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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욕적 한일회담’ 반대투쟁과 동아일보 (1)동아일보 대해부 3권 - 0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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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3.23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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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1월 26일로 예정된 제6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둔 10월 23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외유’를 나가 있던 김종필이 귀국했다.


  ‘민족적 민족주의 전도사’ 김종필

김종필은 11월 4일 고려대 총학생회가 주최한 ‘학생사상대강연회’에서 “우리의 민족주의는 반공을 기둥으로 삼아 독재와 전체주의를 배격하고 자유민주주의를 그 배경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일보 11월 5일자 1면 기사(「민족주의 배경은 자유민주주의 / 휴식은 죽은 다음에 썩도록 할 것」)는 그의 강연 내용을 이렇게 보도했다(동아일보에는 관련 기사가 없음).

  김 씨는 (···) “후진국의 공동과제인 근대화를 위해 민족주의는 절실히 요구되며 민족주의를 통해 경제적 자립과 강력한 리더십의 확립을 이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대한(對韓) 미국정책의 제 문제, 대일(對日) 외교정책의 문제점, 제3공화국의 민주적 전망이란 네 가지 제목을 갖고 약 한 시간 동안 연설했다.
  대일 외교정책의 문제점이란 제목의 강연에서 그는 “혁명정부의 대일정책이 저자세가 아닌데도 그렇게 소문이 나고 있는 것은 국민들의 오랜 대일 감정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평화선에 대해 “당시의 이승만 라인은 현명한 것이었으나 그 후 그 방어를 제대로 못해왔었다”고 말했다.
  그가 중앙정보부장으로 있을 당시 일본과 합의 본 것은 청구권 3억불, 해외경제기금 2억불, 그리고 수출에 1억불 이상 무제한으로 한다는 것이었다고 밝힌 다음 평화선 문제만이 남았으나 이것도 1억2천만불어치의 어선 기술 자재 등을 우리가 요구하고 있어 우리 어민들이 희생되지 않는 한도에서 꼭 타결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제3공화국의 민주적 전망에서 자기가 “혁명 이후 일을 하다 의욕 과잉으로 욕을 먹어 망명 아닌 망명을 하고 돌아오니 주위 사람들이 좀 쉬라고 권고해온다”면서 “그럴 때마다 휴식은 죽은 다음에 썩도록 하겠다고 대답한다”고 말하여 박수를 받기도 했다.

이 기사는 1면 아래쪽에 3단으로 배치되어 눈길을 끌지 못했으나 그 안에는 박정희 정권이 앞으로 강하게 추진할 ‘한일 국교정상화’의 핵심이 들어 있었다. 김종필이 중앙정보부장으로 있을 때 이미 청구권, 해외경제기금, 일본의 한국 수출에 관해서는 일본과 합의를 보았고, 평화선 문제만 남았다고 공언한 것은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1965년 봄부터 정치적 폭풍을 일으키게 될 ‘굴욕적 한일회담’의 예고편이나 마찬가지인 김종필의 공개강연 내용에 주목하는 논평을 내지는 않았다.

11월 26일에 치러진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민주공화당이 압승을 거두었다.

  11·26 총선은 무소속 출마가 금지된 선거였다. 그래서 과거처럼 무소속 당선자를 자기 당에 영입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공화당은 당선 가능성이 높은 인사에게 공천을 주는 조건으로 입당을 시키는 방식을 썼다. 그 결과 5·16 주체세력이 그토록 매도했던 ‘구 정치인’이 대거 공천되었다. 공화당 공천자 162명 중 ‘구 정치인’은 51명으로 전체의 3분의 1정도를 차지했으며, 이 중 구 자유당계가 28명으로 가장 많았다. 51명 중 47명이 전국구가 아닌 지역구로 공천을 받았다. 그러려고 혁명 했느냐는 비판과 아우성이 쏟아지고 내분까지 일어나자 박정희는 ‘이상 6, 현실 4’라고 변명했다.
  11·26 총선에서 공화당은 전체 의석 175석 가운데 지역구 86석에 24석의 전국구를 보태 110석을 얻는 압승을 거두었다. 민정당은 41석, 민주당은 13석, 자민당 9석, 국민의 당은 2석을 얻었다. (·····)
  김종필은 12월 2일 공화당 의장 자리에 복귀하였다.(<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2권>, 244~245쪽).


미국의 압력에 따른 ‘굴욕적 한일회담’

1963년 12월 17일 대통령으로 취임한 박정희는 1964년 초부터 한일회담을 열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한일회담은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목적과 미국의 강력한 요구가 어우러진 것이었으므로 지체할 까닭이 없었다.

1964년 1월 18일 한국에 온 미국 법무부장관 로버트 케네디는 19일 오후 청와대로 박정희를 방문하고 ‘전통적인 한미 유대 강화’를 확인하면서 한일 문제, 한미 상호 안전보장, 원조 등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

박정희와 로버트 케네디의 회담에서 ‘한일문제’가 다루어졌다는 데 관해 야당을 비롯한 재야인사들은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케네디가 한일회담을 재개하라고 압력을 넣었을 것이 분명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육사를 졸업한 뒤 ‘천황 폐하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고 만주군에서 장교로 복무한 적이 있는 박정희가 그 시절의 일제 고위 관료들과 ‘태평양 전쟁 전범(戰犯)’ 출신들이 도사리고 있는 일본 정부를 상대로 자주적이고 호혜적인 회담을 할 수 있으리라고 믿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군대를 동원해 무력으로 장면 정권을 붕괴시키고 집권한 박정희는 정통성 없는 정권의 운명을 경제개발에 걸었다. 그 역시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과 기술을 일본으로부터 들여오기 위해 한일회담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쿠데타 직후인 1961년 5월 22일 한국의 군사정권은 일본에 조속한 회담 재개를 제의했다. 5·16 쿠데타 이후 사태를 관망하던 일본의 이케다 정권은 한일회담 추진이 국내에서 논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처음에 신중한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6월 20~21일 미국에서 열린 미일정상회담에서 이케다 총리가 일본의 안전보장과 한국 정세를 연계시키고 한국의 군사정권을 적극적으로 원조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이후 적극적인 자세로 전환하였다. 이러한 태도 변화는 미국의 강한 압력과 더불어, 기시(岸) 전 총리와 같은 자민당 내우파세력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었다. 결국 5·16 쿠데타로 중단된 한일회담은 1961년 10월 재개되었다(<한국민주화운동사 1>, 401쪽).

박정희는 1961년 11월 미국을 방문하는 길에 일본에 들러 이케다와 정상회담을 갖고 “한일회담을 조속히  타결하여 국교를 정상화” 한다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청구권의 ‘명목’과 ‘액수’가 논란의 핵심이 되어 회담은 제자리 걸음을 했다. 한국 측은 청구권이 ‘식민지배에 대한 보상의 성격’을 지닌 것이라고 주장한 데 반해 일본 측은 ‘경제협력자금’ 또는 ‘독립축하금’으로 주는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회담이 교착 상태에 빠진 상황에서 한국 중앙정보부장 김종필과 일본 외상 오히라가 1962년 10월 21일과 11월 12일 두 차례에 걸쳐 회담을 갖고 ‘김종필·오히라 메모’라는 것을 통해 합의에 이르렀다. 그 메모에는 일본이 “무상 3억 달러, 유상(정부 차관) 2억 달러, 민간차관 1억 달러 이상”을 한국에 제공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자금 제공의 명목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 청구권 합의를 이행하기 위해서는 동시에 평화선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일본 정부는 이전부터 청구권과 평화선의 상쇄를 주장하고 있었고, 한국의 군사정권도 청구권 협상이 성공적으로 해결될 경우 평화선 문제에 대해 대폭적인 양보를 할 용의가 있었다. 김종필·오히라 메모가 작성되기 직전 박정희는 김종필에게 훈령을 보내, 일본 측이 청구권 문제에 성의를 보이면 어업 문제도 해결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오히라 외상에게 전달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청구권 합의에도 불구하고 평화선 양보를 통한 한일회담의 타결은 쉽게 이루어지지 못했다(같은 책, 403쪽).


‘굴욕적 한일회담’에 관한 동아일보의 보도와 사설

동아일보는 ‘굴욕적 한일회담’을 둘러싸고 재야세력과 학생들이 격렬한 반대투쟁을 벌이게 되는 1964년 봄을 앞두고 1월 22일자 1면 머리에 ‘평화선 문제’ 때문에 어민들이 집회를 연 사실을 크게 보도했다.

  평화선 양보를 반대 / 어민들 대회 열고 행동화 / ‘공동규제’는 감시 불능 / 일본과 공동어로면 어족자원 고갈 초래

  [부산 발] 평화선 수역에 출어하는 당지 어민들은 ‘평화선 사수’에 관한 결의를 점차 굳혀가고 있다. 그들의 이러한 태도 경화(硬化)는 정부 및 여당이 전관수역 설정 및 공동규제 방향으로 어업협정을 맺어 늦어도 금년 6월 이내에 한일회담을 마지막으로 타결시키려는 방침을 밝히고 나선 것과 반비례해서 평화선 양보를 막기 위한 ‘반대운동’을 행동화 하겠다는 데까지 다다라 가고 있는 형편이다. 어민들의 ‘평화선 사수’와 관련된 이 같은 태도 경화는 한일회담과 관련해서 국회에서 빚어질 여·야 논쟁을 계기로 한층 양성화될 것이라는 짐작이다.
  그러한 징후로서 몇 어업단체들은 21일 하오에 중앙동 수산센터 앞 광장에서 ‘평화선 사수대회’를 개최하는 등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조성해 놓았다.

박정희가 1963년 12월 대통령에 취임한 뒤 처음으로, 동아일보는 1964년 1월 23일자 2면에 한일회담에 관한 정부의 자세를 비판하는 사설(「한일회담에 임하는 정부 측 태도는 좀 더 솔직해야 할 것이다」)을 실었다.

  한일회담을 타결함에 있어서 그 핵심이 되어 있는 평화선 문제에 관하여 는 정부와 여당의 태도에 우리로서 이해할 수 없는 불투명한 점이 허다하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정부 측에서는 해안 돌출부를 연결시키는 직선 기선(基線)에서 12마일까지를 전관수역으로 하고, 거기에서 또 40마일까지를 한일공동규제수역으로 설정하는 대신에 일본으로부터 어업협조금을 받도록 하는 선에서, 일본과 타결을 짓도록 할 방침이라는 것이 보도되어 있는데, 이렇게 하여 그어지는 해상선은 실제에 있어서는 평화선과 그리 큰 차이가 없으므로, 이것은 우리나라에 조금도 손해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많은 협조금을 받아 오게 되므로 우리 어민에게 이익이 되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정부 측에서는 평화선을 양보하는 것이 우리에게 이익이 되기까지도 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러한 정부 측 해명은 일반 국민에 게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 못하고 있다.
  즉, 지난 22일만 해도 평화선 수역에 출어하는 어민들은 부산에서 대회를 개최하여 평화선 양보를 막기 위한 ‘반대행동’을 행동화할 것을 결의하였다고 전하여지고 있거니와, 누구보다도 자기네들의 이해관계에 예민한 이들 어민들이 어째서 정부 측 방침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려고까지 결심을 하게 되었던 것인가.
  공화당의 김종필 의장은 야당 측에서 협조를 거부하면 단독으로라도 금년 6월까지는 한일회담을 마지막으로 타결하겠노라고 말하였다고 하며, 타결의 기본원칙은 한일 두 나라 사이에 이미 합의가 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이때에, 이제야 어민들이 반대운동을 일으키겠다고 나선 것은 약간 시기가 뒤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다. (·····)
  (···) 정부와 여당이 한일관계에 관하여 비밀 위주로 해왔었다는 것은 앞으로의 한일회담 타결에 있어서 야당 측이 그 협조를 거부하게 된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되기도 한다. (·····)
  사실 지금까지 한일회담 추진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해온 김종필 씨는, 국민의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한일회담을 타결짓도록 하겠노라고 그의 결의를 표명한 것으로 우리의 주목을 끈 일이 있거니와, 재일교포의 재산 반입과 모당의 정치자금과의 관련성이 화제에 오르고 있는 이 즈음에, 그는 또 다시 야 측의 협조 없이 단독으로라도 한일회담의 조기 타결을 서두르겠다고 말한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야당 측 인사는 물론이거니와 일반 국민에게도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그 무슨 흑막이라도 개재해 있지나 않나 하고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
  우리의 평화선은 우리의 주권선이나 다름없는 것이며, 어민들은 그것을 생명선이라고까지 부르고 있는 것인데, 이처럼 중요한 해상선을 야당과 어민과 그리고 일반 국민의 반대 내지 의혹을 받아가면서까지 양보해버리겠다는 것은 아무리 하여도 이해할 수 없는 태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아무런 흑막도 개재된 것이 없다면, 정부 측에서는 좀더 솔직하게 지금까지의 경과를 털어놓고 국민의 오해를 풀고 난 다음에 한일회담 타결에 임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박정희 정권이 ‘수상하게’ 밀고나가는 한일회담에 대해 동아일보가 이렇게 강력한 비판을 한 것과 달리 조선일보는 2월 하순까지 침묵으로 일관했다.


‘굴욕외교 반대 범국민투위’ 결성과 활동

박정희는 2월 28일 경남 진해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한일회담은 한국 측에서 더 이상 양보할 것이 없으며 실무자급회담에서도 더 이상 토의할 필요가 없으므로 3월 중에 정치적 타결로 가부간 결론 내겠다”면서 “야당 의원들에게 최대한의 협조를 요청하고 있다”고 말했다(동아일보 2월 28일자 1면).

“민주당과 삼민회 소속 민주·자민·국민의당 등 전 야당은 3월 6일 정부의 지나친 양보로써 한일회담을 타결시키려는 움직임을 저지시키기 위한 투쟁기구로서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 이 기구를 확대 발전시키기 위해 오는 9일 하오 2시 시민회관 소강당에서 각 정당대표와 종교사회단체를 초청하여 확대회의를 열기로 합의했다.”(동아일보 3월 6일자 1면).
3월 12일 오후 한국과 일본 대표단이 도쿄의 외무성에서 2년여 만에 한일본회담을 열었다. 그러나 ‘어업 협력’과 ‘전관수역’ 문제를 두고 큰 이견을 보이던 농상회담은 3월 16일 결렬 직전에 이르렀다.

범국민투위는 ‘굴욕적 한일회담’ 저지투쟁의 첫 단계로 3월 15일부터 지방 유세에 들어갔다. 부산에서 열린 대회에는 3만여 명의 군중이 모여 “3억불로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박정희 정권”을 규탄하고 “일본의 재침략을 막아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는 연사들에게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16일 광주에는 1만여 명, 마산에는 1만5천여 명이 모여 범국민투위의 활동을 뜨겁게 지지했다. 유세 마지막 날인 3월 21일 서울 유세에는 4만여 명이 운집했다.


4·19에 버금가는 ‘3·24 데모’

1964년 3월 24일 서울에서 ‘4·19’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시위가 벌어졌다. 동아일보는 그날 신문 1면 머리에 사진과 함께 기사를 크게 실었다.

  한일회담 굴욕 타결 반대 / 대학생들 데모 / 서울대·고대·연대 등 5천명 / 총 30명 중경상·1백50명을 연행

  24일 하오 2시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생 약 3백 명이 “사수하자 평화선” “일본제국주의를 말살하자”는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교문을 박차고 데모에  돌입하였다.

  서울대
  이들은 하오 1시 20분에 학교 마당에 모여 “일본제국주의의 잔혹한 압제하에서 피어린 투쟁을 통하여 전취한 해방조국의 민족자주성은 다시 제국주의적 일본 독점자본의 독아(毒牙)에 박살되기 한 걸음 전에 있다”는 선언문과 “민족반역적인 한일회담을 즉각 중지하고 동경 체재 매국정상배는 일로 귀국하라” “평화선을 침범하는 일본 어선은 해군력을 동원하여 격침하라” “박 정권은 민족 분노의 표현을 날조 공갈로 봉쇄하지 말라”는 등의 결의문을 통과시킨 후 데모에 들어갔다.
  학생들은 데모에 앞서 교정 정문 앞에 이완용과 이케다 일본 수상의 허수아비에 휘발유를 뿌려 ‘화형’에 처하고 기세를 올렸는데 화형에 앞서 동대문서 정보계장이 이를 제지했으나 학생들은 듣지 않았으며 교정 주변에는 사복형사들이 눈에 띠었다.
  교문 밖으로 나간 데모대는 대기 중이던 약 2백 명의 경찰기동대에 의하여 제지, 수의과대학 앞까지 밀고 가는 도중 곤봉 세례 등 혼란 끝에 약 25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

  고려대학
  이날 낮 3시쯤부터 교내 배구코트에 모여 한일굴욕외교 성토대회를 벌인 고려대 학생 1천여 명도 곧 교문을 뚫고 데모에 돌입, “일본을 신임하는가”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아무 저항 없이 신설동 로터리까지 나왔으나 급거 출동한 3백여 명의 경찰관들과 부딪쳐 나아가지 못한 채 연좌데모에 들어 갔다.
  연좌데모에 들어가기 전 경영학과 학생들과 합세, 1천3백 명 가량이 된 데모대는 경찰관들과 맞붙어 싸우다가 그 중 10여 명이 곤봉으로 얻어맞아 머리가 터지는 등 중상을 입었다. (·····)

  연세대학
  이날 하오 4시 5분 연세대 학생 약 2천3백 명은 시국강연회를 듣고 강당 앞 광장에 집결, 한 학생이 데모하자고 외치자 만장일치로 결의에 찬동, 데모대는 교문 밖까지 나왔다.
  이날 하오 2시 동교 강당에서는 장준하 씨의 ‘현 시국에 있어서의 대학생의 임무’라는 제목의 강연과 함석헌 옹의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라는 시국강연이 있었다.

같은 날짜 동아일보 2면에는 서울대 학생들이 이완용과 이케다의 허수아비를 태우는 사진과 함께 집회와 시위의 상세한 내용이 보도되었다.

  연옥(煉獄)의 처형대에 세운 매국의 망령 / 이완용 허수아비를 분살(焚殺) / ‘동경의 매국배 돌아오라’ / 평화선 사수 절규

  데모 한 시간 전까지 관할 D서는 ‘데모는 낭설이다’라고 가볍게 버티다가 “학생들이 일어났다”는 정보에 허둥지둥 현장으로·····. “사수하자 평화선” 플래카드를 높이 들고 24일 데모에 돌입한 문리대 학생들은 이날 데모에 앞서 미리 마련해 둔 이완용과 일본 이케다 수상의 허수아비에 불을 지르고 환성까지 올려 일대 기염·····.
  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밀려나가자 약 2백  명의 경찰기동대는 곤봉까지 휘두르고 마침내는 가스마스크까지 쓰고 자못 삼엄한 분위기.
  원남동, 혜화동 일대의 교통이 차단되어 지나가던 시민들은 자목 심각한 표정들.

24일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학생들의 데모를 적극적으로 보도한 동아일보는 25일자 지면을 ‘4·19’에 버금가는 크기와 넓이로 장식했다.

  학생 데모 전국에 확대 / 충천하는 ‘굴욕’ 반대 함성 / 청와대에 총집결, 고교생도 가담 / 무장병력과 대치, 최루탄 20발 발사 / 두 학생 대표, 박 대통령과 면담

  대일 굴욕외교 반대 학생 데모는 25일 서울에서 재발, 부산, 대구, 전주 등 전국으로 크게 번져 “한일회담 즉각 중단” “대표단 소환”의 함성은 각 도시에서 더욱 높이 울려 퍼지고 있다.
  24일 하오의 서울 학생 데모에 자극된 전국 각처의 대학생과 일부 고교 학생들은 25일 아침 학교 별로 학생대회를 열고 결의문을 채택한 뒤 평화선 사수 등을 외치며 시가를 누볐는데, 이날 각 시의 경찰당국은 일절 학생 데모를 저지하지 않아 대체로 아무런 마찰 없이 적지 않은 수의 학교 별 데모는 평온리에 해산했다. (·····)
  서울의 각 대학 학생 및 중고교생들 약 3만 명은 전일의 서울대·고대·연대 데모에 이어 25일 종일토록 대일 굴욕외교를 규탄하며 시내를 휩쓸고, 일부는 청와대에서 수도경비사 무장병력과 맞서 승강이를 벌였다.
  이날 아침 경찰의 저지 없이 비교적 평온한 가운데 데모에 돌입한 연대(약 3천5백 명), 한양대(약 4천 명), 중앙대(약 2천 명), 건국대(약 3천 명), 경희대(약 1천 명), 동국대(약 3천 명), 외국어대(약 5백 명), 배명·성동·수송 등 각 중고교생(약 2천명 )들은 정오 지나서부터 국회의사당 앞에 차례로 합류, 구호를 외치다가 하오 1시 30분경부터 일제히 청와대 앞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청와대 앞에선 완전 무장한 2개 중대와 경기도경 응원경찰대의 삼엄한 저지선에 부딪쳐 하오 3시 현재 옥신각신하고 있는데 경비대는 20여발의 최루탄을 발사했다.
  이들 학생 데모대들은 청와대 앞에서 박 대통령에 대해 직접 ‘한일회담 즉각 중단’과 ‘대표단 소환’을 호소하고자 했던 것이다. 중앙청에서 적선동을 거쳐 효자동에 이르는 길은 약 2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는 학생으로 메워져 있다.
  (···) 이날 하오 2시 40분 정 시경국장 안내로 두 학생대표가 박 대통령과 면담하기 위해 청와대로 들어갔다.

이 기사 옆과 밑에는 「부산 동아대생 3천 명 행진 / 시청 앞서 연좌, 많은 시민 합류」 「전북대생도」 「도청서 연좌데모 / 대구 4개 대학생 8백여 명도」라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리고 「정부·학생 대표 회담도 결렬 / 고 문교 말 듣다 중도서 퇴장 / 한일회담 즉각 중지 등 관철 안 되면 계속 투쟁」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6단으로 자리를 잡았다.


박 정권을 강력히 비판한 동아일보 사설들

동아일보는 3월 25일자 2면에 「정부는 사태를 정시(正視)하라」는 제목으로 사설을 내보냈다.

  (···) 학생 데모가 돌발적이기는 하나 그 원인이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님은 두말 할 것도 없다. 독선적인 태도로 대일외교를 서두르는 정부를 우리는 항상 경고하면서 일방적인 독주 대신에 야당과 신중하게 협의할 것과 국민의 감정 및 의사를 존중할 것을 부탁해 왔었다. 까닭 모를 정도로 서두르던 정부의 비밀외교가 여러 가지 의심을 자아내고 급기야는 이와 같은 사태까지 유발한 것을 우리는 국민과 더불어 개탄할 뿐이다.
  외교 교섭이 아무리 비밀을 지켜야 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국민 여론을 도외시하는 것이어서는 안 될 것임은 당연한 일이다.
  더욱이 일본과의 문제에 관하여는 우리 국민 모두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국민감정을 무시하는 대일 교섭은 출발부터 그릇된 것이라 하겠다. 교섭 중이라는 것을 유일한 방패로 교섭 내용을 비밀에 붙이는 태도를 정부가 일찍 버리고 야당을 설득하고 국민의 양해를 구하는 자세를 왜 갖지 못하는지를 우리는 모르겠다.
  원인은 어떻든 간에 우리 앞에 나타난 사태는 심각하기만 하며, 모든 힘을 다하여 평온하게 수습하는 방도를 취하여야 할 것인 바 그 유일한 길은 정부가 지체 없이 국민의 소리를 경청하는 것뿐이라고 우리는 본다. 정부가 그 독선적인 태도를 버리지 못하고 데모를 탄압하는 졸렬한 정책을 쓸 때에는 사태는 수습되기는커녕 더욱 확대할 위험성이 있음을 우리는 지적하고자 한다. (·····)
  데모대를 폭력으로 탄압하는 우거(愚擧)를 삼가고 근본적인 수습방안은 국민의 소리를 따르는 겸손과 결단이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25일 현재 박 대통령은 취임 1백일째를 맞는다. 하나의 커다란 시련기에 당면한 정부에 대하여 우리는 지금의 사태가 중차대함을 똑바로 인식하고 더 악화되기 전에 현명한 조처를 취할 것을 당부하고자 한다.

  동아일보는 박정희가 군사정권을 이끌던 시기에는 사설을 통해 독재와 부정부패를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적이 아주 드물었으나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계기로 박 정권에 맞서는 자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 사설이 바로 그런 ‘신호’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동아일보는 3월 26일자부터 여러 날 동안 ‘굴욕적 한일회담’과 관련해서 박정희 정권을 강력히 비판하고 올바른 시정책을 요구하는 사설을 잇달아 내보냈다. 그 제목과 요지는 아래와 같다.

  「대폭 후퇴만이 사태를 수습할 수가 있다」 (3월 26일자)

  이번에 학생들이 데모를 감행하게 된 것은 한일회담에 임하는 정부와 여당의 태도가 너무도 저자세였기 때문이었던 것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3·1 운동 당시에 우리의 조상들이 부르짖었던 것과 그 ‘명분’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이것은 학생들의 마음을 더욱 떳떳하게 만들 수가 있었던 것인데, 해방된 조국의 국민이 과거에 우리를 착취하던 외국을 상대로 데모를 벌이는 데 양심에 꿀리는 점이 있을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역사의 기로에서」(3월 27일자)

  5·16 같은 사태 역시 민주발전에는 역행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비민주적인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키운다는 것은 이론에 있어서나 실제에 있어서나 합당치 못하기 때문이다.

  「행동할 때와 정관(靜觀)할 때」(3월 28일자)

  연일 계속된 학생 데모가 질서정연한 것은 학생들의 지성을 생각한다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에게는 마음 흐뭇하게 여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젊은 세대의 이성을 우리가 눈앞에서 똑똑히 재확인한 셈이기 때문이다.

  「건전한 헌정과 국민의 공통광장」(3월 31일자)

  박 대통령은 무엇보다도, 애국심이 어느 특정인이나 특정집단의 독점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애국심이란 국민 전체의 공유물이다. 그러므로 한일회담과 같은 중대한 문제에 관해서는 전체 국민의 공통된 광장에 서서 이 문제를 처리했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정권은 한일회담에 있어서 독주외교를 했기 때문에 금반과 같은 중대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김준연, ‘박정희와 김종필 일본으로부터 거액 받았다’

4·19 이후 최대의 학생 데모에 충격을 받았음이 분명한 박정희 정권은 연행된 학생들을 석방하고 평화시위를 보장하겠다면서 학생들을 설득하려고 했다. 그러나 3월 25일 시위가 전국의 여러 대학과 고등학교로 확산되어 4만여 명이 거리로 나서자 박정희는 26일 ‘특별담화’를 통해 한일회담은 기존 방침대로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그날 시위 참가 인원은 전국 11개 도시에서 6만여 명으로 늘었다. 그러자 정부는 3월 27일 일본에 가 있는 공화당 의장 김종필을 소환하겠다고 발표했고, 그는 이튿날 귀국했다.

  연일 학생시위가 계속되고 있던 1964년 3월 26일 김준연 의원은 국회 본회의에서 박정희 정권이 일본으로부터 1억3천만 달러를 받았다고 주장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4월 2일에도 박정희·김종필 라인이 일본으로부터 2천만 달러를 받아 썼다는 등 13 가지 의혹 사항을 제시했다. 여당인 공화당은 김준연 의원을 허위사실 유포 및 명예훼손으로 고소·고발하였고, 여야의 격돌 끝에 결국 4월 25일 김준연 의원이 구속되었다. 하지만 최근 공개된 미국 CIA의 문서는 이러한 의혹이 충분히 근거가 있다고 하면서, 1961년부터 1965년까지 일본 기업들이 공화당 예산의 3분의 2를 제공했으며, 6개 일본 기업이 한 기업 당 1백만~2천만 달러까지 총 6천6백만 달러를 제공했다고 밝혔다(같은 책, 411쪽).

국회의원이 본회의에서 박정희와 김종필이 일본으로부터 거액을 받았다고 주장했다면, 거기에는 그럴만한 근거나 증거가 있었을 것이다. 동아일보는 4월 27일자 2면에 「김준연 의원의 수감」이라는 사설을 올렸다.

  (···)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철칙을 지지하는 우리는, 야당 의원이라고 해서 유달리 법이 관대할 수도 없고 유달리 법이 준엄할 수도 없다고 믿는다. 법치국가에서 법이 법으로서의 위신을 유지하려면 법이 정권의 시녀로 격하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며, 어떠한 경우에도 누구에 대해서나 그것이 정치적으로 또는 감정적으로 운영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두말 할 것도 없다. (·····)
  우리가 이제 이곳에서 논하려는 문제의 초점은 야당 의원이거나 또는 일반 시민이거나 아무리 범죄 혐의가 있다손 치더라도 1)도주의 우려가 없고 2)증거 인멸의 우려가 없다고 상식적으로 인정되는 경우에 굳이 그를 구속한다는 것이 과연 인권을 존중하는 길이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법무부장관을 지낸 바 있는 노정객인 김 의원에게 도주의 우려가 있다고는 조금도 믿지 않는다.
  또한 김 의원이 허위사실 유포와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의 혐의를 받게 된  문제의 발설은 바로 ‘출판물’에 의하여 출판되어 있으며, 김 의원이 무고죄 혐의를 받고 있는 맞고발 행위는 바로 서울지검에 고발장이 제출되어 있다. 김 의원이 증거를 인멸하려고 해도 인멸할 도리가 없는 것이며, 오직 문제는 범죄의 구성 여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증거 인멸의 우려를 이유로 김 의원을 구속하는 것도 제3자로서는 납득하기 어렵고 정부의 인권 유린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하는 것으로 우리는 본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김 의원이 구속, 수감되기까지의 구체적인 경위를 살펴볼 때 우리는 민주정치의 좌절을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김 의원이 국회 본회의에서 문제의 발언을 한 것은 지난 3월 26일이었다. 공화당 일부에서는 당장에 김 의원을 징계하려는 주장도 내세웠다고 전하여지나 국회가 김 의원 발설의 진부를 가리기 위해  일단 조사위원회를 구성한 것은 당연한 처리책이었다고 할 수가 있다. 특별조사위로 하여금 조사하게 한 후에 조사결과를 기다려 김 의원 발설 문제에 매듭을 짓게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
  정부가 김 의원 구속동의를 국회에 요청하자 여야의 감정은 정점에 달하였다. 국회는 완전히 난장판이 된 채로 회기를 마쳤으며, 이에 책임을 느끼고 이효상 의장은 사의를 표명하였다. 다만 여야 간에 정치적 타결의 기운이 일어나 국민으로 하여금 일단 숨을 돌리게 한 바 있으나 26일 정부는 태도를 경화하여 김 의원의 구속, 수감을 단행하였다. (·····)
  (···) 우리는 김 의원 구속은 행정부가 입법부를 무시한 행위라고 본다. 현재 국회가 개회되어 있지 않기에 정부는 구속영장만 있으면 국회의 동의 없이 김 의원을 구속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한 법적 가능성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행정부가 입법부에 대해서 의원 구속 동의를 요청했다가 동의를 얻는 데 실패했다면, 회기 종료 후에도 마땅히 의원 구속은 삼가는 것이 입법부의 존중이고 정치적 도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결론적으로 말하면 인권 옹호라는 관점에서나 정치적 도의라는 관점에서나 정부가 김 의원을 구속, 수감한 것은 독선적이고 감정적인 단견의 소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김 의원을 구속하지 않았다고 해서 김 의원의 범죄행위가 풀리는 것도 아닌데, 김 의원을 구속함으로써 정부가 얻은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이해할 수가 없다. 마치 순교자처럼 김 의원에게 동정이 쏠리고, 정부가 국민의 눈에는 박절하고 가혹한 정부로 비치게 하는 결과가 되었다고 우리는 보는 것이다.

동아일보의 이 사설은 박정희 정권이 도주의 우려가 없는 현직 국회의원을 구속하면서 입법부를 철저히 무시한 것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박정희는 계속 독재와 독선의 길로 치닫는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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