학생 데모가 국가 기본질서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강경한 진압책을 마련했다.

4월 22일 박정희는 “정부는 더욱 비상한 각오로써 불법 데모 치안교란자들을 철저히 단속하여 사회 안정과 법질서 유지에 힘쓰라”고 내각에 강력히 지시했다. 그는 국무총리 최두선에게 ‘시정(施政)의 일대 쇄신’이라는 제목으로 보낸 5개 항목의 훈령 제3호에서 “수주 간의 연달은 학생 데모 사건들은 민심을 극히 불안케 하고 있을뿐더러 법질서를 파괴하고 사회적 혼란을 자아내게 있다”고 주장한 뒤 “이 사태의 계속 방치는 무법과 방종의 고질적 병폐를 면치 못하게 할 것이며, 나아가 민주질서를 파괴하고 국기(國基)의 대본마저 흔들리게 할 우려조차 금할 수 없다”고 말했다.

5월 11일 박정희는 ‘시국 수습’을 위해 전면 개각을 하면서 국무총리 겸 외무부장관에 정일권,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에 장기영을 임명했다.

  (···) 박정희는 정일권 내각의 첫 국무회의에서 ‘박력 있는 행정’을 강조했다. 정일권 국무총리도 취임 기자회견에서 “앞으로 6개월 또는 1년 내에 이 난국을 수습하지 못하면 물러나겠다”는 결의와 함께 한일회담의 조기 타결을 공언했다. 미국과 일본 역시 정일권 내각을 ‘한일회담촉진내각’으로 파악하고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
  반면 야당은 범국민투위 주최로 시국강연회를 개최하여 박정희 정권의 실정(失政)을 비판했다. 1964년 5월 9일 서울에서 개최한 시국강연회에는 약 2만 명의 청중이 모였는데, 이 자리에서 범국민투위는 대일 굴욕외교, 환율 인상, 학원사찰, 물가 상승, 국공유지 부정불하 등을 들어 정부와 여당을 공격했다. 5·16 군사쿠데타 3주년을 맞이한 16일에도 역시 2만여 명이 모인 가운데 시국강연회를 열어, 군사쿠데타를 통해 총칼로 합헌정부를 전복하고 정권을 차지한 박정희는 현 상황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통령선거가 끝난 지 불과 반년 만에 박정희 정권은 퇴진 요구에 직면했다(같은 책, 416~417쪽).

4월 말 이후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학생들은 범국민투위가 주최하는 대중집회의 열띤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는지, 5월 20일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서 박정희 정권과 공화당을 극도로 자극하는 행사를 열었다. ‘황소식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 바로 그것이었다. 황소는 공화당의 상징이었다.

‘축(祝)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라고 쓴 만장을 앞세운 채, 건(巾)을 쓰고 죽장을 잡은 학생 4명이 민족적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관을 메고 입장했다. 곧 이어 ‘한일굴욕회담 반대 학생총연합회’의 이름으로 선언문이 발표되었다.

  민족사는 바야흐로 위대한 결단을 요구하는 전환기에 섰다. 4월 항쟁의 참다운 가치성은 반외세·반매판·반봉건에 있으며 민족 민주의 참된 길로 나가기 위한 도정이었으나 5월 군부 쿠데타는 이러한 민족 민주 이념에 대한 정면적인 도전이었으며 노골적인 대중 탄압의 시작이었다.
  민족적 민주주의는 수렵적 정보정치를 합리화하기 위한 행상적 탈춤으로 변장됐고 굶주린 대중의 감각적 해방을 위한 독화(毒花)의 미소를 띠었다.
  국제협력이라는 미명 아래 우리 민족의 치 떨리는 원수 일본제국주의를 수입, 대미 의존적 반신불수인 한국경제를 2중 예속의 철쇄로 속박하는 것이 조국의 근대화로 가는 첩경이라고 기만하는 반민족적 음모를 획책하고 있다.
  우리는 외세 의존의 모든 사상과 제도의 근본적 개혁 없이는, 전 국민의 희생 위에 홀로 군림하는 매판자본의 타도 없이는 외세 의존과 그 주구 매판자본을 지지하는 정치질서의 철폐 없이는 민족자립으로 가는 어떠한 길도 폐색되어 있음을 분명히 인식한다. 굴욕적 한일회담의 즉시 중단을 엄숙히 요구한다(김삼웅, <민족·민주·민중 선언>, 일월서각, 1984, 41쪽).

여러 대학 학생 2천여 명과 시민 1천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낭독된 선언문의 내용은 박정희 정권에 대한 ‘사망선고’나 다름없었다.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 열린 바로 이튿날인 5월 21일 새벽 대한민국 역사상 일찍이 보지 못했던 충격적인 사건이 터졌다. 동아일보 5월 21일자 1면 머리에 실린 기사는 다음과 같다.

  무장군인 사법부에 압력 / 공수단 소속 13명 / 오늘 새벽 법원에 작당 난입 / ‘영장 발부’를 강요 / 담당판사 자택까지 몰려

  21일 새벽 완전 무장한 육군 공수단 소속 군인 13명이 법원에 난입한 후숙직판사 자택으로 몰려가 학생 데모 관련 영장 발부를 협박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 무장집단군인의 사법부에 대한 압력행위는 20일 하오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직후 데모로 연행된 학생들에 대한 경찰의 구속영장 신청이 대부분 기각된 뒤 21일 새벽 4시 반부터 법원에서 일어났다.
  육군 소속 구급차를 몰고 온 이들 공수단복의 군인들이 상오 6시 지나 법원에서 숙직담당 양 판사 자택으로 가는 동안 3대의 경찰차가 뒤따랐다.
  정부는 이날 새벽 법원에 몰려온 군인들이 육군 공수단 소속임을 확인했으나 하오 2시 현재 이들 군인에 대한 조처는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5월 22일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야당 의원들은 “무장군인들이 사법부에 간섭하는 것을 ‘국기를 흔드는 난동’으로 보고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 결의안까지 준비하고 있으나 정일권 국무총리를 비롯한 김성은 국방장관은 ‘몇몇 군인의 행동에 불과하며 단순한 충정에서 행해진 것’이라고 국회에 보고했다”(동아일보 5월 22일자 1면).

동아일보는 5월 22일자 2면에 「정부는 무장군인의 법원 난입 사건의 중대성을 인식하라」라는 사설을 올렸다.

  (···) 우리 헌정사상 일찍이 없던 중대 사건에 대하여 조야 법조계를 비롯한 각계 인사는 “사법권의 침해는 물론, 국가의 기본질서를 파괴하고 나아가서 내란에 가까운 망동”이라는 비판과 분노를 표명하고 있으며, 일반 국민들은 일부 소수 군인들에 의해서 저질러진 이러한 민주주의 원칙과 법질서를 부인, 파괴하는 일대 불상사를 정부가 어떻게 처단할 것인지 지대한 관심을 갖고 주시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나타난 정부 측의 반응은 보도된 바에 의하면 우리 일반 국민들의 기대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것 같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나라의 민주제도와 헌정을 수호해야 될 최고책임자인 박정희 대통령은 금반의 현역 무장군인들의 법원 난입 사건에 관하여 “철저히 조사하도록 지시했으며 곧 진상이 밝혀지는 대로 위법행위가 있다  면 법에 따라 엄중 처단할 것”이라고 언명했다고 한다. 그런데 알려진 바에 의하면 박 대통령은 21일 아침 지방 시찰차 서울을 떠나기 전 청와대에서 양 내무부장관, 김 중앙정보부장 및 민 육군참모총장으로부터 이 사건에 관한 보고를 받은 바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대통령은 “위법행위가 있다면” 엄단하겠다고 말했다고 하니 박 대통령은 금반의 현역 무장군인들의 법원 침입 행동이 위법행위가 아닐 수도 있다고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또는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에게 보고한 양 장관·김 부장 및 민 총장의 보고내용이 그러한 여지를 남길 수 있을 정도의 것이었는지 우리로서는 석연치 않다.
  다음으로 육군 수사당국은 법원에 침입했던 난동군인 8명을 21일 밤에  긴급 구속했다고 한다. 그러나 21일 정부가 임시국무회의·임시국가안전보장회의·관계자연석회의 등 일련의 회의를 거듭하고 (···) 이 사건을 크게 문제삼을 것은 못된다고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다만 ‘명령 없이 군무를 이탈한 것’은 육군참모총장이 책임지고 조사 후 조처하도록 결정했다는 것이다. (·····)
  일부 학생들과 시민들이 5·16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국가원수를 모독하는 행위가 있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법절차에 따라서 정부가 조처할 문제이지, 일부 군인들이 헌법을 무시하고 법질서를 파괴해도 좋다는 이유는 절대로 될 수 없는 것이다. 헌법이 엄존하고 정부가 실존하고 있는 한, 그러한 군인들의 집단행위는 일종의 반란행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여당인 공화당의 일부 의원들은 법원에 난입한 일부 무장군인들의 행위를 ‘애국 충정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말하며 그들의 행동을 열심히 변호했다고 한다. (···)
  애국심은 어느 누구의 독점물도 아니다. 애국심이 특정인 또는 특정집단의 독점물이라고 생각하는 한 이 나라에 민주주의와 헌정은 도저히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금반의 불상사는 군기라는 견지에서도 중대한 문제인 것이다. 문제 된 10여 명의 집단적 난동이 단순한 군무이탈 사건으로 취급된다면 앞으로 이 나라의 60만 대군의 군기를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지 심히 의심스러우며 그 결과는 상상만 하여도 몸에 소름이 끼친다.


시가전과 흡사한 ‘6·3 데모’와 계엄령 선포

5월 23일 박정희는 호남 지방을 시찰하던 도중 광주에서 정국 혼란의 책임을 일부 정치인과 언론, 그리고 학생들에 돌리면서 “정부가 이제까지 지나치게 관대했었으며 앞으로는 더 강력히 더 엄격히 다스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무장군인들의 사법부 압력 사건 같은 것의 방지책을 묻는 기자 질문에 “일부 정치인, 언론, 학생들이 반성해야 그런 일이 없을 것으로 믿는다”면서 “몇몇 군인들의 탈선행위로 군의 중립 여부를 운운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라고 대답했다(동아일보 5월 23일자 1면).
동아일보는 5월 25일자 2면에 「박 대통령의 시국관」이라는 사설을 내보냈다.

  (····) 박 대통령은 ‘정국 불안’을 시인하기는 했으나 정국 불안의 근본적인 책임을 일부 정치인·일부 언론·일부 학생에 돌리고, 오히려 정부가 이제까지 지나치게 관대했으며 “앞으로 더 강력히, 더 엄격히 다스릴 것”이라고 말했다. (·····)
  정국 불안이 하루라도 빨리 해소되고, 정국 안정이 하루라도 빨리 이룩되기를 갈원(渴願)하는 우리는 정부수반인 대통령의 이러한 시국관이 과연, 조속한 정국 안정을 기할 수 있는 토대가 될 기초적 현실 인식인가 하고 의아하지 않을 수 없고, 서글픔조차도 느끼게 된다. (·····)
  정부가 지나치게 관용했었다는 말도 무장군인들의 사법부 압력 사건의 경우에 적용시킨다면 혹시 수긍되지 않는 바도 아니겠지만 박 대통령의 진의는 반드시 그러한 것도 아닌 것으로 해석되니, 정국의 앞날이 우려되지 않을 수 없다. 학생들의 경우는, 정부가 지나치게 관용했다기보다는 학원 사찰의 도가 지나쳐 모 기관원이 심야에 학생을 산 속으로 납치하여, 고문하는 잔인한 사건까지 발생케 해서 정부가 학생들의 불신을 사고 있는 것이다.
  무장군인의 난동의 재발을 방지하는 문제만 하더라도 박 대통령은 그 책임을 일부 정치인·일부 언론·일부 학생에게 돌렸다. 전기 3자가 반성하게 된다면 다시 그러한 일이 없으리라는 것이며, 정부수반인 대통령으로서 어떻게 하겠다는 말이 전연 없는 것은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다. 사법부 측에서는 무장군인들의 사법부 압력 사건에 대하여 대통령에게 항의한 바 있는데, 만약 박 대통령이 그러한 항의도 일부 정치인·일부 언론·일부 학생에게 제출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면, 박 대통령은 정부수반으로서의 책임을 철저하게 회피하고 있다고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제, 이곳에서 박 대통령의 책임을 추궁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국 불안의 근본적인 원인은 박 대통령이 민심의 소재를 명료하게 파악하고 있지 않은 데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박 대통령의 시국관이 바로 이것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5월 25일 서울, 부산, 대구, 춘천의 여러 대학에서 ‘난국 타개  학생 총궐기대회’가 열렸다. 난국타개 학생위원회가 대회에서 발표한 「구국비상결의선언문」에는 “부정부패 규명과 사죄, 학원 난입 경찰 처벌, 법원 난입 군인 처벌, 구속학생 석방, 민생고 타개를 위한 독점·매판 자본 몰수”라는 대정부 요구조건이 들어 있었다.

  무엇보다 대회 행동강령에 “금주 내 우리의 의로운 주창(主唱)이 관철될 획기적 전기가 없을 때는 4·19 정신으로 실력투쟁도 불사할 것을 천명한다”라고 명시하고, 실제로 일주일 간 행동을 유보하기로 함으로써 이후 대규모 항쟁의 여지를 열어 놓았다. 한마디로 이 일주일 유예는 6·3 시위의 예고였다. 5월 29일 34개 대학 학생회장들은 ‘난국타개대책회의’를 개최하고 난국타개 궐기대회의 결의사항을 재확인했다. 30일에는 대표 6명을 정일권 국무총리에게 보내 30일 밤 12시까지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을 땐 실력투쟁을 벌이겠다고 통고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학생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시위에 법대로 대응할 것임을 천명했다. 학생과 정권의 갈등은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
  난국타개 학생위원회가 ‘일주일 유예’ 결정에 따라 최후통첩 시한으로 통고한 1964년 5월 30일 밤 12시가 지나갔다. 박정희 정권은 여전히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다. 이에 학생들은 6월부터 실력 행사에 들어갔다. 6월 1일 난국타개 학생위원회 소속 32개 대학 대표 35명이 모였고, 그 중 12개 대학 31명이 청와대 앞에서 집단 단식농성을 시도하다가 연행되었다(<한국민주화운동사 1>, 424~426쪽).

6월 2일자 동아일보 1면 머리에는 대학생들이 대대적으로 데모를 벌인 사실이 사진과 함께 크게 보도되었다.

  대학생들 대규모 데모 / 고대·서울대생 등 약 3천명 / 한때 의사당 앞서 연좌 / 우중(雨中)에 최루탄과 투석 / 학생 요구-박 정권 하야·공포정치 종식

  (···) 이날 고대 학생들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구국선언문을 채택했다.
  “우리는 현 정권의 단말마적 횡포와 처절한 집권욕을 좌시할 수 없으며 헌정을 배신하고 정권욕에 광분하는 현 집권자들의 계속적인 집권을 묵시하기에는 너무나 조국의 배고픔을 참을 수 없었다. (·····)
  전대미문의 가공할 부정부패, 부실 악덕 재벌의 행패, 간악한 이 모든 정치적 퇴폐는 행동의 전위에 선 우리들과 전 국민의 과업으로 요구되는 박 정권 타도의 이유이다.
  이 나라의 민족정치의 장래를 위해서는 또 다시 헌정을 역행하는 군인들의 불법 쿠데타는 없어야 한다.

6월 3일자 동아일보 2면에는 「정부는 권력을 과신 말라」’라는 사설이 나왔다. 바로 그날 오후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 대해 동아일보가 기나긴 침묵에 빠지는 것을 예고하는 듯한 마지막 사설이 되고 말았다.

  3·24 학생 데모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방향을 찾을 수 없는 혼돈 속에서 살아온 것 같다. 이제 새삼스럽게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물어보아도 소용없는 일이 되었다. 책임은 학생들에게도 있었을지 모르며 국회의원이나 언론기관도 책임의 일단을 나누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오늘의 혼란이 대부분 정부의 태도에 연유한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지적한 바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할 것은 난경에 빠진 지금의 시국을 수습하는 임무는 오로지 정부에 있다는 것이며, 사태를 수습하는 데 있어서 정부는 과거와 같은 무사주의를 버려야 하고 또 그렇다고 권력에만 의존하는 태도를 취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여기서 강조해 두고자 한다.
  지난 2개월여에 걸친 사태의 악화는 단적으로 말해서 정부가 임기응변의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그저 나날을 무사히 넘겨보려는 데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문제에 뚜껑만 덮어두는 식의 그와 같은 무사주의가 날이 갈수록 사태를 심각하게 만든다는 것은 우리가 지금 눈앞에 보고 있는 현실이다. 미봉책에만 쫓기지 말고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과감한 태도가 아쉬울 뿐이다. 사태의 진전에 앞질러서 양보할 것은 솔직히 양보하고 미리 조처를 취하는 여유 있고 아량 있는 행동을 앞으로는 취해 줄 것을 정부에 당부하고 싶다.
  이와 동시에 또 우리가 바라는 것은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힘에만 의존하려는 태도를 취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시가를 시위행진하는 학생들을 힘으로만 막을 수 있겠는가. 최루탄과 투석과 완력만 가지고는 도저히 그 행진을 저지할 수 없다고 우리는 본다. 좀 더 넓은 시야에서 문제의 성격을 이해하고 장기적인 해결책을 세워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근자에는 사태 수습을 위하여 계엄을 선포하는 강력책까지 고려될지 모른다고 전문(傳聞)된다. 그러나 그것 역시 어차피 해야 할 문제의 해결을 외면 내지 천연하는 역할밖에 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계엄을 겪어보지 못한 것이 아니며, 군정까지도 경험하였지만, 그런 강력책들이 기본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는 못하였었다. (·····)

  사태가 위급하고 긴박해지면 질수록 과격한 언행과 강경한 대책이 맞설 가능성이 있음을 염려하면서 우리는 학생과 일반 국민에게는 자중할 것을 바라고 정부는 무사주의를 버리는 동시에 권력을 과신하는 강경책에만 의존하는 단견 역시 버릴 것을 요청하는 바이다.

6월 3일 전국의 학생들은 ‘박정희 정권 타도’를 목표로 전면적 항쟁에 들어갔다. 서울대 문리대 단식농성에 참여한 학생이 4백여 명에 이르는 등 3·24 데모 이래 투쟁의 기세가 최고조에 올라 있었다. 동아일보는 6월 3일자 1면 머리에 「학생 데모 확대 일로 / 시내 각 대학생 1만5천명 / 무단(武斷) 박 정권 물러나라 외쳐 / 3일 일부 지방서 호응」이라는 기사를 사진과 함께 실었다. 그날은 1961년 박정희 일파가 쿠데타로 헌정을 뒤엎은 이후 가장 큰 항쟁이 터진 날로 기록되었다.

<한국민주화운동사 1>에 기록된 6월 3일의 상황을 보기로 하자.

  (···) 오전 10시가 넘자 각 대학에서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고려대생 2천여 명은 신설동과 안암동 로터리 부근에서 경찰과 충돌한 후 시내로 진출하여 오후 1시 40분 국회의사당 앞을 점거하였다. 연세대생 2천여 명과 홍익대생 1천여 명은 아현동 로터리에서 경찰과 대치하여 치열한 공방을 벌였으나 저지선을 뚫고 충정로 로터리를 거쳐 중앙청과 국회의사당으로 진출했다. (···) 서울대 문리대생 4백여 명은 단식 100시간을 돌파한 뒤 오후 5시경 단식을 중단하고 가두시위에 나섰다. 문리대생들은 단식 때 차림으로, 앞서 중앙정보부에 의해 고문을 당한 송철원을 들것에 들고 거리로 나와 큰 반향을 일으켰다. (·····)
  이날 서울시내에서 가장 격렬한 시위가 벌어진 곳은 중앙청이 있던 세종로 일대였다. 세종로의 시민회관과 유솜(USOM) 건물 앞의 경찰 제1저지선에 걸려 일단 멈춘 학생과 시민은 약 1만여 명에 달했다. 오후 3시경 학생들이 철조망 1개를 50미터 가량 끌어내고 투석을 하자, 경찰은 최루탄을 발사했고 공수부대의 풍차까지 동원했다. 학생들은 제2저지선(경기도청 앞) 과 제3저지선(중앙청 정문 앞)을 연달아 돌파했다. 시위대는 제4저지선(조달청 앞)으로 밀려들어 청와대를 포위하고 오후 7시 30분경 경찰과 대치했다. 학생들만 시위를 벌인 것이 아니었다. 많은 시민들이 거리에서 학생들을 격려하였고, 경찰의 최루탄 발사에 항의하였다. 또 곳곳에서 시민들이 학생 시위에 합세하여 경찰에게 돌을 던지고 경찰차량을 파괴하기도 했다.
  6월 3일에는 지방에서도 시위가 가열되었다. 충남대 농대생 4백여 명은 교내에서 학원사찰 중지를 비롯한 박정희 정권 성토대회를 열고, 교문을 나와 시가행진에 들어갔다. 광주에서도 2개 대학과 2개 고등학교 학생 1만여 명이 최루탄을 터뜨리는 경찰에 맞서 2개의 파출소와 도청 건물, 그리고 경찰이 경비하고 있는 민주공화당 본부에 돌을 던졌다. 한마디로 6월 3일의 대규모 시위는 1960년 4월 19일의 시위를 방불케 하는 5·16 쿠데타 이후 최대의 항쟁이었다(429~430쪽).

박정희는 6월 3일 오후 9시 40분 ‘대통령 공고 11호’를 통해 그날 오후 8시로 소급해서 서울특별시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 선포와 동시에 수도 서울엔 4일 자정부터 계엄부대인 수도경비사 예하 병력이 진주했으며, 시내 요소요소는 완전 무장한 군인들이 경비행위를 개시, 수도 치안은 완전히 군의 손으로 넘어갔다. 계엄사령관엔 육군참모총장 민기식 대장이 임명되었다.”(동아일보 6월 4일자 1면).

비상계엄에 따라 밤 9시부터 이튿날 새벽 4시까지 통행금지가 실시되고, 각급 학교는 무기휴교에 들어갔다. 언론은 사전검열을 받아야 했고, 모든 집회와 시위는 금지되었다.

이런 사실들을 보도한 동아일보 6월 4일자 1면의 기사들 가운데 여러 곳이 계엄사의 검열 때문에 지워져 있었고 사회면인 3면도 마찬가지였다.

박정희는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발표한 ‘담화문’에서 “학생 데모의 난동화는 국가 기본을 흔들고 망국의 씨를 뿌리는 철없는 한탄스러운 일”이라고 주장했다. 담화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나는 무엇보다도 나와 이 정부가 참을 대로 참다가 이 마지못한 결단을 내리게 된 것을 먼저 국민 앞에 밝혀 두면서 이 나라 이 민족 발전을 위한 이 부득이한 조치를 깊이 이해해 줄 것을 여러분의 애국충정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확실히 근간 국정 전반에 걸쳐 일부 학생들의 도에 넘친 현실 참여는 이 나라 민주주의의 앞날에 암영을 던져주고 있으며 특히 최근 나타난 학생들의 반정부적 파괴행동은 어느 모로부터라도 불순하고 무모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동기 여하를 불문하고 학생들이 자신들의 의사를 표시함에 있어 평화적 시위의 한계를 벗어났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해괴망측한 방법과 극렬한 언동, 그리고 끝내는 공공시설의 파괴로써 민의에 의해서 선출된 정부를 부정, 도괴(倒壞)시키려는 불순한 경향이 노골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들 일부 몰지각한 학생들에게는 헌법도 없고 국회도 없고 정부도 없습니다.
  정부는 학생들에게 인내로써 끝내 다스리려 했으나 인내의 이 이상의 계속은 더욱 사태의 악화를 초래할 것이 예측되므로 실효 없는 사후조치보다도 파국을 예방하기 위한 효과 있는 사전조치가 절실함을 느껴 이 불가피한 단안을 내리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회에 일부 불순한 학생들의 오만과 불손의 파괴적 행동으로 말미암아 앞으로 한없이 조성될 만성적 정치 불안을 우려하여 그 고질을 도려내어 차제에 데모 만능의 풍조를 발본색원할 방침인 것을 분명히 해두는 바입니다. (·····)
  계엄 기간 중 난동·파괴·불온한 선동·유언비어 조작을 비롯한 범법행위와 혼란을 틈탄 일체의 공산세력은 단호히 엄단될 것이지만 시민생활에 대해서는 추호의 위축도 주지 않을 것이며 모든 자유는 최대한으로 보장될 것입니다. 따라서 입법 기능이나 정치활동은 정상적으로 보장받을 것입니다.

박정희의 ‘담화문’은 1964년 3월 24일부터 6월 3일까지 전국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많은 시민들과 재야세력이 줄기차게 펼친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투쟁이 평화적인 집회와 시위의 방법으로 일관한 사실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박정희는 “학생 데모의 난동화는 국가 기본을 흔들고 망국의 씨를 뿌리는 한탄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학생들과 재야세력은 박정희 정권이 옛날의 ‘식민지배자’인 일본을 상대로 자주적인 외교를 포기한 채 ‘비밀협상’으로 보잘 것 없는 액수의 ‘보상금’을 받으려 하면서 어민들의 생명선인 평화선을 포기했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박정희는 그런 ‘현실 참여’가 “민주주의의 앞날에 암영을 던져주고 있다”고 적반하장 격의 주장을 했다.

박정희가 발표한 이 오만하고 독선적인 ‘담화문’에 대해 동아일보를 비롯한 모든 언론은 단 한 마디의 비판도 가할 수 없었다. 계엄사령부의 사전 검열 때문이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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