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굵직한 개편 시점이나 정치·사회적으로 민감한 사안을 소재로 한 프로그램 방영을 앞두고 공영방송에서 편성권을 놓고 경영진과 제작진이 갈등하는 모습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경영진은 편성권을 자신들의 고유 권한이라고 주장하며 일방의 의사 결정을 밀어붙이고 제작진은 이에 반발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최근 지상파 방송과 종합편성(이하 종편)·보도전문채널 등에 노사동수 편성위원회 설치와 운영을 강제하는 방송법 개정안을 두고 여야가 대립하는 과정에서 정부·여당이 편성권을 경영진에 귀속되는 권한으로 해석하며 편성에 대한 방송 종사자들의 개입의 여지를 좁히고 있다. 그러나 학자들과 현업 방송인들은 일련의 주장과 해석들은 방송편성의 자유와 독립을 규정한 방송법 제4조에 대한 일방 해석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봄 개편을 앞둔 지금, 편성권을 둘러싼 갈등은 현재진행형이다. 실례로 KBS 경영진은 봄 개편을 맞아 1라디오 <성공예감 김방희입니다> 폐지를 제작진과 상의 없이 일방 결정했다. 또 1TV <6시 내 고향> 진행자 역시 제작진 의사와 상관없이 교체했다. KBS는 2013년 봄 개편 당시에도 1TV 진행자를 일방 교체했을 뿐 아니라 ‘코드 개편’ 논란을 무릅쓰고 박정희 전 정권 미화 논란이 있던 <다큐극장> 편성을 강행한 바 있다.

▲ KBS 교양문화국 PD들이 7일 오후 5시 30분 <6시 내고향> 녹화가 이뤄지는 신관 TV부조정실-13 앞에서 “무엇이 두려워 소통은 거부합니까”라며 사측을 규탄하는 피케팅을 벌이고 있다.

이처럼 편성권을 둘러싼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경영진이 내세우는 논리는 하나다. 편성권은 경영권에 귀속된다는 것으로, 지난 3월 21일 언론노조 KBS본부에서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경영진은 정례공정방송위원회에서 “방송법에 따라 편성 과정에서 제작 자율성 침해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다.

정부·여당도 이런 주장을 거드는 모양새다. 노사동수 편성위원회 설치와 운영을 강제하는 방송법 개정안 처리에 당초 동의했던 여당은 종편의 반발에 돌연 입장을 바꾸고 “경영에 책임지지 않는 노조가 (편성에) 개입할 경우 방송운영에 파행을 가져올 수 있다”(조해진 새누리당 의원, 3월 31일 tbs <퇴근길, 이철희입니다> 인터뷰)고 주장하고 있다. 편성권을 행사하려면 노조로 대표되는 제작 종사자들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자들은 편성권에 대한 방송 경영진과 정치권의 일방 해석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2000년 통합방송법을 제정하며 방송법 제4조(방송편성의 자유와 독립) 3항과 4항에 방송사업자(경영진)로 하여금 방송편성책임자를 선임해 자율적인 방송편성을 보장토록 하고, 방송프로그램 제작의 자율성 보장을 위해 취재·제작진의 의견을 들어 편성규약을 제정토록 한 것만 봐도, 법에서 보호하고자 하는 주체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방송편성의 독립성은 임명 과정에서부터 정권의 영향을 받는 사장 등 경영진이 아닌 일선 PD와 기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김경환 상지대 교수(언론광고학부)는 “편성은 결국 제작자의 양심에 대한 문제”라며 “제작자의 자유의사에 반하는 프로그램에 대한 책임을 거부할 수 있도록 하는 게 편성권”이라고 말했다.

고민수 강릉원주대 교수(법학과)도 지난 4일 한국방송학회 주최의 방송편성권 관련 토론회에서 “방송법 제4조 3항은 방송사업자로 하여금 편성책임자를 선임토록 하고 있다”며 “경영자가 편성책임자가 되지 않는 이상 편성권이 경영자에 속한다는 주장은 현행법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강형철 숙명여대 교수(미디어학부) 역시 “통합방송법 제정 당시 방송법 제4조를 만든 것은 국가 권력이나 외부 자본으로부터 제작진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함이었는데, 어느 순간 방송사 경영진과 간부들을 보호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여당이 편성권을 경영진의 고유 권한이라고 주장하며 그 근거로 제작진을 대표하는 노조는 경영상 책임을 지지 않냐는 논리를 내세우는 데 대해서도 김경환 교수는 “사실과 다른 주장”이라고 말했다.

김경환 교수는 “ 사례만 봐도 경영진은 법원 판결과 무관하게 제작진이 잘못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면서도 그에 대한 책임은 모두 제작진에게만 넘기고 있다”며 “편성권이 경영진에게 속한 것이라면 모든 책임을 함께 져야 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실례로 영국 BBC는 지난 2003년 이라크 전쟁 당시 ‘사실과장 보도’ 파문이 일자 사장 등이 책임지고 사퇴한 바 있다.

방송 편성권을 둘러싼 논란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방송법 제4조의 내용을 보다 구체화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한 정권을 잡으면 방송에 먼저 손길을 내뻗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언론노조(위원장 강성남)는 “노사동수 편성위원회 구성은 방송공정성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라며 “방송법 개정안을 4월 국회에서 즉각 처리하고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공약인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 논의에 즉각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